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1 13:20:23

최북

<rowcolor=#ffffff> 최북/崔北
파일:최북.png
이한철이 그린 최북의 초상
생년 1712년
몰년 1787년
본관 무주
칠칠(七七)[1]
호생관(毫生館)[2]
삼기재(三奇齋)
거기재(居基在)
성재(星齋)


1. 개요2. 생애3. 성격4. 평가5. 그림

1. 개요

橋下魚動, 脚下肉動[3]
― "부인 참한 규수감 좀 알아보시오!!!" 최북의 부친이 이 시를 보고 한 말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무주.

2. 생애

1712년 한성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며[4] 아버지 최상여는 호조의 회계 실무자인 계사(計士)를 지냈다.[5] 어렸을 적의 아명은 식(埴)이며 20대 무렵에 이름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당대에 드물게 조선을 떠나서 해외를 여행한 사람이기도 하다. 1748년(영조 23영) 조선 통신사의 화원으로 일본을 방문했으며 정확한 시점은 확인할 수 없지만 흑룡강을 건너 만주를 여행했다고도 한다.

괴팍한 성격 때문에 대인관계가 좋지 못했고 술을 워낙 좋아해서 폭음을 하여 돈을 벌어도 생활비와 술값으로 전부 쓰다보니 뛰어난 그림 실력에도 가난을 면치 못했다. 생계와 술값을 위해 평양과 동래까지 가 그림을 팔기도 했으며 가난은 말년까지 이어졌다. 죽기 직전에도 열흘 동안 굶다가 그림을 팔아 겨우 돈을 마련했다고 하며 그 돈으로 술을 마시고는 만취한채로 겨울밤에 한양의 눈구덩이에서 누워자다가 결국 동사했다. 죽었을때의 나이가 49세였는데 이를 두고 사람들은 자신의 죽을 나이를 알고 칠칠이라는 자를 지어 사용했다고 평가했다.(7×7=49) 물론 위에서 보이듯 실제 죽은 나이는 75세로 위의 칠칠 설과는 거리가 멀며 칠칠이라는 자는 자신의 이름 한자인 북녘 북을 풀어서 쓴 것이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884회 방송분(2019년 10월 6일)에서 그의 생애를 소개했다.

3. 성격

희대의 괴짜로 그 자체로 자존감이 강하고 괴팍했으며 자신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또한 화도 잘 내고 말이 거칠어서 독설을 하는게 예사였고 기행을 자주 했다. 그 자신이 오만한 성격임에도 오만한 자를 혐오하여 면전에서 면박을 주기도 했다. 그림값을 제대로 쳐 주지 않으면 그림을 다 그리고도 화폭을 찢어 놓았고 그렇다고 후하게 주면 의뢰인을 조롱했다. 이때문에 그림 실력이 뛰어남에도 개차반인 성격으로 인해 인망이 좋지 않았다.

또한 동료 화원들을 무시하는 언행을 자주 하기도 했기에 동료 화원들과도 관계도 나빴다. 당시 조선 사람들도 최북을 광생(狂生)으로[6] 멸시하였다.

하루는 한 선비가 거금을 가져와 산수화를 부탁했는데 막상 그림 받는 날에 받은 그림은 산만 표현되어 있고 물을 그리지 않았기에 그 선비가 왜 물을 안그렸냐며 이를 항의했더니 "그림 밖이 물이야."라고 소리치며 내쫓았다고 한다.[7]

높으신 분들 앞에 가서도 그의 성격은 죽지 않았다. 최북이 젊은날에 높으신 분 한 분이 그의 마음에 들지않아 그림을 그려달라는 요청을 거절하자 그 고관이 화가 치밀어 곤장을 맞기 싫으면 그림을 그릴 것을 강요하자 "남이 나를 저버린 게 아니라 내 눈이 나를 저버린 것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한쪽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 당연히 이를 본 고관은 기겁을 하며 나간다. 고흐?[8]

술을 매우 좋아해서 하루에 대여섯 되씩 마셔댔다고 하며[9] 술값은 그림과 집안의 서책을 팔아서 댔다. 문제는 이때 모난 성격으로 인해 술에 취하면 술주정을 심하게 하는 행패를 부려 주광(술주정꾼)으로 멸시받았다.

한번은 모 대감댁에 갔는데 그 집의 하인이 대감에게 최 직장[10]께서 오셨다고 하자 노발대발하며 최 정승이라 하지 않고 왜 직장이라고 하냐고 화를 냈다. 이에 하인이 어이 없어서 언제 정승을 한적이 있냐고 되묻자 "이놈아! 그럼 내가 언제 직장은 지냈단 말이냐!!" 라고 말하며 화를 내고는 그대로 돌아갔다. 성질머리하곤... 또 한번은 어느 대감 댁에 갔는데 주인이 그의 괴이함을 보고 "저기 앉은자의 성은 무엇인고?" 라고 하자 "내 먼저 묻노니 그대의 성은 무엇인가?" 라고 소리치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고 한다.

기행도 많이 했는데 일례로 지인들과 금강산에 놀러갔을때 같이 술을 마시고 놀면서 만취하자 구룡폭포를 보고는 경치가 좋다고 칭찬하더니 자살하고자 모름지기 천하 명인은 천하 명산에서 죽어야 한다고 갑자기 구룡폭포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다행히도(?) 나뭇가지에 옷이 걸렸고 놀란 지인들이 달려들어 목숨은 건졌다.

4. 평가

모난 성격과 알코올 중독 때문에 인망이 좋지않아 평생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지만 현대는 물론 당대 조선에서도 인정받는 화가였다. 실제로 최북이 평양과 동래에서 그림을 그려서 팔겠다고 내놓으면 사람들이 이를 보고선 감탄을 하며 서로 사가려고 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동래를 방문한 일본인 상인들도 최북이 그린 그림을 보고는 감탄하며 사갔다. 조선후기의 문인 화가인 조희룡은 최북을 김득신, 이인문, 김홍도와 같은 반열에 놓았으며, 최북의 또래인 문인 정범조도 최북을 정선, 심사정에 견주었다. 특히 청백리인 정승 신광수를 존경하여 그와 같이 한라산을 등반할때 한라산의 경치를 그린 설산조치도를 그리고 나서 돈한푼 받지 않고[11] 신광수에게 선물하여 신광수를 기쁘게 했다.

산수화에 능해 '최산수'라고 불렸으며 남종화의 화풍을 계승해 상상력만으로 절경을 그려냈다. 화훼, 짐승 등을 그리는 데도 재주가 있었는데 특히 메추라기를 잘 그려 최메추라기라는 별명도 있었다. 별명왕? 위에 언급한 개차반 성격에 비해 화풍 자체는 부드러운 편이다.

손가락에 을 묻혀 그림을 그리는 지두화(指頭畵)라는 당시 청나라 화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5. 그림

  • 공산무인도
파일:공산무인도.jpg
  • 메추라기와 조
파일:추순탁속.jpg
파일:표훈사.jpg


[1] 이름인 북(北)을 파자한 것이다. 응?77?[2]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말 그대로 붓(毫)으로 먹고 산다는 뜻이다. 명나라의 문인 동기창이 보살은 붓에서 태어난다고 한 말에서 화가로서 자부심을 담은 뜻도 있다.[3] 뜻은 다리 밑에 물고기가 노닌다, 다리 밑에 고기꿈틀거린다.[4] 헌데 무주를 비롯한 전라북도에서는 무주 최씨라는 이유로 전라북도 출신, 무주 출신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를 비판하는 사람도 많다.[5] 인구와 세금 등의 통계를 맡는 관직으로 당시 조선의 관직들중에서 최하급인 미관말직이었다.[6] 미치게 태어났다는 뜻인데 쉽게 해석하면 미치광이, 정신병자라는 뜻이다. 실제로도 최북의 성격과 행동을 보면 정상이 아니기에 정신질환이 맞다.[7] 실제로도 최북은 그림을 정해진 형식 없이 멋대로 그리는 성격이라서 그가 그린 그림들 중에서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들이 많다.[8] 이때문에 최북을 싫어하는 조선의 유명한 화가인 조희룡은 최북의 자해 사건에 "왕공 귀족에게 아첨하지 않으면 될 것을 어찌하여 스스로를 이처럼 괴롭히냐"며 그를 비난했다.[9] 한 되는 현대의 기준으로 1.8L로 하루에 1.8L짜리 술을 대여섯개씩 마셨다고 보면 된다. 이정도면 애주가를 넘어선 알코올 중독이다.[10] 조선의 말단 관직이다.[11] 사실 신광수는 정승까지 지냈음에도 어머니를 모시고 살 단칸방조차 없을 정도로 가난하여 최북의 그림을 살 돈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