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 ||
<colbgcolor=#bf1400> 경복궁 양의문 景福宮 兩儀門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 |
건축시기 | 1867년 (창건 or 중건) 1875년 (중건) 1888년 (중건) 1995년 (복원) |
<colbgcolor=#bf1400> 양의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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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복궁 교태전의 정문이다.2. 이름
‘양의(兩儀)’ 뜻은 ‘음양(陰陽)’이다. 《주역》 - 〈계사상전〉과 《본의》 등 중국 옛 고전에서 용례를 찾아볼 수 있는 단어이다.동양 전통적 관념에서 여성은 음(陰), 남성은 양(陽)을 의미했다. 즉, ‘양의’는 임금과 중전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살라는 염원을 담은 이름이다.
3. 역사
창건에 관한 기록은 없다. 조선 초기 경복궁을 추정해 그린 그림 〈경복궁도〉를 보면, 교태전 정문이 따로 없고 교태전 본채가 강녕전, 경성전, 연생전과 복도로 붙어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추정이라 정말 저랬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만약 저 당시에 양의문이 있었다면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불탔을 것이다.공식 기록 상 양의문 기록은 1867년(고종 4년) 8월 18일 자 《고종실록》 및 《승정원일기》의 기사가 전부이다. 당시 경복궁 중건을 담당하던 경복궁 영건도감에서 각 건물과 문의 이름을 지어 고종에게 올렸는데, 이 때 교태전 남행각문을 양의문 · 대래문으로 정했다는 내용이다.
1873년(고종 10년)과 1876년(고종 13년)에 교태전이 화재로 사라졌다가 1888년(고종 25년)에 다시 지어졌다. 그런데 양의문도 교태전과 같이 불탔다 재건되었는지는 모른다.
일제강점기였던 1917년 11월에 창덕궁 내전 핵심부가 불탔다. 조선총독부 산하 이왕직에서 재건할 때 경복궁 내전 건물을 자재로 쓰면서 해체, 이전하여 대조전의 정문 선평문이 되었다. 이후 80년 가까이 빈 터로 남아있다가 문화재관리국에서 경복궁 종합 정비 계획 사업의 일환으로 1995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4. 구조
- 1층[1] 목조 건물이다. 칸 수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총 6칸이다. 기단은 장대석 1벌대로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계단도 따로 없다. 주춧돌과 기둥은 사각이다.#
- 지붕은 맞배지붕, 처마는 홑처마로,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그 위에 용두와 취두를 두었다. 문짝과 측면의 벽은 붉은색 나무판이다. 문의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다. 단청은 모로단청[2]으로 칠했다.
- 왕이 다니는 가운데 칸을 양 옆 칸과 다르게 만들었다. 넓이도 더 넓고 문의 높이도 더 높다. 문짝도 가운데 칸은 6판이나 양 옆은 4판이다.
- 각 칸의 인방 위에 풍혈을 뚫은 궁판을 올렸다. 좌, 우 칸의 경우, 위, 아래 7개 씩 총 14개의 풍혈을 뚫은 궁판이 놓여있으나[3] 가운데 칸의 경우, 풍혈 10개 뚫린 궁판 하나를 올렸다. 궁판들 위에 홍살을 놓았으며 가운데 칸 궁판에 현판을 걸었다. 천장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 남쪽에서 바라볼 때 기준으로, 양의문 양 옆에 굴뚝이 있다. 교태전 온돌이 아니라 강녕전 온돌을 떼고 생긴 연기가 나가는 굴뚝이다.[4] 행각과 붙어있는 형태로, 몸체는 황색 벽돌로 쌓고, 가운데에는 삼화토 등으로 무늬를 내어 아름답게 장식했다. 동쪽 굴뚝에는 문자도(文字圖) ‘천세만세(千世萬歲)’, 서쪽 굴뚝에는 ‘만수무강(萬壽無疆)’을 새겨놓았고 주변에 무시무종[5] 무늬를 장식해두었다.
5. 여담
5.1. 현판 논란
<colbgcolor=#bf1400> 현재 양의문 현판 |
[1] 보통 전통 건축에선 단층이라고 표현한다.[2] 부재 끝부분에만 문양을 넣고 가운데는 긋기로 마무리한 단청이다.[3] 윗 궁판의 경우, 6개는 온전히 뚫었으나 1개는 반으로 나누어 배치했다.[4] 교태전 온돌에서 생긴 연기는 아미산 굴뚝으로 나간다.[5] 시작도 끝도 없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