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4 05:59:32

정종(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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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문종의 부마
영양위(寧陽尉) 헌민공(獻愍公)
정종
鄭悰
파일:정종가묘.jpg
정종 가묘 전경
출생 1437년(세종 19)
사망 1461년(세조 7)
묘소 영양위 정종·경혜공주 묘역[1]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 29)
본관 해주 정씨
부모 부 - 정충경(鄭忠敬)
모 - 여흥 민씨
아내 경혜공주
자녀 슬하 1남 1녀
장남 - 정미수
장녀 - 해주 정씨
봉호 영양위(寧陽尉)
시호 헌민(獻愍)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4.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조선 제 5대 왕 문종현덕왕후의 적녀 경혜공주의 남편. 본관은 해주(海州). 참판 정충경(忠敬)의 아들이다. 시호는 헌민(獻愍).

증조부는 대광 정윤규(鄭允珪), 조부는 좌찬성 정도공 정역(鄭易), 조모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안동 권씨, 아버지는 형조참판 정충경(鄭忠敬), 어머니는 정경부인 여흥 민씨이다. 고모 예성부부인 정씨는 효령대군의 처라서 효령대군은 정종의 고모부겸 처종조부이다. 2명의 누나가 있는데 1명은 행주 기씨 기축(奇軸)의 처 숙부인((淑夫人) 정씨(鄭氏)이고 다른 1명은 영응대군의 처 춘성부부인(春城府夫人) 정씨(海州鄭氏)이다.

아내 경혜공주에게서 얻은 아들 해평부원군 소평공 정미수는 정경부인 전의 이씨와 결혼했다.

2. 생애

1450년(세종 32년), 당시 세자였던 문종의 딸 평창군주(平昌郡主)와 혼인하였다. 장인 문종이 즉위한 후, 아내 평창군주는 경혜공주로 진봉되었고 정종 본인도 왕의 부마로서 영양위(寧陽尉)[2]에 봉해졌다. 문종은 그와 경혜공주의 저택을 짓기 위해 당시 대표적인 부촌이었던 양덕방(陽德坊)[3] 향교동에 있는 약 30여 채나 되는 많은 집을 철거하기도 했다.

문종이 얼마 못 가 승하하고 뒤를 이어 즉위한 단종에게는 하나뿐인 친누나[4]의 남편이었으니, 처남인 단종에게 두터운 신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5]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당시 단종이 있었던 곳도 누나 경혜공주와 매형 정종의 집이었다.

이후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이곳 저곳으로 유배 생활을 하다가 승려인 성탄 등과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죄로 거열형을 당했다. 이때 국문을 당하면서도 "어서 죽여달라"고 당당한 태도로 일관했다고 한다. 반역죄로 거열형에 처해져 시신을 수습할 수 없어서인지 묘는 실전되었고,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 있는 경혜공주 묘역에 가묘를 썼다.

이후 신원되었고, 아들 정미수가 중종반정 2등 공신이 됨에 따라 정종 역시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에 추증되었다.

3. 가족 관계

경혜공주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얻었다.[6] 아들 정미수는 죄인의 아들이라는 탄핵에도 불구하고[7] 정희왕후성종의 보호 하에 꾸준히 관직을 역임해 후에 중종반정의 반정공신의 반열에 올라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해지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슬하에 자녀가 없어 문종의 핏줄은 여기서 끊어진다. 다만 7촌 조카인 정승휴를 양자로 입양해 가문은 이어갔다. 그리고 정승휴의 외동딸은 희빈 홍씨의 장남 금원군과 혼인했다.
  • 증조부 : 정윤규(鄭允珪) - 판예의사사(判禮儀司事)
    • 조부 : 정역(鄭易, ? ~ 1425) - 전 판중군부사(前判中軍府使)
    • 조모 : 정경부인 안동 권씨(貞敬夫人 安東 權氏, ? ~ 1428)
      • 고모/처종조모 : 예성부부인 정씨(藝城府夫人 鄭氏, 1394 ~ 1470)
      • 고모부/처종조부 :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 ~ 1486) - 장인 문종의 숙부
      • 숙부 : 정충석(鄭忠碩, 1406 ~ ?) -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 숙모 : 정경부인 연일 정씨(貞敬夫人 延日 鄭氏) - 정종성(鄭宗誠)의 딸
        • 사촌 : 정침(鄭忱, 1424 ~1485)
      • 부 : 형조참판 정충경(刑曹參判 鄭忠敬, 1399 ~ 1443)
      • 모 : 정경부인 여흥 민씨(貞敬夫人 驪興 閔氏, ? ~ ?) - 민호덕(閔好德)의 딸
        • 누나 : 숙부인 정씨(淑夫人 鄭氏, 1429 ~ ?)
        • 매형 : 기축(奇軸)
        • 누나/처숙모 : 춘성부부인 정씨(春城府夫人 鄭氏, 1435 ~ ?)
        • 매형/처숙부 : 영응대군(永膺大君, 1434 ~ 1467) - 장인 문종의 막내 동생
  • 부인 : 경혜공주(敬惠公主, 1436 ~ 1474)
    • 아들 : 해평부원군 소평공 정미수(海平府院君 昭平公 鄭眉壽, 1456 ~ 1512) - 정순왕후 송씨 시양자(侍養子)
    • 며느리 : 정경부인 전의 이씨(貞敬夫人 全義 李氏) - 이덕량(李德良)의 딸
      • 양손자 : 정승휴(鄭承休, 1488~1534)
        • 양증손녀 : 파징군부인 해주 정씨(波澄郡夫人 海州 鄭氏, 1513 ~ 1560) - 금원군의 부인
    • 며느리(첩) : 신원 미상
    • 딸 : 해주 정씨(海州 鄭氏) - 딸은 혼인 기록만 있고 후사에 관한 기록은 없다.[8][9]

4. 대중매체

단종세조 관련 사극들에서 조연들로 등장한다.

1990년 파천무에서 권오현이 연기했다.

1994년 KBS 드라마 한명회에서 홍선용이 연기했다.

같은 방송사의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전현이 연기했다. 훗날 전현은 정종의 장인 문종의 동생 금성대군과 문종의 조상 이린도 연기한다.

4.1. 공주의 남자

2011년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 이민우가 연기했다. 여기서는 주연급으로 등장하는데 영양위 정종이 최초로 부각된 사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경혜공주 역의 홍수현과 더불어 작중 젊은 연기자들 중에선 연기력이 가장 뛰어난 편에 속하다 보니, 감정이입이 메인 커플보다 더 잘 된다는 얘기가 많았다. 게다가 이민우는 1983년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뿌리깊은 나무에서 단종을 연기한 적이 있어서 평행세계의 자신을 지키려고 한다는 배우개그도 성립한다.

일찍부터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명문가의 후손이라는 실제 역사적 사실[10]과 달리, 드라마에서는 사채까지 끌어다 써야 할 정도로 몰락한 명문가의 자제로 방탕하게 사는 허당으로 처음 등장했다. 그러다 장터에서 몰래 궁 밖으로 나온 경혜공주와 우연히 마주치고 그녀에게 한눈에 반한다.

얼마 뒤 정종이 정치적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한미한 가문 출신인 것을 노린 수양대군의 배후조정 덕분에 경혜공주의 남편이 된다. 앞서 기술하였듯이 실제 역사에선 문종이 즉위도 하기 전인 세종대왕 시절에 이미 혼인하였다.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를 잃고 홀로 남은 아버지 (세자 시절의) 문종이 애처로워서인지 경혜공주는 당시로서는 대개 12세 즈음에 혼인하는 왕녀들과 달리 16세에 이르기까지 결혼하지 않고 있었는데, 할아버지인 세종대왕의 건강이 악화됨에 따라 급히 혼인한다. 이는 만약 세종이 승하하면, 국상을 3년상으로 치르는 동안 혼인할 수 없기 때문에, 3년 탈상을 하고 나면 경혜공주의 나이가 20살에 가까워 너무 과년하게 되기 때문. 아무튼 드라마에서 묘사된 국혼 장면이 굉장히 코믹한데, 수양을 비롯한 숙부, 종친과 신하들이 모두 웃음만발인 분위기 속에서 처음엔 수줍어하더니 상대가 자신에게 싸다구를 날린 그 여인이었다는걸 알고 입이 귀에 걸릴듯한 마음을 절하면서 애써 숨기는 정종과 신랑이 자기가 보는 앞에서 사채업자한테 두들겨맞던 한량이라는데에 기가 막힌 경혜공주의 심통난 표정이 인상적이다.

부마가 된 뒤로도 처음에는 철없는 개그캐의 면모가 보이지만, 점점 철부지의 면모가 사라지고 진지한 모습으로 변하며, 경혜공주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과 처남인 단종에 대한 충성심을 보인다. 경혜공주는 처음에는 정종을 남편 대접은커녕 듣보잡 취급하지만[11] 힘없는 처지에서도 자신과 남동생 단종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정종의 모습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연다. 특히 수양이 계유정난 때 김종서 일가를 때려죽이고 피가 묻어있는 칼과 철퇴를 든채 대뜸 집에 들이닥치자 경혜공주와 함께 온몸으로 처남을 지키려 드는 장면, 숙부에게 양위하고 내관과 궁녀들이 통곡하는 가운데 상왕이 되어 궐을 나오는 처남을 마중나왔을 때의 의젓한 면모는 전혀 사채업자한테 쫓기던 한량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

그러나 경혜공주의 사랑을 받게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사육신의 거사에 가담했다 사육신과 거열형에 처해질 위기에 놓인다. 물론 실제 역사상으로는 이미 경혜공주와 통진에 유배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드라마에서처럼 사육신의 거사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사육신과 함께 심문받는 장면도 역사 속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

그러나 자신을 살리기 위해 세조에게 무릎을 꿇은 경혜공주 덕분에[12] 경혜공주와 전라도 광주로 유배가게 된다. 그곳에서 잠시나마 신혼 생활을 누리고 경혜공주가 아이[13]까지 가지게 되지만, 금성대군의 역모에 가담한 것이 발각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어 거열형에 처해진다. 참고로 실제 역사로는 금성대군의 역모에 연루되지 않았고, 금성대군과 단종이 죽은 뒤 4년이나 지난 1461년 승려인 성탄 등과 함께 역모를 꾸미다 처형당한다.

거열형에 처해지기 전 세조에게 일갈하는 모습과 처형장에 온 경혜공주와 마지막으로 눈맞춤을 하는 애절한 모습, 거열형에 처해질 때의 처절한 모습[14]까지 소화한 이민우의 열연으로, 평소에 공주의 남자를 보지 않는 시청자들에게까지 강한 인상을 남겼다. 정종이야말로 진정한 공주의 남자라는 평을 받을 정도.

한량 시절에는 김승유, 신면과 삼총사로 경성 거리를 누볐으나 계유정난으로 인해 승유는 야인이 되어 복수를 꿈꾸고, 신면은 친구들과 스승을 배신하여 갈라서게 되었다. 정종도 처음에는 신면을 원망했지만 여러 일을 겪은 후에는 달관했는지, 처형장에 끌려가는 길에 신면을 만나 '너를 미워한 적은 있었어도 싫어한 적은 없었다. 승유도 가엾고, 너도 가엾다'며 권력 때문에 깨어진 우정을 안타까워한다. 정종은 훌륭한 신하이자 남편이기도 했지만, 좋은 친구이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여담으로 이민우는 이전에 사극 <무인시대>에서 정균을 연기했는데, 하필이면 정균도 해주정씨[15]이고, 작중 정균은 공주의 남자(부마)가 되려다 결국 경대승 일파에게 끔살당했기 때문에, 드라마 리뷰 등에서 이에 대해 배우 드립을 치기도 했다. 물론 작중 희대의 광기 캐릭터인 정균과, 한량이었다가 나중에 충성스런 신하이자 헌신적인 남편으로 각성하는 정종은 서로 특성이 완전히 다르긴 하지만.


[1] 정종의 무덤은 시신이 없는 가묘이다.[2] 봉호는 본관인 해주의 별칭인 '대령(大寧)'에서 따왔다.[3] 현재의 종로구 계동 일대[4] 문종의 서녀 경숙옹주도 있었지만 동복누이는 경혜공주 한 명뿐이었다.[5] 실제로 정종은 부마였음에도 불구하고 단종 재위 초기 형조판서까지 역임하기도 했다. 보통 부마가 명예직이어서 관직을 제대로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단종의 총애 없이는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6] 딸은 정종 사후 태어난 유복녀이다.[7] 성종실록에서 정미수와 관련된 기사는 대개 정미수를 탄핵하는 내용이다.[8] 《조선왕조실록》1465년 기록에 정종의 아들과 딸은 연좌하지 말라는 것으로 존재가 확인되었고 1476년과 1477년에는 혼인을 해서 물품을 하사한 기록이 있는데 《선원록》에서는 존재 자체가 누락되었다.[9] 오빠 정미수의 생년이 1456년인 것, 1461년 10월 20일에 아버지 정종의 사형선고가 내려진 것, 1476년에 혼인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혼인할 당시의 나이가 15~16살로 공주의 딸 치고는 늦은 결혼이다[10] 정종의 가문은 정종 본인이 부마가 되기 전부터 왕실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세종의 둘째 형 효령대군의 부인이 정종의 고모이며, 정종의 누나 또한 경혜공주의 숙부이자 수양대군의 막내동생인 영응대군의 둘째 부인이었다. 다만 영응대군의 경우 정종의 누나와 혼례를 맺기 전 단종비 정순왕후의 고모인 송씨와 이미 부부였으나 송씨가 병이 있다는 이유로 아버지 세종에 의해 강제이혼당하고 정종의 누나와 재혼한 것이다. 이 당시 정종의 아버지 정충경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관례상 정종의 누이를 왕실의 인원과 혼인시키는 것은 어긋나는 일이지만 세종은 이를 다 씹고 자신의 막내아들 영응대군을 정종의 누이와 재혼시켰다. 하지만 영응대군 본인은 전처 송씨를 잊지 못해 계속 만남을 가지면서 그 사이에서 딸까지 낳아버리는 대형사고까지 치게 된다. 나중에 수양대군이 이 둘을 적극적으로 재결합시켜주었고, 자신의 형에게 고마움을 느꼈던 영응대군은 이후 수양대군을 적극 지지해주기까지 한다. 여담으로 영응대군은 드라마에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세종소헌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아들이었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가장 큰 총애와 귀여움을 받고 자랐으며, 심지어 세종은 승하할 때도 자신의 막내아들의 사저에서 승하할 정도였고 세종 살아생전에도 유일하게 자신의 아버지를 아바마마라고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런 총애와 귀여움을 독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영응대군 자신은 나중에 아버지가 맺어준 부부관계를 마음대로 깨버리고 수양대군에게 붙어먹기까지 했으니....[11] 자신에게 힘이 될 수 있는 김종서의 아들 김승유와 혼인하는 것이 좌절되어 낙심한 데다, 처음 만났을 때 사채업자들에게 끌려가던 찌질한 모습 때문에 정종을 한심하게 보고 있었다.[12] 이 때 사육신과 정종이 함께 형장에 끌려가던 중 정종만 살려주라는 수양의 명령이 내려오고, 죽을 각오를 했던 정종은 당혹스러워하며 울부짖지만 사육신들은 '우린 죽어도 젊은 녀석은 살아야지' 라는 듯 초연하게 미소지으며 보내주는 훈훈한 장면을 연출한다. 땅바닥에 쓰러져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정종을 다독이며 부디 치욕스럽게라도 살아만 달라는 경혜공주와 오늘만은 마마가 밉다며 원망하는 정종의 연기가 슬프고 처절하다.[13] 드라마에서는 이 아이가 정미수로, 정종이 처형된 뒤 태어난 유복자로 나온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정종이 죽을 때 정미수는 이미 3살이었고, 당시 경혜공주의 뱃속의 아이는 둘째인 딸이었다. 드라마의 전개 속도와 극적인 임팩트 때문에 딸은 생략되고 정미수가 유복자로 묘사된 것.[14] 직접 보자. 4분 32초부터 비장함이 몰아친다.[15] 물론 정중부 가문은 멸문 당했기 때문에 정균과 정종은 본관만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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