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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환조의 증손 하령군 河寧君 | ||
봉호 | 하령공(河寜公) → 하령군(河寧君) | |
시호 | 충민(忠愍)#[1] | |
본관 | 전주(全州) | |
이름 | 양(穰) | |
아명 | 영(瓔) | |
생부 | 완천군 이숙 | |
생모 | 군부인 하음 봉씨(河陰 奉氏) | |
부인 | 정경부인[2] 여산 송씨(礪山 宋氏) | |
자녀 | 2남 | |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3] | |
생몰 기간 | 음력 | 미상 ~ 1453년 10월 10일 |
양력 | 미상 ~ 1453년 11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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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의 왕족. 태조 이성계의 이복동생 의안대군 이화의 손자이자 완천군 이숙의 장남이다.2. 생애
태어난 해는 알 수 없다. 1404년(태종 4년)에 하령공(河寧公) 작위를 받았고 다음해에 하령군으로 개정되었다.# 1406년(태종 6년)에 이름을 이영(李瓔)에서 이양(李穰)으로 바꿨다.#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맡았다. 세종 시기 그가 역임한 관직은 옥구진병마사, 의주목사, 첨지중추원사, 중추원부사, 동지돈녕부사, 충청도 수군도안무처치사, 동지중추원사, 공조참판이며 세종 말년에는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온 후 강계절제사 직을 맡기도 했다.#
세종은 하령군을 매우 신임했다. 주요 보직을 맡긴 것은 물론, 승하할 때도 황보인, 김종서 등과 함께 불러 세자가 약하니 어린 세손을 도우라는 말을 남겼다. 저 말을 문종이 죽기 전에 했다고도 알려져 있는데 문종은 사망 직전에 말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력이 쇠했었기 때문에 고명대신이 없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도 하령군을 매우 아껴, 궁궐 밖을 나갈 때마다 항상 하령군이 자신의 뒤를 따르게 했다.# 1451년(문종 1년)에는 영릉(세종의 능)의 수릉관이 되었고 이어 지중추원사와 지돈녕부사, 판중추원사를 거쳐 우찬성으로 임명받았고 나중에 판병조사 직을 겸했다.#
단종 즉위 후에는 좌찬성 직을 맡았다가 다시 우찬성이 되었다. 그러나 단종의 충신이란 점 때문에 수양대군 세력과 대립했고, 결국 1453년(단종 1년)에 11월 10일(양력) 계유정난이 일어난 그날 밤에 살해당했다. 같은 날 황보인, 김종서도 죽었다.
3. 사후
계유정난 때 하령군뿐 아니라 그의 아들 여양군 이승윤과 친척 형제들을 포함한 의안대군 후손 16명이 화를 입었다. 이 때 남은 후손들은 인천 이씨[4][5], 광산 이씨[6], 홍주 이씨[7] 등과 같이 본관을 바꿔서 연좌제를 피하고 살았다.숙종이 신원시켰고, 장릉(단종의 능)의 충신단에 배향하면서 ‘양세문훈 일문과절(兩世文勳 一門夸節)’이란 글을 직접 써서 내렸다. 뜻은 ‘두 대에 걸쳐 공로를 세웠고 온 가문이 고상한 절개를 지녔다’이다.
정조 때는 배향한 단종의 충신들 명단을 적은 책 《장릉배식록(莊陵配食錄)》에 육종영(六宗英)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렸다. 육종영은 단종을 위해 죽은 왕족 6명을 가리키며, 하령군 외의 종친은 안평대군, 금성대군,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이다.
고종 때 신하들이 그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몇 차례 논했으나 흐지부지되었다가, 1910년(융희 4년) 7월에 순종이 시호 ‘충민(忠愍)’을 내렸다.#
위에 썼듯, 가문이 화를 입고 수백 년 뒤에 복권받았기 때문에 그의 실제 묘는 없다. 다만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에 후손들이 그의 가묘를 만들어두었다.#
[1]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홈페이지와 하령군 묘비에는 시호가 ‘충의(忠毅)’로 적혀있다.[2] 사후 추증.[3] 가묘이다.[4] 하령군은 인천 이씨 8세(또는 11세)로 나오며, 그의 아들인 여양군 이승윤(礪陽君 李承胤)의 관직이 헌납(獻納)으로 나와 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1982년판 《인천 이씨 대동보》에서는 언급되어 있지만 2009년판 《인천 이씨 대동보》에서는 이 부분이 지워져 있다.[5] 의안대군의 손자인 한산군(韓山君) 이의산은 인천 이씨 14세로 나오며, 계유정난에 순절했다는 내용은 둘 다 나온다. 이의산에게는 해령군(海寧君) 이우경(李友敬)이 있는데 《의안대군파보》에서는 순절한 걸로 나오지만 《인천 이씨 대동보》에서는 이름을 순석(恂碩)으로 바꾸고 대구 수성으로 은거했다는 내용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것도 역시 2009년판 《인천이씨 대동보》에서는 이 부분이 지워져 있다.[6] 여양군 이승윤의 두 아들인 이소조와 이계조는 광산 이씨 상서공파 중시조 7세로 나오며, 계유정난에 화를 입었고 장릉(莊陵) 배식단에 모셔졌다는 내용이 양쪽 다 나온다.[7] 조선 개국 시기에 영의정을 지낸 이서의 본관이다. 광산 이씨와는 다르게 여양군의 두 아들들은 이서의 손자로 나와 있고 관직명도 적혀 있다. 더불어서 자손이 있다고 나오는데, 자손의 일부는 봉산 이씨와 겹치는 부분이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