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8-22 09:05:40

리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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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하게 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 오른쪽 날개와 왼쪽 날개의 크기와 모양과 힘이 꼭 같다. 우리 인간들이 모여서 사는 사회도 마찬가지다. 우와 좌는 동격이고 동등하고 평등한 것이다. 서로 보완적이고 보강적이다.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 그런 관계가 아니라, 둘이 함께 서로 동시에 있어야 인간사회는 안전하게 진보할 수 있다."
"새는 좌와 우의 두 날개로 난다."

1. 개요2. 평가3. 비판 및 반박
3.1. 문화대혁명 미화 문제
3.1.1. 반박 1
3.2. 카다피에 대한 옹호
3.2.1. 반박 2
3.3. 대한민국은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가 아니다?
3.3.1. 반박 3
3.3.1.1. 재반박
3.4. 기타
3.4.1. 반박
3.5. 총론
4. 조선일보와의 관계5. 저서6. 편역서
6.1. 리영희 평전

1. 개요

리영희(李泳禧, 1929년 12월 2일 ~ 2010년 12월 5일)는 대한민국의 언론인, 언론학자, 사회운동가이다.

본관은 평창이다. 평안북도 운산군 출신이다. 조선총독부 농림국의 문관으로서[1] 평안북도의 영림서에서 근무하는[2] 리근국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의주사범학교와 경성공립공업학교(현 서울공업고등학교) 중 후자를 택하게 되어 경성에서 고학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1950년에 국가에서 학비와 숙식비를 전액 부담하는 국립해양대학(현 한국해양대학교)를 졸업하였다. 항해 실습을 하다가 여순사건을 목격한 적이 있다고 한다. 진압군 병력을 수송하는 선박에서 항해 실습을 하다가 여수항까지 가게 되었다고.

항해학을 전공했으나 수업은 영 재미가 없었고, 영문학 작품에 심취하여 다수의 책들을 섭렵했다고 자술했다. 이후 경북 안동에 있는 안동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 중에 6.25 전쟁이 발발해 그 해 군에 자진 입대한 뒤 전방에서 3년 반, 전후 후방에서 3년 반 총 7년간 복무했다. 국군 장교로 임관해 통역 업무를 맡았다고 한다. 하지만 전시에 미군 고위 장교들은 사적으로 통역관들을 데리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 고문관들과의 사이는 데면데면했다고. 오히려 여자들을 부대로 들여보내 재미 좀 보려는 고문관들의 태도와 한국인을 무시하는 모습에 격분해 권총결투를 신청한 적도 있다 한다. 그리고 이 때 목격한 민간인 학살(11사단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 각종 제1공화국의 악행과 각종 부패상을 체험한 것은 그가 훗날 진보성향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상하였다.[3]

포병이나 공병, 보병과는 달리 의무나 통역같은 특수보직은 인원이 적었기 때문에 장기복무를 해야만 했다고 한다. 후방에서는 미군 의료FM을 번역하거나 국군인쇄창에서 보병장교신분으로 재직했으며, 전훈을 인정받아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았으나 인사기록 부실로 누락이 되었고, 소령으로 제대 후에는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57년부터 1964년까지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를 지냈다. 5명 뽑는데 200명넘는 지원자가 몰렸는데, 그 중 앞의 4명은 전부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 출신이고 자기가 5등으로 들어왔다 한다. 1960년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언론대학원을 연수했다. 1964년 조선일보 외신부 기자를 거쳐 1965년부터 1968년 7월까지 조선일보와 합동통신 외신부장을 각각 연임했다.[4] 그러나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하는 내용의 사설들을 여러차례 기고한것이 문제되어[5] 중앙정보부로부터 반공법위반으로 구속되어버리고, 이후 68년 7월 조선일보를 퇴사.(말이 '퇴사'지 실상은 강제해직이었다) 1971년까지 합동통신 부장만을 지냈으며 위수령 등에 항의해 ‘64인 지식인 성명’참가로 강제 해직되었다.

1980년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로 반공법 2년형을 살고 출소하였다.

1972년부터 한양대 문리대학교 교수 겸 중국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하던 중 박정희 정권에 의해 1976년 해직되어 반공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지내고 1980년 3월 복직됐으나, 그해 5월 전두환 정권에 의해 다시 해직되었다. 1984년에 복직했으나 1985년 일본 도쿄대 사회과학연구소, 독일 연방 교회사회과학연구소에서 연구하고 1987년 미국 버클리대학교의 정식 부교수로 초빙되어 '평화와 갈등' 특별강좌를 강의하는 등 전두환 정권 내내 해외에 있어야 했다. 이후 귀국했으며 1988년 한겨레신문사 이사 겸 논설고문에 취임했다. 1995년 한양대학교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했다. [6]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었을 당시 리영희는 반전운동에 적극 나섰었다.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가 함락된 직후 열린 4월 12일 ‘국제반전평화 공동행동의 날’에 집회에 참여하여 미국의 이라크 침략은 미군의 바그다드 함락으로 개전 3주 만에 성공을 거둔 듯 보였지만 이후 더 큰 재앙들을 예고 할 것이라고 경고했었다. # #

2000년대 후반부터 간경변으로 투병하다 2010년 12월 5일 81세를 일기로 서울특별시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타계. 묘지는 광주광역시의 5·18 민주묘지(5.18 묘역)에 있다. [7]

중국의 사상가이자 작가인 루쉰(魯迅)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그를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다. 발언이나 저술한 글들을 보면 루쉰에 대한 존경심이 매우 진하게 나타난다. 특이하게 루쉰을 한국 한자음인 '노신'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에겐 그게 더 친숙했단다.

2. 평가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져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
리영희, 『우상과 이성』

리영희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기존의 권위주의 독재 정권 시절, 정권의 논점을 조목조목 반박. 한국 현대사에서 왜곡된 국제적 사실들을 밝히는 데 공적을 남겼다. 단적인 예를 들어 베트남 전쟁에 대해 그는 한국에서 '베트남 전쟁은 이념대립이 아닌 반제국주의 성향이 짙다.'고 최초로 정의내린 인물이었다. 후에도 베트남 전쟁 때의 대한민국 국군의 과오에 대해 사죄를 요구하기도 했으며 보수정부들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밖에도 단순한 반공논리만이 주입될 뿐 외부 정보가 거의 차단되었던 1970년대에 세계의 객관적 시각들과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소개하여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릴 수 있었다. 그리고 매카시즘을 조장하는 기존 방송이나 언론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중국일본과의 외교문제나 미국의 동북아 전략 등이 국가의 통제를 넘어 제대로 소개되면서 사람들에게 충격을 가하였던 것.

이 때문에 그의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1974년작)는 당시 많은 젊은이들에게 중요한 책으로 간주되었는데, 문재인이 가장 좋아한 책으로 꼽기도 했다. 2005년 KBS 1TV의 《TV 책을 말하다》에 출연했을 때 문화평론가 진중권이 같이 출연하여 과거의 자신에게 끼친 리영희 저작의 영향에 대해 강조하기도 했다. 이른바 유신시대와 5공 시대 운동권 대학생들의 '사상의 은사'였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 때문에 보수쪽 이들에게는 당연히 눈 밖에 나버리게 되었고, 이들은 그를 '빨갱이'라는등 인신공격을 맹렬히 퍼부었다. 다만 리영희 자신은 북한 정권에 대해서도 서슴없이 비판을 가했다. 단적인 예로 1998년에 방북해 고위직 인사들과 회담을 나눈적이 있었다. 리영희는 북한의 경직된 체제와 우상화를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북의 고위직 인사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비전향 장기수(비전향 장기수중에는 6.25 전쟁때 학살범들도 많다)에 대한 비인간적 처우와 문제에 대해서 '북한 당국의 잘못이 매우 크다'고 책임을 강하게 묻기도 했었다. 그러나 반공법으로 잡혀들어갔을 때 도저히 그를 공산주의자로 매도할 수가 없었던 것이, 이북 출신이긴 하지만 가족 모두가 한국 전쟁 이전에 남한으로 이주했고 한국 전쟁에 통역장교로 임관하여 전후까지 합쳐 7년 동안이나 직위에 있었던 예비역 소령인데다가, 비록 인사체계의 부실로 인해 없어졌지만 은성무공훈장까지 수여받은 터라 잡아낼 건덕지가 없었다. 결국 재판에서 11심까지 갔으나 1심에서 이미 당시의 정권으로부터 2년형을 때리라고 밀서가 온 터라 감옥에 부당하게 갇히게 되었다.[8] 정치범으로 서대문형무소 독방에서 모친의 부음을 듣게 된다. 이 때의 아픔을 바탕으로 <서대문형무소의 기억>에선 일제 시대 재소자들보다 더 열악한 처우를 비판하며 법조인들은 임관 전에 자기 집 냉장고에 하루라도 갇혀보라는 일침을 날리기도 했다.

김삼웅 독립운동관장이 아직 대상자가 살아있던 시기(2010년 4월 19일)부터 쓰던 평전이 있다. 다만 호평이 어느 정도 강한 것은 감안할 것. # 그는 리영희를 "한국의 소크라테스"로 평했다.

3. 비판 및 반박

그러나, 일부 보수인사들은 냉전기에 사상의 은사인 그의 역할은 인정하나, 과오도 상당히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과거 마오이스트를 자처했다가 뉴라이트로 전향한 안병직 교수 등이 그를 적극적으로 비판하며 시장주의를 강력히 옹호하였다. 그리고, 반박 항목들을 보면, 단편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어떤진단을 내려서인지 뭔가 성급하고 미래에 대한 혜안이 좀 부족해 보인다는 느낌 역시 지울 수 없다는 입장이 있고 현대에 있어 리영희가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가 미래 예측이나 사안에 대한 전반적인 분석의 부정확함 때문인 것은 분명하다.

다만, 해당 시대와 그 시대 한국 사회의 한계 때문에 정확한 판단이 어려웠던 점을 참작할 필요는 있다. 예를 들어, 리영희의 가장 큰 과오로 지적되는 '문화대혁명 옹호'의 경우, 문화대혁명의 전모와 실체가 거의 드러난 21세기 이후에 이를 비판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하지만 리영희의 《8억인과의 대화》가 쓰여진 것은 1977년이다. 그렇다면, 40년간의 시차를 감안하지 않고 두 입장을 동등하게 비교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또한, 리영희와 동등하게 비교될 수 있는 위치에 있던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의 다른 한국 학자들은 문화대혁명에 대해 어떤 의미있는 분석을 내놓았던가? 이는 결국 '대상에 대한 충분한 자료와 객관성을 가지고 내릴 수 있는 후세의 평가'와 '정보도 불충분하고 객관성도 확보하기 힘들지만 대상과 강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고, 후세의 평가의 기초가 될 수 있는 당대의 평가'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는 문제이다.
또한, '단편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성급하게 진단하여 미래에 대한 혜안이 부족해 보인다, 미래 예측이나 사안에 대한 전반적인 분석이 부정확하다' 고 말하지만... 당장 아래 비판 단락에서 볼 수 있는것처럼, 확대해석과 견강부회를 통해 억지로 논란을 만들다시피 한 카다피 문제를 제외한다면 리영희의 오류라고 할 만한 것은 문화대혁명에 대한 오판 하나뿐이며, 그나마도 리영희 개인의 오류라기보다는 서구진영의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진 세계사적 맥락의 오류였던 것.

그러나 세계사적 맥락이든 무엇이든 과오는 명백한 과오다. 제국주의, 우생학을 옹호했던 서구 지식인들이 "세계사적 맥락이 그러했으니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하면 과연 이렇게 어물쩍 넘어갈 수 있겠는가? 그 오판의 대상이었던 문혁이 수천만의 무고한 피를 제물로 삼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리영희의 오판은 더욱 비판 받아 마땅하다.

그렇지만 리영희가 보여준 다른 통찰들중에는 한국 현대사와 현대 사회에 대한 대중의 관점 자체를 전환했다고 할 만큼 강력한 것이 많다. 예를 들어 리영희가 제시한 사상적 틀인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같은 경우, 이제는 보수정당인 자유한국당 소속 정치인들까지도 즐겨 사용할 정도로 시대를 뛰어넘는 강력한 통찰을 제시하고 있는 것. 그렇다면, 주요 저서만 십여권에 각종 기사나 사설, 기고문까지 반생에 걸친 방대한 저작활동의 내용 중에서 틀린 것 딱 하나만 찝어내서 리영희라는 인물 자체가 '성급하고 혜안이 없었으며 전반적인 분석이 부정확했다'고 평가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 비판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물론 독자가 스스로 판단할 문제일 것이다.

3.1. 문화대혁명 미화 문제

리영희 교수는 마오쩌둥중국문화대혁명을 자신의 저서에서 지나치게 미화하였다.

대표작 《전환시대의 논리》 《8억 인과의 대화》(약칭 대화, 1977년 작)[9]에서 리영희는 문화대혁명을 '이 때까지의 자본과 물질 중심의 세계에서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보려는 세계관으로의 전환'이라고 하거나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 보긴 했다. 그 본성이 악마성이라 문제였지 '물질주의에서 정신적 실존적 인간의 본연을 고민하는 단계로 세계가 변화한다'는 식으로 표현했다. 중국인들은 홍위병들한테 맞아죽지 않을까 하고 자신의 생존을 고민하기는 했다 또한 마오이즘을 일종의 인민주의로 묘사하기도 했다. 이는 유물론적 서구 세계관이 일상 생활이나 정신적인 부분은 개혁이 시도되지 않았음을 들어 이야기 한 것이다.

무엇보다 독재정권에 맞서 진실을 파헤치겠다던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이, 중국에서 대학살이 벌어지고 있던 시절 중국 독재정권의 문화대혁명 미화 선전을 아무 의심 없이 그대로 믿어 버리고 잘못된 정보를 대중에게 전파한 것은 분명 비판 받을 만한 부분이다. 불과 3년 뒤인 1980년, 같은 조선일보 출신인 조갑제 기자가 5.18 당시 목숨 걸고 광주로 들어가 당시 전두환 신군부가 주장한 북한군 침투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낸 것과 심히 비교되는 일이다.

반박 항목에서 지식인은 신이 아니라 사람이다라고 했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지식인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평하는 것을 가장 철저하게 삼가해야 한다. 인문/사회 분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더. 그러나 리영희는 정확한 지식 없이 막연한 사상적 편향성에 매몰되어 문혁을 마치 인간 중심적인 큰 변혁인양 미화했다.

만약 어떤 지식인이 자신의 단편적인 지식과 사상만으로 김씨왕조의 폭정이나 나치의 대학살을 미화한다면 그것도 옹호할 수 있을 것인가? 모든 지식인들의 조상 소크라테스가 괜히 "지혜란 다른 게 아니라 자신의 무지에 대한 앎이다"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3.1.1. 반박 1

이런 진단이 가능했던 이유는 문화대혁명기간 중 홍위병에 의한 구습 타파이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문화대혁명 당시엔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덕분에 그 실상이 바깥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10]

게다가 같은 시기에 표면적으로 비슷한 성격이긴 한 68혁명이 프랑스에서 벌어지고 있었으며, 68혁명의 당사자들 역시 문화대혁명을 자신들과 동급으로 여기는 큰 오류를 저지르고 있었다. 세계사적 맥락의 오류 [11]

문재인은 자신의 책 《운명》에서 이 문화대혁명에 대해 리영희에게 물어보았고, 리영희는 그의 질문에 솔직하게 자신의 착오를 인정하였다. 그는 그 당시에 중국에 대한 정보가 크게 부족하였다고 첨언하였다. 그의 책 대담집인 《리영희의 대화》(약칭 '대화')에서도 과거 문화대혁명 오판에 대한 자기고백을 했다.

물론 세계를 여행했던 지식인이 문화대혁명의 실체를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반박도 있으나 지식인도 사람이지 신이 아니다. 모택동 시절의 중국은 현재의 북한과 마찬가지로 폐쇄적인 국가였으며 일개 지식인에 불과한 리영희가 자세한 사정까지 안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판 단락에서는 "불과 3년 뒤인 1980년, 같은 조선일보 출신인 조갑제 기자가 5.18 당시 목숨 걸고 광주로 들어가 당시 전두환 신군부가 주장한 북한군 침투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낸 것과 심히 비교되는 일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애초에 '같은 나라의 지방도시에 들어가는 것'과 '아예 다른 나라에 들어가는 것' 이 어떻게 비교 대상이 되는가(...)

그러나 중국 문화대혁명과 대약진운동의 참상 역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분명 당대부터 수십만의 사상자가 있다는 정보가 분명 존재하긴 했다. 다만 희생자가 수십만이 아니라 수천만이라는게 밝혀졌을 뿐(...) 한마디로 잘 알지도 못하는걸 빨아댄 셈

3.2. 카다피에 대한 옹호

2005년에 출간된 대담집인 '대화'에서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알 카다피를 옹호하기도 했는데, 그 때 시점에서도 카다피는 35년째 독재 중이었다[12]. 과연 '반(反) 시장제국주의적 활동'이라는 이름만으로 이러한 독재를 용인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렇게 극찬한 카다피는 2011년 들어 민주화를 주장하는 자국민을 전투기로 폭격하고 용병까지 동원해서 학살하는 악질적인 본성을 드러내다 결국 사살당했고, 해당 내용은 갈 곳을 잃게 되었다. 이건 70년대도 아니고 21세기의 오류다.

굳이 변호를 하자면 초창기의 카다피는 '젊은 혈기의 혁명가'로서 '아프리카의 체게바라'로까지 불리며 진심으로 리비아 시민들을 위한 정치를 폈던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것은 그보다 못했으면 못했지 나을 게 없는 왕당파와 반동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오랜 장기 집권으로 부패하여 독재로 리비아 국민들을 힘들게 하고 민주화 운동을 잔인하게 진압한 것은 결코 옹호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2.1. 반박 2

해당 대담집에서의 발언은 카다피 집권 당시의 유전 국유화 등의 조치를 보고 그 때 당시 자신이 느낀 반가움을 이야기 한 것이다. 그리고 위 비판 단락에도 나와 있는것처럼 70년대 집권 초기의 카다피가 받은 평가는 2010년대 이후에 받은 평가와는 전혀 다르다. 애초에 해담 대담집 자체가 전체적으로 일관성을 가지고 대상을 분석한 학술서라기보다는 단편적인 대담 모음집이며, 카다피에 대한 언급 역시 '카다피라는 인물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총체적인 평가가 아니라 70년대의 자신을 회상하면서 그때 자신에게 큰 충격을 안겨 준 사건들 중 하나로 카다피가 집권 직후 시행한 유전 국유화 등 반 시장제국주의 정책을 이야기 한 것이다. 1970년의 카다피가 단행한 정책을 보고 1970년의 리영희가 기쁨과 감동을 느꼈다는 이야기를 2005년의 리영희가 2005년의 카다피를 옹호했다고 해석해서 '카다피의 장기독재를 어떻게 옹호할 수 있느냐'고 핏대올리는 것이 오히려 억지인 셈.

3.3. 대한민국은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가 아니다?

"80년대 한국사회에서 모든 지식인과 교수, 정책수립가, 정당 관계자들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의 법리를 뒷받침하는 소위 유엔총회 결의 '대한민국은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라는 이 법률이 얼마나 사실과 다르며 허위이고, 해석을 견강부회했던 집권자들의 자위적인 해석인지, 또 완전히 거짓에 의한, 우상에 의한 미신인지를 밝혀나갈 때 무척이나 고통받았다"
오마이뉴스, "부시 재집권, 이제 반동의 시대 열린다" 2004년 11월 4일

리영희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정부가 UN에게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형식상 총선거가 실시된 38선 이남 지역에서의 유일 합법정부인 것이지, 한반도 전체의 주권을 가졌다고 보는 것은 확대해석이란 것.

이에 대한 비판은 다음과 같다.

역사교과서 집필시안 세 가지 쟁점
<포럼>歪曲 국사 교과서 修正 거부해선 안돼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는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뿐이다

3.3.1. 반박 3

대한민국 정부를 인정한 UN 결의문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Declares that there has been established a lawful government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having effective control and jurisdiction over that part of Korea where the Temporary Commission was able to observe and consult and in which the great majority of the people of all Korea reside; that this Government is based on elevations which were a called expression of the free will of the electorate of that part of Korea and which were observed by the Temporary Commission; and that this is 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
출처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마지막의 'that part of Korea and which were observed by the Temporary Commission; and that this is 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이다. 이 문장에서 UN은 UN감시단의 감시 아래 총선거를 정상적으로 실시한 지역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주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당시 총선거는 소련과 김일성 세력의 방해로 인해서 38선 이남 지역에서만 진행할 수 있었다. 따라서 UN은 우선 38선 이남 지역으로 한정해서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 합법성을 인정한 것. 물론 한반도 전체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지 못하게 된 책임은 앞서 말한 소련과 김일성 세력에게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 전체의 주권을 대표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당시 시점으로 보았을 때 UN 입장에선 소련을 어떻게든 설득해서 38선 이북 지역에도 총선거를 마저 실시하여 정부의 합법성을 확보하도록 하는게 중요했고 그게 절차상으로도 정상이었다. 총선거가 실시되지 않았는데도 38선 이북 지역에까지 대한민국 정부의 주권을 미치게 한다면 오히려 그게 비정상이다. 그러니까, 리영희의 주장이 옳다.
3.3.1.1. 재반박
역설적으로 그래서 리영희의 주장이 옳지 않은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UN에게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받은 것은 사실'이라는 그의 말을 다시 되새기자. UN의회에 들어가는 것이 합법정부로 인정되는 것이라면, 대한민국은 1948년 옵져버 자격으로, 북괴는 1991년 UNSC Resolution 702에 의해 UNGA에 들어가 '합법정부를 인정'받았으므로 1948년부터 1991년까지 (한반도 전체의 주권 문제와는 상관없이) 한반도 지역 내에서 합법정부로 인정받은 정부는 대한민국정부밖에 없다.

UN은 1948년 총선거를 통해 주권이 미치는 지역을 38선 이남 지역으로 한정하긴 했지만 이는 대한민국 정부의 공정한 선거로 권력이 확립된 정통성이 미치는 부분을 38선 이남까지만 인정한 것이며, 38선 이북 지역에서 현 북한 정권의 정통성은 1991년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북한은 합법이 아닌 정부가 되어 대한민국은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가 맞는 것이다.

물론 리영희도 마찬가지로 북한 정권에게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3.4. 기타

2000 남북정상회담6.15 선언 이후 남북관계가 긍정적으로 보였을 때에 북한이 변하는 만큼 남한이 변해야 한다고 주장을 했다. 남한이 우익세력이 강한 것은 40년 전과 다를 것이 없는데 북한은 남한과 대화를 하면서 변해왔으니 남한은 최소한 그만큼, 가능하면 그 이상 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관련 기사.

그 외에 군사정권 시절의 인권 탄압에 대해서는 철저히 비판하면서도 북한 주민들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비판의 강도가 덜하다고 지적되는 경우도 있으나, 이런 지적은 한국의 극단주의적 보수우파가 흔히 사용하는 색깔론종북몰이의 전형으로써 진지하게 반론할 가치조차 없다. 상술된 바와 같이 리영희 자신이 이미 북한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조목조목 충분히 보여준 바 있는데 이런 입장조차 '상대적으로 비판의 강도가 덜하다'고 지적받아야 한다면, 무슨 발언 할 때마다 글자수 세서 북한 정권에 대한 비판과 남한 내 문제에 대한 비판의 길이라도 맞춰야 한단 말인가? 애초에 대한민국 사회의 구성원이 자기 자신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한국 사회 내부의 문제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당장 한국 사회 내에서 북한에 대해 가장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정치세력중 하나라는 자유한국당 소속 정치인들의 발언만 보더라도 북한 정권에 대한 비판보다 한국 내의 적대정파에 대한 비판적 발언을 더 자주 하며, 이는 한국 내 정치세력이라는 입장상 당연한 것이다. 위와 같은 논지에 따르면 자유한국당에 대해서도 '적대 정파에 대해서는 철저히 비판하면서도 북한 주민들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비판의 빈도가 낮다'라는 비판이 가능해지는 것. 그렇다면 자유한국당도 친북정당인가?(...) 결국 이와 같은 논지는 합리적인 비판이라기 보다는 그저 리영희를 친북이라고 몰아가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낸 꼬투리에 불과하다는 것.

3.4.1. 반박

위 주장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주장이다.

리영희는 거창 양민 학살의 잔혹성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해왔다. 이런 사람이 모택동의 잘 한 점을 이야기한다면, 그의 말을 들어왔던 사람들은 모택동의 1000만 양민 학살의 잔혹성이나 천안문 3천 학살, 위구르 학살도 비난하길 기대할 것이다. 베트남 전쟁을 이념전쟁이 아닌 생존전쟁이라며 북베트남을 칭찬한다면, 그의 말을 들어왔던 사람들은 북베트남 정부가 전후 처형한 최소 6만5천에서 최대 10만 이상의 민간인에 대해 격분하기를 기대할 것이다. 마찬가지 입장에서 ‘반공주의’도 아니고 ‘광적인 반공주의’라며 반공이념으로 생사람을 잡았던 학살사건에 대해 인권침해를 이유로 극도의 분노를 표출한 '대화’ 740여쪽 중에 반공이 생기고 국민들 사이에 퍼지게 된 본래 원인인 ‘북한 무장공비의 이승복 가족 학살’이나 북한 간첩에 의해 우리 국민이 죽은 사건에 대한 단 한 문장의 언급이라도 있는 것이 합리적이지만, 전혀 없다.

이런 이중적인 태도를 '그저 리영희를 친북이라고 몰아가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낸 꼬투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리영희 교수는 “나는 막연하게 이념이나 이론 조작이 아닌, 엄밀한 실증적인 연구를 해왔기 때문에 남들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해. 우선 찾아야 하고, 읽어야 하고 평가하고 판단해야 하고, 정확하고 치밀하게 체계화해서 글을 써야 하는데, 이것은 너무 힘든 작업이야. 글 하나 쓰기 위해 몇 천 페이지를 읽어야 할 때도 있어”,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야 하는 까닭에, 그것을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저서 대화(2005년)에 “중국 공산당의 혁명운동 철학과 전략 그리고 파란만장한 궤적은 일본공산당의 그것과 비교의 전제조차 안 되겠지. 중공혁명은… 태평천국의 혁명(1851-64)이라는 업적의 유산입니다… 태평천국은 완전 평등주의에 입각한 공상적 공산주의사회를 목표로 했고… 그들의 이념과 인간적 덕성과 정치적 목표와 같은 것을 알면 알수록 감탄을 금할 수 없어요.” 라고 서술한다.

전환시대의 논리(1974년)에는 박정희 정부의 경제 발전과 같은 공은 놔두고 과인 독재를 비난했던 사람이 왜 모택동의 문화대혁명은 공, 즉 '그 속에 담긴 뜻'을 중요시하고 과는 그 당시에 몰랐다는 식으로 대충 넘어갈까? 본인이 여러 책에 걸쳐 문화대혁명을 긍정적으로 소개했으면 책임감 때문에라도 문화대혁명에서 박정희 정부의 독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학살을 고발해야 하지 않을까? 박정희 정부도 그 속에 담긴 뜻은 충분히 있었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이는 2005년에 '박정희의 인본주의 사상은 알면 알수록 감탄을 금할 수 없어요. 혼란스러운 사회를 군인들이 정리하고 정권을 민간에 이양한다는 약속을 하다니. 독재는 제가 그 당시에 경험해 보지 않아 잘 몰라요.' 라고 옹호하는 꼴과 똑같은 것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태평천국의 혁명을 우상화하기 위해 리영희는 동학농민전쟁의 사상적 원천이 중국에 있다고 주장한다. “태평천국농민전쟁은 중국공산당의 사상으로 전수되기 이전에 이미 조선으로 그 사상이 전달되어, 평등사회를 목표로 하는 동학농민전쟁(1891-94)의 지도이념으로 개화(開花)했지요.”

동학은 수운 최제우가 유불선의 사상을 섭렵하면서 민족고유의 독창적인 신앙으로 체계화한 것인데, 리영희는 태평천국의 사상이 동학의 지도이념으로 개화했다고 우기는 것이다. 최제우가 동학혁명을 일으키기 전에 중국을 방문하고, 태평천국농민전쟁의 자료를 공부하며 교훈을 얻기라도 했다면 리영희의 주장에 타당성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증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물론 이런 점을 들어 그의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한 이중성을 비난할 수는 있어도 그가 종북이라고 하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이와 같은 논지가 '합리적인 비판이라기 보다는 그저 리영희를 친북이라고 몰아가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낸 꼬투리에 불과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3.5. 총론

물론 리영희라는 인물의 행적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여 그 공과 과를 논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지만, 리영희라는 인물이 한국의 민주화, 더 나아가 한국 현대정치와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력이 막대한 만큼 이 인물에 대한 사회적 평가 역시 상당부분 정치적 일 수 밖에 없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민주화 운동 세력으로부터 '의식화의 은사'로 추앙받는 인물인 만큼 그 반대 세력으로부터는 '의식화의 원흉' 이라는 적의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이 양 세력의 후예들이 정치권을 주도하는 현대 한국사회에서 리영희에 대한 평가는 상당부분 학술적이라기 보다는 정치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요컨데, 민주화 운동 세력의 계승을 주장하는 정치세력들이 이 인물을 '사상의 은사'로 추앙하는 만큼 상대 정치세력으로써는 이 인물의 학술적 성과를 비판함으로써 상대 정파의 사상적, 이론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대외문제에 대한 비판 역시 마찬가지이다. 위에서도 반박된 바와 같이 카다피 옹호 논란같은 경우 '69~70년 카다피 집권 당시의 감상'을 '2005년에 출간된 대담집에서 회상한 것'을 '2011년 이후의 행적을 바탕으로 비판' 하는 그야말로 시간을 달려가는 꼬투리잡기를 볼 수 있는 것. 실제로 이 문서의 과거 이력을 보면 '해당 대담집이 출판된 것은 2005년으로 2011년 리비아 혁명 유혈진압이 일어나기 이전의 일임을 감안해야 한다'는 상식적인 수준의 반론까지 '카디피 옹호하는 거 아니면 실드치지 마라' 라거나 '엄연한 사실인데 왜 지우냐' 는 억지를 쓰며 싹싹 날려대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설령 2005년의 카다피에게서 2011년의 카다피의 전조를 찾아볼 수 있었다 하더라도, 1970년의 카다피와 2005년의 카다피 사이에는 35년의 간극이 있고, 카다피는 집권 초기와 중후반기의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인물이다. 이 역시 리영희를 비판하기 위해 무리하게 꼬투리를 잡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는 어려운 사례인 것.

이 부분에 대해서는 리영희의 담론 상당수가 '당대에는 독자의 인식을 완전히 전환시켰다고 할 정도로 충격적이었지만, 현대의 기준으로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 이기 때문에 리영희의 담론이 저평가되는 면이 있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베트남 전쟁에 제국주의적 요소가 있다'는 리영희의 분석은 지금으로써는 그저 다양한 관점 중 하나로써 상식적인 주장일 뿐이지만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베트남전은 반공 성전'이라는 고정관념을 뒤흔든 엄청난 충격이었던 것. 또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즉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의견이 다른 좌우파가 동등하게 균형이 맞아야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는 주장 역시, 좌파 자체를 범죄시하고 집권 정파가 반대파(야당)을 탄압하고 정치에서 철저히 배제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당시로써는 독자의 인식을 근저에서부터 뒤흔들었다고 할만큼 엄청난 충격을 안겨준 주장이었던 것이다. 즉, 리영희의 분석과 주장이 얼마나 정확하고 지혜로웠는지를 따지려면 일단 리영희의 핵심적인 주장 중 상당부분이 현대에 와서는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오늘날 상식으로 여겨지는 것의 상당부분이 불과 30~40년 전의 한국 사회에서는 지극히 이단적인 주장이었고, 리영희는 이런 과거의 상식을 뒤흔들어 현대의 새로운 상식을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 중 하나라는 것이다.

또한 리영희에 대한 비판의 핵심인 '문화대혁명에 대한 오판'이 리영희의 전반적인 주장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역시 중요하게 따져봐야 할 문제이다. 물론 문화대혁명에 대한 리영희의 판단이 오판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고, 리영희 자신도 이를 '사상적으론 훌륭하지만 현실적으론 안좋은 일들이 많았다'며 억지로 인정했다. 그러나 <8억인과의 대화>나 <전환시대의 논리>의 주제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분석' 이 아니라 '한국 사회 내의 인식 전환'이며 이 맥락에서 해당 저작의 중국론 역시 한국 사회 내에서 '중공'에 대한 인식 전환, 즉 중화민국 정통론에 경도된 기존의 중국관에서 벗어나 중화인민공화국을 이해와 대화의 대상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점에 중점을 두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것이다. 시대적인 측면에서 중국이라고 하면 곧 중화인민공화국을 연상하는 현대의 독자들은 실감하기 어려울수도 있겠지만, 70~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중국이란 곧 대만의 자유중국(중화민국)을 의미했고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해서는 '정당성 없는 찬탈정권'이라는 인식이 주도적이었으며, 심지어 92년의 한국-대만 단교 당시에도 '어차피 세계적으로 공산정권들은 다들 무너지고 있으니 중공정권도 오래는 못갈 것' 이라는 논리로 대만과의 관계를 우선시할 것을 주장하는 주장도 적지 않게 제기되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리영의의 주장을 '중화민국(대만) 일변도로 편향된 중국관에 대한 인식 전환의 필요성 제기'로 해석한다면... 문화혁명에 대한 오판으로 주장의 근거 중 하나가 무너진 것은 분명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주장 자체가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려울수도 있다는 것.

결국, 리영희의 오류에 대한 비판 자체는 큰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이런 비판중에는 정치적 의도등으로 인하여 과장되거나 억지스러운 부분 역시 섞여있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 그리고 어떤 인물에 대한 비판에서 그 인물의 잘못이나 실수, 문제점이 두드러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를 침소봉대하여 해당 인물이 분명 여러 영역에서 미래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보여주었음을 무시하고 '성급하고 미래에 대한 혜안이 없다' 는 식으로 낙인찍는 태도 역시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

4. 조선일보와의 관계

리영희는 조선일보, 특히 반공주의적인 논객 선우휘와의 관계가 별로 좋지 못하였는데, 이는 선우휘가 조선일보에서 편집국장이던 1968년 박정희 정부의 외압으로 사임하게 한 탓도 있었다. 애초에 리영희가 선우휘의 사상을 혐오한 것도 있었다.[13]

또한 리영희는 후에 주필이 되는 신참기자인 김대중을 좋게 보지 않았는데, 김대중 이후에 다른 기자들이 다 잘리고(...) 높은 자리로 올라갔다면서 의아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대중 주필은 후에 반민주적이고 특정 정치 정당을 대변하는 논조나 해외 논설의 왜곡 번역 문제 등으로 선우휘에 가까운 비판을 받았다.

5. 저서

6. 편역서


6.1. 리영희 평전

리영희 저서나 편역서는 아니지만, 전 독립기념관장이자, 민주화 운동가인 김삼웅씨가 쓴 리영희 평전 또한 리영희를 아는데 있어서 읽어볼만 하다. 일반인들이 어렵지 않게 리영희의 일대기를 알 수 있는 책이다.


[1] 일본 제국관료제는 현대 시대의 1급~10급 공무원(국민의 충복)이 아니라 중세 시대의 정1품~종9품 문무관리(국왕의 충복)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고대 시대와 중세 시대의 제국왕국공국을 다스리는 문무관리는 근대 시대와 현대 시대의 민주공화국인민공화국연방공화국을 다스리는 공무원에 비해서 권력이 매우 센 편이다.[2] 일본령 한반도에서 영림서들의 숫자는 최다 37개소에 이르렀는데, 평안북도에서 활동하는 영림서들의 숫자는 최다 9곳에 이르렀다.[3] 참으로 아이러니 한건 리영희의 통역을 신뢰했던 사람은 바로 제임스 밴 플리트였다.[4] 이 때만 해도 조선일보의 성향은 지금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다.[5] 당시 일반인은 물론 자기가 데리고 있던 기자들도 베트남 전쟁은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성전' 정도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고 한다.[6] 이후 산본에 있는 수리산 근처의 아파트에서 살았다.현재 군포시 중앙도서관에 가면 그가 기증한 도서들이 있다.[7] 당시 5월 17일 ‘광주소요 배후조종자’로 구속돼 해직되어 민주화 관련 공이 있음을 인정받았다.[8] 당시 심문한 공안검사의 상식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서울대 법대를 재학중에 사시 패스를 했다고 자화자찬하던 수재 출신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뭔지도 몰라 너무 어이가 없어 누구의 책이라고 말하기도 뻘줌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9] 중국의 당시 인구를 말한 것으로 일종의. 편역서이다. 후에 1983년에는 《10억인의 나라》라는 책을 다시 냈다. 인구가 그새 늘었다.[10] 당시엔 크렘린이나 천안문에서 지난 번에 봤던 그 특정인이 보이지 않으면 숙청되었다고 추측하던 시절이기도 했다.[11] 그 덕분에 유럽의 좌파중에도 문화대혁명이나 심지어 캄보디아폴 포트를 관료적 공산주의를 개혁하려는 새로운 시도로 받아들이고 높게 평가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놈 촘스키도 그랬다.[12] "신생 독립국가인 리비아에서 쿠데타로 서구제국주의의 괴뢰왕조를 전복한 카다피 육군중령은 즉시 시장제국주의 자본이 소유했던 유전의 국유화를 단행했어요. 이것은 아랍세계 인민이 결정적으로 서방 자본주의의 착취를 거부하는 몸부림이었어……국내 현실로 말미암은 질식과 절망의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과 같은 기쁨을 느꼇어."[13] 선우휘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반공주의적 성향으로 더욱 굳건하게 변화하여 그 당시(80년대) 운동권의 비판순위 제 1대상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