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말 그대로 죽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행진을 말한다.전쟁범죄의 일환으로 포로나 민간인에게 강요된 강행군이 떠오르긴 하지만 일이 잘 안풀려서 본의 아니게 아군 병력을 이끌고 죽음의 행진을 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참패로 인해서 적대적 지역에서 철수를 하느라 지독한 추격과 게릴라 공격을 받는다던가 대비치 않은 가혹한 환경에 맞닥뜨린다거나 보급이 여의치 않는 지역에서 강행으로 침략을 지속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과 그 패주길[1], 카롤리너의 죽음의 행진이 대표적이다.
2. 사례
2.1. 제1차 세계 대전
2.1.1.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해당 문서 참조. 여러 학살 방식 중 죽음의 행진도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2.2. 태평양 전쟁
2.2.1. 바탄 죽음의 행진
해당 문서 참조.2.2.2. 산다칸 죽음의 행진
해당 문서 참조.2.3. 6.25 전쟁
2.3.1. 북한의 죽음의 행진
관련 문서: 북한의 전쟁범죄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개전된 후 조선인민군은 개성, 서울 등지에서 교황청 특사인 벨 주교, 미 육군 제24사단장 딘 육군 소장[2], 앙투안 공베르 신부&줄리앙 공베르 신부 형제를 비롯한 가톨릭 신부들, 베아트리체, 베르나도테를 비롯한 가톨릭 수녀들, 개신교 선교사, 미국 고문단을 비롯하여 상당수의 서양인들을 포로로 확보했는데 이들을 경기도 개성시에 모았다가 평안북도 지역의 포로 수용소로 이동시켰다. 그런데 상당수의 포로들이 80살을 눈 앞에 두거나 80살을 넘은 고령이라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어려웠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어떠한 탈 것을 제공하지 않았으며 먹을 것, 마실 것도 잘 주지 않은 채 엄동설한에서 행군을 강행시켜 상당수의 포로들이 동사 혹은 아사하거나 인민군들에게 살해되었다.
딘 장군은 종전 후 포로 교환으로 석방될 때까지 몇 차례 대남 선전용 삐라에 등장하기도 했는데 양복을 입고 쌀밥에 반찬들이 놓인 밥상을 받고 있는 모습을 연출해 포로가 되면 후하게 대우해 줄 거라는 환상을 심어주려 했다. 물론 형편없는 대우로 인해 수십 kg이나 살이 빠져 비쩍 마른 장군의 모습을 본 유엔군들은 아무도 안 속았다.
국민방위군 사건을 죽음의 행진으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긴 한데 애초에 죽으라고 굴린 것하고 극도의 부패가 낳은 참사는 일단 다른 거니까 동일선상에 놓긴 어려우며 담당자 5명 사형시킬 때도 전시 군법재판에 의거 군수물자 횡령으로 사형시켰지 아군 학살했다고 사형시키지는 않았다.
6.25 전쟁 당시의 죽음의 행진을 소재로 하는 소설로 이호철 작가의 '나상'이 있다.
2.4. 인도차이나 전쟁
2.4.1. 베트남의 죽음의 행진
1차 베트남 전쟁 또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베트남 독립 전쟁, 특히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베트민군도 외인부대원 등 프랑스군 포로를 상대로 장거리 행진을 시켰는데 먹을 거라곤 하루에 미숫가루나 생쌀 한 줌이나 주었을 정도였고 베트남인들에게 식민지 프랑스인 및 용병인 외인부대에 대한 증오로 가혹하게 대하면서 1만여 명이 넘는 포로 가운데 3천 명 정도만 살아남았다. 예외적으로 독일 국적의 외인부대원 중 동독으로 귀국할 의사를 피력한 포로에 한해 동맹국과의 우호 강화 차원에서 조기 석방 및 귀국시켜줬다.다만 이걸 원한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게, 2차 베트남 전쟁 때도 미군 포로들을 상대로 가혹행위가 이뤄졌다. 그나마 미군이나 다른 국가의 포로는 이렇게 포로 대우를 했지만 대한민국 국군 포로는 아예 포로로 인정하지 않고 북한으로 압송한 사례도 확인된다.
웃기게도 프랑스는 내외 선전을 위하여 베트남 포로들을 일단 배불리 먹여서인지 몸매는 그다지 마르지 않은 이들과 이 행진으로 뼈만 남은 채로 마른 프랑스군 및 외인부대 포로들이 극과 극으로 포로 교환이 되는 일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프랑스가 베트남인에게 잘 대한 건 절대 아니다. 단두대 항목에도 나오듯이 실제로는 베트남 저항인사를 고문 및 단두대로 참수하던 프랑스가 한 선전 홍보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이후 남베트남이 멸망한 다음 벌어진 피살자만 8~1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보복을 예고한 것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