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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성왕릉으로 추정되는 송산리 6호분(우측) 전경. | |||
| <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출생 | 468년 추정[1] | ||
| 왜국(?) (現 일본국) | |||
| 즉위 | 479년 11월 | ||
| 백제 웅진성 (現 충청남도 공주시) | |||
| 사망 | 501년 12월 (향년 32~33세 추정) | ||
| 백제 웅진성 (現 충청남도 공주시) | |||
| 능묘 | 송산리 6호분 (추정) | ||
| 재위기간 | 백제 제24대 국왕 | ||
| 479년 11월~501년 11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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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 | 모대(牟大)[2] · 마모(摩牟) 대(大) · 마제(麻帝)[3] 말다(末多)[4] 마동(麻童)(?) | ||
| 부모 | 부왕 좌현왕 부여곤지 모후 미상 | ||
| 형제자매 | 5남 중 차남(?)[5] | ||
| 배우자 | 왕후[6] | ||
| 자녀 | 1남 이상? 왕자[7], | ||
| 후손 | 동성도천(?)[10] | ||
| 종교 | 토속 신앙 | ||
| 시호 | 동성왕(東城王) | ||
| 별호 | 모대왕(牟大王) | ||
| 말다왕(末多王) | }}}}}}}}} | ||
1. 개요
백제의 제24대 군주(건길지). 이름은 '모대(牟大)', '마모(摩牟)'[11], '마제(麻帝)'[12], 《일본서기》에는 '말다(末多)'. 중국 역사서와 《삼국유사》<왕력> 편에는 '여대(餘大)'로 나타난다. 이 때문에 '마동(薯童) = 서동(薯童)'으로 서동요의 서동이 백제 동성왕이라는 설도 있다. 실제로 이 시기 신라의 소지 마립간이 백제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찬 비지의 딸[13]이 동성왕과 결혼해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연계성을 완전히 부정하기 어렵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담력이 컸고 특히 궁술이 뛰어나서 활을 쏘면 백발백중이었다고 한다.#
2. 생애
문주왕의 동생인 부여곤지의 아들로 권신 해구의 반란을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한 진씨 세력에 의해 왕위에 올랐는데 중국 측 사서를 신뢰하여 동성왕을 문주왕의 아들로 보는 가설도 있다. 무령왕릉이 발굴되면서 동성왕이 무령왕보다 나이가 적은 것으로 밝혀졌는데, 그런데도 왜 동성왕이 먼저 임금이 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은 동성왕이 문주왕의 아들이었다고 한다면 자연스레 해명할 수 있는 부분이기는 하다. 하지만 《삼국사기》 등 대부분의 기록에는 부여곤지의 아들로 나와 있기 때문에 이 설의 근거는 빈약한 실정이다.기록대로 부여곤지의 아들이라면, 형 무령왕처럼 일본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서기》에는 479년 동성왕이 즉위할 당시 유년(幼年)이었다고 전하며, 이를 바탕으로 최소 10대 초반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점에서 진씨 세력이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두기 쉬운 어린 왕손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나이로 보아 형인 부여사마(무령왕)가 즉위하는 것이 순리였으나, 성인이 된 부여사마는 제어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동성왕을 새 왕으로 세웠다는 것이다.
다만 이름인 ‘말다’가 ‘맏’으로 읽힌다는 점, 무령왕이 개로왕의 후궁 소생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부여곤지의 적자는 무령왕이 아니라 동성왕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동성왕이 백제로 귀국할 때 일본 측은 츠쿠시국(지금의 후쿠오카) 군사 500명을 호위로 붙였으며, 이들 병력과 파견된 일본 장수들은 이후 고구려와 전투를 벌였다고 전한다.
是歲, 百濟調賦, 益於常例. 筑紫安致臣馬飼臣等, 率船師以擊高麗.
이 해에 백제가 바친 조부(調賦)가 평소보다 많았다. 츠쿠시의 아치노오미(安致臣)와 우마카히노오미(馬飼臣) 등이 선사(船師)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쳤다. - 《일본서기》 유랴쿠 23년 (479년)
이 해에 백제가 바친 조부(調賦)가 평소보다 많았다. 츠쿠시의 아치노오미(安致臣)와 우마카히노오미(馬飼臣) 등이 선사(船師)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쳤다. - 《일본서기》 유랴쿠 23년 (479년)
결과적으로 진씨 세력이 삼근왕을 버리고[14] 동성왕을 옹립한 선택은 스스로를 무너뜨릴 호랑이를 왕위에 올린 최악의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차라리 진씨 세력의 지원을 받으며 국정을 운영하던 삼근왕을 계속 내세우는 편이 나았을 정도로, 이들의 기대는 처참하게 배신당했다.
삼근왕은 권신 해구를 숙청할 때 진씨 귀족 세력의 도움을 받았고, 해구 제거 이후 진씨 세력이 권력 전면에 등장했다. 그러나 권력을 더 확고히 하려던 진씨 세력은 정치적으로 유능한 삼근왕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동성왕이 자신들의 입맛대로 조종하기 좋다고 판단, 삼근왕을 제거하고 동성왕을 옹립했다.
문제는 진씨 세력이 동성왕의 진짜 성향을 간과했다는 점이었다. 동성왕은 야심이 크면서도 이를 철저히 숨길 만큼 정치 감각이 뛰어난 인물[15]이었다. 동성왕은 즉위 초반 외교와 국방에 집중해 자신의 입지를 다졌고, 그 성과를 발판으로 진씨 세력에 예속되지 않는 독자적 기반을 구축했다. 그리고 마침내 즉위의 최대 공신이었던 진씨 세력을 전격 숙청하며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481년(동성왕 3년), 고구려와 말갈 연합군이 신라 북쪽 변경을 침공하자, 백제는 신라 및 가야와 연합하여 이를 격퇴했다. 이 전투는 <백제본기>에는 기록이 없고, <신라본기>에만 전한다. 482년 9월에도 말갈이 다시 침입했으며, 이때 역시 고구려와의 연합 공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평가받고 있다. 한편 484년(동성왕 6년)에는 중국 남조(南朝) 남제(南齊)에 사신을 보내려 했고, 485년(동성왕 7년)에는 신라에도 사신을 파견하는 등 군사 활동 뿐만 아니라 외교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또한 《일본서기》에 따르면 487년에는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 生磐宿禰)의 반란으로 가야가 혼란에 빠지자 백제가 개입해 가야 연맹 내 영향력 확대를 꾀했다. 기록상으로는 가야 측에서 백제에 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489년(동성왕 11년), 남도 바닷가의 농부가 두 이삭이 합쳐진 벼를 바쳤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를 근거로, 근초고왕대 경략 이후에도 현지 세력을 인정하는 불완전한 지배에 머물렀던 현재 전라도 지역의 마한 세력이 이 시기에 완전히 병합되었고, 중앙에서 지방관을 직접 파견하는 체제로 전환되었다는 해석이 있다. 다만 전라도 동부의 섬진강 유역은 동성왕 이전 백제의 혼란기를 틈타 대가야가 차지했었는데, 당시 백제는 내분과 국력 약화로 이를 적극적으로 문제 삼지 않았고, 동성왕 재위기에도 가야와의 우호 관계도 유지했다. 이 지역에 대한 탈환 시도는 후대인 무령왕 대에 들어서야 본격화되었으며, 결국 대가야를 몰아내고 전라도 전역에 대한 영유권을 확보하게 된다. 현재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은 동성왕이 파견한 왜계(倭系) 지방관의 묘라는 견해도 있다.
493년(동성왕 15년), 신라의 군주 소지 마립간에게 정략결혼을 제안하여, 이찬 비지의 딸을 백제로 맞아들였다. 이어 494년(동성왕 16년)과 495년(동성왕 17년)에는 고구려가 번갈아 백제와 신라를 침공하자, 신라와 연합해 이를 격퇴하며 나제동맹을 한층 공고히 했다.
498년에는 공물과 세금을 바치지 않는 탐라국(오늘날의 제주특별자치도)을 직접 정벌하고자 무진주(오늘날의 광주광역시)까지 진군했다. 그러나 탐라국이 항복하자 무력 사용을 중지하고 이를 속국으로 편입했다. 이 시기 백제의 중심지가 충청도였음을 고려하면, 전라도 지역을 완전히 장악해야 제주도와 안정적으로 연결할 수 있었고 이를 종합하면 탐라국 정벌 시도가 항복으로 마무리된 사실은, 이미 앞서 언급한 전라도의 마한 지역의 합병이 거의 완료되었다는 정황으로도 해석된다.
이외에도 국방 강화에 계속 힘쓴 정황이 나타나는데 반란의 원인으로 언급되는 잦은 사냥도 실제로는 군사 훈련의 성격이 강했다는 해석이 많다. 이러한 노력 끝에 백제는 군사력을 어느 정도 회복했고, 한때 한강 이남 깊숙이 밀려났다가 이 시기부터 다시 한강 유역으로 진출해 고구려와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애초에 문주왕 시기에도 백제가 한강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라는 견해가 있으나, 동성왕 이전의 백제 상황을 고려하면, 설령 영토를 유지했더라도 실질적 관리 능력은 크게 부족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나제동맹은 사서에 분명하게 명기된 것은 아니지만, 동성왕 재위 후반에 이르러서는 균열의 조짐이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동성왕 즉위 과정과 맞물려 발생한 키노 오이와노스쿠네의 반란 이후, 백제와 불편한 관계가 된 반파국(대가야)이 오히려 신라와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고구려가 남하할 때마다 서로 구원병을 파견하던 백제와 신라의 관례도 어느 시점부터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501년(동성왕 23년)에는 신라가 백제의 침공 가능성에 대비해 탄현에 방어선을 설치하기도 했다. 당시 문헌에는 炭峴이라 표기되어 있으며, 오늘날 경기도 고양시의 탄현역과 한자는 같지만 위치는 전혀 다르다. 현재의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일대가 그 지점으로 추정된다.관련 링크
물론 이후에도 백제와 신라가 직접적인 충돌을 벌인 것은 이보다 훨씬 이후인 관산성 전투(554) 때로, 신라의 한강 유역 병합을 계기로 나제동맹이 본격적으로 붕괴되었다고 보는 정설은 약 50년 뒤에나 적용된다. 그러나 동성왕 말년 무렵에는 이미 양국 관계의 밀착도가 크게 약화되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애초에 백제와 신라는 오랜 앙숙 관계였으며, 491년 장수왕이라는 공동의 적이 사망한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거리가 벌어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왕은 웅진성(공주) 천도 이후 혼란스러웠던 정국을 수습하고 나라를 어느 정도 안정시켜, 훗날 무령왕 시기의 중흥으로 이어지는 기반을 닦았다. 이때문에 흔히 백제의 중흥군주 중 한 명으로 평가되며 긍정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말년에 접어들면서 그는 정사를 멀리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었다.
499년(재위 21년) 한산 지역에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 아사자가 속출하고, 무려 2천여 명이 고구려로 도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신하들이 창고를 열어 구휼할 것을 간언했으나 동성왕은 이를 묵살하였다. 오히려 이듬해 봄에는 웅진성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세우고 동물을 기르는 화려한 정원을 조성하는 데 몰두하였다. 나아가 간언조차 번거로워하여 궁궐의 문을 닫아버렸으니, 말년의 치세가 타락과 방종으로 얼룩졌음은 분명하다.
결국 501년(재위 23년) 겨울, 동성왕은 사비 서원에서 사냥을 즐기던 중 폭설로 머무르던 틈을 타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의 반란에 휘말렸다. 백가는 왕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더구나 가림성으로 좌천된 데 원한을 품어 군세를 일으킨 것이다. 동성왕은 소식을 듣고 궁궐로 돌아가려 했으나, 백가의 군세가 왕의 사냥단을 급습하여 신하와 근위병들을 학살하였고, 왕 역시 도주하다 붙잡혀 암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다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의 승하는 동년 11월조에 기록되었으나 본문에는 “12월에 이르러 승하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는 왕이 습격 직후 즉사한 것이 아니라 중상을 입고 웅진성으로 돌아온 뒤 잠시 생존하다가 결국 12월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16] 《일본서기》 또한 《백제신찬》을 인용하여 “말다왕이 포악무도하였으므로 국인(왕경인)이 그를 제거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한편 성왕 시기에 사비로의 천도가 비교적 짧은 준비 기간에도 이루어진 사실에 비추어, 이미 동성왕 재위 후반부터 천도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해석도 제기된다. 이에 따르면 동성왕이 죽기 직전 사비 서원을 찾은 것은 단순한 사냥 때문만은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
시호(諡號)는 동성왕(東城王)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그의 아들이 훗날 무령왕이 된 부여사마라고 전해지지만, 《일본서기》에 따르면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이거나 혹은 부여곤지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사촌, 혹은 이복형에 해당한다. 무령왕릉 발굴 결과 무령왕이 461년 또는 462년에 태어난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는 468년생으로 추정되는 동성왕이나 465년생인 삼근왕보다 연상이 된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해당 기록은 오기로 보는 견해가 확실시된다.
동성왕의 무덤은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 가운데 송산리 6호분이 바로 동성왕릉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있다.
3. 미스터리
3.1. 북위와의 전투
동성왕 시대에 백제가 탁발선비족의 북위와 교전을 벌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상세 내용은 문서 참조.#!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백제-북위 전쟁#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백제-북위 전쟁#|]]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2. 최후에 대한 의혹
동성왕은 재위 말년에 접어들면서 의도적으로 신진 세력들을 등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웅진 천도 이후 문주왕과 삼근왕을 거치면서 약화되었던 부여씨 왕권을 다시금 부흥시키려는 의도로 풀이할 수 있다. 한성에서 함께 내려온 구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웅진 출신의 신진 세력을 중용한 것이다.문제는 동성왕 시해를 사주한 백가는 견제의 대상인 구 귀족 세력이 아니라 동성왕이 등용한 신진 세력이었다. 백제의 대성팔족 중 하나인 백씨 가문은 웅진의 귀족이었고, 백가는 동성왕이 직접 위사좌평에 임명한 인물이었다. 위사좌평은 오늘날 대통령경호실장에 해당되는 위치였기 때문에 사실상 백가는 동성왕의 최측근이라고 봐도 좋을 인물이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성왕은 백가를 새로 신축한 가림성[17]의 성주로 임명했다. 백가는 이에 불만이 있었는지 병을 핑계로 가림성으로 부임하지 않으려 했으나 동성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자객을 보내 왕을 암살했다고 전한다. 이후에 백가는 가림성으로 도망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후사를 이은 무령왕이 보낸 토벌군에 제압당한 뒤 항복해 그대로 처형되었다.
이 부분에 근거해 동성왕의 죽음과 뒤를 이은 백가의 황당한 반란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왕의 최측근이던 경호실장이 왕을 암살한 뒤 큰 저항 없이 항복하고 처형되었다는 점에 근거하여 백가가 뭔가 뒤에 믿는 구석이 있었다는 추정이 그것. 무령왕이 배후에서 백가를 조종했고 계획이 성공하자 백가를 팽했다는 학설이다. 정황상 아주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지만 기록의 부재로 진위는 알 수 없다.
한편 《삼국사기》의 탐라와 전라남도 강진군에 대한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동성왕은 남쪽으로 팽창정책[18]을 펼쳐왔다. 이에 한강 일대에 경제권을 소유한 구 세력들이[19] 동성왕의 남진정책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가설도 있다. 후임자인 무령왕은 적극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유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었다는 점이 그 근거. 또한 《삼국사기》 동성왕 치세기에 기록된 남산에서 두 호랑이가 싸웠다는 기록을 두고 이 호랑이 두 마리가 각각 무령왕과 동성왕을 은유적으로 표현한게 아니냐는 학설도 있다.
4. 평가
전대의 삼근왕과는 대조적으로 전제군주라 할 정도로 주체적이고 고집있는 왕권강화 정책을 펼쳤다. 진씨 세력의 추대로 옹립된 왕이다보니 생존을 위해서라도 왕권 강화는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그래서 권세를 휘두르는 진씨[20]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금강 유역권을 지배 기반으로 삼았던 신진 세력을 대거 기용하여 권력의 전면부에 배치시켰다.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세력으로 사씨, 연씨, 백씨 등 대성팔족이 있다.웅진 천도 이후 바닥까지 추락했던 백제의 부여씨 왕권과 국제적 위치를 정상 궤도에 안착시켜 백제를 중흥시킨 임금으로 우호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개로왕 이후 끊겨버린 중국(특히 남조)과의 관계를 되살렸고 신라의 소지 마립간에게 혼인 동맹을 제의하여 이찬 비지의 딸과 동성왕이 혼인하게 됨에 따라[21] 나제동맹의 결속을 굳건히 하는 등 적극적으로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대처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다만 말년에는 대신의 간언을 무시하며 성곽, 궁실, 정원 등을 과도하게 증축하고 향락에 빠지며 사냥에 지나칠 정도로 빠지는 등 과도한 왕권 강화 및 과시를 하며 백성에 대한 구제를 외면하여 원성을 사기도 했고 이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는 원인이 되었다.[22]
《동국통감》에서는 기근이 들었는데도 백성들을 구휼하지 않고 사치를 부린 점 때문에 부정적으로 평가되어 있다.
"동성(東城)은 나라가 흉년을 맞아 백성에게 기근이 들었는데도 구휼하지 않고, 임류각(臨流閣)을 세워 몹시 화려하게 하고 스스로 방자하게 연회하였다. 궁문(宮門)을 닫고, 간하는 신하를 거절하면서 놀고 사냥하는 데 빠져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다가 적신(賊臣)에게 해를 당했다."
5. 《삼국사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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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동성왕 본기>
一年冬十一月 동성왕이 즉위하다
四年春一月 진로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맡기다
四年秋九月 말갈이 한산성을 습격하다
四年冬十月 큰 눈이 내리다
五年 한산성으로 행차하여 군사와 백성을 위무하다
五年夏四月 웅진 북쪽에서 신성한 사슴을 사냥하다.
五年春二月 남제에 사절을 파견하다
六年秋七月 남제에 파견하는 사절의 통행을 고구려가 차단하다
七年夏五月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다
八年春二月 백가를 위사 좌평에 임명하다
八年春三月 사절을 남제에 보내 조공하다
八年秋七月 궁실을 중수하고 우두성을 쌓다
八年冬十月 대궐 남쪽에서 군대를 사열하다
十年 위가 침입하다
十一年 두 이삭이 합쳐진 벼를 바치다
十一年冬十月 천지신명에 제사지내다
十一年冬十一月 남당에서 군신들과 잔치를 벌이다
十二年秋七月 사현성과 이산성을 쌓다
十二年秋九月 연돌을 달솔에 임명하다
十二年冬十一月 겨울에 물이 얼지 않다
十三年夏六月 웅천의 물이 불어 민가가 피해를 입다
十三年秋七月 백성이 굶주려 신라로 도망한 무리가 일어나다
十四年春三月 3월에 눈이 내리다
十四年夏四月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다
十四年冬十月 우명곡에서 사냥하다
十五年春三月 신라와 혼인 관계를 맺다[23]
十六年秋七月 군사를 보내 신라를 구원하다
十七年夏五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七年秋八月 신라군이 구원하여 고구려가 물러나다
十九年夏五月 연돌을 병관좌평으로 임명하다
十九年夏六月 큰 비가 내려 백성들의 가옥이 유실되다
二十年 웅진교를 가설하다
二十年秋七月 사정성을 축조하고 한솔 비타를 보내 지키게 하다
二十年秋八月 왕이 무진주로 행차하여 탐라의 사죄를 받다
二十一年 백성이 굶주려 고구려로 도망한 무리가 일어나다
二十一年冬十月 전염병이 크게 돌다
二十二年 대궐 동쪽에 임류각을 세우다
二十二年夏四月 우두성에서 사냥하다
二十二年夏五月 임류각에서 잔치를 베풀다
二十三年春一月 서울에서 노파가 여우로 둔갑하여 사라지다
二十三年春三月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치다
二十三年夏五月 여름부터 가을까지 비가 내리지 않다
二十三年秋七月 탄현에 목책을 세워 신라의 침입을 대비하다
二十三年秋八月 가림성을 축조하여 백가로 하여금 지키게 하다
二十三年冬十月 사비 동쪽 벌판에서 사냥하다
二十三年冬十一月 백가가 자객을 보내 동성왕을 죽이다
총 46줄로 기록이 상당히 많다. 재위 기간으로 비교하면 의자왕보다도 많을 정도. 백제에서 온조왕(65줄), 무왕(58줄) 다음으로 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 군주다.
6. 기타
- 동성왕의 후계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동성(東城)씨를 자처한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성왕 시기 활동한 동성자막고, 동성자언, 동성도천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동성씨가 자신들의 조상을 밝히지 않은 점과 일시적으로만 나타나고 사라졌던 점 때문에 아닐 가능성도 있다.[24]
- 무령왕과 마찬가지로 일본 태생이거나 장기 체류한 것으로 추정된다.
- 동맹국이자 같이 고구려군을 막아왔던 신라의 소지 마립간과 즉위한 해가 479년으로 같다.
7. 창작물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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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서기》 479년 4월조에 따르면 삼근왕이 사망할 당시 동성왕은 '유년(幼年)'의 나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廿三年夏四月 百濟文斤王薨 天王 以昆支王五子中 第二末多王 幼年聰明 勅喚內裏 親撫頭面 誡勅慇懃 使王其國 仍賜兵器 幷遣筑紫國軍士五百人 衛送於國 是爲東城王 그래서 학계에서는 동성왕이 재위 8년(486년) 당시 나이를 18세가 된 것으로 추정되므로 동성왕이 468년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2] 《남제서》, 《양서》에서도 모대라 써있다.[3] 《삼국유사》.[4] 《일본서기》. 훈은 '마타'.[5] 형 부여사마(?)[6] 신라 이벌찬 비지의 딸. 왕족이었으므로 김씨일 가능성이 높다.[7] 아들이 아닌 무령왕이 둘째 아들이라고 했는데 이 기록을 보면 동성왕은 첫째 아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 기록은 동성왕-무령왕 관계의 경우처럼 실제 부자 관계가 아닐 경우에 첫째 아들이 아닌 둘째 아들이라고 의도적으로 기록하던 패턴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보면 아들의 유무 자체를 알 수 없어진다.[8] 《삼국사기》의 기록. 이것을 신뢰한다면 무령왕은 부여곤지의 손자에 해당한다. 하지만 《일본서기》에 의하면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사촌이거나 부여곤지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이복형에 해당한다. 그리고 무령왕릉 발굴 결과, 무령왕이 동성왕과 삼근왕보다 나이가 많은 것으로 밝혀져 일단 《삼국사기》의 기록이 사실과 다름이 확실시되었다.[9] 상기한 둘은 모두 《일본서기》에 백제에서 왜국으로 파견된 사신들로 나오는데,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둘의 이름에서 겹치므로 "동성왕의 아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10] 마찬가지로 동성(東城)은 동성왕을 뜻한다고 볼 경우. 아들인지는 알 수 없다.[11] 摩牟는 摩帝의 오기로 보기도 한다.[12] 帝의 옛 음은 '뎨'. 황뎨 '뎨'. 즉 마뎨, 말다, 모대는 음이 통한다.[13] 선화공주처럼 공주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지는 진골 이상 신분이므로 김씨 왕족일 가능성이 높다.[14] 《삼국사기》에는 단순히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학계에서는 정황상 진씨 세력에 의해 시해된 것으로 본다.[15] 2025년 현재 중국의 국가주석인 시진핑이 바로 이 케이스이다. 시진핑이 주석에 오르기 전까지는 조용하고 자기 색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고, 이에 중국공산당의 각 계파가 합의해서 시진핑을 올렸는데 시진핑은 야심이 엄청 큰 사람이었다. 시진핑은 주석 자리에 오르자마자 자신을 올려준 태자당과 상하이방부터 대거 숙청에 나서며 절대 권력을 틀어쥐었다.[16] 웅진시대의 공주[17] 오늘날 충청남도 부여군 성흥산성.[18] 마한계 귀족 세력들인 사씨(沙氏), 연씨(燕氏), 백씨(苩氏) 등의 세력이 강해졌다는 추정이다.[19] 남래(南來)귀족 세력 해씨(解氏)와 진씨(眞氏). 백제 초창기부터 함께한 근본있는 가문이다.[20] 대성팔족중 상당수는 공주와 충남 일대를 본거지로 두는 신진 귀족 세력이며 4-5세기 무렵부터 삼국사기, 일본서기 등에 등장하는 마한계인 사씨, 연씨, 백씨가 있다. 그리고 그들과 대척점에 있는 남래(南來)귀족 세력 해씨(解氏)와 진씨(眞氏) 또한 대성팔족으로 이들은 온조의 십제 시절부터 온조와 동행한 세력으로 추정하며 한강일대의 경제권을 장악한 호족으로 파악된다. 다만 여기서 진씨는 온조를 따라 북쪽에서 내려온 것보다는 보통 한강 일대에서 온조 세력에게 연합해 지배층에 오른 마한 토착세력 출신으로 추정한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 백제 초창기부터 분구묘 계통으로 대표되는 현지세력을 지배층으로 수용해 연합한 게 확인되기 때문이다.[21] 비록 신라왕의 친딸인 고귀한 공주의 신분은 아니지만 이찬이라는 높은 신라 관등을 감안하면 비지 역시 신라 왕과 아주 밀접한 고위 종친일 가능성이 높다. 동성왕이나 소지 마립간에게 결혼 적령기의 딸이 없었기 때문에 종친의 딸을 대신 시집보낸 것으로 보이며 이런 사례는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자주 있었다.[22]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동성왕[23] 신라 측 기록과 관등이 다른데, 딸의 출자가 명확하게 기록된 것을 보아 신라 측 기록을 우선시한다. 따라서 비지의 관등은 이찬. 참고로 이 사건은 백제 측에서 그 유명한 서동요로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해당 문서 참조.[24] 참조문헌: 노중국 교수의 《백제의 성씨와 귀족가문의 출자》, <<대구사학>> 89,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