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20:02:29

연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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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군
인구 158,845명

延安郡 / Yŏnan County

파일:연안군.png
교동도에서 바라본 연안 시가지


교동도 화개산에서 촬영한 연안군. 생각보다 건물이 많아 선전용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편집자가 건물이 많아보인다고 하는 곳이 연안읍이다. 사리원시, 개성시 같은 곳이 이곳보다 훨씬 규모가 크다. 자동차가 적은 이유는 북한이 자가용 소유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을 조직에 강제 가입시켜 동원시키는 경향도 있다. 5장 6기 문서에서 보듯 오토바이 소유조차 제도적으로 어렵게 해놓았다. 저기서 언급하는 탑을 영생탑이라고 한다.

1. 개요2. 역사3. 지리4. 교통5. 행정구역
5.1. 구한말 행정구역
6. 대한민국과 연안군

1. 개요

황해남도의 연백평야 서쪽에 있는 군. 동쪽으로는 배천군, 서쪽으로는 청단군, 북쪽으로는 평산군과 접해있으며 남쪽으로는 황해와 접해있다.

2. 역사

삼국시대 고구려가 차지한 후 동삼홀군(冬彡忽郡)을 설치했다. 이에 동음홀(冬音忽)·시염성(豉鹽城)이라고도 했다.

남북국시대 신라 경덕왕이 해고군(海皐郡)으로 고쳤다.

고려시대에는 염주(鹽州)였다. 연안 차씨 차송우가 위사공신에 책록되자 염주를 지복주사(知復州事)로 승격시켰고, 이후 다시 원종연안 이씨 이분희가 위사공신에 책록되자 석주(碩州)로 승격시켰다. 1308년에 다시 온주목(溫州牧)으로 승격시켰으나 충선왕 때 목이 폐지되자 연안부(延安府)로 강등시켰다. 별호는 오원(五原)이다.

임진왜란 이전 연안부사로 있었던 신각[1]이 '왜적이 쳐들어올 것이니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조헌의 권고를 받아들여 이곳의 성곽과 방어시설을 보수하였고, 이후 이정암이 이를 이용하여 의병들을 이끌고 구로다 나가마사 휘하 5,000여 명의 일본군의 침략으로부터 연안성을 사수하고 승리로 이끌었으며, 그 결과 황해도를 지켜낼 수 있었다.

조선시대 때 연안도호부였고 1895년에 연안군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1914년에 배천군과 합쳐졌으며, 두 군의 앞글자를 따서 연백군이 되었다. 8.15 광복38선이 그어지면서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군 대부분의 지역이 경기도 연백군에 속해 남한지역이었다. 그러나 6.25 전쟁 이후 전지역이 북한으로 넘어가면서 1952년에 연안군과 배천군으로 분할되었다. 휴전선이 그어진 후 이 지역은 주민들의 출신성분이 복잡하다고 판단하여 신해방지구(특별감시대상지역)으로 지정하였고, 주민들에 대한 통제감시를 강화했다.

분단 이전부터 있던 염전이 현재도 남아 있으며, '연백제염소'의 관리 하에 국가가 계획경제의 일환으로 통제하는 곳이 되었다. 북한은 이 지역 일대를 '염전로동자구'라는 읍·리급 행정구역인 로동자구에 편입시켰다.

3. 지리

군의 상당수 지역이 연백평야에 해당한다.

4. 교통

도로는 해주 배천간 2급도로(대한민국 기준으로는 50번 국도)가 동서로 지나간다. 철도는 토해선이 지나갔으나 북한에 의해 배천선으로 바뀌었다. 연안역이 있다.

5. 행정구역

읍: 연안읍(延安邑)
로동자구(구): 염전로동자구(鹽田勞動者區) 1구
리: 장곡리(長谷里), 룡호리(龍虎里), 해월리(海月里), 동산리(東山里), 오현리(梧玄里), 창덕리(彰德里), 봉덕리(鳳德里), 아현리(雅峴里), 자양리(紫陽里), 정촌리(鼎村里), 풍천리(楓川里), 천태리(天台里), 도남리(桃南里), 소아리(小雅里), 발산리(鉢山里), 부흥리(富興里), 청화리(淸華里), 호서리(湖西里), 와룡리(臥龍里), 소정리(素井里), 송호리(松湖里), 해남리(海南里), 호남리(湖南里), 라진포리(羅津浦里), 신양리(新陽里), 화양리(華陽里), 개안리(開安里) 27리

5.1. 구한말 행정구역

  • 동부면(東部面): 연안읍성 동쪽 안팎에 있는 행정구역으로, 부방제(部坊制)가 면리제(面里制)로 개편된 뒤 개칭되었다.
  • 서부면(西部面): 연안읍성 서쪽 안팎에 있는 행정구역으로, 부방제(部坊制)가 면리제(面里制)로 개편된 뒤 개칭되었다.
  • 남부면(南部面): 연안읍성 남쪽 안팎에 있는 행정구역으로, 부방제(部坊制)가 면리제(面里制)로 개편된 뒤 개칭되었다.
  • 북부면(北部面): 연안읍성 북쪽 안팎에 있는 행정구역으로, 부방제(部坊制)가 면리제(面里制)로 개편된 뒤 개칭되었다.

6. 대한민국과 연안군

8.15 광복 이후 6.25 전쟁 전까지 38선 이남의 연안군 지역은 대한민국의 실효영토였으며 경기도 연백군[2]에 속해 있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도와 거리상 매우 가깝다. 그래서 연백 출신 실향민들이 많이 정착하기도 했다. 통일 후에는 교동도와 다리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국토개발계획에 의하면 서해안고속도로가 교동도를 지나 연안군으로 연장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 임진왜란에서 육지에서의 첫 승리인 양주 해유령 전투의 주역.[2] 1952년 이전까지 북한에서는 남연백군이라고 불렀다. 38선 책정 후 북한은 38선 이북의 연백군과 평산군 일부를 합쳐 연백군을 따로 설정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