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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지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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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d1a3b,#8c8c7f><colcolor=#ffffff> 초대 쌍용그룹 회장 김성곤 金成坤 | |
출생 | 1913년 8월 15일[1] |
경상북도 현풍군 읍내면 하동 (現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하리)[2] | |
사망 | 1975년 2월 25일 (향년 61세) |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 |
호 | 성곡 (省谷) |
본관 | 김해 김씨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달성공립보통학교[3] (졸업 / 6회)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 보성전문학교 (상과 / 학사) |
가족 | 부친 김광도, 모친 김봉옥 4남 4녀 중 4남 배우자 김미희(1920 ~ 1981, 1937년 결혼) 장남 김석원 차남 김석준 포함 슬하 3남 3녀[4] |
의원 선수 | 4 |
의원 대수 | 4, 6, 7, 8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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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별일 없제?
김성곤이 생전 자주 쓰던 말로, 1985년 발간 '성곡 일화집' 제목
대한민국의 기업인이자 정치인. 쌍용그룹을 설립하고 제4, 6, 7, 8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김성곤이 생전 자주 쓰던 말로, 1985년 발간 '성곡 일화집' 제목
2. 일생
2.1. 출생 ~ 청년기
1913년 7월 14일, 김성곤은 경상북도 현풍군 읍내면 하동[5](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하리)에서 김광도(金光度)와 김봉옥(金鳳玉)의 4남 4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다.1922년에 현풍보통학교(현 현풍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25년 대구로 이사하여 달성공립보통학교(현 대구달성초등학교) 4학년에 편입하였다. 1928년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가 1929년 대구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북고등학교)에 편입하였으며[6], 4학년 때 교내 항일운동의 주동으로 퇴학당하여 다시 상경,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7년 보성전문학교 상과[7]를 졸업하였다. 학창시절엔 유도 선수로 활동했고 정계에 있을 때 대한유도협회 회장을 역임한 체육인이기도 하다[8]. 그의 호를 딴 '성곡컵 국제유도대회'가 있다.
2.2. 사업가로서
1939년 비누공장인 삼공유지합자회사를 설립하였다.[9] 1948년에는 고려화재해상보험[10]과 자본금 1억 원의 금성방직을 설립하였다. 1950년 6.25 전쟁으로 금성방직 안양공장이 불탄 뒤, 1952년 동양통신을 창간하고 1953년 연합신문을 인수하였다. 1956년 태평방직과 아주방직을 인수하였다. 1959년 국민대학을 인수[11]있다. 국민대 설립자 해공 신익희 선생 외손자 김유생[12]씨와 성곡 김성곤 회장의 외손자 조현찬[13]씨도 가수이다. 1962년 쌍용양회를 설립하였다.2.3. 정치
8.15 광복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에서 활동하였으며, 1946년, 미군정의 친일경찰의 횡포에 의해 일어난 대구 10.1 사건에서 친구 박상희, 황태성과 같이 주요 역할로 활동하였다. 이후 사업가로 활동하다 1958년 달성군에서 자유당소속으로 제4대 민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4.19 혁명 후에는 한때 정계를 은퇴하였으나 5.16 군사정변 후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 6대, 제7대, 제8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민주공화당 내에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김종필과는 껄끄러운 사이로 4대 중앙정보부장 김형욱과 함께 김종필을 견제하였다.
박정희의 친위대를 자처하면서 3선 개헌에 회의적이던 김종필계와 대다수 민주공화당 인사들을 강하게 압박해서 3선 개헌을 성사시켰다.[14][15] 이 과정에서 김진만, 백남억, 길재호와 함께 소위 4인 체제로 박정희를 대리해서 공화당을 관리하였다. 특히 재벌에게 해외차관과 정부발주공사의 10%를 무조건 자신을 통해서 상납하게 하면서 정권의 정치자금 창구를 단일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권과 재벌, 언론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는 그가 쌍용그룹 회장(재벌총수), 동양통신 사장(언론인)이면서 공화당 재정위원장(정치인)이자 박정희의 최측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김성곤은 학창시절 박정희의 셋째형 박상희와 절친이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박정희를 보아왔으며 사석에서는 박정희와 자녀의 결혼 문제를 상의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다. 이런 배경 때문에 박정희는 김성곤한테 정치자금을 모으라고 지시하였다는 후일담이있다. 한편 야당 정치인 중 유진산과는 밀월관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김성곤은 자유당 시절에도 국회의원이었으므로 구 자유당 인사들과 이승만 정부의 인사들과도 친분이 깊었다.
그러나 자신의 영향력을 과신한 나머지 1971년 민주공화당의 김진만, 백남억, 길재호 등과 함께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안을 가결시킨 10.2 항명 파동을 일으켰다. 당시 김성곤은 내가 정권의 돈줄을 쥐고 있으니, 박정희도 자신을 어쩌지 못할 것이라면서 자신만만해 했으나, 항명파동 바로 다음날 이후락의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고 곧바로 정계은퇴 선언을 하게 된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서 한동안 은둔하게 되는데, 사실상 추방당한 것이다.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트레이드 마크인 콧수염이 뽑힐 정도로 수모를 당했고, 심지어 시중에는 두들겨 맞아서 변을 지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가 몇년 못가서 세상을 떠나게 되자, 사망 원인이 고문 후유증이라는 얘기도 있다. 너무나 참혹한 처사에 야당인 신민당까지 박정희 정권이 이들을 정치적으로 살해했다고 맹비난할 정도였다. 3선 개헌 이후에 4인체제의 힘이 커지자 기회만 보고 있던 박정희가 항명파동을 계기로 정리를 한 셈이다. 민주공화당의 견제장치 없이 1인 독주체가 성립됨으로써 집권당 내에선 의미있는 반대계파가 사라졌으며 대한민국 제4공화국을 성립시킨 유신 선포를 수월히 할 수 있게 되는 발판이 되었다.
한편 서울특별시에 최초로 지하철을 도입하고 공사를 시작할 때, 일본 기술을 도입해서 진행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이 공사비가 당초의 두 배가 되었는데 아사히 신문의 취재 결과 130만 미국 달러가 김성곤과 기시 노부스케에게 흘러들어갔던 것이 파악되었다.
2.4. 정계 은퇴 이후 말년
몇년간 미국에서 은둔하다가 박정희의 용서를 받고 1973년 귀국해서 대한상공회의소 제8대 회장에 취임하였고 1974년 대한양회를 인수, 한국신문연구소 회장에 취임하는 등 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강제로 정계은퇴당해 생긴 한은 가시지 않아 폭음으로 지난날을 잊으려 했다고 한다. 평소 위스키 커티샥을 맥주컵 가득 부어 마시던 주당이기도 했다. 그러나 잦은 폭음은 김성곤의 건강을 크게 해치고 만다.2.5. 사후
김성곤 묘비 제막식 (1975.11. 06.) |
성곡선생 서거특집 모음 (1975. 02) [16] |
- 2월 25일 밤 11시
- 0분 00초 ~ 1분 54초 : 김성곤 사망 소식
- 1분 54초 ~ 3분 04초 : 빈소 현황
- 3분 04초 ~ 4분 19초 : 김성곤 사망원인과 사망 과정
- 4분 19초 ~ 13분 20초 : 김성곤에 대한 평가
- 13분 20초 ~ 15분 06초 : 성곡 김성곤 인터뷰
- 2월 26, 27, 28일
- 15분 06초 ~ 17분 11초 : 김성곤의 빈소 조문 현황
- 17분 11초 ~ 19분 04초 : 김성곤의 발자취
- 2월 28일 밤 10시 30분
- 19분 04초 ~ 31분 34초 : 김성곤의 생애
- 31분 34초 ~ 34분 05초 : 성곡 김성곤 인터뷰(위 인터뷰와 같다)
- 34분 05초 ~ 50분 35초 : 배영호 전 법무부 장관의 김성곤 평가
- 50분 35초 ~ 55분 21초 : 김성곤 영결식[17]
1975년 2월 24일 고려대학교 교우회장 자격으로 졸업식 축사를 준비하고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깨어났는데 오른쪽 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는 등 뇌졸중 증세를 보여 순천향대학교병원의 주치의를 불러 진단을 받고 별거 아니니 쉬라는 판정[18]을 받고 있다가 오후 2시에 상태가 악화되어 그날 저녁 8시 50분경 순천향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61세로 당시에는 평균 수명에 가까웠으나 사망 전날까지는 멀쩡했던 점, 정계, 재계, 언론계의 다방면에서 활동한 폭넓은 인물이었기에 주변 인사들의 안타까움이 컸다.[19]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으며, 그의 묘는 원래 가족장으로 국민대학교 뒷산[20]에 안장되었다가 1984년 강원도 평창군에 이장되었고, 2014년 고향인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으로 재이장되었다.
국민대 본부관 앞에는 그의 어록비와 좌상이 자리잡고 있다.
3. 유족
자세한 내용은 범쌍용가 문서 참고하십시오.출처
- 부인 : 김미희 (1920 ~ 1981)
- 장녀 : 김인숙 (1941년생) / 사위 : 조해형 (나라기획 회장)
- 외손자 : 조현진
- 외손자 : 조현찬[21]
- 외손녀 : 조은영
- 차녀 : 김의정 / 사위 : 이승원
- 외손자 : 이용훈
- 외손자 : 이진휴
- 외손자 : 이성훈
- 외손녀 : 이원희
- 장남 : 김석원(1945 ~ 2023, 전 쌍용그룹 회장) / 전처 이래현/ 후처 박문순(1955 ~ ) 성곡미술관 관장[22]
- 손자 : 김지용[23] (1973년생, 22•23대 학교법인 국민학원 이사장) ) /
전처 정유희 (1973년생) 정몽필의 딸 - 손자 : 김지강 (1977 ~ 2011) 사망
- 손자 : 김지명
- 손자 : 김지태
- 손녀 : 김설리
- 손녀 : 김지수
- 삼녀 : 김의령
- 차남 : 김석준 (1953년생, 쌍용건설 회장) / 이혼
- 손자 : 김지성
- 손자 : 김지운 셰프, 이튼 칼리지 진학
- 손녀 : 김지연
- 삼남 : 김석동(1960년생, 전 굿모닝증권 사장) / 妻 한준희
- 손자 : 김지호
- 손자 : 김지원
- 손녀 : 김지영
4. 논란
재미 언론인 문명자[24] 기자가 취재한 내용에 의하면, 김성곤은 일제 때는 남대구경찰서 순사로 칼을 차고 다니더니, 일제의 패망이 확실해 졌을 때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였고, 해방 후에는 남로당 당원으로 들어가서 대구 10.1 사건 때 경상북도 인민위원회 재정부장을 지냈는데, 김성곤의 부인 김미희도 공산주의 여성동맹 위원장이었다. 특히 김성곤은 당시 경북 지역의 유명한 사회주의자들인 박정희의 형 박상희, 그리고 황태성과도 절친한 사이였다. 그리고 이후 6.25 때는 김성곤이 북한군 장교 계급장을 달고 서울 거리를 활보 하는 걸 본 사람도 있다고 한다.출처문명자 기자의 취재록에 의하면 김성곤은 그런 좌익 경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6.25 때 이기붕이 대구로 피난 오자 이기붕에게 접근하여 깊은 친분을 만들었고, 그 덕에 자유당이 몰락할 때까지 자유당의 재정부장을 지낼 수 있었다. 아울러 김성곤은 이기붕과의 친분에다 한국운크라(UNKRA - 국제연합 한국통일 부흥위원단) 단장 콜트 장군과의 친분을 이용해 금성방직을 설립해서 기업가로 승승장구 했다고 한다.출처 이후 자녀들을 미국과 일본에 유학보내면서 본인과 가족들의 미국 시민권 취득을 알아봤다는 증언도 있다. 특히 김종필의 증언에 따르더라도, 적어도 김성곤이 남로당 활동을 했다는 기록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이승만 정권 하에서 승승장구하던 김성곤도 4.19 혁명 이후 마침내 부정축재자로 걸려들었는데, 그러나 그 때도 그는 용캐 법망을 무사히 빠져 나왔고, 이후 5.16 쿠데타가 터지자 반대로 박정희에게 결탁하여[25] 민주공화당의 재정부장을 맡으면서 박정희 정권 내내 승승장구한다. 물론 그런 그도 10.2 항명 파동 이후에는 박정희에게 찍혀 강제로 정계은퇴를 당하게 된다.
어쨌든 문명자의 취재 내용과 김종필의 증언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김성곤은 친일파 → 남로당 좌익 활동 → 친미 보수 우익 / 친 이승만계 → 친 박정희계로 변신을 거듭해온 기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다.
5. 미디어에서
제3공화국, 삼김시대에서 배우 박규채가 연기했다.6.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58 | 제4대 국회의원 선거 | 경북 10[26] | [[자유당(1951년)|]] | 23,518 (72.75%) | 당선 (1위) | 초선 |
1963 | 제6대 국회의원 선거 | 경북 8[27] | [[민주공화당|]] | 44,674 (64.75%) | 재선 | |
1967 | 제7대 국회의원 선거 | 62,354 (73.96%) | 3선 | |||
1971 | 제8대 국회의원 선거 | 경북 10[28] | 56,751 (73.87%) | 4선[29] |
역대 선거 벽보 및 공보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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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수상 경력
- 대통령 표창 (1967)
- 국민훈장 무궁화장 (1975)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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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진 | 문태준 | 오준석 | 이원우 | 박주현 | |
송한철 | 김천수 | 이동녕 | 정진동 | 김창근 | |
구태회 | 김주인 | 김용순 | 김창욱 | 성낙현 | |
김삼상 | 공정식 | 노재필 | 설두하 | 김택수 | |
최치환 | 민병권 | 양정규 | 현오봉 | 정구영 | |
윤치영 | 백두진 | 최희송 | 김정렬 | 윤천주 | |
양찬우 | 이동원 | 김동환 | 이영근 | 김성희 | |
이원엽 | 김유탁 | 박노선 | 김용호 | 김영복 | |
이정석 | 신동욱 | 김용채 | 이병주 | 이매리 | |
이성수 | 신동준 | 김익준 | 이원영 | 이영호 | |
김성용 | }}} }}}}}} |
[1] 음력 7월 14일.[2] #[3] #[4] 외손자가 1988년 MBC 대학가요제 대상 무한궤도(밴드)의 멤버이자 015B 창립멤버인 조현찬.[5] 이 인연 때문인지 현풍고등학교는 한때 쌍용그룹 재단이었다.[6] 경북고 동문회에서는 15회 졸업생으로 대우하고 있다.[7] 지금의 고려대 경영학과의 전신. 김성곤은 나중에 고려대 교우회장을 맡기도 했다.[8] 그러나 30대 즈음서부터 살이 붙기 시작하더니 40~50대엔 고도비만이 되어서 불과 61세밖에 안 되어 죽었다. 후술할 사망 보도에서도 앵커가 아직 한창 일할 나이였다는 멘트로 보아 당시 평균수명보다 조금 못 산 듯.[9] 지하철 대구역에서 칠성시장 방향으로 가다보면 쌍용그룹 발상지 입간판이 있다[10] 고려화재는 훗날 쌍용화재로 바뀌었다가 흥국생명의 모기업인 태광그룹에 인수되어 현재 흥국화재로 바뀌었다.[11] 보성전문학교 상과 시절 인촌 김성수가 보성전문학교 교정에서 밀짚모자를 쓰고 교정에서 풀을 뽑는 모습에 감명을 받아 이때부터 육영사업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덕분에 국민대에서는 김성곤을 학교 설립자인 해공 신익희와 함께 양대 건학 공로자로 기념, 추모하고 있다.[12] 해공 신익희 선생의 따님인 독립운동가 신정완 여사의 차남 김유생 씨는 1963년 봉봉사중창단 멤버로 '꽃 집에 아가씨'를 작사해 활동하고 문공부 해외공보관으로 근무[13] 1988년 MBC 대학가요제 대상 무한궤도와 015B 창립멤버[14] 3선개헌이 처음 불거졌을때 김종필을 선두로 해서 대다수 공화당 정치인들은 이를 반대했다. 장기집권한 이승만의 최후를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1969년부터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화당 국회의원들을 회유, 협박해서 결국 모두 찬성으로 돌려놨다. 당내에 막강한 독자계보를 가지고 있던 김종필을 압박하는데 선봉에 선게 김성곤, 김진만, 백남억, 길재호 4인방[15] 한때 60명이 넘던 공화당 내 개헌반대파 국회의원은 결국 3명 정구영, 예춘호, 이만섭만이 남았고, 결국 정구영-강제 정계은퇴, 예춘호-제명, 이만섭-낙선으로 모두 숙청되었다. 예춘호는 야당으로 넘어가서 1980년대 재야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고, 이만섭은 야인으로 지내다가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었다. 그리고 전두환의 집권 이후 한국국민당 총재로 재기했다.[16] MBC에서 제작되었다.[17] 51분 18초쯤에 고인의 영전에 술을 따르는 이가 장남 김석원, 51분 50초쯤에 절하는 이들은 김성곤의 외손주들이나 차남 김석준, 삼남 김석동으로 추정된다. 53분 36초에 미망인 김미희 여사, 그 옆에 세 아들이 보인다.[18] 의사의 직무소홀 아닌가 싶지만, 당시로서는 의학기술이 정밀하지 않아 뇌졸중의 증세가 어느 정도인지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19] 당장 위에 소개된 영상에서도 "한창 일할 나이에 별세했다"는 평을 남겼을 정도.[20] 이 장소는 이장 이후, 현재 성곡동산으로 불리며 학생들의 쉼터로 사용되고 있다.[21] 무한궤도의 드러머, 공일오비의 객원보컬이었던 그 분 맞다. 대학 졸업 후 쌍용건설에서 일하다가, 스탠퍼드대 석사, 도쿄대 경제학 박사를 거쳐서 세계은행(World Bank) 산하 국제금융공사(International Financial Corporation)의 중국/몽골 담당 매니저로 12년간 활동하였다. 2019년 홍콩계 사모펀드로 이직하였다.[22] 장남, 차남은 이래현이 낳은 자식들이고 3남, 4남, 막내 딸은 박문순이 낳은 자식이다.[23] 김성곤이 생전에 유일하게 본 친손자였으나 그가 2살 때인 1975년에 김성곤이 사망했으므로 기억에도 없을 것이다. 현재 국민대 이사장.[24] 미국식 이름은 줄리 문으로, 백악관 출입기자로 활동했다. 미국 현지에서 활동하며 주로 박정희 정권의 고위 인사 및 권력자들에 얽힌 부정과 비리 기사들을 꾸준히 집중적으로 취재하여 폭로했다. 당연히 박정희 본인이나 정권의 핵심 권력자들에게는 매우 눈엣가시 같은 인물이었으나, 문명자 본인이 미국 정계의 고위 인사들과 친밀한 인맥을 지니고 있었던 덕에 위협을 피할 수 있었다. 특히 김대중 납치사건 관련 특종 보도 직후에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엄청난 압박과 치명적인 위협을 받게 되자 미국에 망명하여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기 때문에 목숨이 무사할 수 있었다.[25] 김성곤이 5.16 쿠데타 이후 줄을 바꾸어 박정희와 성공적으로 결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과거 박상희-박정희 형제와 남로당 인맥으로 가까웠던 덕분이었다는 분석이 정설이다.[26] 달성군[27] 달성군, 고령군[28] 달성군, 고령군[29] 1971년 사퇴 (10.2 항명 파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