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17:08:12

경복궁 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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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colbgcolor=#bf1400> 경복궁 북원
景福宮 北苑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
조성 시기 1868년 (조성)

1. 개요2. 역사3. 궁장(宮墻)
3.1. 신무문(神武門)3.2. 계무문(癸武門)3.3. 광무문(廣武門)3.4. 현무문지(玄武門址)3.5. 추성문지(秋成門址)3.6. 춘생문지(春生門址)
4. 경무대(景武臺) 권역
4.1. 융문당(隆文堂)4.2. 융무당(隆武堂)
5. 옥련정(玉蓮亭) 권역
5.1. 오운각(五雲閣)5.2. 벽화실(碧華室)5.3. 옥련정(玉蓮亭)
5.3.1. 오운정(五雲亭)5.3.2. 무명정(無名亭)
5.4. 침류각(枕流閣)5.5. 천하제일복지천(天下第一福地泉)
6. 경농재(慶農齋) 권역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파일:서울종로 경복궁 융문당 융무당_PS0100100102001648900000_0.jpg
1928년경 촬영된 북원 경무대 인근의 원림(苑林)[1]
파일:그림53_(1).jpg
경복궁 북원 추정배치도[2]
고종 대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북악산 자락의 현재 청와대 자리에 조성한 궁궐 원림(苑林)이다.

2. 역사

북악산 원림의 기원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선비기(道詵秘記)』에 따르면 고려 수도의 송악산(松岳山)은 그 기운을 삼각산(三角山),[3] 즉 남경(南京)[4]에게 빼앗긴다고 했다. 고려 숙종 대에 김위제(金謂磾)가 국토를 저울로, 남경을 저울추에 비유하여, 삼각산에 기대어[5][6] 도읍을 정한다면 온 세상의 신령스러운 물고기들(神魚)이 한강으로 모일 것이라며 『도선비기』를 근거로 천도를 주장했다. 점복을 관장하는 일관(日官)도 김위제를 지지하자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이 설치되었고, 1104년 남경 별궁이 완성되었다. 숙종이 직접 남경에 행차하기도 했었으나, 이때 남경은 당시 서경[7]처럼 정치적인 중요성이 크지 않아 천도는 논의만 하다가 흐지부지 끝났다. 이때 조성한 남경 별궁 터가 바로 훗날 경복궁 북원 자리로, 현재의 청와대이다.

1382년 2월 우왕 대에 천문과 역술을 관장하던 서운관(書雲觀)에서 또 다시 『도선비기』[8]를 들어 남경으로의 천도를 주장했고, 1382년 9월 우왕이 남경으로 행차하여 잠시 남경 별궁에서 머물렀으나 1383년 2월 다시 개경으로 환궁했다. 1387년 우왕은 남경으로 천도를 추진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조선 개국 후 도읍을 한양으로 천도하고, 경복궁을 창건하였다. 경복궁은 원래 남경 별궁 터에 지으려고 했는데, 터가 협소하여 경복궁은 약간 더 남쪽에 자리를 잡고, 남경 별궁 터는 경복궁 뒤쪽에 원림으로 남아있었다.[9] # 조선 초기 군신(君臣)이 동물의 피로서 서약했다고 하는 회맹단(會盟壇)이 이곳, 경복궁 북원에서도 엄밀하게는 고려 남경 별궁 터에서 더 남쪽 즉 현재 청와대의 정문 바깥과 경복궁 사이에 있었다.

이후 북악산 원림은 임진왜란경복궁이 불타 소실된 후 한동안 방치되었다.[10] 이후 고종 대에 이르러 흥선 대원군경복궁을 중건하고,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이어하면서 이곳에 창덕궁의 후원을 본떠 북원(北苑)을 새로이 조성했다.

경복궁을 중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873년과 1876년 두 차례에 걸친 대화재로 강녕전(康寧殿)교태전(交泰殿)을 비롯한 내전 권역이 전소(全燒)됨에 따라 고종은 다시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할 수밖에 없었는데, 재건 공사가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도 고종은 몇 차례 경복궁으로 돌아오려 했고, 총 4번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사이 이미 불타버린 내전 권역의 역할을 그 이북의 전각들이 대신 담당하는 경향이 있었다. 결국 내전 권역의 복구가 마무리되고 나서도 이러한 현상은 계속되어 흥복전(興福殿), 함화당(咸和堂), 건청궁(乾淸宮), 만경전(萬慶殿), 집옥재(集玉齋) 등 본래 경복궁의 후원 권역이었던 곳이 궁궐의 중심부 역할을 하게 되었고, 따라서 더 북쪽에 내밀(內密)하고 사적인 후원 권역이 추가적으로 필요해짐에 따라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던 신무문 밖 원림을 경복궁의 권역으로 끌어들여 그 역할을 하게 하였다는 분석이 있다.

1868년 북원을 창건할 때 동쪽에는 원형의 농포(農圃)와 도청(都廳), 중일각(中日閣)을 두어 농경지 권역을 만들고, 북쪽 북악산 중턱에는 옥련정(玉蓮亭)과 오운각(五雲閣)을 중심으로 별원 권역을 만들었으며, 동쪽에는 금위군직소(禁衛軍直所)를 두어 원림의 경비를 맡게 하였다. 그리고 그 중심부에 넓은 빈터를 만들고 창덕궁 춘당대(春塘臺)와 같은 역할을 하게 하여 경무대(景武臺)라고 불렀다. 1893년 도청과 중일각을 없애고 그곳에 경농재(慶農齋)를 중심으로 한 농경지 권역을 2차로 조성함으로서 후원의 기능은 더 강화되었다. 원형의 농포를 더 넓혀 사다리꼴로 만들고 대유헌(大有軒), 양정재(養正齋) 등 추가적인 전각들을 신설함으로서 북원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경무대에서는 국왕의 참석 하에 과거 시험을 치르거나 권농, 연무 등이 행해지기도 했다. 이 경무대가 훗날 이승만 정부 시절 청와대를 부르던 명칭인 경무대의 기원이 되었다.
파일:external/e-mansang.com/%B0%E6%B9%AB%B4%EB-%C1%B6%B0%A821.jpg
그래픽으로 재현한 조선 총독 관저

일제강점기일본은 이곳을 부속 전각들과 함께 헐고 공원 부지로 만들었으며, 1937년에 이 지역을 조선 총독 관저 부지로 선정하여 수궁(守宮)이 있었던 자리에 관저를 세우게 되었다. 이때 지붕은 보천교(普天敎) 본당이던 십일전(十一殿)[11]의 화려한 청기와를 가져왔다. 총독 관저는 1939년 완공된 후 제7대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가 관저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해방 이후 청와대 본관으로 거듭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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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궁장(宮墻)

파일:북궐후원도형 2.jpg
<colbgcolor=#bf1400> 북궐후원도형(北闕後苑圖形)

경복궁 본궁을 감싸는 궁장의 신무문(神武門) 바깥에도 북원을 감싸는 궁장을 둘렀는데, 북궐도형에는 그 길이가 약 698칸(약 1,675m)으로 되어있다. 궁궐 내부에서 북원으로 들어가려면 북대문인 신무문을 나가거나, 그 동쪽에 난 작은 암문인 계무문(癸武門)과 광무문(廣武門)을 나가야 했다. 북원 궁장에도 추성문(秋成門), 금화문(金華門), 현무문(玄武門), 춘화문(春和門), 춘생문(春生門) 등의 문이 나있어 외부에서 드나들 수 있었다.

현무문은 북원의 북문으로 현 청와대 본관이 신축되기 이전까지 바깥과 통하던 철문이 있던 곳에 나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주춧돌의 흔적만 남은 채 사라져 있다. 추성문은 현재 효자동삼거리 동쪽에 위치한 북원의 서문으로 북원에서 개최하는 행사에 참석할 종친과 관료, 유생, 군인 등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금화문은 추성문보다 살짝 북쪽에 있었다. 이 인근은 일제강점기에 경복궁으로 이어진 궁장 일부가 헐리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직원 관사(館舍)가 들어서는 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편 북원의 동쪽에서는 경복궁 외부의 태화궁(太和宮)으로 이어졌던 궁장에 난 춘생문과, 그 안쪽 북원 궁장에 난 춘화문의 이중문을 통과해야 들어올 수 있었는데, 여기서 아관파천의 주요 원인이 되었던 춘생문 사건이 벌어졌다. 춘생문이 있었던 곳은 현재 청와대 춘추문(春秋門) 밖 경복궁 궁장이 높이 솟아오른 지점이고, 춘화문은 그보다 조금 더 서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원래 언덕을 이루어 계단을 올라야 했던 지형이 완전히 깎여나가 도로가 생기는 바람에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3.1. 신무문(神武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경복궁 신무문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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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계무문(癸武門)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colbgcolor=#bf1400> 경복궁 계무문
景福宮 癸武門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52
파일:계무문.jpg
<colbgcolor=#bf1400> 계무문[12]

3.3. 광무문(廣武門)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colbgcolor=#bf1400> 경복궁 광무문
景福宮 廣武門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52
파일:광무문.jpg
<colbgcolor=#bf1400> 광무문[13]

3.4. 현무문지(玄武門址)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colbgcolor=#bf1400> 경복궁 현무문지
景福宮 玄武門址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팔판동 115-42
파일:0403청와대담장밖에서촬영한현무문터로추정.jpg
<colbgcolor=#bf1400> 현무문 터로 추정되는 곳[14]

3.5. 추성문지(秋成門址)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colbgcolor=#bf1400> 경복궁 추성문지
景福宮 秋成門址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98-2
파일:0392추성문.jpg
<colbgcolor=#bf1400> 추성문으로 추정되는 사진[15][16]

3.6. 춘생문지(春生門址)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colbgcolor=#bf1400> 경복궁 춘생문지
景福宮 春生門址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팔판동 115-42
파일:3698936108_EkcBsH7x_3.jpg
<colbgcolor=#bf1400> 춘생문[17]

4. 경무대(景武臺) 권역


파일:나무위키+유도.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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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9일 이전까지 대한민국 대통령 집무실 및 관저의 기능을 수행한 건물에 대한 내용은 청와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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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0313융문당과융무당원경(1910년경).jpg
<colbgcolor=#bf1400> 1910년경 촬영된 경무대의 모습[18]

북원(北苑)의 중심부 권역이다. 청와대의 옛 명칭인 경무대는 여기서 유래한 것으로, 춘당대(春塘臺)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1868년 9월경 주요 전각과 함께 조성되었으며 국왕이 직접 감독하는 문무전시(文武殿試)나 망배례(望拜禮), 국왕의 시사(試射), 군영의 사열식 등 국가의 주요 행사를 개최하였다. # #

경무대는 탁 트인 넓은 빈터로, 현재 청와대 여민관에서 녹지원, 헬기장까지를 포함하는 광활한 구역이었다. 녹지원에는 경무대 시절부터 있었던 160년 수령의 반송(盤松)이 있고, 지금도 주변으로 나무들이 우거져 아름다운 경치를 연출하는 장소이다. 경무대에 속한 주요 전각으로는 융문당(隆文堂)과 융무당(隆武堂)이 있었다.
파일:서울종로 경복궁 융문당 근경_PS0100100102001647500000_0.jpg
파일:서울종로 경복궁 융무당 전경_PS0100100102001648600000_0.jpg
<colbgcolor=#bf1400> 1928년 촬영된 융문당과 융무당[19][20]
파일:그림28.png
<colbgcolor=#bf1400> 경무대 추정 배치도

두 건물 모두 1868년 9월 ~ 10월경 건립되었다.

융문당은 이익공 형식의 공포에 지붕마루에 양상도회(樑上塗灰)를 하여 권위를 높였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대청이 3칸이고 양 옆에 방이 있다. 단 차이가 있는 넓은 월대를 갖추고 있으며 하대(下臺)의 넓고 큰 계단 아래에 하마석(下馬石)이 있었다.

뒤쪽으로는 담장을 둘렀는데, 동쪽 담장은 융무당까지 연결되어 경무대 영역의 범위를 한정지었다. 이 담장에 삼춘문(三春門)이, 융문당 후면 쪽에는 경무문(景武門)과 용무문(用武門)이, 융문당의 동쪽 사이 담에는 문안문(文安門)과 경춘문이, 춘안당 쪽의 사이 담에는 무숙문(武肅門)과 소춘문(小春門)이 있었다. 융문당은 계회(契會)나 연회를 베풀 때, 또는 과거 문과시험을 치를 때 사용했으며 융무당과 함께 사열식을 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기 전 경복궁 후원에 있었던 서현정(序賢亭)과 용도가 같다.

서쪽에 춘안당(春安堂)과 15칸 규모의 수궁(守宮)이 딸려있었으며, 고종 때 대보단제(大報壇祭)를 위하여 왕은 융문당에서 재숙(齋宿)하고 세자는 춘안당에서 재숙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 춘안당에는 왕실의 서책을 보관하기도 하였다.

융무당은 융문당보다 규모가 작아서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중앙에 대청 2칸, 좌우에 방이 1칸씩 있고 전·후퇴가 있는 구조이다. 공포는 물익공이고 지붕마루에 양상도회(樑上塗灰)를 했다. 전면에 넓은 월대가 있으나 건물의 규모와 월대 높이, 익공 형식 등은 융문당보다 규모가 작다. 월대 위에 좌우로 협문과 3칸씩의 행각이 있는데, 북쪽의 협문의 이름은 본시문(本始門)이다.

건물 뒤편을 담장으로 둘렀는데 남쪽에 있는 문이 일춘문(一春門), 북쪽에 있는 문이 이춘문(二春門)이다. 융무당의 북측 월대에서 북쪽으로 융문당까지 연결되는 담장의 뒷마당에 있는 문은 삼춘문(三春門)이다.

융무당에서 좌측에서 남쪽으로 11칸의 행각이 있고, 행각에서 남쪽으로 경복궁의 북쪽 궁성의 광무문(廣武門) 인근까지 담장이 있다. 담장에 일각문이 있기는 하지만, 이 영역은 서쪽의 추성문에서 출입하는 것이 주된 통로였으므로 융무당이 있는 경무대의 영역은 여기까지이다. 동쪽 담장 너머는 수궁(守宮)이 있고 그 동쪽 춘도문(春到門) 안은 궁궐 숙위를 담당하는 금위군직소(禁衛軍直所)의 영역으로, 후원 외궁장의 춘생문(春生門)과 그 안쪽의 춘화문(春和門)이 금위군직소의 영역에 포함된다. 융무당에서는 왕이나 왕세자가 참석하여 군병들을 대상으로 활쏘기 시험을 보거나 호궤(犒饋) 포상, 훈련, 무예 시범 등을 행했다. # 또한 백성들에게 미곡을 나누어주는 구휼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기 전 경복궁 후원에 있었던 충순당(忠順堂)과 용도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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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2006년까지 원불교 서울교당으로 쓰이던 융문당과 융무당[21]

일제 강점기에 융문당과 융무당은 함께 일본 불교 종단인 진언종(眞言宗)에 무상으로 대여되었다. 헐린 재목은 1928년 8월 이후 당시 경성부(京城府) 한강통(漢江通)에 있던 일본 사찰인 고야산(高野山) 용광사(龍光寺)의 건물이 된 이래 원불교(圓佛敎) 서울 교당으로 2006년까지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전라남도 영광군의 원불교 영산성지(靈山聖地)로 이건되어 융문당은 원불교창립관으로, 융무당은 우리삶 옥당박물관으로 각각 사용되고 있다. 한편, 전각들이 헐려나간 경무대 자리에는 조선총독부 별관이 들어서 매화실(梅花室)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매화실의 후신인 상춘재(常春齋)청와대 경내에 있다.

4.1. 융문당(隆文堂)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colbgcolor=#bf1400> 경복궁 융문당
景福宮 隆文堂
소재지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읍 성지로 1356
건축 시기 1868년 (창건) / 1928년 (이건) / 2006년 (이건)
파일:크기변환_1E6A0589.jpg
<colbgcolor=#bf1400> 융문당[22]

4.2. 융무당(隆武堂)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colbgcolor=#bf1400> 경복궁 융무당
景福宮 隆武堂
소재지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읍 대신길3길 3
건축 시기 1868년 (창건) / 1928년 (이건) / 2006년 (이건)
파일:376029_28750_170.jpg
<colbgcolor=#bf1400> 융무당[23]

5. 옥련정(玉蓮亭) 권역

파일:서울종로 경복궁 전경_PS0100100102001649200000_0.jpg
<colbgcolor=#bf1400> 북악산 중턱 후원에서 바라본 경복궁 전경[24][25]

북원 가장 깊숙한 산골짜기에는 계곡이 있었는데, 북원을 만들 때 옥류천(玉流川)을 본떠 이곳에 옥련정(玉蓮亭)과 오운각(五雲閣), 벽화실(碧華室) 등 정자 및 수직실(宿直室)과 수경 시설을 조성하여 별원(別苑) 권역으로 만들었다. 이 권역은 조선 총독 관저가 들어선 후 서서히 퇴락하여 점차적으로 사라져 갔고, 일부 건축물이 변형되거나 이건된 것으로 추정될 뿐 정확한 정황을 파악하기 어렵다. 해방 이후에 이곳에는 이전 사료에는 나타나지 않던 침류각(枕流閣)오운정(五雲亭), 이름 없는 정자 하나와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이 남아있었으나 이름 없는 정자는 해체되었고 나머지는 1989년 청와대 내부에 대통령 관저를 신축함으로서 경내의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옥련정과 오운각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를 살해한 낭인들이 시신을 불태우고 왕궁을 떠난 다음 날, 불에 탄 유해를 향원정 연못에 넣으려던 것을 훈련대 참위 윤석우(尹錫禹)가 황후의 유골일지 모른다고 하여 오운각 서쪽 봉우리에 안장(安葬)하였다고 한다. # 윤석우는 시신에 함부로 손을 댄 죄로 교수형에 처해졌으나, 이듬해 종2품 군부협판(軍部協辦)으로 추증된다.

또한 고종이 옥련정과 오운각에 올라 쓴 어제시(御製詩)가 3편 전한다.
[ruby(登, ruby=등)][ruby(玉, ruby=옥)][ruby(蓮, ruby=련)][ruby(亭, ruby=정)]
[ruby(華, ruby=화)][ruby(山, ruby=산)][ruby(天, ruby=천)][ruby(作, ruby=작)][ruby(屹, ruby=흘)]
화산(華山)은 하늘이 깎아 우뚝 솟았으니

[ruby(下, ruby=하)][ruby(有, ruby=유)][ruby(玉, ruby=옥)][ruby(蓮, ruby=련)][ruby(亭, ruby=정)]
그 아래에 옥련정이 있다

[ruby(夏, ruby=하)][ruby(日, ruby=일)][ruby(多, ruby=다)][ruby(佳, ruby=가)][ruby(氣, ruby=기)]
여름날 상서로운 기운 진하게 감돌고

[ruby(溪, ruby=계)][ruby(長, ruby=장)][ruby(萬, ruby=만)][ruby(木, ruby=목)][ruby(靑, ruby=청)]
계곡은 뻗어 뭇 나무가 푸르구나
[ruby(玉, ruby=옥)][ruby(蓮, ruby=련)][ruby(亭, ruby=정)]
[ruby(瑞, ruby=서)][ruby(靄, ruby=애)][ruby(籠, ruby=농)][ruby(南, ruby=남)][ruby(山, ruby=산)]
상서로운 안개 남산에 걸리고

[ruby(松, ruby=송)][ruby(陰, ruby=음)][ruby(入, ruby=입)][ruby(小, ruby=소)][ruby(亭, ruby=정)]
솔 그늘은 작은 정자에 들었는데

[ruby(池, ruby=지)][ruby(塘, ruby=당)][ruby(斜, ruby=사)][ruby(暎, ruby=영)][ruby(白, ruby=백)]
못은 물비늘 비껴 비추고

[ruby(楊, ruby=양)][ruby(柳, ruby=류)][ruby(自, ruby=자)][ruby(搖, ruby=요)][ruby(靑, ruby=청)]
버들잎은 절로 흔들린다

[ruby(雨, ruby=우)][ruby(後, ruby=후)][ruby(搴, ruby=건)][ruby(珠, ruby=주)][ruby(箔, ruby=박)]
비 온 뒤 수정렴(水晶簾) 걷어올리고

[ruby(風, ruby=풍)][ruby(前, ruby=전)][ruby(倚, ruby=의)][ruby(玉, ruby=옥)][ruby(欞, ruby=령)]
바람 불 제 궁궐 창가에 기대니

[ruby(淸, ruby=청)][ruby(泉, ruby=천)][ruby(石, ruby=석)][ruby(間, ruby=간)][ruby(出, ruby=출)]
맑은 샘은 돌 틈에서 솟아나고

[ruby(琴, ruby=금)][ruby(曲, ruby=곡)][ruby(共, ruby=공)][ruby(泠, ruby=영)][ruby(泠, ruby=령)]
거문고 가락 함께 영령(泠泠)하다
[ruby(奉, ruby=봉)][ruby(陪, ruby=배)][ruby(慈, ruby=자)][ruby(聖, ruby=성)][ruby(登, ruby=등)][ruby(五, ruby=오)][ruby(雲, ruby=운)][ruby(閣, ruby=각)][ruby(有, ruby=유)][ruby(吟, ruby=음)]
[ruby(蔥, ruby=총)][ruby(鬱, ruby=울)][ruby(綠, ruby=녹)][ruby(陰, ruby=음)][ruby(裏, ruby=리)]
녹음이 무성한 사이로

[ruby(玉, ruby=옥)][ruby(流, ruby=류)][ruby(處, ruby=처)][ruby(處, ruby=처)][ruby(聲, ruby=성)]
맑은 시냇소리 곳곳에서 들리는데

[ruby(奉, ruby=봉)][ruby(駕, ruby=가)][ruby(五, ruby=오)][ruby(雲, ruby=운)][ruby(閣, ruby=각)]
어가(御駕)를 받들어 오운각에 올라

[ruby(祝, ruby=축)][ruby(岡, ruby=강)][ruby(此, ruby=차)][ruby(日, ruby=일)][ruby(誠, ruby=성)]
오늘 산세(山勢)가 우거짐을 감축(感祝)한다

5.1. 오운각(五雲閣)

'오운(五雲)'은 직역하면 '다섯(五) 구름(雲)'이란 뜻으로, '오색 구름이 드리운 풍광이 마치 신선이 노는 곳과 같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정자로 묘사되나 현재 남아있지 않다. 대청마루와 방 3개가 있었으며 누마루가 어구(御溝)로 정비된 시냇물 위에 걸치도록 설계되었는데, 마치 창덕궁 검서청의 구조와도 흡사하다. 물소리를 들으며 소요(逍遙)할 수 있도록 마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면상 1926년까지는 분명 남아있었으나 1938년의 도면에서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으로 되어있다.

5.2. 벽화실(碧華室)

又以右邊捕盜廳言啓曰: "謹依統長口傳下敎, 五雲閣碧花室鐵物偸竊漢徐命石移送秋曹事、命下矣。 臣廳在囚賊漢徐命石移送秋曹之意、敢啓。" 傳曰: "知道。"

또 우변포도청의 말로 아뢰기를, "삼가 통장(統長)의 구전 하교에 따라 오운각(五雲閣) 벽화실(碧花室)의 철물을 훔친 놈 서명석(徐命石)을 추조로 이송하라는 명을 내렸으니 신의 청에 갇혀 있는 도적놈 서명석을 추조로 이송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라고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 고종 14년 병자(1876) 6월 29일 무오 기사
永肅門入直局出身二十人, 承和門入直局別將一員率領仍直。承和門入直局出身二十一人內, 七人移直於碧華室, 七人移直於神武門, 七人移直於內弓房。三軍府入直哨官一員、馬兵四十名移直於南營。下都監入直哨官一員, 以別武士一人換直, 使之移直於北營。

그리고 영숙문(永肅門)에 입직하는 국출신(局出身) 20명은 승화문(承和門)에 입직하는 국별장(局別將) 1명이 거느리고서 그대로 입직하고, 승화문에 입직하는 국출신 21명 가운데 7명은 벽화실(碧華室)로 옮겨서 입직하고, 7명은 신무문(神武門)으로 옮겨서 입직하게 하고, 7명은 내궁방(內弓房)으로 옮겨서 입직하게 하겠습니다. 삼군부(三軍府)에 입직하는 초관 1명과 마병(馬兵) 40명은 남영으로 옮겨 입직하게 하고, 하도감(下都監)에 입직하는 초관 1명은 별무사 1명으로 바꿔 입직하게 해 그로 하여금 북영으로 옮겨서 입직하게 하겠습니다.
승정원일기』 고종 14년 정축(1877) 3월 8일 갑자 기사

벽화실에 대해 언급되는 기록은 이 정도밖에 없다. 옥련정 권역의 경비를 담당하는 병졸들이 머물렀던 수직소(宿直所)로 생각되나, 더 이상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정면 9칸, 측면 1칸의 규모로 대청마루와 방 4개, 창고 1개와 부엌 2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오운각과 마찬가지로 1926년까지 남아있었으나 1938년에는 이미 사라진 것으로 되어있다.

5.3. 옥련정(玉蓮亭)

파일:서울종로 경복궁 융문당 북쪽 백악산 정자_PS0100100102001649400000_0.jpg
<colbgcolor=#bf1400> 옥련정(玉蓮亭)으로 추정되는 정자[26]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된 정자로, 별원 권역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쪽과 서쪽에서 올라오는 계단이 있었으며, 특히 서쪽의 오운각에서도 30여 단의 계단을 올라야 했던 것으로 보아 전망이 매우 좋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의 시에서도 '남산에 안개가 걸렸다'는 구절이 나오므로 경복궁은 물론 멀리 남산까지 조망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옥련정은 총독 관저가 들어서면서 헐린 것으로 추정되는 오운각이나 벽화실과는 달리 1938년까지도 살아남았으나, 그 이후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청와대 경내에는 2곳의 정자가 있었는데 둘 중 하나가 옥련정이 변형된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5.3.1. 오운정(五雲亭)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101호 102호 103호
국기복색소선 및 사절복색자장요람 오운정 침류각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02호
오운정
五雲亭
소재지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
(세종로, 청와대)
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조경건축 / 누정
수량 / 면적 1棟
지정 연도 1997년 12월 31일
건축 시기 알 수 없음
관리자
(관리 단체)
국유
파일:오운정.jpg
파일:오운정2.jpg
<colbgcolor=#bf1400> 오운정[27]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넓이는 7.5㎡(약 2.3평)이다. 주춧돌기둥은 사각이며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 1단 위에 건물을 올렸다. 지붕은 사모지붕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며 공포는 이익공이다. 지붕 위에는 절병통을 두었다. 각 면마다 세살을 달았으며 정면 가운데에만 출입을 위해 을 달았다. 창과 문은 분합문으로, 들어 올릴 수 있다. 실내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다. 건물 바깥으로 사방에 툇마루를 둘렀고 그 위에는 '' 자 형 난간을 설치했다. 정면 가운데에 출입할 곳에는 난간을 두지 않았으며 그 앞에는 돌계단 1단이 있다. 현판 글씨는 이승만 대통령이 쓴 것이다.

오운정의 연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다. 오운각이 오운정으로 이름만 바뀌었다는 설이 있으나 오운각은 총 10칸 규모의 큰 정자였으므로 아귀가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옥련정이 변형되어 오운정이 되었다는 설도 있고[28], 경무대가 들어선 이후에 새로 지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간에 오운정의 이름이 오운각에서 따온 것으로 유추해 볼 수는 있다.

1989년에 오운정 자리에 대통령 관저를 지으면서 현재 위치로 옮겨졌고, 1997년 12월 31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02호로 지정되었다.

5.3.2. 무명정(無名亭)

파일:그림29.png
<colbgcolor=#bf1400> 이름 없는 정자[29]

대통령 관저 서쪽 산의 절벽 바위 위에 있었던 정자로, 편액이 없어 이름을 알 수 없다. 1969년 박정희 대통령 재임 기간 중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건립에 관한 자료가 전무하여 연혁을 알기 어렵다. 오운정과 거의 구조가 같은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오운정보다 칸의 너비가 약간 좁은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오운정과는 달리 사방에 분합문이 없어 뻥 뚫린 구조였다. 1999년에 해체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 해당 자리에는 터만 남아있고 정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서울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고 한다.

5.4. 침류각(枕流閣)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101호 103호 104호
오운정 침류각 정정공 강사상 묘역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03호
침류각
枕流閣
소재지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
(세종로, 청와대)
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주거건축 / 가옥
수량 / 면적 1棟
지정 연도 1997년 12월 31일
건축 시기 알 수 없음
관리자
(관리 단체)
국유
파일:침류각.jpg
파일:침류각2.jpg
<colbgcolor=#bf1400> 침류각[30]

옛 옥련정 터 주변에 있었던 정자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이며, 넓이는 78㎡(약 24평)이다. 주춧돌기둥은 사각이며 장대석으로 쌓은 3단 기단 위에 건물을 올렸다. 오른쪽 가장자리 칸은 1칸을 앞으로 돌출시켜 누마루 형식으로 만들었으며 누마루 하단 돌 기둥 사이에는 장초석 기단 3단과 벽돌을 설치했다. 왼쪽 가장자리 칸은 역시 1칸을 뒤쪽으로 돌출시켜 으로 만들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지붕마루는 양성바름을 하지 않고 기와로 마감한 모습이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공포는 없다. 단청은 칠하지 않았고 현판도 달려 있지 않다.

문살이 화려한데, 세살무늬와 빗살무늬, '' 자 형 무늬가 섞여있다. 에 창호지를 발랐으나, 일부분은 유리를 끼운 것도 있다. 침류각 영역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기단부 가장자리에는 로 만든 통같이 생긴 수조경복궁 영제교에 있는 것과 유사하게 생긴 서수 조각이 있다.

대부분의 자료에서는 대한제국 시기인 1900년대에 지었다고 설명하지만 의문이다. 당시에는 고종경운궁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 시대 임금들은 한 에 머물지 않고 여러 궁을 필요에 따라 활용했으므로, 고종이 경운궁에 있더라도 경복궁에 건물을 지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종이 경복궁을 떠난 것은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껴서였으며, 아관파천을 단행하고 경운궁에 머물면서부터는 아예 경복궁으로 환궁하는 것을 극히 꺼렸다. 더군다나 경복궁을 몇 년간 비우면서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모양인지, 궐내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다고 하며 심지어 광무 2년(1898) 9월 21일자 《매일신문기사를 보면 궁궐 담 아래에 이 많이 자라 사람들이 지나다니기도 힘들고 궁궐 문 밑에 인분이 쌓여 악취가 행인들의 코를 찔렀다고 한다. # 그렇게 될 때까지 방치한 경복궁에, 그것도 후원 깊숙한 곳에 번듯한 건물을 굳이 새로 짓는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건물 양식을 보아 1920년대에 지었다는 설도 있지만, 일제강점기일제조선총독부와 총독 관저를 신축하기 위해 경복궁 내부는 물론 후원의 건물들까지 철거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일본식 건물도 아니고 한옥을 굳이 지을 개연성 역시 떨어진다. 결국 지금으로서는 정확한 건립 경위와 연대를 알기 어렵다.
<colbgcolor=#bf1400> 침류각이 보이는 1955년 5월 18일 자 《대한뉴스》 - 〈경무대 소식〉. 2분 6초 참조.

한편 광복 이후 북원 자리에 경무대가 입주한 뒤 신축했다는 설도 있다. 다만 그렇다면 최소 1955년 5월 이전에 건립한 것은 분명하다. 1955년 5월 18일 자 《대한뉴스》- 〈경무대 소식〉에 침류각이 나오기 때문이다.

대통령 관저 신축 당시 오운정과 함께 옮겨졌으며, 1997년 12월 31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03호로 지정되었다.

5.5. 천하제일복지천(天下第一福地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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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humb_3696406434_Q7oaZqFT_4.jpg
<colbgcolor=#bf1400> 천하제일복지 각자와 천하제일복지천.
문을 닫아놓은 샘물 발원지 위로 석조여래좌상이 보인다.[31]
以東有玉蓮亭一間、以北有天下第福地泉。
동쪽으로 옥련정 1칸이 있고, 북쪽으로 천하제복지천[32]이 있다.
『궁궐지(宮闕誌)』

옥련정 권역의 계류(溪流)를 이루는 샘으로, 창덕궁 옥류천의 위이암(逶迤巖)과 같이 유상곡수(流觴曲水)를 염두에 두고 조성한 구역으로 보인다. 그 구조가 매우 독특한데, 북궐도형을 보면 3개의 수조를 놓고 거꾸로 뒤집은 갈 지(之) 자 모양을 그리며 수로가 연결되어 있다. 천하제일복지 각자 아래에 동그란 첫 번째 수조가 있었고, 그로부터 빠져나온 물이 두 번째 수조를 거친 뒤 좁은 수로를 통해 두 갈래로 빠져나가게 된다. 한쪽은 궁 바깥으로 연결되는 시냇물로 빠져나가고, 한쪽은 세 번째 수조로 흘러들어간 뒤 출수구(出水口)가 없이 고여 있도록 했다. 이는 세 수조 간의 수위를 일정하게 조절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파일:023천하제일복지천天下第一福地泉.jpg
<colbgcolor=#bf1400> 천하제일복지천의 현재 모습[33]

이곳은 북궐도형에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고 표기되어 있을뿐 별다른 유구가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대통령 관저를 신축할 때 天下第一福地 延陵吳据(천하제일복지 연릉오거)라는 각자가 발견되었다. 약 150년 정도 된 각자로 추정하고 있으며 중국 남송의 명필이었던 오거(吳据)의 글씨를 누군가 집자(集字)하여 새긴 것으로 추측된다. # 샘물은 마르지 않고 여전히 솟고 있으며, 현재는 어정(御井)이라고 불리는 대리석 누조와 석조가 설치되어 있고 그 위로 일제강점기 때 이곳으로 옮겨진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이 보호각 아래 안치되어 있다.

6. 경농재(慶農齋) 권역

파일:팔도배미.jpg
<colbgcolor=#bf1400> 경복궁 농포를 본떠 디자인한 영빈관 진입로[34]

농본주의(農本主義)를 표방했던 조선시대에는 중앙에서 백성들을 상대로 꾸준히 권농(勸農)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농사직설(農事直設)』과 같은 농사 지침서를 배포하고 개간사업을 진행했으며, 사직단에서 행하던 기곡제(祈穀祭)나 선농단에서 행하던 선농제(先農祭) 등 농사와 관련된 국가적 행사에 임금이 참석한 뒤 직접 농삿일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를 친경(親耕)이라고 하는데, 왕세자, 종친, 신하들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 다 함께 밭을 간 뒤 술을 내리게 하는 의식을 치렀다. 세종 대부터 『농사직설(農事直設)』의 농사법을 시험하기 위해 경복궁에 농포를 만들기 시작했고, 성종은 후원을 논과 뽕나무밭으로 만들어 농상지(農桑地)라고 부르는 등, 궁궐 안에서 한 해 농사의 풍흉을 가늠하고 농삿일의 노고를 직접 체험하는 '관경(觀耕)'을 행하기 위해 궁궐의 후원에 경작지를 조성하는 풍습이 생겨났다. 이는 동시대 중국이나 일본에서 발견되지 않는 한국 궁궐 조경의 독자적인 특성으로 평가받는다.[35]

창덕궁에는 청의정(淸漪亭)이 있었고, 창경궁에는 답십야미(沓十夜味)[36]와 한전(旱田)이 있었으며, 경희궁에는 회상전 농포가 있었다. 경복궁 중건 이후 북원을 조성할 때도 마지막으로 경농재 권역을 경작지로 만들면서 일제강점기 직전까지 이러한 풍습이 이어졌다.

이곳에는 경농재, 대유헌, 양정재, 지희실(至喜室) 등의 건물이 있었다. 가운데의 경농재에는 관풍루(觀豊樓)가 딸려 있어 논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게 하였다. 경농재 좌우에 각각 지희실과 대유헌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뒷편에 안채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이는 양정재가 있었다. '경농(慶農)'은 기쁜 마음으로 농사를 짓는다는 뜻이고, '관풍(觀豊)'은 곡식이 풍성하게 익은 모습을 바라본다는 뜻이며, '대유(大有)'는 오곡이 익어가는 모습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모두 농삿일과 풍년 기원에 관련된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양정재는 인원왕후가 태어난 곳의 이름과 동일하여 그곳에서 따온 것이라는 설이 있다.

상술했듯이 경복궁의 주축이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고종은 화재로 불탄 내전(內殿)이 복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정전(思政殿)이나 강녕전(康寧殿)을 이용하지 않고 경농재와 대유헌을 편전(便殿)처럼 사용했다. 또한 처음에 경농재 앞쪽에는 원형의 논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나, 주변에 있던 작은 건물들을 허물어 크게 중창할 때 논의 모양도 사다리꼴로 바뀌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논은 큰 구역 4개와 작은 구역 4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름이 '팔도배미'라 하여 전국 각 팔도에서 들여온 종자들을 각각 심었다고 전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파일:OWOIWPCTTRFYLGZYXFF7VD26IQ.jpg
<colbgcolor=#bf1400> 동아일보에 실린 대유헌과 경농재 관풍루의 모습[37]
[ruby(慶, ruby=경)][ruby(農, ruby=농)][ruby(齋, ruby=재)]를 [ruby(移, ruby=이)][ruby(建, ruby=건)]하야 파밀『호텔』 안에 민족 미슐관 일 년 안에 동양대학 분교 셜치

[ruby(東, ruby=동)][ruby(洋, ruby=양)][ruby(大, ruby=대)][ruby(學, ruby=학)][ruby(敎, ruby=교)][ruby(授, ruby= 수)][ruby(柳, ruby=류)][ruby(宗, ruby=종)][ruby(悅, ruby=렬)][ruby(氏, ruby=씨)] [ruby(談, ruby=담)]

동양대학교수 류종렬(東洋大學敎授 柳宗悅) 씨는 종래로 계획하야 오든 조선민족미슐관(朝鮮民族美術館) 셜립을 위하야 이삼일 젼에 경성에 도착하야 여러가지 일을 준비하는 중인대 (류종렬) 씨는 그 사업의 장래에 대하야 말하되 아쥭 어느 때부터 시작하야 개관을 하게 될는지 예측할 수 업스니 임의 당국에서 비러노은 경복궁 안에 잇는 경농재(慶農齋)는 위치의 관계와 기타 사정으로 미흡한 점이 업지 아니함으로 다시 뎍당한 곳을 구하는 중이더니 근일 남대문안 「파밀리」호텔 안에 이천여 평의 뷔인터를 어더서 전거 경농재를 그곳으로 옴기어보고자 하는대 그리하자면 자연 만흔 경비가 들고 영구한 시일을 요구할 터이닛가 매우 걱정되는 일이 만숨니다 그리고 이번에 내가 경성에 온 목뎍은 민족미슐관 셜립 이외에 동양대학 조선분교(東洋大學 朝鮮分校) 셜립을 위하야 그 준비를 하고자 왓습내다 동양대학에서 조선에 분교를 셜치하고자 하기는 년래로 경영하든 바인데 근일 아조 질병이 되여 일개년 후에는 실현될 터인 바 학과는 문학을 중심으로 동양쳘학(哲學)을 위주하야 가릇치고 그 외에 서양문학도 가릇칠 터이며 학생은 순전한 조선쳥년을 모집하야 교수할 터이라고 말하더라
『동아일보(東亞日報)』 1922년 1월 6일자
[ruby(移, ruby=이)][ruby(轉, ruby=전)]하는 [ruby(大, ruby=대)][ruby(有, ruby=유)][ruby(軒, ruby=헌)]

[ruby(四, ruby=사)][ruby(十, ruby=십)][ruby(五, ruby=오)] 년 전 건축한 고적으로 [ruby(各, ruby=각)] [ruby(道, ruby=도)] [ruby(農, ruby=농)][ruby(事, ruby=사)]를 [ruby(奬, ruby=장)][ruby(勵, ruby=려)]하시던 자취

경복궁(景福宮) 신무문(神武門) 밖 경무대(景武臺)에 잇는 대유헌(大有軒)이라는 건물이 이번 총독 관저 신축상 옴기지 아니할 수 없어 이제 헐려간다。이 건물은 명치 二十五년인 이태왕(李太王) 즉위 三十년 음력 四월 二十五일에 창건된 바로 지금부터 四十五년 전에 경농재(慶農齋) 속에다 신축된 것인데 대유는 곧 대풍(大豊)을 의미하는 것으로 황제가 직접 농원에 출어하야 각 도에서 들어온 종자로서 경운하는 것과 농사를 독려하시던 곳이다。근대에 와서는 총독부 관사로 사용하던 것인데 이 집은 三청동 뒷산 약물터 부근에 이전시킨다 하여 발견된 상량문(上樑門)은 어제(御製)로 붉은 비단 한 필 四十 척에 달하는 것으로 당시 교시강원검교필선(敎侍講院檢校弼善) 민경호(閔京鎬)의 본교근서(本敎謹書)인데 전중(田中) 통역관이 국어로 번역 중이다。(사진은 헐어지는 대유헌)
동아일보(東亞日報)』 1939년 03월 07일자

경농재를 비롯한 북원의 건물들은 1912년 이후 조선총독부가 관할하게 되었다. 1921년경 경농재 권역의 건물들은 총독부에 의해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조선민족미술관(朝鮮民族美術館)에 대여될 예정이었지만, 여러 사정으로 인해 대신 집경당을 대여해 주었다고 한다. 1937년까지의 도면에서는 건물들이 남아있었으나, 동아일보에 1939년 총독 관사 신축 사업으로 대유헌이 해체된 뒤 종로구 삼청동 약수터 부근으로 이전한다는 기사가 실린 것으로 보아 경농재 역시 비슷한 시점에 헐린 것으로 보인다. 삼청동에 있는 칠보사(七寶寺)의 법당이 이건된 대유헌일 가능성이 있다는 설이 존재한다.

2022년 문화재청이 용역한 조사에서 경농재 권역의 현 위치는 청와대 영빈관 옆 경호동 일대가 대부분으로 확인되었고, 영빈관 자리는 궁장(담장)과 문 일부만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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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2] #[3] 지금의 북한산.[4] 지금의 서울특별시.[5] 삼각산(三角山)은 현재의 북한산을 말한다. 삼각산 이름의 유래이기도 한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세 봉우리가 하늘로 솟은 모양을 풍수적으로 왕관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바로 아래에 도선국사가 지었다는 도선사라는 절이 있다. 풍수적으로 서울의 조산(祖山)인 삼각산에서 기운이 일어나 그 기운이 맺혀 일어난 곳이 서울의 주산(主山)인 북악산이고, 이로부터 좌(左) 청룡 낙산, 우(右) 백호 인왕산으로 나뉘어진다고 한다.[6] 조선에서의 풍수 논쟁에서도 삼각산(三角山)이 등장한다. 세종 대에 지관 최양원이 경복궁이 잘못 들어섰으며 승문원(承文院), 현재 현대그룹 계동 본사 사옥이 위치한 곳이 왕궁터라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자 풍수학 훈도(訓導) 최연원이 승문원 터가 좋은 터이기는 하지만 나무로 치면 작은 가지이며 어리석은 이가 보면 착각하기 쉬운 화혈(花穴) 즉 가짜 혈로서 삼각산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진혈(眞血)은 북악산으로 소소한 흠이 있다 하여도 그 높음을 상대할 수 없다며, 북악산 아래 터를 잡은 경복궁에 비할 바가 아니다며 반박하였다. 훗날 정주영 회장이 옛 승문원 터에 자리를 잡고 현대그룹을 일구어냈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었다.[7] 지금의 평양시.[8] 고려에 대한 예언들이 꽤 잘 맞았는지 최영 장군은 도참에 실린 지난 일들이 모두 다 입증되니 믿지 않을 수 없다며 한양 천도에 동의했다고 전해진다. 『도선비기』에는 조선에 대한 예언들도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조선이 들어서자 전부 다 회수해 없애버렸다. 그래서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들을 제외하고는 현재 『도선비기』라며 돌아다니는 내용들은 진위 여부를 확신할 수 없다.[9] 남경 별궁 터는 경복궁북악산 사이에 마치 공터처럼 남겨졌는데, 이것 때문에 후대에 청와대가 들어설 때 이곳은 일부러 풍수적 이유에서 남겨둔 곳이니 청와대가 들어서면 안 된다는 의견과, 고려시대부터 이어진 궁궐 터로 길지(吉地)이기 때문에 들어서야 한다는 의견이 부딪혀 갑론을박이 있었다. 위에도 기술되어 있지만 나중에 기록이 발견되면서 밝혀진 바로는 경복궁은 원래 고려 남경 별궁터에 들어서려고 했으나 터가 협소하여 약간 더 남쪽에 자리를 잡게 됐다고 한다.[10] 이때 경복궁을 대신하여 창덕궁이 조선의 정궁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 이후의 궁중 비사는 다수가 창덕궁 내에서 일어난 일이다.[11] 십일전 본당 건물은 조계사 대웅전으로 쓰이게 된다.[12] https://blog.naver.com/joonho1202/221449275781[13] https://blog.naver.com/sport_112/221272832555[14] https://blog.daum.net/aroma-may/9430790?category=32542[15] https://blog.daum.net/aroma-may/9430687?category=32542[16] 그러나 북궐도형에 추성문은 2칸인 것으로 되어있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금화문일 가능성도 있다.[17]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30739[18] https://blog.daum.net/aroma-may/9313912?category=32542[19] 사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20] 사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21] https://blog.daum.net/aroma-may/9313912[22] https://m.blog.naver.com/psyroad/220168562442[23] http://www.namdo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76029[24] 사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25] 남산까지 조망되는 위치상 옥련정 권역에서 찍은 사진일 가능성이 있다.[26] 사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27]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진 출처 - 서울역사편찬원.
[28] 총독 관저 신축 당시의 도면에 나타난 지형과 청와대 지형도를 비교하면 옥련정이 있었던 자리에 대통령 관저가 들어섰으므로, 오운정이 변형된 옥련정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29] https://www.koreascience.or.kr/article/JAKO201631261653935.pdf[30]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진 출처 - 서울역사편찬원.
[31] https://muchkorea.tistory.com/323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29286
[32] 일(一) 자가 빠진 오기(誤記)로 보인다.[33] https://blog.daum.net/aroma-may/9152528?category=32542[34] https://blog.daum.net/aroma-may/9090219[35] 정우진・심우경,「조선시대 궁궐 후원 농경지(農耕地)조영의 특성」, 『한국조경학회지』 제40권 4호, 2012, p.63 ~ 65[36] 야미(夜味)는 논의 경계를 일컫는 '배미'를 향찰식으로 표기한 낱말이다.[37] https://news.nate.com/view/20220510n33661?mid=n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