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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방위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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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집된 국민방위군 사진 출처
1. 개요2. 편성
2.1. 지휘부2.2. 병사
3. 첫 부대 소집4. 죽음의 행렬5. 예산 횡령6. 사망자 수7. 사건에 대한 책임 처벌과 정치적 영향8. 해산9. 여담10. 대중매체11. 다른 나라의 경우12. 기타13. 관련 문서14. 둘러보기

1. 개요


인간을, 포로도 아닌 동포를, 이렇게 처참하게 학대할 수 있을까 싶었다. 6·25전쟁의 죄악사에서 으뜸가는 인간 말살 행위였다. 이승만 정권과 그 지배적 인간들, 그 체제 그 이념의 적나라한 증거였다. 얼마나 많은 아버지가, 형제와 오빠가, 아들이 죽어갔는지... 단테연옥불교지옥도 그럴 수 없었다. 단테나 석가나 예수가 한국의 1951년 겨울의 참상을 보았더라면 그들의 지옥을 차라리 천국이라고 수정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리영희의 증언[1]

국민방위군 사건은 1950년1951년에, 즉 6.25 전쟁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가 강제징집한 국민방위군 수만 명이 국회, 정부 및 군 고위층의 예산 횡령뇌물 범죄 탓에 보급을 받지 못하여 그대로 희생된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대 최악의 군수비리 사건이자 국가 폭력이다. 사실상 한국판 임팔 전투[2] 수준. 피해 정도만 보면 오히려 임팔 전투보다 훨씬 심하다!

병력수송 비용과 식비 등을 횡령하여 신정동지회 국회의원 20여 명에게 공작비와 여비 등 명목으로 제공했다. 그 탓에 징집된 방위군이 혹한기 속에 굶주리면서 행군하여 기아와 동상으로 사망하였다.

적군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부정부패와 인명경시로 100여 일 사이에 전투에 참여는커녕 한 번 못 만져 본 장병 최소 7만 7천[3] ~ 12만 명[4]이 후방에서 굶어 죽고 얼어 죽었으며 전체의 80% 가량이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 수족손실의 중상자도 보수적인 학계에서 조차 최소 20만 명 이상으로 본다.[5] 이승만 정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역사학자 유영익[6] 교수도 장정 9만 명가량이 동사, 아사, 병사한 천인공노할 사건으로 규정했으며,[7] 서북청년단 창립멤버였던 손진(孫瑱, 1920~2017)[8]도 자서전에서 이 사건을 '대한민국 청년 운동사에 씻을 수 없는 큰 오점'이라고 평가했다.[9]

이 사건으로 신성모 국방부 장관[10]이 물러났다. 그리고 국민방위군 사건의 진상이 규명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던 부통령 이시영은 이승만 정부에 거대한 회의감을 느끼고 사표를 제출하여 스스로 행정부 부통령직에서 물러났을 지경이었다.

6.25 초기 북한이 남한 지역을 점령한 후 동원한 인력은 무려 60만 명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최전선의 총알받이로 투입되었다. 나머지는 탄약 및 식량 운반, 교량과 도로 보수 등에 동원되다가 전방에 병력 손실이 발생하면 병력보충용으로 투입되었다.[11] 전쟁 시작 당시 북한군은 약 20만 명이었지만 최초 3개월간 사상자만 22만 1천 명이었다. 이 엄청난 사상자를 남한에서 동원한 의용군으로 보충했다. 그래서 북한으로 후퇴할 무렵 북한군은 약 5만 명, 의용군 5만 명이었다. 후퇴하지 못하고 낙오되어 빨치산이 된 2만 5천 명은 제외한다. 애시당초 인구가 부족했던 북한은 저 20만 명이 짜내고 짜낸 병력이었고 한 번 잃은 뒤로는 전쟁 내내 재기하지 못했다. 한국군이 남아도는 실업자와 쏟아지는 미군 물자를 합성해 사단을 찍어내며 갈수록 강화된 것과 달리 북한군은 휴전까지 주력 교전단체가 된 적이 없다.

1.4 후퇴 당시 또 다시 남한의 청장년을 북한 점령 지역에 놔두고 갈 수 없는 정부 입장에서 청장년 국민 총동원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국민방위군 모집은 공무원들이 소집 영장을 작성하여 강제적으로 실시했지만[12] 당시 서울/경기 일대 청장년들은 공포심을 느껴 영장을 받지 않아도 엄청난 숫자가 소집장소로 몰려들었다. 남아 있으면 북한의 의용군에 끌려갈 가능성이 매우 높고 소집되면 안전하게 대피시켜 주고 최소한 밥은 주는 줄 알던 상황이라 서울/경기 일대 청장년들이 몰려듦은 당연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군인 모병 업무를 맡은 청년방위대는 길거리에서 젊은이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가는 이른바 '홀치기'를 하는 등 온갖 행패와 비리를 저질러 심각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13]

결과만 보면 북한 점령 지역의 남한 청장년을 소개한다는 목적 자체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목적인 국군의 징병자원 확보는 대실패했다. 소개 과정에서 상당수가 사망했거니와 생존자도 온갖 고생으로 체력이 소진되어 말 그대로 기진맥진한 뒤라 도저히 군인으로 쓸 수 없어 대부분 인원을 귀향조치하였다.

2. 편성

국민방위군은 제2국민병역[14] 청년방위대 출신의 장교들, 그리고 제2국민병 출신의 하급장교 및 기간병들로 구성되었다.
최초 기획된 북한 점령 지역의 남한 청년 소개라는 목적 외에도 훈련 및 신병훈련소/전선으로 병력 보충 임무가 가장 주된 업무다. 국민방위군 주력은 이동 중 굶어죽고 얼어 죽으며 공중분해되기는 했지만 일부는 전투부대로 편성되어 후방지역 정규군 산하에서 공비 토벌, 보급로 경계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고 연대 규모로 정규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일단 장부상으로 존재하기는 했지만 국민방위군은 (숫자 4를 건너뛰고) 1사단부터 11사단까지 10개 사단이 편성되었다. 여기는 군사영어학교나 육사 출신 정규군 대령들이 사단장으로 보직되었다. 연대급으로는 국민방위군 1, 2, 3연대까지는 확인되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장부상으로만 존재했는데 그 장부도 한참 뒤에 발견된지라...
M1 소총칼빈, 소련식 장총, 일제 99식 소총, 북한 다발총 등으로 무장한 국제화된 군대였다. M1은 군인, 99식 소총은 경찰 줘야 하니 국민방위군에게 돌아갈 무장은 북한군이 버리고 간 소련식 장총(모신나강) 등이 주 병기가 되었다.
그나마 국민방위군 1연대는 장비 전무, 2연대는 2개 중대분 보유이고 3연대만 저 정도 장비를 갖추었다. 당시는 전투경찰대도 빨치산과 전투로 얻은 북한식 장비로 무장하는 시절이라는 것을 참고해야 한다.(빨치산 문서 참조) 다만 빨치산들도 내무서원들이 장비를 죄다 들고 북한으로 튀어 버리는 바람에 맨손으로 국군과 경찰을 공격해 탈취한 무기로 무장하였다. 결국 무기는 돌고 돌았다.
국민방위군 중 유일하게 제대로 싸운 부대는 국민방위군 제3연대. 국군 2사단에 배속되어 경상도 일대에서 공비 소탕 작전을 전개하였다. 3연대는 소속이 육군 3군단과 육본 직할로 바뀌다가 최종적으로 1951년 4월 29일 태백산지구 사령부로 배속되었다. 3연대는 1, 2대대만 있었는데 총병력 1509명에 장교 55명이었다.

2.1. 지휘부

대한민국 정부는 중공군 개입 즈음 기존의 대한청년단청년방위대를 해체하고 적의 손에 넘어갈 수 있는 지역의 청장년을 보호하여 소개할 목적으로 '국민방위군'을 창설했다. 대한청년단장이자 청년방위단 사령관 김윤근이 그대로 국민방위군사령관이 된 데서 알 수 있듯 앞서 두 조직의 지휘부가 그대로 국민방위군 지휘부가 되었다. 또 다른 범죄자인 국민방위군 윤익헌은 대한청년단 총무국장이자 청년방위대 경리국장이었다.[15]

국민방위군을 지원하기 위해 육군본부 산하에 국민방위을 설치하였는데 초대 국장은 준장 이한림(10일 근무), 2대 준장 장창국, 3대 준장 김종갑이 있었다. 문제는 당시 상황이 긴박히 돌아가 국민방위국의 현역 장병들이 제대로 인사 배치가 되지 않아 실질적으로 국민방위군을 감독하지 못했다.

국민방위군 사령부 지휘부는 사령관 김윤근(사형), 부사령관 윤익헌(사형), 참모장 박경구였고 일반참모부로 인사/정보/작전/군수처를 두었고, 특별참모부로 휼병실, 재무실(장 강석한 사형), 후생실, 조달과(장 박창원 사형), 보급과(장 박기환 사형), 정훈실이 있었다. 중간 제대 역할로 5 / 10 / 13 / 19 / 20단과 단대번호 불상의 4개 단등 총 9개 '단'이 있었다. 이들에게는 청년방위대 시절 부여받은 준장이니 대령이니 하는 계급이 있었지만, 실제로 군생활 경험은 전무했다. 국군이 북진하여 북한 대부분을 접수하였을 때 함께 올라가자, 정부에서 치안유지 인원으로 쓰고자 이들에게 계급을 부여해주었던 듯.

2.2. 병사

1950년 11월 15일 기준으로 전국 장정 대 등록자는 238만 9730명이었다. 이 중 경찰 / 형무관 / 군 소집 예정자 등을 제외한 68만 350명이 제2국민병이 되어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되었다. 이들 인원 중 당시 군이 발표한 사망자 수는 1234명이고 그외 상세불명의 행려 사망자가 있었다고 한다. 국민방위군 소집인원 중 교육대 수용인원은 29만 8142명이었다. 교육대는 경상도 일대에 51개, 제주도에 1개로 총 52개가 있었다.[16]

북한에게 초모되기 전에 청장년을 소개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기 때문에 북한에서 월남한 청장년과 서울, 경기 지역의 피해가 막심하였다. 다만 충청, 전라도의 경우 소집되어 이동하는 중 국민방위군이 해산되어 비교적 피해가 적었다. 실제로 국민방위군 68만 명 중 월남자 / 서울 / 경기 / 강원 / 인천 지역에서만 42만 명이 소집되었다.

소집된 제2국민병은 각 구청별로 소집된 장정을 담당 경찰관이 지정된 장소(서울은 창덕궁 비원 후정)로 인솔하고 인원점검 후 국민방위군 장교들이 200 ~ 300명식 중대 단위로 편성하여 도보로 교육대가 있는 경상도로 인솔했다.

3. 첫 부대 소집

1950년, 대한민국 국군유엔군중공군의 무단 월경[17]과 전쟁 개입으로 인해 다시 남쪽으로 후퇴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이승만 정권의 요인들은 한동안 북한 치하에 있었던 남한의 장정들, 즉 곧바로 군인으로 징병할 수 있는 인적자원들이 다시금 공산군에 의해 징병될 가능성을 심각하게 고려하였다. 이미 북한 점령 지역 남한 청년들 다수가 허울 좋은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강제징병되어 조선인민군 육군에 들어간 전례가 있었다.[18] 따라서 정부는 같은 해 12월 15일 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살 이상~40살 이하의 장정을 제2국민병에 편입한 뒤 제2국민병 중 학생이 아닌 자는 지원하여 국민방위군에 편입함을 골자로 한 국민방위군설치법 법률안을 발의했다.

그런데 국회에 법률안을 제출하면서 예산 계획을 설명하지도 않았음에도 본회의에서 통과될 정도로 과정이 날림이었다. 법률안 통과 이후로 12월 21일에 첫 부대 1만여 명이 창덕궁에서 소집돼 행군에 나섰다. 사실 중공군의 진격이 너무 빨라 그로부터 겨우 2주 뒤에 서울이 함락되었음을 생각하면 이렇게 서두른 사정이 이해는 된다. 그러나 아직 행정체계고 뭐고 제대로 갖추기도 전에, 낙동강 이북 지역을 수복했다가 다시 상실하는 상황에서 이런 대규모 인원이송을 기획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재앙을 예고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정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한바탕 쇼를 했다고 음모론을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사정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굳이 정치 자금을 먹으려면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문서로만 존재하는 유령 부대를 편성하는 게 뒷말도 없고 목격자도 없어서 은폐하기 아주 편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대를 편성하는 것보다 수고도 적고 빼먹은 것이 들키기도 어려우며, 보는 눈도 적어 공금을 유용하기에 아주 쉽기에 시대와 국가를 가리지 않고 애용되는 수법이다. 허위로 교육대를 만들고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인원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실제 편성 인원보다 적은 수로 징집하고 나머지는 유령 인원으로 할당하면 뒷소문 없이 깔끔하게 해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국민방위군이란 이름으로 징집했을 뿐, 별도의 사단이나 여단으로 미리 편제를 잡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육대에서 훈련 수료 후 각 부대에 뿌려지기 마련이므로 인원 조작도 상대적으로 수월했을 것이다. 아무리 멍청하다 한들 수만에 달하는 인원이 이동하여 소문이 안 날 수가 없는데 단지 정치 자금 마련을 위해 술책을 부렸다기엔 어폐가 있다.

즉 국민방위군의 예산 유용은 예산을 빼돌릴 명분으로 대규모 인원을 조직한 것이 아니라 대규모 인원에게 산정된 예산을 탐욕스럽게 빼돌렸다고 보는 것이 옳다. 앞뒤가 바뀐 음모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음모론 여부를 떠나서 당시에 유령 부대를 만드는 것은 써먹기 어려웠다는 주장도 있다. 유령 부대는 비전시에나 써먹을 수 있는 것으로, 국방 예산을 전시에 유령 부대에 집어넣고 있으면 몰락의 히틀러 재탕 찍을 가능성이 아주 커진다. 더구나 6.25 전쟁 시기에 전시작전통제권은 전쟁 발발 1달 만에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군사령부에 이양하여 유엔군 사령관이 행사했는데 그 상황에서 유령 부대 따위를 만들었다가는 금방 들켰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이 헷갈리는 부분으로, 작전권과 통수권은 엄연히 다르다. 작전권이 군령권이라면 인사/행정/교육은 모두 군정권에 속한다. 따라서 평시는 물론이고 전시인 6.25 전쟁 당시에도 장교 및 사병의 배치 및 진급/전역, 신병의 훈련과 간부의 교육 등은 모두 대한민국 관할에 속하는 권한이었다. 국민방위군 역시 징집하여 바로 전투에 투입할 목적이 아닌, 후술되는 것처럼 후방으로 이송한 뒤 각 교육대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을 예정이었다. 즉, 국민방위군의 지휘통솔권한은 유엔군 사령부가 아닌 대한민국 육군본부에 있었다. 이 사건에서 벌어진 참극은 후방 교육대로 이송하는 동안 발생한 것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며 이는 전적으로 대한민국의 관할이었다. 후술하듯 관련자들은 모두 대한민국 육군 인사들이었고 이들의 처단 역시 대한민국의 군사재판으로 했지 유엔군사령부가 하진 않았다.

4. 죽음의 행렬

당시 작전처장의 증언에 따르면 1만 명 가까운 병력을 후송하는데 이나 군복 하나 안 주고 언제까지 집결하라는 것도 없이 '착지(着地) 부산 구포'라는 작전명만 육군본부로부터 하달받았다. 그리고 행군 중 대열 책임자가 경유지의 시장, 군수에게 육군 본부로부터 하달받은 양곡권을 보이고 급식을 해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국방부와 내무부가 서로 양곡 지급권을 갖겠다고 다투느라 양곡권 지급이 제대로 안 되었고 내무부는 지방 행정기관에 양곡 지급을 중단하라고 지시하기까지 했다.

이는 국방부와 내무부간 알력 싸움이었다. 당시 국군과 경찰은 앙금이 깊은 사이였는데[19] 경찰은 내무부 소속이었으므로 내무부가 국방부에게 곧이곧대로 협조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이들 끼니는 제대로 해결될 리 없었고, 심지어 인민군 휘하 의용군 대접만도 못할 정도였다.[20] 북한군에게 의용군으로 강제징집되었다가 탈출해, 국민방위군에 자원입대했던 서태원[21]의 증언에 따르면 "의용군 시절에는 주먹밥이나마 하루 세 끼를 거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국민방위군으로 남하할 때는 병자나 아사자가 속출해도 돌봐주는 이 없는 거지 중의 상거지였다."라고 회고할 정도. '거지 중의 상거지'란 표현은 다른 국민방위군 경험자 및 목격자 증언에 일관되게 등장하는 관용구다.

게다가 때가 12월이고 그것도 당시 유례 없는 혹한이었는데[22] 소집된 장정들은 상식적으로 '정부가 군인으로 소집했으니 알아서 먹여주고 입혀주지 않겠느냐?' 생각하고 홑바지와 저고리 차림에 길을 나섰다. 그러나 정작 정부는 이들을 위한 옷값도 배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현금을 주더라도 방한복 50만 벌을 구할 길이 없는데 예산은 배정해서 무엇하냐.'는 것이었다. 당연히 차량 따위는 없었다. 무조건 도보행군. 또한 국도는 UN군이 작전도로로 통제하므로 제2국민병들은 샛길이나 산길을 타고 이동하여 피로가 더욱 극심하였다. 따라서 장정들은 2명당 1장씩 지급된 가마니로 서로의 체온을 의지해 추위를 견뎌야 했고 교실 하나에 수백 명이 수용돼 서로 몸을 맞대고 자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위생 상태가 나빠진 것은 물론이었고, 당연히 벼룩가 들끓어 티푸스 같은 질병이 창궐하여 수도 없이 죽어나갔다. 말 그대로 죽음의 행군이었는데 문제는 이 행군이 국민방위군이 겪은 고난의 전부가 아니란 것이었다.

제주도 교육대는 육지에서 배를 타고 간신히 교육대까지 도착한 장정 중 3천 명이 체력 부족이라고 돌려보냈는데 그냥 인근 마을에 눌러앉아 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데려올 때는 배 태워 왔는데, 가는 배편은 마련되어 있지 않고, 대부분 여비가 없어서 못 가고 거지가 되었다.

국민방위군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끌려갔던 본 기여자의 할머님의 증언을 빌리자면, 그분은 행렬 중에 모처 다리의 노점상에서 고향사람과 함께 인절미를 사먹는 척 하고 쭈그려 앉아 행렬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일어나는 방식으로 탈영에 성공했다고 한다. 얼마나 관리감독이 허술했는지, 아니 아예 없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군기와 담당자가 없어 감시하는 사람도 없었고 군복도 입지 못했으므로 일반인과 구분되지 않아 대열에서 이탈만 하면 탈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경남지역에서 징집된 병사들은 비교적 온화한 날씨와 절대적으로 짧은 동선 때문에 상기된 죽음의 행렬을 경험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당시 헌병사령관 최경록은 1951년 1월 대구로 가는 길에 가마니를 뒤집어 쓴 군인들이 거지처럼 서성거리는 것을 목격하였다. '군기가 이 꼴이 되다니.' 하는 생각에 혼내주러 갔다가 오히려 그들의 안내를 받아 굶어 죽고 얼어 죽은 국민방위군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다. 헌병사령관의 전시 주업무가 후방에서 군사적으로 치안유지를 하는 것인데, 이때서야 국민방위군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 보고는 보통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조사하였다. 그리고 2차 수사의 주역이 되어 책임자 총살형에 큰 역할을 했다.

5. 예산 횡령

법안에 따르면 정부는 국민방위대가 약 50만 병력임을 가정해 후방에 50여 개의 육군 교육대를 설치해 1개 교육대 당 1만여 명을 수용할 것을 명시했다고 한다.[23] 하지만 교육대의 육군 기간요원들은 그 많은 병력을 받아들일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게다가 군복은 커녕 병력 운용을 실질적으로 담당하였던 육군 장병들의 월급마저 계산해두지 않고 알아서 처먹으라는 식으로 예산이 뭉터기로 지급되었다.

교육대 장병들은 대부분이 이승만 정부 산하 백색테러단체 서북청년회 소속이 합류한 대한청년단 간부들이었는데 제대로 된 훈련이나 북한 지역에서 반공 게릴라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진작 사관학교나 정규군으로 차출된 이후였던지라 극소수의 단기교육이라도 받은 인원을 제외하면 생짜 민간인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사령관 김윤근은 육군 준장 계급을 달긴 했지만 사실 중국군(국부군)이나 일본군, 만주군 출신의 군경력자가 아니었다.[24] 대한청년단 제3대 단장이자 씨름꾼 출신으로 대한청년단 초대 단장인 신성모의 사위였다. 즉, 계급만 준장이지 정규군 장교로서 갖추어야 할 군사적 자질은 아예 없었다.[25]

이러한 훈련기관이나 예비대 조직을 급하게 편성해야 한다면 퇴역한 예비역 장교들을 소집하거나 부상 등의 사정으로 인해 전선에 나갈 수 없는 현역 장교들을 돌려서 맡기는 게 상식이다. 창군 2년 남짓 지난 시점이니 국군 출신 예비역 장교는 없었다 쳐도 일본군, 만주군 혹은 중국군(국부군) 출신 중에는 고령 등의 이유로 현역에서 물러난 이들이 있으니 이들을 책임자로 임명하고, 국군에는 전쟁통에 당연히 발생했을 상이군인들이 있으니 이들을 교육인력으로 활용해서 정상적인 조직을 구축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는데도 이런 짓을 한 것이다.

군 행정 지식은커녕 기본적인 책임감조차 없던 무자격자들이 장악한 조직이 본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었을 리 없다.

일단 국민방위군은 1인당 1일 양곡 4홉,[26] 취사연료비 40원, 잡비로 10원을 책정하여 50만 명의 3개월분 예산 209억 830만 원을 국회에 요청했는데...

1. 실제로는 68만 명이 모집되었기에 어떤 부정이 없었다 해도 1인당 실제 집행액이 원래 계산만큼 나올 수 없었다.

2. 국민방위대에서 계산한 1인당 하루 4홉은 하루 5홉 5작을 지급받는 전쟁포로만도 못했다. 돌아가는 꼴을 보면 넉넉하게 책정해줬어도 다 해먹었겠지만.

3. 국민방위군은 장교와 하사관의 봉급을 아예 책정하지 않았으므로, 이들은 본인들이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예산착복을 안 할 수가 없었다.[27]

4, 겨울에 집행할 예산이라면서 난방비와 피복비는 아예 책정조차 하지 않았다.

5. 그렇게 다 떼먹은 찌꺼기조차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는데, 예산을 떼먹으려던 교육대들에 천신만고 끝에 국민방위군들이 도착하면 수용을 거부하며 다른 교육대로 뺑뺑이를 돌리고 상부에는 그들을 수용해 훈련시키기 시작했다는 허위 보고서를 올리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6. 이 와중에 진짜 작정하고 해먹으려는 아이디어들까지 끼어들었다. 젤리()공장은 생산 능력에 대비 소비되었다는 의 양이 6배가 넘었고, 자동차는 250대를 구입했다더니 20대밖에 안 샀다. 그러나 이들은 차라리 양반이었는데 명태는 386만 짝을 샀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0.1%에 불과한 4천 짝을 구매한 게 전부였다. 그 외 담요부터 시작하는 각종 횡령 목록은 도저히 여기 다 쓸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안 그래도 부족한 예산에서 사령관부터 병들까지 상중하로 다 떼먹으니 남는 게 없었다. 굶주린 장정들은 훈련을 빌미로 마을로 가서 먹을 것을 탈취하고 잔치집과 굿판을 습격하고 그 와중에 빈 속에 급하게 먹어서 토사곽란으로 죽은 장정들까지 발생하는 등 별의별 일이 다 벌어졌다.[28]

1951년 3월 29일 정파별 3명씩 15명으로 구성된 '국회진상조사위원회'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1. 인원수 허위보고에 의한 현금횡령액 23억 5126만 원
2. 인원수 허위보고에 따른 양곡횡령액 20억 4710만 원
3. 공제액이란 명목으로 예하의 공금을 횡령한 액수가 28억 8328만 원
으로 위의 부정액만 72억 8164만 원이었다.(휴대용 제리, 자동차 구입, 명태 등 현품 횡령 제외)

이는 50만 명 기준으로 책정된 1951년 1~3월 3개월분 예산 209억 830만 원 중 약 1/3에 달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는 김윤근과 윤익헌 등 수뇌부에서만 해먹은 금액이고, 예하 52개 교육대에서 얼마나 횡령했는지는 추산조차 불가능하다.

이 때 횡령한 금액 중 상당액이 당시 국회에서 여당 노릇을 하던 신정동지회에 유입되었다고 한다. 당시 헌병사령부에선 부정액 계산방식이 틀려 현금 24억 2111만 원에 군량미 1887가마를 횡령했다고 했는데(2차 수사기인 6월 11일 발표) 헌병사령관 최경록 준장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이렇게 많은 돈이 어떻게 유용되었는지를 조사했더니, 횡령액 중 1/3은 국회의 신정동지회에 정치자금으로, 1/3은 관계 요로에 무마비조로, 1/3은 국민방위군 간부들의 유흥비로 소비 되었다. 특히 이 사건은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국회 내에 자기를 지지하는 정치세력을 만들려고 70명의 신정동지회에 정치자금을 지원한 데서 일어난 사건이다.

국민방위군 재정을 실질적으로 총괄한 부사령관 육군 대령 윤익헌[29]은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기생들에게 돈을 뿌리고 다녔다고 한다. 윤익헌 대령이 100여 일 동안 기밀비 명목으로 쓴 돈은 무려 3억 원이었다. 당시 국가기관이던 감찰위원회(지금의 감사원) 1년 예산이 3천만 원가량이었다. 그를 수사한 김태청 검찰관은 훗날 "윤익헌 대령이 돈을 쓰듯이 물을 써봤으면 했다."고 회고했다. 아무리 당시 부산에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물이 무척 귀했다지만 얼마나 돈을 펑펑 쓰고 다녔으면 저런 말이 나왔겠는가?

참고로 국민방위군 사건을 민간 업자와 일부 군인들의 연계로 벌어진 거대한 군납비리 사건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간혹 있다. 그러나 군납(軍納)[30]은 군에서 소요제기, 예산심사, 입찰 등등 과정을 거쳐 업자가 납품을 하면 대금을 지불하는 과정까지이다. 이 과정에서 비리가 벌어지면 그것이 군납비리인데 국민방위군 사건 전반에서 군납비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사실상 없다시피 했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대부분 민간업자까지 갈 필요도 없이 자기들이 부대 내 장부를 조작하고 예산과 물자를 횡령했다. 또 정부도 국민방위군이 살아남기 위해 최소한도로 필요한 쌀과 동계피복을 보급해 준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군의 물품과 예산을 어떻게 분배하고 사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 등은 군 내부의 군수(軍需: 군사물자) 분야이다. 군 예산과 군수물자를 횡령하여 마음대로 유용한 국민방위군 사건은 민간이 개입한 군납비리가 아닌 내부 군수비리라고 해야 한다. 실제로 책임소재가 파악되어 처벌받은 사람들도 전부 국민방위군 간부들이지 민간업자는 아예 없다.

6. 사망자 수

이승만 정부의 공식 기록에는 1,000~2,000명 사망이라고 했지만, 당시 소문으로는 5만 ~ 10만 명 가량이 죽었다고 했다. 중앙일보가 간행한 <민족의 증언>에는 대원 50만 명 중 20%가 병사 혹은 아사했다고 했고, 부산일보가 간행한 <임시수도 천일>에는 사망자가 5만여 명이라고 서술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이승만을 열렬히 찬양하는 유영익 교수조차 9만 명이 굶어죽고 얼어죽은 천인공노할 사건이라고 말했다.

당시 서민호 의원은 국회에서 "수천 명이 굶어 죽어 갔고, 귀환 장병들도 20%는 생명유지가 불가능하며, 80%는 노동이 불가능"이라고 발표하여 대내외 기관에서 인용하는 공식 자료가 되었다.

참여정부에서 조직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5만~ 8만 명이 사망했다고 추산했다. # 안타깝게도 구체적인 사망자 수는 정확하게 계측할 수 없다. 당시 국회조사에 따르면 사망자 상당수가 행려병자로 처리되었고, 약 100일 동안 각종 질병, 동상, 아사, 도주 등 이유로 전체의 40%에 달하는 27만여 명이 사라졌다. 과거사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그동안 다수 매장지가 개발되면서 유해가 발굴되었는데 전부 무연고자로 처리되었다.

참고로 미국 통계에 따르면 6.25 전쟁 내내 한국군 사망자는 14만 명 정도이다. #

다만 남정옥이 지은 <6.25 전쟁시 예비전력과 국민방위군>을 보면 당시 육군이 보도하고 발표한 사망자 1234명이란 수치가 맞고 나머지 실종자들은 중간에 집에 돌아갔다고 설명했다.[31]

이 사건을 다룬 재판조차 워낙 빨리 끝나 버리는 바람에 사건의 진상도 제대로 밝혀지지 못한 채 묻혔고, 오늘날까지 수수께끼로 남았다.[32]

7. 사건에 대한 책임 처벌과 정치적 영향

국민방위군의 참상이 곳곳에서 목격되어 사회 문제가 되었으나,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은 1951년 1월 20일 기자회견에서 "백만 국민병은 훈련을 받고 있는 중이다. 일부 불순 세력들이 국민방위군 편성에 여러 가지 낭설을 퍼뜨리고 있음은 유감이다."라고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려 했다. 또 국회에 출석한 국방부장관 신성모도 국민방위군 사건의 진실에 대해 묻는 국회의원들을 향해 "제5열의 책동에 동요하지 말기 바란다."라고 사건을 왜곡했다. 여기서 신성모가 언급한 '제5열'이란 첩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한국 전쟁 당시에는 곧 북한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다시 말해 신성모는 국민방위군이 굶주리고 죽어간다는 이야기가 모두 '북한이 퍼뜨린 유언비어'라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33]

김윤근과 신성모가 이런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국민방위군 사건을 숨기려 했던 데에는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 둘 다 이승만이 총애한 사람들이라는 것. 김윤근은 씨름꾼 출신으로 일제 때 일본군 사병으로 복무하다가 해방이 되자 이승만에게 총애를 받아 6.25를 전후하여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국민방위군 사령관이 되었다. 신성모는 이승만의 말이 끝나면 눈물을 흘려 '낙루장관'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이승만에게 아부를 다하여 역시 총애를 받았다. 그래서 국회가 국민방위군 사건을 문제삼아 신성모의 파면을 요구하자 이승만은 "강을 건너다가 말을 바꾸어 탈 수 없다!"라고 거부하며 신성모를 감싸려 했다.[34]

하지만 국민방위군 병사들이 굶어 죽고, 병 들어 죽고, 얼어 죽거나 도망쳐서 사태의 진상을 말하는 경우가 워낙 많다 보니 아무리 김윤근과 신성모가 거짓말을 늘어놓아도 국민 여론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건 수사가 진행되어 관련자들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하지만 1951년 5월 6일 1심 재판에서 선고된 형량이 너무 낮았다. 연루자 16명 중 실형 4명, 파면 10명, 무죄 2명이었다. 사령관 김윤근에게는 무죄가, 부사령관 윤익헌에게는 고작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하였을 뿐이었고 나머지에겐 고작 징역 1년 6개월만 선고하였다. 당시 재판장은 국방부 정훈국장인 이선근이었는데 김윤근, 윤익헌과 이미 잘 아는 사이이기에 공정한 재판이 될 수 없었다. 재판 과정에서도 김윤근, 윤익헌은 반성은커녕 잘못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였다.

국민들은 판결을 보고 격렬하게 재판을 규탄했고, 정부 불신이 더욱 심해졌다. 특히 신성모와 김윤근를 비판하는 여론이 극에 달했다. 이승만은 이에 거창 양민 학살사건 등 책임을 물어 1951년 5월 5일 신성모를 국방장관에서 경질했고 후임으로 서둘러 5월 7일 이기붕을 장관에 임명했다. 또한 5월 14일에는 부통령 이시영이 작금의 사태에 대해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고 물러났을 정도였다. 6월 23일에는 육군참모총장정일권에서 이종찬으로 교체하였다.

이렇게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 김윤근은 1951년 5월 17일에 구속수감되었고 합동수사단은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 부사령관 윤익헌, 재무실장 강석한, 조달과장 박창원, 보급과장 박기환, 군수처장 김희, 회계과장 장의두, 회계과장 보좌관 노용식, 10단장 송필수, 15교육대장 박철, 27교육대장 임병언 등 11명이 고등군사법원으로 송치되었다.

7월 5일부터 재판이 시작되었다. 군사재판은 비공개가 원칙이지만 국민들의 정부 불신을 해소한다는 명목으로 일반인에게 공개하였다. 몰려든 인파를 위해 교정에 스피커까지 설치했고, 국방부장관 이기붕, 최경록 헌병사령관, 김석원 장군, 그리고 합동수사본부장 김창룡까지 방청을 나왔을 정도였다.

고등군사법원에 송치된 11명 중 군수처장 김희와 회계과장은 빤스런하여 실종 상태였고 회계과장 보좌관 노용식은 파면되었다고 그냥 넘어가 결국 2차 재판에 회부된 인원은 8명뿐이었다. 재판부는 재판장에 병기감 심언봉 준장, 재판관에는 작전국장 이용문 준장, 감찰감 안춘생 준장, 군수국장 김형일 준장, 법무사 계철순 소령으로 구성되었다.

1951년 7월 15일 국민방위군 사건 재판정에서 증인으로 나왔을 때 한 답변이 걸작인데 위에도 언급한 김태청이 전 육군총장 정일권 소장에게 "(국민방위군사령관) 김윤근은 일등병 경험도 없는데 어떻게 하루 아침에 별을 달고 사령관이 됐는가?"고 묻자 정일권은 "이 대통령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했을 뿐이다."라고 답변하였다. 검열관으로 참석했던 김석원 장군은 이에 하도 어이가 없어서 "이봐! 대답이 그게 뭐야! 당장에 계급장을 떼어버려!"라고 끼어들어 버럭 외쳤다. 당시 정일권의 계급은 육군 소장, 김석원은 육군 준장이었다. 어찌 보면 하극상이라 한때 징계설이 나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과거 정일권은 겨우 만주군 육군 대위, 김석원은 일본 육군 대좌 출신으로 사실 국군 이전의 군경력[35]은 김석원이 한참 대선배였다. 사실 김석원이 미 군사고문단과 불화가 없었다면 커리어가 가장 좋던 그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따라서 그냥저냥 무마되었다.

고등군사재판은 논란이 상당히 많았다. 동일한 범죄를 재심하는 것은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느냐고 법리적인 문제가 제기되었다. 신임 이종찬 총장은 고심 끝에 적용법이 바뀔 경우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해당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국방경비법이 아닌 비상사태하의범죄처벌에관한특별조치령으로 적용법을 바꾸도록 지시하고 재심을 명하여 7월 19일 국민방위군의 주요 간부 5명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리고 당시 사령관 김윤근을 장인인 신성모가 빼돌린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에, 이들은 대구 근교 야산에서 8월 13일공개처형되었다. 이렇게 이례적인 조치가 반복되었다는 점에서 그 자유당 정권에서조차 이 사건이 얼마나 심각하게 여겨졌는지 알 수 있다.[36] 그 결과 이승만 다음 세력자였던 신성모가 세력을 잃고, 사건 관련자들을 엄벌하여 인기가 급상승한 이기붕이 후계자로 부상했다.[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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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8월 13일 국민방위군 사령관 외 5명에게 총살형을 집행한 순간이다.

처형된 자는 사령관과 보급 라인으로 사령관 육군준장 김윤근, 부사령관 육군대령 윤익헌, 재무실장 육군중령 강석한, 조달과장 박창환, 보급과장 박기환이다. 그리고, 대구 소재 제 10단장 송필수는 징역 5년을 받았지만,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뭐가 어떻게 된 지 모르겠는데 재판받은 8명 중에서 15교육대장 박철, 27교육대장 임병언은 선고도 받지 않고 그냥 넘어가서 선고는 무죄 송필수 포함 6명만 나왔다.

윤익헌 등이 횡령한 막대한 액수의 자금이, 단순히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지 않고 '더 높은 쪽'으로 흘러들어 갔다는 의혹이 당시에는 물론이고 현대에도 나온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횡령한 자금 중 적지 않은 액수가 신정동지회 등으로 흘러 들어갔고, 그 외에도 다른 '높으신 분들'의 호주머니에 들어갔을 것이라는 심증이 일부 있다. 하지만 관련자들이 신속히 총살형을 당해 버리는 바람에 이 돈이 얼마나 누구에게, 어떤 용도로 흘러들어갔는지는 추적할 수가 없다. 당시나 지금으로서도 납득이 안간다. 일단 횡령한 자금을 추적한 뒤 집행해도 늦지 않는데 무작정 처형된 이들이 바지사장[38]이고 실세는 따로 있을 수 있기에 신속히 처형해 이들 선에서 끝났다고 밖에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이 사건을 처음으로 수사했던 101헌병대장 송효순(宋孝淳, 당시 중령)은 "횡령한 수십억 원의 행방이나 용도에 관한 이야기는 당시의 관련자들이 대부분 현존하고 있어 밝히기가 곤란하군요. 다만 돈이 흘러간 곳이 아주 광범해서 각계의 요로에 거의 다 미쳤다는 것만은 말할 수 있지요. 결과적으로 그 죄상은 천인공노할 만했습니다. 조사 결과 사령관 김윤근 준장이 그 돈을 횡령해서 개인적으로 축재한 것은 별로 없었어요."라고 밝혔다.[39] 21세기에는 관련자들이 대부분 사망했지만 송효순이 이 증언을 한 1970년대 초반(1972년 중앙일보 연재)만 해도 국민방위군 사건 관련자들이 대부분 시퍼렇게 두 눈 뜨고 살아 있던 상황이었고, 개중 일부는 지역 유지나 고위급 장교로 활동하는지라 소송으로 해꼬지할 염려는 충분하기는 했다.

8. 해산

개요 부분에서 밝힌 대로 북한 점령 예상지역에 남은 청장년들은 북한군에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끌려갈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들을 강제로 후방의 안전한 장소로 이동시킬 필요 자체는 있었다.

이 시기에 중국 인민지원군 최고 사령관 펑더화이중국공산당 중앙 군사위원회에 "북한의 징병 문제가 아주 이상하다. 16~45세 남성들을 모두 징병하고 있다. 대부분은 밥조차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있다."는 전문을 보냈다. 즉 서울/경기 일대의 청장년들을 국민방위군을 강제로 다 끌고 가지 않았다면 북한에 끌려갈 상황. 결국 북한 점령 예상 지역의 청장년들의 소개라는 목적은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또 하나의 목적인 국군의 병력자원 확보 측면에서는 대실패였는데 이는 국민방위군은 국군이 병력자원으로 생각한 징병예정자들을 제외한 사람 중에서만 뽑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국군의 병력이 줄어들면 징병예정자들로 보충했고 남한 내 징병 가능 대상인 200만 명을 무장시킬 장비도 없었기 때문에 국민방위군이 국군에 들어갈 일은 없었다.

이에 1951년 1월 15일 국회에서 최초로 문제가 제기된 이후 2월 17일 36세 이상, 3월 15일 서울 재탈환으로 전세가 안정된 게 확실해지자 동월 25일 26세 이상, 이후 국민방위군 사건이 심각해지자 동월 30일 국민방위군 전원이 차례로 소집해제되었다. 이후 4월 30일 국회는 국민방위군 폐지법안을 통과시켰고, 5월 12일 국민방위군 폐지법이 정식으로 공포되면서 국민방위군은 법적으로 완전히 해체되었다.

한편 국민방위군을 관리하는 국방부 국민방위국은 5월 5일자로 해체되었는데 동시에 예비 제 5군단이라는 것을 창설했다.[40]

초대 군단장은 군번 1번 외길인생 이형근 소장이었고 당시 국민방위국 국장이었던 김종갑 준장을 부군단장에 임명하였다. 예하 부대로 제101사단(마산), 제102사단(통영), 제103사단(울산), 제105사단(창녕), 제106사단(여수)이 있었으며 예하 101연대~117연대까지 각 3개 연대씩 배정했다(중간에 4가 들어가는 연대는 공석). 이 때는 향토방위, 치안 확보, 잔비 소탕, 신병 수송업무를 수행하였다.

101근무 사단은 미1군단 지원, 103근무사단은 미10군단 지원, 105근무사단은 미9군단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100근무여단은 동부전선의 한국군 1군단, 200근무여단은 서부전선의 한국군 2군단을 지원하였다.

이들은 군번 앞에 영문자 R이 붙은 군번을 받아 일명 'RO' 군번으로 불린다. 제5군단은 동년 11월 1일 예산 문제로 해산되고 지원받는 부대에 배속되어 노무부대 체계로 전환되었다. 한국군에서는 이들을 '지게 부대'[41]라고 불렀고 UN군은 지게가 알파벳 A자처럼 생겼다고 해서 'A Frame Army'라고 불렀다.

전쟁 기간 동안 노무자 9만 명이 RO 군번으로 동원되어 지게를 들고 군수품과 부상자들을 나르며 헌신하였다.(근무부대 소속이 아니었던 노무자까지 합치면 약 30만 명) 백마고지 전투에서는 죽을 힘을 다해 군수품을 갖고 산 꼭대기까지 올라갔는데, 막상 도착하니 병사들이 다 죽어버려 대신 수류탄을 던지며 싸우는 등 준 군인으로 역할을 하였다.

이들 지게부대 중 7909명(장교 3288명)은 국민방위군 출신이었다. 1953년 7월 1일에는 새로운 군번을 부여받아 현역으로 편입되었는데 R자가 떨어져 나간 제대로 된 군번이었다. 이때 방위장교 3395명과 방위사병 5486명이 현역 군번을 받았다.(R군번 / 현역 군번을 둘 다 받은 사람은 3101명)

국민방위군으로 끌려간 68만 명 중 RO 군번이든 현역이든 합쳐서 7909명만 군번이 있어 쥐꼬리만한 참전자 혜택이라도 받을 수 있었고 나머지는 군번이 부여되지 않아 병적기록표가 없어 복무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다.

9. 여담

6.25 전쟁 기간에 한국 군인들이 후방에서 추위에 굶주리다 처참하게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다면 거의 여기 끌려갔다고 보면 된다. 당시 국군의 병참이 형편없긴 했어도 국민방위군 사건처럼 형편없지는 않았다. 심지어 북한 의용군에 끌려가도 밥은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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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거창 양민 학살사건에 이어 국민방위군 사건이 터지자 이시영은 이승만 정권에 크게 실망하여 정권을 비판하며 국민에게 전하는 글을 남기고 부통령직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나는 정부 수립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관의 지위에 앉은 인재로서 그 적재가 적소에 배치된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한 데다가 탐관오리는 가는 곳마다 날뛰어 국민의 신망을 상실케 하며, 나아가서는 국가의 존엄을 모독하여서 신생민국의 장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으니 이 얼마나 눈물겨운 일이며 이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닌가.
그러나 사람마다 이를 그르다 하되 고칠 줄을 모르며 나쁘다 하되 바로잡으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것의 시비를 논하는 그 사람조차 관위에 앉게 되면 또한 마찬가지로 탁수오류에 휩쓸려 들어가고 마니 누가 참으로 애국자인지 나로서는 흑백과 옥석을 가릴 도리가 없다. 더구나 그렇듯 관의 기율이 흐리고 민막(民瘼)이 어지러운 것을 목도하면서도 워낙 무위무능 아니하지 못하게 된 나인지라 속수무책에 수수방관할 따름이니 내 어찌 그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한 나인지라. 이번에 결연코 대한민국 부통령직을 사임함으로써 이 대통령에게 보좌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씻으려 하며 아울러 국민들 앞에 과거 3년 동안 아무 업적과 공헌이 없었음을 사과하는 동시에 일개 포의로 돌아가 국민과 함께 고락과 생사를 같이 하고자 한다.
시인 신동엽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 또한 이때 차출되었다. 신동엽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민물 를 잡아 생으로 먹었다가 간디스토마에 감염되었고 그게 결국 간암으로 악화되어 1969년에 38세의 이른 나이로 요절하게 되었다. 정진석 추기경은 여기서 살아남아 다니던 서울대학교 공대를 그만두고 신학교에 입학하여 사제의 길을 걸었다.

당시 한 의원이 실상 파악을 하러 갈 때 어느 방위군 병사가 거지꼴로 가마니를 뒤집어쓴 채 어디론가 가는 모습을 보고 어디로 가냐고 묻자 이 병사는 악에 받쳐 "김일성한테 간다, 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북한으로 튀면 더 잘 먹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니 당시 상황이 나온다. 그리고 이 말은 어느정도 사실이었다.[42]

학자에 따라서는 국민방위군 자체가 북한의 공격을 막는다는 1차 목표 이외에도 서북청년단과 이승만 친위세력이 군과 별도 조직으로서 무장하는 단체를 가진다는 목적이 있었다고 보기도 하나 친위대에 이렇게 예산 배정과 보급을 개판으로 한다는 건 있을 수 없으므로 큰 설득력은 없다.[43]

당시 육군 통역 장교였던 리영희 소령은 이때 참상을 목전에서 봤다. 리영희의 주장에 따르면, 군사고문단 미 육군 장교와 함께 무리하게 보급품을 빼서 그들을 도왔다고 한다. 이 사건을 두고 리영희는 "6·25 전쟁 죄악사에서 으뜸가는 인간 말살 행위였다. 이승만 정권과 지배적 인간들, 그 체제 이념의 적나라한 증거였다."고 회고하였다. # 이 사건은 이후 리영희의 사상체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최종 책임자는 당시 육군참모총장 정일권인데, 정일권의 한국전 회고록이나 이후 최종판 회고록이 대단히 시시콜콜한 이야기들까지 수록한 반면 이 사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다.

훗날 조선일보 논설고문이 된 홍사중의 회고에 의하면 운이 좋아서 당시 진주의 국민방위군 교육대에서 군수처 경리 담당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국민방위군 사령부에서 감사가 와도, 서류는 절대 들춰보지 않고 교육대장 및 군수처장의 접대만 받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날 군수처장이 수사가 시작되었으니 같이 도망가야 한다면서 직인까지 찍힌 귀향증[44]을 들고 왔다고 한다. 더 기막힌 건 홍사중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경리 담당에서 군수처장 보좌관으로 승진되어 있었다는 것.

한 마디로 이건 일본군이나 독일 국방군미군 또는 소련군 포로에게 했던 짓거리를 자국의 예비 병력 대상으로 저지른 꼴이다. 예를 들자면 독일군이 독소전쟁에서 사로잡은 소련군 포로들을 식량도 지급하지 않고 혹한에 수백 km를 걷게 하여 포로 사망율이 30%에 달하게 한 일이나[45] 일본군의 유명한 죽음의 행진이 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애초부터 적국 포로를 절멸시키려는 의도로 실시한 것이고 여기에 책임이 있는 군인들은 전쟁이 끝난 후 전범재판에 넘겨져 사형과 같은 엄벌을 받았다, 그러나 이 국민방위군 사건의 관련자들은 적군 포로도 아니라 자국군에게 이런 짓을 하고도 종전 후에 잘 먹고 잘 살았으니 이들이 얼마나 극악무도했는지 알 수 있다.

보도연맹 사건이 잠재적인 적이라 생각한 특정 계층 국민을 상대로 제노사이드를 실행한 사건이라면 이건 자국의 예비 병력을 관리할 의무를 방기한 끝에 제노사이드에 필적하는 참사가 벌어진 셈이다. 도현신 저서 <국가의 배신>에서는 "중공군이나 북한군이 아군을 병사나 노역부로 쓰지 못하도록, 그들이 점령할 것으로 예측되는 지역들에서 미리 청장년들을 포섭하는 것"이 국민방위군의 진정한 목적이었으리라 추정했다. 이미 북한 점령 시기 의용군으로 강제징집한 전례가 있었고 국민방위군의 창설 목적 역시 자국의 예비 병력을 후퇴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국민을 자국의 예비 병력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적의 예비 병력으로 봤다는 확대해석은 편파적인 것이다. 물론 국회에서는 예산까지 배정했고 이것은 군수비리 때문에 제대로 집행되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지만, 결과만 보면 그렇게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전혀 관리나 신경이 없었다.

그 외에도 울릉도에서는 국민방위군 간부가 월권 행위를 해서 민폐를 끼쳤다. 여기서 기자와 담화하는 국민방위군의 박경구백의사의 간부이자 독립유공자이다. #, #

1955년에 정부가 한 번 신문광고를 내서 국민방위군 사망자 신고를 받아 331명을 인정해 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때 전사통지서나 그 밖의 서류가 있어야만 신고를 접수해 주었는데 과연 국민방위군 소집자들 중 몇이나 제대로 된 서류를 받았을는지...[46]

파일:attachment/국민방위군 사건/국민방위군_희생자들을_위한_추모비.jpg

2002년에야 경북 영천[47]에 국민방위군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를 세웠다.

밀리터리 실패열전 2권에서 다뤘다.

2010년 활동을 종료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 사건에 대한 조사보고서를 내면서 정부의 실태조사와 보상 및 사과, 위령제, 유해 발굴 등을 요구했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10. 대중매체

야인시대 87회에서는 이승만이 중공군 개입 소식을 듣고 방위군 사령관을 임명해야겠다며 혼잣말할 때 처음 언급되며 88화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해 보고를 받고는 이승만이 분노하며 일갈하는 장면이 나온다. # 물론 신성모는 필사적으로 발뺌하려 했지만 정황이 너무 드러난 게 명확한지라... 그리고 이 이전(87화)에 국민방위군 사령관을 김두한에게 맡아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나오나 김두한은 '저는 무식하고 아는게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맡기십시오.' 하면서 이를 거절하였고, 이는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가 된다. 물론 역사적으로 보면, 김두한은 당시 고려 대상에도 포함되지 않으니 이 사건과 김두한을 엮은 것은 그냥 주인공이라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다못해 내무부장관직을 제안 받았다는 것은 김두한 스스로의 주장이라도 있는데, 국민방위군 사령관 드립은 어디서 나왔는지 불명이다.

소설 태백산맥에도 자세히 나온다. 간략하게 서술된 이 문서보다 그 참상이 백 배는 더 자세하다. 아예 챕터명 하나가 '죽음의 대열, 해골의 대열'인데 실제 당시에 이렇게 불렸다고 한다.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병 들어가는 사람들, 지나가는 민가에 끼치는 엄청난 민폐, 그 처우에 분노하는 몇 안 되는 올바른 군인과 뒤늦게 해산이 발표되자 징집된 이들은 이동 수단도 없고 돌아갈 기력도 없이 그냥 그대로 수천수만 단위의 거지떼가 되어버리는 비극적인 결말까지 묘사되어 있다.

태백산맥 9권에서는 이 '국민방위군 사건'을 은근히 빗대 국회의원과 군 장교가 서로 "전쟁 물자만 뒷대주면 우리나라 젊은 놈들이 얼마든지 있지 않소. 죽어도 하나도 아까울 것 없는 천한 것들이 아직 얼마든지 득시글득시글한데..."라고 주고받는 대사가 있다. 물론 저자의 창작이지만, 사실 저런 대사를 고위층들이 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정도로 6.25 전쟁 당시 권력층들의 인명경시 풍조는 매우 강했다.
파일:1293939495.jpg
당시 마카오에서 수입한 원단으로 만든 양장을 입은 부유층을 비꼰 포스터다. "마카오 신사, 숙녀여! 양심이 있나?"라고 적혀있다.
대표적인 예로 이승만 정부 시절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채병덕 장군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맥아더와 만난 자리에서 "한국 청년 200만 명을 동원하여 훈련시키면 간단히 이길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발언을 했다가 맥아더로부터 무능력자로 낙인찍혀 결국 해임되었다. 채병덕의 발언이 왜 문제냐 하면 단순히 많은 병력을 동원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진 않기 때문이다. 병력들한테 알맞게 식량과 물자를 제공하지 못하면 국민방위군 꼴이 나기 때문이다. 113만 대군을 동원했던 수나라가 왜 훨씬 병력이 적은 고구려한테 패배했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왜 가장 병력을 많이 동원한 러시아가 그보다 병력이 적은 독일한테 참패했을까.

이들이 대부분 일본에 빌붙어 다른 이들을 착취해 호의호식하며 떵떵거리며 살던 작자들임을 추가하면 더욱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11. 다른 나라의 경우

나치 독일에선 전쟁 후반에 이르러 소련군과 연합군에게 탈탈 털리자 국민돌격대라는 이름으로 민간인들에게 일부를 제외하곤 엉성한 무기와 보기에만 그럴싸한 완장을 달아주어 전선으로 내몰았다.

일본 제국은 미군의 본토 상륙작전에 대비해 국민의용대를 창설하여 1억 전국민 옥쇄 전법을 실행하려고 했다.

12. 기타

13. 관련 문서

1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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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 편 1: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2] 일본군 삼대오물무타구치 렌야가 지휘한 사건으로도 유명하다.[3] 1951년 2월 총무처(현 행정안전부) 생산문서[4] 1951년 국회 제2국민병비상대책위원회 생산자료를 토대로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추정[5] 참고로 6.25 전쟁의 국군 전사자가 13만 7899명이다.[6] 이 사람은 이승만을 가리켜 세종대왕과 맞먹는 인물이라고 찬양할 만큼 열렬한 이승만빠다. 링크 그 이승만빠조차도 저 사건만은 절대로 옹호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막장이었다는 것이다.[7] 사실 과거 유영익이 이승만에게 부정적이었던 이유가 바로 국민방위군 사건 당시에 해당 사건을 접하면서다.[8] 서북청년단 경남본부 선전부장 겸 중앙집행위원이었으며, 말년에 재건 서북청년회 총재와 대한민국 건국회 명예회장을 역임했다.[9] 이와 함께 이 사건에 서북청년단 출신이 가담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기술할 정도였으면, 이승만을 숭배하는 극우단체 회원 입장에서도 국민방위군 사건은 도저히 옹호의 여지가 없는 대참극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0] 거창 양민 학살도 지시한 정황이 있고 전쟁 전 예비군 해체도 지시한 사람이며 한강철교 폭파까지 지시하고 도망쳤으며, 그 사실을 본인의 상관인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아무 일도 없고 모두 잘 되가고 있다는 식으로 보고하여 사건을 은폐해 왔다. 결국 지금 와서는 이승만에게 그 모든 책임이 떠넘겨져 혼자 욕만 먹는 신세. 그 짓을 저지르고도 장관만 그만두었을 뿐, 6.25 이후에도 10년 가까이 좋은 자리를 해 쳐먹다가 4.19 혁명이 나자 그제서야 뇌출혈에 걸려 한 달 만에 죽었다.[11] 지급할 수 있는 장비에 한계가 있으니, 60만 명 전부를 한 번에 투입하지는 못했다.[12] 손이 아파서 하루에 200장 정도만 만들었다.[13] 출처: 부산일보사, 『비화 임시수도 천일』(상), 1983, 160쪽[14] 병역을 필하지 않은 17세부터 40세까지의 남성. 1949년 8월 6일 공포된 병역법에 규정되어 있다. 당시의 제2국민병역은 현재의 병역준비역전시근로역에 해당하며, 당시의 제2국민병역에 해당하는 역종은 1957년에 징병처분을 받지 않은 자에 한하여 제1국민병역으로, 1962년에 제1국민역으로 바뀐후, 2016년에 병역준비역으로 바뀌었다.[15] 해방 직후 김윤근과 윤익헌은 지청천 장군이 만든 대동청년단 소속이었다. 대한청년단으로 통합 직후 보직은 이승만 총재, 신성모 단장, 윤익헌 사무국장, 김윤근 감찰국장이었다.[16] 국민방위군 자료가 사라져서 당시 국민방위군 소집자가 구두로 00교육대로 갔다는 식으로 증언한 자료 정도뿐이다.[17] 당시 중공군의 한만국경 월경을 불법으로 간주하였다. 인민해방군이 아닌 중국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의용군인 양 눈 가리고 아웅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 탓에 중공 정권은 꽤 오랫동안 UN에서 침략자로 규정되었다.[18] 남한 출신자에 대한 강제징집인 데다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자원입대하지 않은 이상 북한 정권을 진심으로 따를 리는 없었다. 따라서 강제징집된 청년들이 탈영하여 다시 국군에 입대하는 일도 빈번했다. 특히 인천 상륙 작전 때 투입된 인민군 육군 병력 다수가 남한 징집자들이어서 탈영 비율이 매우 높았다.[19] 앙금은 해방 직후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 시절 민중을 가까이에서 억압한 것은 일본 경찰이었다. 당연히 높으신 분들보다 일선 순사들에 대한 국민들의 공포와 증오는 굉장한 것이었다. 오죽하면 '순사 온다'는 말이면 우는 애가 울음을 그친다는 소리까지 있었으니... 문제는 미군정이 들어서며 내부 실정을 아는 경력자인 순사들이 그대로 미군정 경찰로 고스란히 채용된 것이다. 즉, 왕년의 친일파가 경찰이 돼버린 셈이다. 일본 순사들이 대한민국 경찰 제복을 입고 거들먹대는 꼴에 분통이 치민 이들은 모조리 국군, 특히 육군으로 입대했고 이후 경찰과 육군은 총격전(!)을 주고받을 만큼 험악한 사이가 되었다. 물론 국군에도 일본군, 만주군 경력자들이 즐비했고 지금 시선에서야 둘 다 친일파라고 하겠지만 일본 육군, 만주군의 하급장교나 하사관에 불과한 이들이 대민 마찰을 일으킬 일은 적었다. 따라서 당시 관점에선 일본군, 만주군 경력자는 친일파로 안 봤다. 당장 '경찰 놈들이 부대로 쳐들어온다'는 헛소문으로 부대원을 선동하며 벌어졌던 여수·순천 10.19 사건의 주역인 남로당 김지회조차 왕년의 일본 육군 소위였다.[20] 내무부의 비협조 말고도, 전시 상황인 탓에 진짜로 양곡이 없어서 아예 면장, 읍장들이 텅 빈 양곡창고를 구경시켜 주는 일도 즐비했다.[21] 4.19 혁명 이후 민의원 역임.[22] 이 당시 북한 지역으로 밀고 갔던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은 중공군과 싸우는 한편 동장군하고도 싸우고 있었다.[23] "실제 소집된 인원은 적게는 80만에서 많으면 100만여 명까지 보고 있기도 하다." 《밀리터리 실패열전》 2권 25쪽.[24] 김윤근이 일제 강점기 말기에 일본군 사병을 한 적은 있다. 출처: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2004년 7월 9일 발행/ 205쪽.[25] 참고로 대한청년단 간부들은 국민방위군의 전신에 해당하는 청년방위대에도 참여했고 여기서도 예산을 횡령했다.[26] 부피 720mL, 쌀 1되를 보통 1.6kg으로 치는 것을 생각하면 640g[27] 대한민국 공무원의 월급이 평균 이상으로 책정되는 것도 부정의 동기를 없애기 위해서다. 현대 멕시코 경찰이 그토록 심하게 부패한 이유도 월급이 턱없이 적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아전들이 부패한 것도 녹봉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고, 6.25 이후 초기의 한국군이 부패한 이유도 월급이 턱없이 적었기 때문이다.[28] '영양재개증후군' 으로 불리는 증상으로, 장기간 굶다가 갑자기 기름지고 영양가 높은 음식이 들어가면 체내의 소화능력이 떨어진 상태라 제대로 소화시키질 못해 그대로 게워내는 것이다. 그만큼 징집 장병들이 장기간 굶주린 기아 상태였다는 말이기도 하다.[29] 지청천 휘하의 한국광복군 출신으로 일단은 독립운동가이다. 대한청년단 등지에서 경리나 회계를 맡아본 경력이 있었는데, 어디선가 돈을 구해오는 능력이 탁월했다고 한다.[30] 인가를 받은 민간업자가 군에 필요한 물자를 납품하는 것.[31] 다만 저자 남정옥은 6.25 서적을 다수 집필하긴 하였지만, '우남이승만연구회 이사'로 이승만 대통령의 군사 외교, 국가수호노력 등 책을 제작하는 이승만 숭앙주의자다. 이 문서만 해도 김윤근 방위사령관이 신성모 장관의 사위이자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다는 것에 중점을 두었는데, 책에는 그런 내용은 일절 없고 김윤근 사령관과 윤익헌 부사령관은 지청천의 대동청년단 출신이라며 지청천과 국민방위군 간 관계에 더 주목했다.[32] 이런 사항은 국민방위군만큼이나 참혹했던 보도연맹 학살사건도 마찬가지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5.16 군사정변을 일으키면서 국방부에 보관된 보도연맹 학살 관련된 자료들을 모두 없애 버리는 바람에 보도연맹 학살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도 제대로 알 수 없다.[33] 출처: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204쪽.[34] 출처: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205쪽.[35] 김석원 장군은 중일전쟁에도 참전하였다.[36] 개요에서 언급했던 친이승만 역사학자와 서북청년단 단원조차 이 사건은 두둔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37] 훗날의 일로 이미지가 좋지 않아 그렇지 당시만 해도 이기붕은 유능한 인물로 평가받았다.[38] 바지사장의 어원이 총알 받이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39] 출처: 중앙일보사/ 민족의 증언 4/ 111쪽.[40] 1950년 7월 청천강 전투 패전으로 2군단(장 유재흥)이 해산되고, 1951년 5월 26일에는 현리 전투의 적전도주로 3군단(장 유재흥)이 해산되어 주문진의 1군단(장 백선엽)만 남은 상태였다.[41] 불행히도 이들은 정식 군인으로 인정을 받지 못해서 징집 영장이 나와 또 군대로 끌려가는 일을 겪기도 했다. 군대 두 번 가는 일을 몸소 겪었던 셈이다.[42] 당시 이남 지역은 주전투 지역이라 엄청난 피해로 잿더미가 되었지만, 이북 지역은 이남에 비해 전투 규모와 피해가 작았고 일제강점기 시기 일본 제국이 독립 후 남기고 간 중공업 + 발전 시설을 기반으로 하여 단기간에 경제성장할 수 있었고, 소련이 대한민국을 공산 국가로서 우방국으로 키우기 위한 지원을 펼쳤기 때문에 남한과 북한의 전력차는 압도적으로 커졌으며, 70년도에는 아시아에서 3번째로 컬러 TV를 방영할 정도로 황금기를 맞이했었다. 국민들은 배급제라 쌀, 의류, 신발, 간장, 소금, 설탕 등을 배급 받으며 직장에서 일하고 결혼도 현재 기준으로도 일찍 하는 편이며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았기에 남한에서 살기 어려워 월북하는 이들도 있었을 정도다. 해방 직후엔 남한에서 생산하는 전력이 터무니없이 작아 북한에게 원조받아야 했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게 일제가 만들어놓고간 당시 아시아 최대 규모의 수풍댐이 이북 지역에 있었으니 이걸로 당시 한반도 대부분의 전기 공급이 가능했으니. 애초에 6.25 전쟁도 북한이 소련의 뒷배와 자신의 체급을 믿고 남한에게 박치기를 시전한 점도 있다. 하지만 이후 소련의 체르노빌 원자력 사고로 인한 소련의 지원 감소와 소련의 붕괴가 일어나고 김일성을 사실상 몰아내며 김정일이 권력을 잡으면서, 김정일이 일으킨 여러가지 실책 + 대홍수로 인해 북한은 고난의 행군 시기를 맞게 되면서 끝도 없이 추락하게 된다.[43] 에티오피아 제국의 메할 세파리, 케부르 자바나(황실 근위대), 제3제국슈츠슈타펠, 중화민국 국민정부장제스 휘하 중앙군이나 일본 제국의 황실 근위사단 전부 넉넉한 봉급과 복지 혜택을 받으며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무기로 무장한 정예군이었다. 단, 슈츠슈타펠은 최고 지도자 하인리히 힘러가 중간에 농간을 부려 좋은 장비를 먼저 지급받긴 했지만 국방군에 비하면 정예군은 아니었다.[44] 당연하지만 이런 건 전시 상황에서 쉽게 구할 수 없다![45] 포로는 필요없다 참조.[46] 과거사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한 국민방위군 소집자는 분명히 교육대에서 군번을 부여받았는데 기록이 전혀 남지 않았다.[47] 거창 양민 학살사건을 일으킨 제11기계화보병사단이 창설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