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관아의 부속시설 (客舍)
전주객사(全州客舍). 전주 시내 번화가에 있는 문화재로 정식 이름은 풍패지관(豊沛之館)[1] 보물 제 583호 |
나말여초때부터 세워지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조선 중기까지 그다지 보편적이지 않은 건물이었다. 조선 이전에는 국가적으로 불교를 신봉해 전국에 규모 있는 사찰이 많았고 이들이 관리나 사신들의 숙소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따로 객사를 지역별로 만들 이유가 적었다. 사찰은 조선시대 초기 이후에도 숙소로 많이 이용되었지만, 숭유억불이 오래 지속되면서 평지의 대형 사찰은 사라지거나 일부는 객사로 개조되고,[3][4] 교통로와 거리가 있는 산중턱의 중소규모 사찰 위주로 살아남았기 때문에 이젠 평지의 도시에 따로 숙박시설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객사는 주로 평안도와 경상도에 집중되었으나 성종때 사림파를 등용한 이래로 전국적으로 세워지기 시작했다. 향촌에 성리학을 보편화시키기 위해 객사의 중심 건물인 정청에 궐패(闕牌)[5]를 안치해 삭망월 등에 망궐례를 행하기 시작했고, 임진왜란을 거쳐 18세기에 들어서 보편화되었다. 수령을 비롯한 관원들이 초하루와 보름, 명절, 그리고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전패(殿牌)[6]를 북쪽에 안치하고 그 앞에서 절하는 망궐례(望闕禮)가 이루어지던 곳이다.
또한 객사는 중앙으로부터 임금의 뜻을 받들고 내려온 사신들을 머물게 하며 접대하던 건물이기도 하였으며, 관찰사가 순시차 들르면 잔치를 벌이거나, 백성들에게 향시를 베풀기도 하였다. 이런 이유로 객사는 각 지방에서 가장 경치 좋은 곳에 세워지거나 관아와 나란히 지어지곤 하였다. 관사(館舍) · 객관(客館)이라고도 하였다.
보통 객사 건물은 건물 중앙부에 정청이라고 부르는 건물을 만들어 놓고 그 좌우에 익헌이라고 불리는 길쭉한 형태의 건축물을 연결하는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중앙부에 두는 정청은 좌우익헌보다 약간 높이가 높았다.
객사(드라마)의 객사도 이 객사이다.
1.1. 현존하는 객사건물
조선시대의 관아 건물들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었지만, 객사만큼은 현재까지 살아남은 비율이 많은 편이다.그외 객사에 딸린 누(樓)로는 밀양객사의 영남루와 제천객사의 한벽루, 성천객사의 강선루, 안변객사의 가학루가 있다.
1.2. 전주 객사길
전주시 객사가 유명한 이유는 전주 객사길이 유흥가이자 구 도심, 시내이기 때문이다. 광주광역시의 충장로와 비슷한 분위기와 포지션의 시내. 옷가게와 NC웨이브 전주점 , 맛집, 레스토랑들이 입점해 있다. 전주에서 '시내 가자' 라는 뜻은 객사에 가자는 뜻. 중고등학생들이 많다. 특히 전주국제영화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2. 객지에서 죽음 (客死)
이 분야의 전설[15] |
객사(客死)는 집이나 병원, 양로원처럼 죽음을 염두에 둔 장소가 아닌[16], 객지에 나가있다가 병이나 사고 등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사망하는 것을 말한다. 주로 심혈관계 질환처럼 건강 상태와 악화 상태의 격차가 심한 병증으로 죽는 경우가 많다.
과거 농경사회에선 역마살이란 말마따나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을 불행히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거기에 죽기까지 한다는거니 객사는 죽음 가운데서도 자살과 더불어 매우 불행한 죽음으로 간주되었다. 객사할 팔자란 말도 있듯 단어 자체가 약간 불운, 저주의 의미도 있다.[17] 미신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친지 얼굴도 못 본채 죽기 때문에 미련이 남아 죽어서도 악령이 되기 쉽다고 한다. 다만 객사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외지에서 죽는 것도 억울한데 악령 드립까지 치니 상당히 불쾌할듯.
타살된 경우는 객사라고 부르는 경우가 드물다. 애초에 타살이라는게 외지에서 당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 데다 방식도 인위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불행한 죽음이란 점에선 도긴개긴이긴 하다만.
자살 역시 객사라고 부르는 경우가 드문데, 사망 장소가 어찌되었든 애초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의도한 죽음이기 때문이다.
2.1. 사례
- 두경승: 유배지에서 울분으로 피를 토해 죽었다.
- 박술희: 유배지에서 살해됐다.
- 이백: 방랑 생활 도중 이양빙의 집에서 사망했다.
- 두보: 방랑 생활 도중 동정호를 지나던 배 안에서 병사했다.
- 김삿갓: 방랑 생활 도중 지인의 집에서 사망했다.
- 이색: 이천의 어느 나루터에서 배를 타려다 숨을 거두었다.
- 허엽: 집에 돌아오다가 경상도 상주 객관에서 숨을 거두었다.
- 민무구, 민무질: 유배지에서 태종에게 사약을 받고 죽었다.
- 민무휼, 민무회: 유배지에서 태종에게 자결하라 명을 받아 자결했다.
- 톨스토이: 열차를 타러 간 역에서 쓰러져 역장실로 옮겨졌으나 숨을 거뒀다.
- 유진 오닐: 호텔 방에서 태어나 호텔 방에서 죽었다.
- 다케다 소가쿠: 평생을 떠돌다 객사했다.
- 크리스 맥캔들리스: 촉망받던 우등생이었다가 야생에서의 삶을 동경해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 비참하게 객사했다.
- 신익희: 열차 안에서 죽었다.
- 김일성: 남북정상회담 숙소로 쓰일 묘향산 특각을 둘러보다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다.
- 김정일: 열차 안에서 죽었다.
- 진시황: 전국 순행 도중 병사했다.
- 아베 신조: 길거리 유세 도중 총격에 피살되었다.
- 이고: 궁궐로 들어가던 도중 이의방에게 철퇴를 맞고 살해됐다.
- 이이: 대사동에서 과로로 병사했다.
- 이행: 유배지에서 병사했다.
- 정철: 유배지에서 굶어 죽었다.
- 소유즈 11호 비행사들: 재진입 도중 밸브가 열려 우주에서 죽었다.
- 심정: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 김안로: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 유재하: 자신의 가수 데뷔앨범을 내고 얼마 안 지나 동창회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친구의 차 안에서 교통사고로 객사했다.
- 올로프 팔메: 영화를 보고 집으로 가던 중 피살당했다.
- 페르 알빈 한손: 밤늦게까지 일하고 전차(電車)를 타고 퇴근하는 길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 의안대군: 자신의 동복형 무안대군과 함께 귀양길에서 살해되었다.
- 무안대군: 자신의 동생 의안대군과 함께 귀양길에서 살해되었다.
- 우왕: 유배지에서 참수됐다.
- 박정희: 궁정동에서 김재규의 총을 맞고 죽었다.
- 차지철: 궁정동에서 김재규의 총을 맞고 죽었다.
- 창왕: 유배지에서 참수됐다.
- 서세원: 캄보디아의 의료센터에서 링거 주사를 맞다가 쇼크사했다.
- 세르지오 마르치오네: 취리히 대학병원에서 침윤성 육종 합병증으로 발병으로 사망하였다.
- 김기덕: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한 급격한 합병증으로 라트비아 리가 스트라디나 대학병원에서 사망하였다.
- 김태호: 전북 군산시의 어느 라이브카페에서 자선공연에 참여했다가 어느 선원이 외상값이 안 맞아 분노하여 저지른 방화에 휘말려 죽고 말았다.
- 점보 츠루타: 말년에 미국 주립대 객원교수로 일하다 간염으로 필리핀에서 간 이식 수술 중 사고로 쇼크사하였다.
- 임종식: 보현원에서 무신들에게 살해됐다.
- 한뢰: 보현원에서 무신들에게 살해됐다.
2.2. 객사의 유형
[1] 원래 한고조 유방의 고향 및 주변 지역을 합쳐서 풍패(豊沛)라고 불렀던 것이 이후 역대 왕조 창업자들의 고향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의미가 확장되었다.[2] 일례로 부산 동래구에 존재했던 동래 객사는 서양식 창을 달아 학교로 사용되었다.[3] 부여군 부여객사가 대표적으로, 주춧돌 등에서 사찰을 개조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4] 그 외에 고려 멸망 후 역할을 잃은 사찰들은 향교나 서원으로 개조되기도 했다.[5] 한양에 있는 왕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수령이 왕의 지시에 따라 고을을 다스리는 의미에서 비치해 두었다.[6] 조선 임금을 상징하는 의미로 전각 전(殿) 자를 새긴 나무 패. 크기나 모양은 제사에 사용하는 위패와 거의 같았다. 중국 사신들이 올 만한 장소에는 중국 황제를 상징하는 궐패(闕牌)도 만들어서 전패와 함께 배치하였으나, 그렇지 않은 곳에는 전패만 두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전패를 없애고 대한제국 황제를 상징하는 의미로 궐패만 사용하도록 했다.[7] 전기 객사는 정청과 좌우의 익실 건물이 분리되어 있다.[8] 고령객사는 1930년대에 사라졌다.[9] 중앙부와 우익헌 건물이 헐리고 좌익헌만 남아 원래 위치에서 이전되었다. 때문에 건물의 형태가 한쪽은 팔작지붕인데 한쪽은 맞배지붕인 특이한 형태이다.[10] 이미 고려시대부터 존재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11] 후기 객사는 정청과 좌우의 익실이 합쳐져 있다.[12] 지금은 옥천지관(玉川之館)이라는 현판을 달았다.[13] 1972년에 지금의 다대초등학교 부지에 있던 건물을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고 다대포 객사라는 이름으로 문화재 등록을 했다. 최근인 2020년에 와서야 이 건물이 다대포객사가 아니라 다대포 관아의 동헌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다대진 객사는 1904년 다대포사립실용학교 개설 전인 1900년에 이미 철거된 상태였다고 한다.# 현재는 "다대진 동헌"으로 등록.[14] 고창군 흥덕면에 소재한 건물로 이곳 역시 1993년 해체복원 과정에서 "순조 7년(1807년)에 이건된 동헌"이라는 상량문이 나오면서 객사가 아니라 동헌 건물임이 확인됐다.[15] 야인시대 한정으로, 실제 김두한은 자택에서 숨졌다.[16] 과거 아주 보수적인 집에서는 병원에서 죽는 것도 좋지 않게 생각했으나 현재는 오히려 집에서 죽으면 일단은 변사 사건으로 되어 유족들이 경찰 및 소방 당국에게 범죄 혐의 등을 의심받아(가족을 살해하는 사건도 빈번하기 때문에) 간단하게라도 조사를 받아야 하는 과정이 번거로워지기 때문에 집에서 지내다가도 임종 전에는 병원으로 다시 옮겨 병원에서 임종을 맞게 하는 경우가 더 많아져 지금은 병원에서 죽는 것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다.[17] "나가 죽어라", "나가 뒈져라"란 표현 역시 이 객사 저주와 연관이 되는 욕설이다. 지금이야 사회가 바뀌어서 별로 심한 욕 같이는 안 들리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