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7-25 00:36:06

이혁기

이혁기(李赫基)
(1923년 ~ ?(몰년미상), 창씨명 星村赫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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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해방 직후 최대 군사조직 조선국군준비대(朝鮮國軍準備隊)의 총사령관. 일제시대에는 학병거부운동을 주도한 바 있다.

2. 생애

구제중학교 4학년을 수료한[1] 1941년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 입학시험에 응시해 합격하고[2] 경성제대 예과에 제18회 신입생(문과을류[3])으로 입학했다.

중일전쟁 격화에 따른 전시 수업연한의 임시 단축조치(문부성 학제백년사 참조)에 따라[4] 그가 성대 예과를 수료하게 되는 1943년 9월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가 시행되자, 이혁기는 보성전문학교이철승 등 각 구제전문학교 대표들과 함께 학병 입영거부 운동을 주도했다.[5] 이 때 이혁기는 몽양 여운형, 이철승은 인촌 김성수의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1, #2, #3 참조).
학도지원병으로 끌려가기 싫어서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나왔다. 학병 해당자들은 여러 형태로 저항을 했다. 예를 들어 1943년 11월 이후 관공서를 습격, 파괴한 후 형사처벌을 받아 학병을 면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함남 북청 출신 이광림 등 학병 60명이 파출소를 습격하였고, 서재균 등은 재동파출소를 습격했으나 학도지원자라는 이유로 문책받지 않았다. 또한 서울에서는 경성제국대학이혁기, 보성전문이철승 등이 주동이 되어 학병 거부를 주도하며, 소기국소 총독과 학병문제로 담판을 지은 바 있다. ㅡ 정병준,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56권 pp.227-228.

결국 학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으나, 훈련소에서 기본군사훈련을 마치고 히로시마 우지나항(宇品港)에서 남양 전선으로 출항하는 수송선에서 바다에 뛰어들어 탈출, 탈영하여(유진오, 양호기(2019), pp.138-145) 1945년 8월 해방시까지 강원도 속초설악산 일대에서 활동한 '산악대(山岳隊)'를 조직해 활동했다고 한다(정병준,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56권, pp.236-237).

이를 바탕으로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교동국민학교에서 "귀환장병대"를 조직했고, 8월말 별도 창설된 "귀환군인동맹"(총사령 이혁기, 부사령 박승환, 참조)을 통합하여 9월 7일 조선국군준비대를 결성해 대장을 맡았다. 이혁기의 국군준비대는 명동에 위치한 명동 증권거래소(舊 조선주식현물시장) 건물을 본부로 삼고, 태릉의 일본군 지원병훈련소(現 육군사관학교)를 훈련소로 사용했다고 한다(장창국 참조).

미군정은 1946년 1월 15일 국방경비대를 창설하면서 사설 군사단체를 모두 해산시켜 국군준비대가 해산되었고, 이혁기는 군정포고령 위반으로 1월 25일 군정재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1년반 만인 1947년 6월 16일 미소공동위원회의 건의로 석방되었으나, 5.10 총선을 앞두고 폭동을 기획했다는 이른바 '북로당계 인민혁명군 사건'으로 1948년 2월 22일 검거되어 검찰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받은 후 실종되었다.

3. 여담



[1] 1918년 12월 대학령과 함께 고등학교령을 공포한 일제는 서양 문물을 빠르게 흡수해야했던 메이지 시대 기준으로 구성된 긴 교육 기간을 단축하기 위하여 구제중학교(5년제)와 구제고등학교 대학예과(3년제)를 합쳐 심상과 4년 + 고등과 3년의 도합 7년제로 수학 연한을 줄이는 개정 고등학교령을 공포하였다. 1919년 4월 이 개정 고등학교령의 시행과 함께 기존의 3년제 구제고등학교들은 구제중학교 4년 수료생부터 입학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고, 여타 대학예과 역시 2년제 또는 3년제를 택할 수 있게 하여 2년제의 경우는 구제중학교 졸업의 학력 조건이 있었으나 3년제는 구제고등학교와 마찬가지로 중학교 4학년 수료시 응시가능했다. 경성제국대학 예과는 설립 당시인 1924년에는 2년제였기 때문에 구제중학교(및 고등보통학교) 5년 졸업을 요구했으나, 1934년부터 3년제로 개편되면서 4학년 수료자도 입시를 치를 수 있었다. 다만, 사립 구제대학대학예과들과 달리 관립대학의 예과나 특히 최고의 인기를 자랑했던 제국대학 예과인 구제고등학교의 입시는 재수, 삼수가 기본으로 중학교 4학년 수료 후 합격하는 경우는 많아야 10% 미만으로, '사수(四修)'라 불리며 천재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2] 조선총독부 관보 제4269호(제5면)에 게재된 京城帝國大學豫科昭和十六年入學視驗合格者 명단 참조. 여기에 이혁기는 문과을류(文科乙類) 명단 18번째에 창씨명인 星村赫基로 등재되어있다.[3] 구제고등학교제국대학 법학부, 경제학부, 문학부로 진학하는 문과와 의학부, 이학부, 공학부, 농학부 등으로 진학하는 이과로 구성되었고, 문이과의 각 학생들을 제1외국어에 따라 갑류(영어), 을류(독일어), 병류(프랑스어)로 분반했다.[4] 당초 3년제였던 구제고등학교대학예과는 1941년과 1942년 신입생은 6개월씩 단축되어 2년 6개월을, 1943년 신입생은 1년이 단축된 2년 재학 후 졸업/수료하게 되었다. 참조.[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