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보의 <형정도첩>에 그려진 곤형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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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곤장(棍杖)은 전근대에 사용하던 형벌 도구이다.2. 규정
한자로는 곤(棍)으로 표기. 곤장으로 사람을 치는 '곤형'은 태-장-도-유-사로 구분되는 오형과는 별개의 형으로, 속대전에 규정되어 있다. 주로 군대나 궁궐, 기관에서 중죄를 저지른 죄인을 대상으로 사용하였다.드라마나 영화 때문에 장형에 곤장을 사용한다는 오해가 널리 퍼져 있지만, 원래 장형에 쓰던 '장'은 얇은 회초리인 '태'보다 굵은 지팡이 수준의 회초리이며 곤장보다는 훨씬 작은 도구다.
곤장은 배를 저을 때 사용하는 노처럼 너부데데한 형태의 형구다. 곤에는 폭과 길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게에 따른 파괴력의 차이에 따라서 다섯 종류가 있는데 작은 것을 소곤이라고 하며 그 다음 중(中)곤, 대곤, 중(重)곤, 가장 큰 것을 치도곤이라고 하며 치도곤[1]의 경우 길이 5자 7치(173cm), 너비 5치 3푼(16cm), 두께 4푼(3cm)으로 웬만한 성인 남성만한 큰 물건이다.[2]
강릉 임영관에서 분류해 놓은 곤장의 모습. 좌측부터 소(小)곤, 중(中)곤, 대(大)곤, 중(重)곤, 치도곤(治盜棍)이다. |
장형의 남용을 막기 위해 숙종 때는 30회까지만 치게 정했고, 정조 시대에 발행된 <흠휼전칙>(1778)에서는 곤장의 규격과 사용 규정을 엄격하게 정했다. 하지만 지방 수령이 악랄한 인물이면 아무 때에나 치도곤을 썼다고 한다. 이렇게 가혹하게 처벌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4]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장형을 곤장으로 치는 것이 반드시 틀렸다라고만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법과 원칙이 지켜지는 자리를 묘사하면서 장형을 곤장으로 집행하는 것은 재현 오류이다.
일부는 물곤장이라고 크고 단단한 참나무 곤장을 물에다 조금 불린 다음 죄수의 엉덩이 피부도 물을 흡수하도록 한 다음에 내리치는데 물에 불어서 약해진 피부에 그런 몽둥이질까지 더해지면서 심한 경우 뼈가 보일 정도가 되며, 이쯤되니 거의 다 죽었는데, 운좋게 살아남는다 해도 하반신 불구가 되어 평생 일어설 수 없게 된다.
3. 곤장을 맞은 인물
- 정정혜: 정약종의 딸이자 천주교 순교자. 7회에 걸쳐 320대의 곤장을 맞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주교 순교자 중 숱하게 장살형을 당한 이들이 있으나 정정혜는 나눠 맞았다고 해도 320대를 맞고 장살당하지 않았으며 이후 참수당해 순교했다. 보통 100대도 사네 죽네 하는 마당에 40이 넘은 나이로 320대를 맞고 살아있다가 다른 이유로 죽은 것.[5]
- 이 아가타: 역시나 천주교 순교자로, 나누어 맞았을 테지만 390대를 맞았다고 전해진다. 특이점은 순교자 중에서도 나이가 어린 17세라는 점과 순교자 중 찾아볼 수 있는 곤장대수가 가장 많다는 점. 게다가 이후 9개월간 생존해 최종사인이자 사형방식은 교수형이다.
- 이속: 태종이 신빈 신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정신옹주를 시집보내려고 좋은 집안 아들을 찾으라고 지화라는 점쟁이에게 의뢰했는데 이속은 ”내 아들 앞길 망치게 어찌 몸종의 딸과 혼례시킬 수 있느냐. 적어도 명문가 혈통인 정혜옹주 정도는 되어야 수준이 맞다.“라고 화를 내며 쫓아냈다. 비록 신빈 신씨가 원래 원경왕후를 모시던 몸종 출신이나 후궁이 되어 낳은 정신옹주는 태종의 자녀이니 엄연한 왕족이었다. 즉, 저런 발언을 하며 정신왕주를 무시한 것 자체가 사실상 왕을 비아냥거린거나 마찬가지니 왕권을 건드리는 짓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 태종의 분노를 사 곤장 100대 형에 처해진다. 그런데 평소 행실이 오만해서 평판도 좋지 않다보니 신하들은 한술 더 떠 '곤장 100대만 하시는 건 너무 무르십니다. 더 쎄게 처벌하시죠.'라고 여론을 조성하여 적극적으로 이속의 과거 자잘한 잘못들까지 들춰내 결국 태종도 처음에는 뭘 그렇게까지 하냐고 생색내다 “경들이 그리 원하니 물리칠 수 없어 들어주겠소.”라고 장단을 맞춰 이속은 곤장형+재산 몰수 및 노비행+아들들의 금혼 삼단 크리를 맞아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래도 신하들은 부족했는지 이후 세종대왕 즉위 후에는 노비로라도 살려두는 것은 있어선 안 되니 확실히 죽이자고 청했으나 세종대왕은 이 요청을 묵살하여 이속은 겨우 목숨을 건졌다. 다행히 이속의 아들들은 훗날 금혼령이 풀려 자녀를 얻을 수 있었고, 조선왕실에 간택이라는 혼인제도가 만들어지게 됐다.
- 원균: 역사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경우로, 문서에 써있듯이 별이 별에게 맞은 것이다. 유명해질 수밖에 없는 케이스. 근데 왕이 시킨 게 아니라 몇대를 맞았는지가 불분명하고[6], 이후 부대복귀 후 업무를 수행한 걸로 봐서 조금 때렸을 확률이 높다. 장군이 사병들 앞에서 저걸 한대라도 맞는 것 자체가 자살 충동이 들 만큼의 수치이므로 모욕을 당하게 할 목적이 컸을 것이다. 다만 그게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을 정도로 잘잘못이 너무 명확했다(...).[7]
4. 매체에서의 등장
'장 몇대를 쳐라', '곤장을 쳐라' 등으로만 나오기 때문에 사실 소품을 돌려쓰는 경우도 많은 사극 등에서는 이것이 장형인지 곤장인지 구분이 없는 게 대부분이다. 장형 문서 참조.- 드라마 김수로에서는 신녀 나찰녀가 신물을 가지고 달아나려다 붙잡혀 곤장을 맞는다. 홑겹의 소복만 입은 채로 형틀에 묶였는데, 신녀에게 곤장을 치자 노한 하늘이 폭우를 내린다는 설정 탓에 장틀에 묶여있는 몸의 윤곽이 비에 젖어 하체와 엉덩이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난 채[8] 물볼기를 맞았다. 카메라가 비에 젖은 나찰녀의 다리와 엉덩이를 훑으며 이동하는 장면에 이어서, 건장한 사내의 손에 의해 치도곤 수준의 커다란 곤 수십대가 나찰녀의 엉덩이에 떨어진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지르지만[9] 그래도 버티자 분개한 정견비가 매질의 강도를 더한다.[10] 심지어 매의 고통에 나찰녀가 몸부림 칠때 나찰녀의 비에 젖은 상체가 들썩이며 가슴골이 살짝 드러나기도 한다. 여인의 몸으로 견디기 힘든 매를 맞지만, 유혈 묘사는 없으며 오히려 에로틱하게 묘사되기도 하여 방영 당시에 논란이 있었다. 대역이라고 하면서[11] 다소 일단락 된 분위기였으나 누군가의 맨몸이 고스란히 방송을 탔고 그걸 빼고도 가슴골은 다소 수위가 높은지라 논란이 아예 수그러들지는 못 했다.[12] 영상
- 드라마 해를 품은 달에서는 월이 임금인 이훤에게 연모를 가져 합방을 방해하기 위해 훤에게 살을 날렸다는 시나리오를 써서 이훤을 꺾으려고 한 윤대형을 비롯한 높으신 분들의 음모에 의해 의금부로 끌려가게 되고 이때 의자에 묶여서 허벅지에 곤장을 맞는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된다. 영상
- 런닝맨을 포함한 예능이나 여행 프로그램에 자주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5. 매품팔이
장형은 사람을 죽이는 형벌은 아니었지만 잘못하다간 사람 잡을 수준까지 되는 형벌이었다. 따라서 장형은 죄인 대신 보수를 받은 대리자가 맞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시대엔 매품팔이가 바로 그런 일을 했다. 본래 매품팔이는 연로한 아버지나 할아버지 대신 자손이 대신 장형을 치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매품팔이의 개념은 시대가 흐르고 변질되어서 돈 있는 죄인이 고용한 매 대신 맞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흥부가에서도 나오는 내용이다. 흥부가 돈벌려고 매품팔이를 하려고 했지만 실패하는 장면이 나온다.매품팔이 일은 돈이 많이 들고 매우 위험해 가성비가 나빴다. 《청성잡기(靑城雜記)》에선 매품팔이가 건당 7냥밖에 못 받았고 아내의 채근 탓에 이걸 하루 3번이나 했다가 결국 죽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실 18세기 당시에는 1냥이 꽤 큰 돈이었고, 정조를 살해하려는 암살단을 고용하는 돈이 15냥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아내가 과욕을 부린 것도 사실이다.
매품팔이가 장형에서 건강을 어느 정도 챙기려면 관청의 형리에게 미리 뇌물을 바쳐야 했다. 이때 매품팔이가 바치는 뇌물의 양은 곤장 때리는 사람 마음이었다. 매품팔이가 형리에게 뇌물을 많이 바칠수록 살살 때릴 확률이 높았고 적게 바치거나 줄 돈 없으면 당연히 쎄게 맞았다. 그리고 매품팔이는 형리 뿐만이 아니라 아전들과도 맞닿아있었다. 아전들은 죄인 대신 다른 사람(매품팔이)이 매를 맞는 걸 눈감아주며 뇌물을 챙겼기 때문이다.[13]
6. 그 외
형벌은 아니고 일종의 의식에 가까운 곤장치기도 있었다. 호랑이를 잡아온 포수들에게는 관아에서 곤장으로 3번 후려치는 시늉을 하였다. 호랑이를 '산군(山君)', 즉 '산 속의 왕'이라는 의미로 불렀는데 어쨌거나 왕을 잡았으니 '벌'을 내린다는 뜻. 물론 실제로는 가볍게 툭 치는 시늉만 한 뒤 포상금을 지급했다. 유쾌한 포수들은 곤장을 맞을 때 일부러 관아가 떠나가라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호랑이를 잡은 사냥꾼은 관아뿐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에게 굉장한 대우를 받았다. "범 잡은 포수는 주막도 잡는다"는 함경도 속담이 있을 정도로 범 잡은 포수는 주변에서 공술 얻어먹기 쉬웠다.우리말 표현 중 이 곤장에서 유래된 표현으로 '호된 벌이나 곤경에 처하게 하다, 곤욕을 치르게 하다'라는 뜻의 관용구로 '치도곤을 안기다/치르다/먹이다'라는 말이나 욕설 중 '난장맞을'[14] 등이 있다. 부관참시에서 파생된 육시럴이나, 능지형에서 나온 '깎아죽일'[15], 경을 칠, 우라질[16], 주리를 틀 같이 형벌에 관한 관용구가 많은 한국 표현 가운데 하나이다.
[1] 도적(盜)을 다스리는(治) 몽둥이(棍)라는 뜻이다.[2] 당시 남성 평균키(161cm)보다도 12cm나 더 컸다.[3] 사실 상당수가 죽었다. 그 자리에서 죽기도 했지만, 돌아가서 다음날 죽거나 며칠 있다가 죽는 등 많은 죄인들이 일주일 안에 앓다가 죽었다.[4] 특히 동학 농민 운동의 발단만 해도 고부군수 조병갑이 그의 탐학질에 항의하는 농민 대표들을 곤장으로 심하게 때린 일이다.[5] 그녀의 어머니이자 정약종의 부인 유소사 체칠리아는 79세의 나이로 230대를 맞았다고 전해진다. 전부 곤장인지 일부 단순 태형인지는 자료별로 분분.[6] 난중잡록에 나온다. 물론 난중잡록은 역사학적 가치가 매우 높은 기록이라 맞은 건 100% 틀림없지만, 당사자가 현장에서 직접 보고 쓴 게 아닌지라 몇 대인지는 안 나오고 맞았다는 사실만 써 있다.[7] 아무리 원균이 온갖 병크를 터뜨리고 있어도 원균의 백으로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 알면 함부로 건드릴 수 없기 마련이나 그렇더라도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을 만큼 처참했으니 권율도 사실 자기가 관직에서 잘리거나 분노한 왕에게 보복당할 각오를 하고 할 수 있는 권한 내에서 응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8] 참으로 노골적인 의도를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두대째에서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 오므리는 것까지 잡혔기 때문.[9] 첫 번째와 두 번째 매는 꾹 참지만, 세 번째 매부터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지른다. 의도된 연출인지는 알 방법이 없지만 세 대를 맞으면서 눈에서 눈물로 보이는 것이 한 줄기 흐른다. 처음엔 자연스레 있던 손도 후반에 보면 주먹을 꽉 쥐고 있다.[10] 이는 단순 치는 연기로는 보이지 않는데, 정견비가 때리는 장면에선 곤이 엉덩이를 치고나서 반동으로 튀어오른다. 맞는 이도(대역인지 김혜은인지 불명) 발가락을 오므리는 것을 볼 수 있다.[11] 단순 옥에 티지만 잘 보면 알 수 있듯 중간에 발목을 묶은 밧줄이 느슨해졌다가 돌아온다. 대역으로 교체했든 아니든 묶고 풀면서 찍긴 했다는 것.[12] 이 회차에선 심지어 단체 목욕씬까지 나오기 때문인 것도 있다.[13] 아전들의 경우 국가에서 따로 녹봉을 챙겨주지 않았다. 그냥저냥 백성들 뒷돈이나 알아서 뜯어내어 입에 풀칠하라는 거나 마찬가지다.[14] 욕설 젠장의 유래가 된 표현이다. 예: “이 난장 맞을 년, 남편이 들어오는데 나와보지도 않아, 이 오라질 년.”(현진건, <운수 좋은 날> 中)[15] '능지할' 이라는 표현도 있는데 이것은 '꼼짝도 못할 정도가 되다' 라는 의미이다.[16] 원래는 죄인을 묶은 밧줄인 오라질에서 파생된 표현이다. 그래서 속담 중에는 '오라는 네가 지고 도적질은 내가 하마' 같은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