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9 23:34:40

이강석(1937)

<colbgcolor=#000><colcolor=#fff> 이강석
李康石 | Lee Kang-seok
파일:이강석.jpg
출생 1937년[1] 2월 5일
경기도 경성부
(現 서울특별시)
사망 1960년 4월 28일 (향년 23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무대
(現 청와대 구본관 터)
본관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부모 친부 이기붕, 친모 박마리아
양부 이승만, 양모 프란체스카 도너
형제자매 누나 이강희[2], 남동생 이강욱
학력 경기중학교 (중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중퇴)
육군보병학교 (졸업)
임관 갑종간부후보생
최종 계급 소위 (대한민국 육군)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인물.

이승만 정부의 국회의장 이기붕박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말년에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된 사람이다.[3]

2. 생애

이승만프란체스카 도너중혼하기 전, 본처 박승선[4]과 이봉수란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봉수는 7살 때 디프테리아로 사망했고,[5] 프란체스카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을 얻지 못했다. 이기붕과 이승만은 같은 전주 이씨[6] 같은 정당의 정치가로서 친분이 있었으므로, 1957년 이승만의 83세 생일에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이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사실 이 입양은 당시 민법상 장남은 타인의 양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무효였다.[7] 거기다 항렬로도 이강석은 이승만의 손자뻘이기에 차라리 이승만의 죽은 아들 이봉수의 양자로 입양되던가 아니면 아들뻘인 이기붕이 직접 이승만의 양자로 들어가는 것이 더 적합하다. 이기붕은 나이로든 항렬로든 이승만의 아들뻘[8]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세간에서는 이기붕이 자식 팔아 출세하려 한다고 말이 많았다. 덧붙여 이 시기엔 아직 자기 집안의 대를 잇는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던 때라 이렇게 친척뻘 간에 양자를 보낼 경우엔 장남은 남겨두고, 차남을 보내는 것을 당연시했다.[9] 그런데 자신의 대를 이을 장남을 보냈으니 권력에 미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10]

이승만의 양자이자 민의원의장 이기붕의 아들이었으니 이강석의 권력이 얼마나 컸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 빽으로 서울대학교 법대에 편입했으나, 학생들이 등교 거부를 하는 등 거세게 반발#하여 결국 중퇴했고, 육군사관학교에 재입학했으나, 관절염 때문에 중퇴 후 갑종간부후보생 제도로 대한민국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이강석의 권력을 단편적으로 보여준 사례로 어느 청년이 이강석을 사칭한 가짜 이강석 사건을 들 수 있다. 당시 이강석이 시내에서 헌병을 구타하고 난동을 부린 적이 많았는데도 보도 한 번 안 되었다고 한다. 가짜 이강석 사건으로 법정 공판이 열렸을 때는 이승만 정권에 진저리를 내던 대중들이 얼마나 관심이 많았는지 법정 안에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들어차서 의자가 부서졌고, 심지어 판사 전용 출입문에까지 방청객들이 들어차서 판사가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나오다 법복이 찢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의 권력을 조롱한 피의자 강성병의 진술에 방청석이 환호했다는 후문도 있다.

1960년, 이기붕이 부정 선거를 주도하다가 이승만 대통령까지 하야하고 4.19 혁명이 끝나갈 무렵인 4월 28일, 친아버지 이기붕, 친어머니 박마리아, 동생 이강욱 등 온 가족을 총으로 쏴 죽인 뒤 자신도 자살했다. 이강석이 어떤 심정으로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가족들 전부가 같이 죽기로 합의하고 죽었다는 말도 있지만, 훗날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강석의 시신에서 머리와 가슴에 총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스스로 머리에 한 발, 가슴에 한 발 쏘았다는 뜻인데, 말이 안 된다고 생각되어 타살론이 나왔다. 타살론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이었던 곽영주가 이기붕 일가를 살해하여 국민여론을 달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막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기붕 일가가 죽기 전에 담화를 통해 하야를 발표했던 상태라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한 곽영주는 이 일이 있고 얼마 안 가 사형당해서 사실 확인도 불가능하다.

이기붕과 박마리아는 이전부터 사는 게 힘들다고 자살 기도를 여러 번 했던 적이 있으므로, 수면제 치사량을 복용하고 먼저 자살했고, 나중에 이강석이 권총 두 자루를 준비하여 머리와 가슴에 각각 대고 쏘았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왜 자기 동생까지 죽이고 굳이 자살한 사람들한테 총을 쏘면서 패륜적인 행동을 한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4.19 혁명이 일어난 지 9일째 되는 날 이승만 정권의 몰락으로 이기붕 일가가 미국으로 도주 준비 중에 자신의 처지에 화가 난 이강석이 충동적으로 자신의 가족들을 몰살한 게 아니나는 추측도 있다.

3. 대중매체에서

  • 1989년 KBS 드라마 <무풍지대>에서는 배우 오대규가 연기했다. 일가족 집단 자살 장면은 총쏘는 장면만 스틸컷으로 대체되었다.
  • 1993년 KBS 다큐멘터리극장 <귀하신 몸>에서는 배우 신용규가 연기했다.
  • 1998년 SBS 드라마 <삼김시대>에서는 배우 손민우가 연기했다.


[1] 1960년 4월 29일 자 동아일보의 이기붕 일가 자살 기사에 이강석의 당시 나이를 24세로 표기했다.# 세는나이였다면 1937년생이 된다.[2] 1935년 ~ 1949년 (향년 14세)[3] 입적 이후 '영식 강석 소위'로 호칭되었다. 당대 대한뉴스에서 확인 가능하다.[4] 출처: 《전주이씨족보》 이승만편., 출처2:쿠키뉴스 박승선 취재1 취재2 취재3오마이뉴스 국민일보 한겨레 1891년 혼인. 쿠키뉴스의 취재 등 여러 언론에 따르면, 박승선은 이혼에 합의한 적이 없고, 해방 이후 면담 역시 거부되었다. 끝까지 자기가 본부인이며, 다른 이가 있다면 첩이라고 주장했다. 박승선의 주장은 무시당했다. 1912년 이혼했다는 설이 널리 퍼져있지만, 사실은 이승만 측에 의해 소송을 당해 1949년 6월 4일 혼인 관계와 호적이 말소되고 말았다. 그리고 지방 판결조차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 이는 1960년대 여러 언론의 보도로 알려졌고, 1965년 8월 8일 《조선일보》 당대 기사에서 호적 말소는 법적 소송을 제대로 거치지 않아 시정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1960년의 《부산일보》 9월 20일 기사에서는 이승만이 1912년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호적에 손을 댄 적이 없으며, 박승선이 이은수를 양자로 맞아 호적상 이승만의 장남으로 기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이는 박승선이 1912년 이후에도 호적에 부인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5] 출처 - 연합뉴스 (2015.10.08.) : <역사속 오늘> 25살 연상의 이승만을 사랑한 '호주댁'[6] 두 사람은 모두 조선 태종의 후손으로 35촌 간이다.(이승만은 양녕대군의 16대손, 이기붕효령대군의 17대손.)[7] 의용민법 제111조에 규정되어 있었으며, 이 조항은 이후 민법이 제정되면서 제875조(직계장남자의 입양금지)에 규정되었다가 1990년에 민법 개정으로 삭제되었다.[8] 이기붕의 아버지인 이낙의와 이승만은 동갑이다.[9] 가령 조선시대의 흥선대원군도 이 때문에 장남이 아닌 차남을 효명세자 밑으로 입적시켰고 이 차남이 바로 고종이다. 물론 이것도 오늘날 기준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10] 어찌되었든, 이강석이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된 것을 전주 이씨 문중에서도 인정했기 때문에, 현재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보》에 수록된 이강석의 정보란에는 '出系讓寧大君派(양녕대군파로 출계했다.)'로 적혀있다.[11] 길용우는 이강석이 을 타는 장면을 연기하기 위해 처음 승마를 배웠는데 이후 여러 사극에 출연하면서 이를 유용하게 써먹었다고 한다.[12] 1944년생 배우. 본명은 김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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