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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립
이승만이 환국한 직후, 그는 다음과 같은 기자회견으로 이미 모스크바 3상 회의 전부터 우선 각자의 노선이 어떻든지간에 독립부터 해서 국제 사회에 합법적이고, 승인된, 정당한 발언권과 교섭권, 외교권을 가져서 한인들의 주권을 먼저 되찾아야 한다는 취지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필요성을 역설하였다.나에게는 (미래에 대한) 어떤 정치적 전망도 아직 없지만, 다만 국내에 여러분과 합동하여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우리 일을 할 수 있는, 우리 국가를 하루 빨리 세워야 하겠다는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만 잘 단결되면 내일이라도 우리의 국가를 세워 우리에게 산적한 모든 문제를 의논할 수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8월 15일 후 우리 국내에는 50이 넘는 정당이 난립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한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당한 문제 중 가장 긴급한 문제는 완전 독립이 아니겠습니까? 그러자면 하루 빨리 뭉쳐야할 줄 압니다. 헌데 뭉치어 우리 국가를 찾자면 총선거를 단행하여 새 국가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런 후에 서로 한 자리에 앉아 흉금을 터놓고 여러가지를 논의할 수 있으며 논의한 후 인민의 총의(總意)에 의하여 어떻게든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연합군도 우리 인민의 총의에 의하여 결정되면 우리를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1]
2. 정당통일 활동
1945년 10월 20일, 미국 국무부 극동국장 존 카터 빈센트(John Carter Vincent)가 한국에 신탁통치를 실시할 가능성에 대해 미국 의회에서 공개적으로 시사한 이후, 이승만은 강대국의 이러한 식민지 정책을 저지하기 위 민족 전체가 하나로 대동 단결할 것을 호소했고, 모든 민족 진영이 단합할 수 있는 그릇으로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구성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어 1945년 10월 23일, 조선호텔에서 65개 단체 대표들과 여러 정당 대표 200명[2]이 참석한 가운데 결성되었다.[a]. 약칭 독촉.그러나 갈등 끝에 11월 16일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독촉에서 탈퇴했다. 그 결과 독촉의 좌우대통합 이미지는 타격을 입었고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들도 사람들에게 분열세력이라는 인식이 생김으로써 정국의 주도권이 우익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1945년 11월 2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성원들의 1차 서울 귀환을 계기로 중앙집행위원회 구성을 시작했는데, 11월 28일부터 시도된 중앙집행위원회 구성에서 갈등을 드러냈다. 여운형은 위원 7명 중 5명[4]이 한국민주당의 당원이라면서 퇴장했다. 이승만은 독촉을 중심으로 임시정부 세력도 흡수하려고 했으나 임시정부 세력들이 이에 반발하였고 이들은 독자적인 조직을 만들려고 했다.
3. 신탁통치 반대 활동
3.1. 배경
1943년 12월 1일 미국, 영국, 중국의 합의로 한국의 독립과 신탁통치 실시를 논의한 카이로 회담 이후 테헤란 회담, 얄타 회담을 거치면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가 논의되고 합의가 된다.하지만 남한의 미군정 사령관인 존 리드 하지(Lt. Gen. John R. Hodge)는 신탁통치가 아닌 정무위원회 구성 후 미군정과 통합하여 과도정부를 수립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신탁통치안의 주창자였던 윌리엄 랭던(William R. Langdon)[5]은 임시정치고문으로 부임 후 입장을 바꾸어 하지의 과도정부 수립에 대한 구상에 따른 ‘정무위원회' 계획안을 제시하였다.[6]
미군정(하지)은 이러한 계획의 중심 인물로 이승만을 추대했으며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45년 10월 20일 연합군 환영대회에서 이승만을 소개할 때는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일생을 바쳐 해외에서 싸운 분이 계시다. 그분이 지금 우리 앞에 계시다."라고 소개하며 이승만의 명성을 높였다.[7]
신탁 통치에 대한 여론이 미국 정계를 주름잡게 되자, 이승만 또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로 하여금 1945년 11월 2일, 미국과 소련에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발송하게 하였다.[a]
3.2.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통한 신탁통치 반대
미군정이 '정무위원회' 계획안에 따라 과도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중간단계인 정무위원회가 실제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로 추진되고 있었다.[9] 1945년 10월 28일 이승만은 하지와의 면담을 나누고, 신탁통치가 반드시 실현되는 것이 아니며 그 대안으로 민족통일을 완성해야하고 독촉이 민족통일의 구침체라고 강조하는 발언을 한다.[10]즉 이승만의 귀국 후 정당통일 운동의 일환으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출범하고, 이에 따라 미군정이 신탁통치안의 대안으로 독촉을 바탕으로 하여 임시정부 세력을 합류시켜 미군정 예하의 과도정부를 추진한다. 미군정은 12월 16일에 개최될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까지 신탁통치 대안을 제시해야하는 상황이었으며 독촉을 주축으로한 민족통일전선 구축을 인정받아야 했기에 임시정부세력을 흡수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승만은 독촉으로의 임시정부 흡수를 강조하기 위해 임시정부가 정부의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독촉을 중심으로한 정당통일을 이루고자하였다.[11]
하지만 임시정부는 독촉을 중심으로 임시정부가 흡수되어야한다는 이승만(독촉), 한민당, 미군정의 태도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의 통합이 아닌 독자적인 노선을 취하게 된 것이다.[12] 이승만은 임시정부와의 통합에 실패한 후 12월 15일 제1회 중앙집행위원회[13]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3.3. 결과
미군정과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계획이 미국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는 좌파, 중도파, 임시정부 세력을 포함하는 민족통일의 완전체가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이전에 완성되어야 했다. 하지만 박헌영, 여운형 등의 죄파 계열 인사들의 탈퇴에 따른 보수집단화에 더하여 임시정부가 독자적인 노선을 취하면서 민족 통일과 정당 통일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21] 따라서 미군정과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신탁통치의 대안으로 제시했던 과도정부 수립은 끝이난다.4. 한계와 의의
좌·우익을 망라하여 통합 조직을 이룬다는 계획과 다르게 한민당, 국민당 등 우파 정당이 주류를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한계가 드러난다.신탁통치의 대안으로서 제시된 미군정 예하의 과도정부 수립은 정치적 경험이 부족한 하지 미군정에 의해 수립된 계획으로, 미국의 국제적 합의를 부정하고 미군정이 독단적인 계획을 세웠다는 점에서 한계가 분명했다.[22]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초기 목적 달성에는 실패하였지만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서의 활동을 통해 최고지도자로서 이승만이 부각되는 성과를 거뒀다.[23] 이후 1946년 2월 8일, 김구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와 통합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되었다.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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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李元淳, 《人間 李承晩》, 1965, 新太陽社, p. 262[2] 박헌영의 조선공산당도 그 중 하나였다. 이승만은 10월 31일에 돈암장에서 박헌영을 만나 장장 4시간에 걸친 대화를 나눈 끝에 박헌영의 독촉 참여를 이끌어냈다.[a] 許政, 《雩南 李承晩》, 1970, 太極出版社, p. 214[4] 허정, 김동원, 백남훈, 원세훈, 송진우[5] 랭던은 1942년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가 논의될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의 신탁통치 구상에 강령히 주장하였다. 하지만 임시정치고문으로 부임으로 하지와 협력을 통해 신탁통치가 한국에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생각 하에 '정무위원회' 계획안을 수립한 것[6] ”The Acting Political Adviser in Korea Langdon to the Secretary of state” (1945. 11. 20), RG 59, State Department, Decimal File, 740.00119 control(korea)/11-2145.[7] 『매일신보』1945년 10월, 20일자.[a] [9] 「주한미군정의 “임시한국행정부” 수립 구상과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역사와 현실』 19집.[10] ,『자유신문』1945년 10월 28일자.[11] 『중앙신문』 1945년 11월 6일자; 『신조선보』 1945년 11월 20일자.[12] 정병준, 2009, 「해방 후 백범 김구의 건국노선과 평화통일 활동」, 『백범과 민족운동연구』 7, 백범학술원[13] 모스크바 회담이 12월 16일에 개최되기에 이 회의가 모스크바 회담에서의 신탁통치의 대안을 제시할 마지막 기회였다.[14] 위하여[15] 넋시냐[16] 이 결성=정무위원회=독촉중협[17] 전쯤[18] 보여주었더라면[19] 있었을[20] 『독립촉성중앙협의회록』 1945년 12월 15일. 제1회 중앙집행위원회(제1차화합)[21] 『주한미국사』(HUSAFIK) 2부 1장, 41쪽[22]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7991[23] 『우남 이승만 연구』(정병준, 역사비평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