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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건국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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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 437 (낙원동) 소재. 낙원상가 근처에 있는 건국동맹을 결성했던 곳. 지금도 그 건물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현재 건국대학교 소유. 네이버 지도

1. 소개2. 활동
2.1. 강령
3. 의의4. 관련 문서

1. 소개

1944년 8월 10일 일본 제국의 패망을 예견하고 광복을 준비하기 위해 조직된 비밀결사 단체.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여 조동호, 현우현, 황운, 이석구, 김진우 등이 조직했다.

2. 활동

사실 '건국동맹'이라는 이름은 나중에 만들어진 이름이고, 당시 조직이름은 없었다. 이는 뒷날 광복직후 발족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도 마찬가지여서 나중에 단체를 명명하기 위해 이름이 붙은 것이지 당시에는 이름이 없었다. 이는 이름이 있으면 임원 한 명이라도 체포되었을 시에 전부 발각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조직의 원칙은 삼불(三不)이었는데, 즉 '말하지 않는다'(不言), '문서로 남기지 않는다'(不文),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不名)였다.

이 단체는 1년 정도 존재했지만 매우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국회도서관 '독립운동사사전 총론편 下'(독립기념관 발행) 참조바람.(단, 로그인 필요) 593~611

활동한 사람들 경력은 대부분 화려하다. 구한말기 의병장(유인석)의 제자로 지낸 사람(김진우)부터 시작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경력이 있는 사람(이유필), 비타협 민족주의자(명도석), 조선일보동아일보 둘 다 근무한 언론인(이여성, 조동호), 체육인 출신(이상백), 독일공산당 경력이 있는 엘리트 공산주의자(리강국), 신간회 좌익 계열에서 활동했던 인물(박정희 前대통령의 형 박상희, 황태성) 등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어우러져 활동했다.[1]

참가 인물들이 조직적인 훈련이나 활동을 벌인 사람들도 아니었고, 이념적으로 단결, 통일되지도 않았다. 건국동맹은 이론적으로 탁월한 정치노선, 조직노선이나 세련된 활동전술을 구사하지는 못했고, 개인적 연락활동에 치중하는 수공업적 조직화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그러나 건국동맹 조직은 1940년대 국내 독립운동의 중요한 성과로 독립운동의 맥을 잇는 역할을 하였다.

일체의 활동을 비밀리에 전개하고, 산하에 노동자, 농민, 청년뿐만 아닌 학병, 징용거부자 등 각계각층을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조직을 만들어 운영했다.[2] 또한 공장, 학교, 회사에 세포조직을 만들고자 했다.

1944년 10월에는 경기도 양평군 중심으로 건국동맹 산하조직 농민동맹을 결성했다. 농민동맹은 김용기장로하고 여운형 등 13인이 발기한 단체인데, 이 단체는 학병, 징용, 징병 해당 청년 수십 명을 용문산, 예봉산 일대에 피신시켰고[3] 공출반대 운동을 벌였다. 공출반대를 벌인 방식은 쌀 공출 자체를 막고자 논농사를 짓지않고, 공출을 하지 않는 고구마, 감자 등 밭농사를 지어 식량으로 대체했다.

건국동맹 조직구성에는 내무, 외무, 재무의 3부서와 도별 책임위원을 두었으며, 최고책임자인 여운형만이 전체 활동상황을 알 수 있도록 했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항일군사행동을 준비하기 위해 해외 무장독립세력과도 연계를 주력했는데, 대표적으로 중국 옌안의 조선의용군(김무정 지휘)과 연계를 맺고 연락을 수시로 하면서 구체적으로 군사작전 논의를 마련하기도 했다.(주로 북만주,베이징,옌안 등지에 연락원을 파견하고 서로 접선하기도 했다.)[4] 한편, 군사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활동하였으나 실행되지 못했다.[5]

1945년 8월 초, 부민관 폭탄의거[6]의 여파로 건국동맹 주요간부인 조동호, 이걸소, 이석구 등 간부들 및 회원이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들은 광복을 맞아 출옥했고, 건국동맹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모체가 되었다.

2.1. 강령

1. 각인 각파를 대동단결하여 거국일치로 일본 제국주의의 모든 세력을 몰아내고 조선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것

2.반추축 여러 나라와 협력하여 대일 연합 전선을 형성하고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방해하는 일체의 반동 세력을 박멸할 것

3. 건설 부면에 있어서 모든 시행을 민주주의적 원칙에 의거하고, 특히 노농 대중의 해방에 치중할 것
조선 건국 동맹 강령(1944)

3. 의의

일제말기에는 독립운동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던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국내에 독립운동의 맥을 이어준 역할을 한게 건국동맹이다. 결성 직후부터 건국동맹은 중앙조직, 지방조직을 꾸렸을 뿐만 아니라 각 계급, 계층을 망라하기 위한 조직적 준비사업을 초보적인 단계에서나마 광범하게 진행시켰다. 광복 직전까지 조직은 급속히 확대되었지만, 강력한 조직역량을 갖추지 못한점이 한계였다.

다만 건국동맹이 해방 전후 건국준비위원회, 해방후 인민 위원회라는 전국적이고 자발적 행정집단으로 발전한 것은 긍정적으로 볼 일이다. 이름에서 거부감을 느낄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명백한 좌우합작 단체였고, 자치기구라는 점, 일제 잔재를 자발적으로 청산하려 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에서 눈여겨볼 단체이다.

4. 관련 문서



[1] 그래도 대개 사회주의자가 주류였다. 기본적으로 독립운동가의 80% 이상이 사회주의 성향이었고 그나마 남아있던 국내 민족주의자들은 수양동우회 사건 검거를 계기로 사실상 절멸했기 때문에.[2] 대표적인 학병기피자로 하준수(뒷날, 지리산 빨치산으로 활동.)가 있다. 하준수는 학병거부, 기피하여 덕유산에 은신하면서 1945년 3월경에 징용거부자 73명을 모아 '보광당'을 조직했다. '보광당'은 일제의 후방교란과 무장투쟁을 목적으로 주재소 습격과 군사훈련을 실시하다 광복을 맞았는데, 하준수는 광복 이후 자신이 '건국동맹과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얘기하고 다녔다고 한다. 관련 증언에 따르면 하준수가 강동정치학원에 입교했을 당시 자신의 자서전, 이력서에다가 '건국동맹원'이었음을 기술할 정도였다고 한다.[3] 대표적인 인물이 경성제대 재학생이었던 이혁기와 염윤구 등 학병거부자들이었다. 이들은 광복이후 국군준비대 간부로 활동한다.[4] 그밖에 충칭에 있던 한국광복군과도 연락을 맺고자 여러번 접촉 시도도 했었는데, 당시 중일전쟁 전선이 격화되어 도저히 충칭까지 갈 형편이 못되었다고 한다.[5] 구체적인 원인을 들자면 무기획득 실패 때문이다. 무기획득을 위해서 여운형은 경기도 주안 조병창에서 근무하고 있던 채병덕 중좌와 두 차례 접촉을 시도했는데, 여기서 연락담당은 손기정이 맡았다. 손기정에 의하면 결국 채병덕은 여운형을 만나주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경기도 주안의 조병창은 당시 많은 사람들이 무기획득을 위한 공작을 시도햇던 곳으로, 이미 1944년 말에 무기 밀반출 사건이 여러번 발생했었다.[6] 1945년 7월 말, 부민관에서 박춘금이 주도한 '대의당' 결성대회가 있었는데, 이 대회장에서 조문기 등이 설치한 다이너마이트가 터져 1명이 즉사하고 수십 명이 다친 사건. 당시 엄청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