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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보물 제1760호 | |
경복궁 수정전 景福宮 修政殿 | |
소재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
수량 | 1동 |
지정연도 | 2012년 3월 2일 |
제작시기 | 조선 시대, 1867년 창건 |
<colbgcolor=#bf1400> 수정전[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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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복궁의 편전 중 하나이다.경회루의 바로 남쪽, 근정전의 서쪽에 있으며 남향이다. 궁궐 내 관청들인 궐내각사와 임금이 머무는 내전 사이에 있어 왕과 신하들이 만나기 편한 곳이었다.
2. 이름
'수정(修政)' 뜻은 '정사(政)를 잘 수행(修)한다'이다. 현판 글씨는 건립 당시 도승지였던 조석원(曺錫元, 1817~ ?)이 썼다.3. 역사
조선 초기에는 없었고 수정전 언저리에 그 유명한 집현전이 있었다.[2] 수정전 자체는 1867년(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처음 지었으며 사정전과 함께 편전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때로는 이 곳에서 행사를 거행하고 어진을 잠시 모셔두기도 했다.# 이 때에는 주변에 200칸 가까운 행각들이 있었고 북행각과 수정전 본채가 복도로 연결되었으며 궐내각사에 해당하는 수많은 전각들이 경복궁의 서쪽 대문인 영추문까지 즐비해 있는 등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colbgcolor=#bf1400> 건물 양 측면에 복도가 있는 수정전 |
<colbgcolor=#bf1400> 일제강점기 수정전 | <colbgcolor=#bf1400> 전시실로 변한 수정전 내부. 중앙아시아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
2000년에 보수 공사와 함께 내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경복궁 1차 복원 공사 5단계(1997년 ~ 2001년)에 국가유산청에서 수정전의 행각을 복원할 예정이었지만 계획대로 하지 못했다. 이후 2차 복원 때 포함시켰지만 2차 계획을 축소하면서 다시 무산시켰다. 계속해서 복원을 무산시킨 이유는 상술했듯이 《북궐도형》작성 시 이미 건물이 철거되어 건물의 전체적인 구조만 알 수 있을 뿐, 상세한 구조는 모르기 때문이다.
4. 정문
자세한 내용은 경복궁 숭양문 문서 참고하십시오.5. 구조
- 정면 10칸, 측면 4칸의 1층[5]이다. 장대석을 높게 쌓은 6단의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네모난 기둥을 세운 뒤, 겹처마 양식으로 지었다. 공포는 쇠서[6] 2개를 둔 이익공이고 기둥 사이마다 화반을 놓은 뒤 그 위에 운공을 설치하였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취두와 용두, 6개의 잡상을 설치하여 장식하였으며, 단청은 모로단청[7]으로 칠하여 깔끔하면서도 화려한 모습을 뽐내게 하였다.
- 건물 남쪽 전면에 큰 월대를 두었다. 월대는 4단이고 월대 윗 부분은 박석으로 마감했다. 계단은 월대 정면에 3개, 측면에 2개, 총 5개가 놓여있고 그 중 임금이 다니는 정면의 가운데 계단은 소맷돌을 두어 다른 계단과 차별화시켰다. 가운데 계단과 그 왼편에 있는 계단 사이엔 무늬가 새겨진 댓돌이 있다.
- 기단 양 측면에 나무로 된 문이 보이는데 온돌에 불을 지피는 아궁이다. 불을 때면서 나오는 연기를 배출할 굴뚝을 수정전 건물 바로 뒤에 두 개를 놓았는데, 별다른 무늬없이 그냥 벽돌을 길이쌓기하고 그 위에 한옥처럼 기와 지붕을 올린 뒤 흙으로 구워 만든 배출구를 올렸다.[9]
<colbgcolor=#bf1400> 수정전 내부[10] |
- 내부는, 가운데 정면 3칸, 측면 2칸을 대청으로 놓았는데 대청은 서쪽으로 치우쳐있으며, 칸을 나누지 않고 한 공간으로 뚫어 넓게 쓸 수 있게 하였다. 천장은 우물 반자[11]로 막고 마루는 우물 마루로 놓았다. 대청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동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두었으며 온돌방과 대청 주변을 전부 툇간이 둘러싸고 있는데, 남쪽의 툇간은 다른 면의 툇간보다 남, 북 축의 길이가 훨씬 길다.#
<colbgcolor=#bf1400> 수정전 내부 장지문[12] |
<colbgcolor=#bf1400> 《북궐도형》의 수정전 및 행각 내부 구성도 |
-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행각은 수정전을 3중으로 둘러싸고 가장 남쪽의 남외행각에는 정문인 숭양문(崇陽門)과 남외행각 서쪽에 수정전의 음식을 만들던 곳인 대전 수랏간(大殿 水剌間)이 연결되어 있었으며, 중행각에는 중문인 영화문(永和門)이, 남행각에는 수정문(修政門)이, 수정전의 복도는 동쪽의 사정전 서행각과 서쪽의 각 관아의 서리(書吏)가 쓰던 대전장방(大殿長房)과 연결되어 있으며 마지막으로 북행각은 동쪽부터 융지문(隆智門),장원당(章元堂),협오당(協五堂),습회당(習會堂)이 있었다. 위에도 언급되다시피 2차 복원에서 수정전의 행각과 대전 수랏간(大殿 水剌間)을 복원하려 했지만 2차 복원 계획의 축소로 취소되었다.
6. 여담
7. 매체에서
궁궐 촬영이 비교적 쉬웠던 2000년대 이전 조선을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배경으로 꽤 나왔다.<colbgcolor=#bf1400> 〈용의 눈물〉 159화에 나온 수정전 |
<colbgcolor=#bf1400> 〈무한도전〉 - 궁 밀리어네어 특집에 나온 수정전 관련 영상 |
[1]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립문화유산포털.[2] 확실하게 현재 수정전 자리라고 단정할 수 없어 그 언저리라고 표현하였다.[3] 1907년(광무 11년)에 작성된 《북궐도형》에서는, 작성 당시에 이미 헐린 건물도 모두 다 이제는 없다는 뜻인 '금무(今無)'라 표기하여 작성했다. 수정전 권역의 경우, 숭양문 행각 외에 다른 행각은 모두 '금무'로 쓰였다.[4] 오늘날 국립민속박물관의 전신.[5]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6] 소 혀 모양의 부재.[7] 끄트머리만 칠하는 단청.[8] 高柱, 이름 그대로 굉장히 높은 기둥을 말한다.[9] 이 배출구는 꼭 집처럼 생겼다하여 연가(煙家)라고 부른다.[10]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립문화유산포털.[11] 서까래가 안보이게 천장을 가리고 평평하게 만드는 구조물.[12]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립문화유산포털.[13] 이전에는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경축식을 열었으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확산을 막고 일부 보수단체들의 반정권 시위를 차단하기 위해 광화문광장을 폐쇄하면서 경복궁에서 소규모로 기념식을 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