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by(紀 大磐宿禰, ruby=き の おおいわのすくね)]
1. 개요
일본과 한반도에서 활약한 인물. 왜국 겐조 덴노 3년 및 백제 동성왕 9년인 487년에 벌어진 반란의 주동자이다. 키노 츠노노 스쿠네(紀 角宿禰)의 자손으로 키노 오유미노 스쿠네(紀 小弓宿禰)의 아들이었다.'키(기, 紀)'는 '우지(氏)[1]'이고, '스쿠네(숙녜, 宿禰)'는 '카바네(姓)[2]'이기 때문에 순수한 이름은 '오이와(생반, 生磐)'이다. 따라서 현대식으로 읽자면 '키 오이와(기 생반, 紀 生磐)'가 된다.[3]
이름의 한국식 독음과의 유사성 때문에 칠지도의 기생성음(奇生聖音)이란 구절과 엮이기도 하는데 이건 이름이 아니라 그냥 구절로 추정된다.[4] 애초에 이름이, 음독으로 읽는 게 아니라 '오이와(생반, 生磐)' 혹은 '오오이와(대반, 大磐)'라는 이름을 훈차한 건데 '기생성음(奇生聖音)'은 앞 2자인 '기생(奇生)'까지는 '키 오이'로 비슷하게 읽을 수 있지만[5] 뒤 2자인 '성음(聖音)'은 아무리 일본어 한자의 음과 훈이 다양하다 해도 DQN 네임이 아닌 이상 훈독으로나 음독으로나 '와(노)스쿠네'로 읽을 수가 없다.[6][7]
2. 상세
13대 근초고왕 이래 한성백제는 한반도 중부의 패권을 손에 넣고, 가야 지역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백제-가야-왜로 이어진 동맹을 통해 북쪽의 고구려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광개토대왕과의 전쟁에서 16대 진사왕과 17대 아신왕이 연전연패한 이후, 줄곧 고구려의 위협에 시달리다 끝내 장수왕이 벌인 대대적인 남진으로 21대 개로왕 때 한성 일대를 통째로 잃어버리고(한성백제의 멸망), 가야의 중심이었던 금관국마저 광개토대왕의 남정으로 인해 막대한 타격을 입어 힘을 잃어가자 가야 제국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 때 금관국의 영향력이 전보다 줄어들면서 반사적으로 반파국(대가야)과 안라국(아라가야)이 가야 지역의 맹주로 떠오르게 되었다.이렇게 내외부적인 요인이 겹쳐 가야 일대가 혼란에 빠지자 가야 지방의 세력가였던 키노 오이와노 스쿠네는 지금의 충청도 일대까지 남하한 고구려와 손을 잡고 스스로를 '거룩하고 성스러운 존재'로 칭하며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백제-가야-왜 동맹의 힘은 아직 건재했기에 결국 토벌되었고, 오이와노 스쿠네는 가야로 후퇴했다가 일본 열도로 넘어갔다.
기록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닥 유명하진 않은데 흔한 사건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엔 당대 한반도와 일본의 쟁쟁한 세력들이 모두 엮인 사건이어서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 사건을 뒷받침하는 듯한 고고학적 증거로, 금강 상류인 전라북도 장수군 지역에서 가야계 유적과 유물이 나오는 것을 들기도 한다. 오이와노 스쿠네(生磐宿禰)와 내통 혹은 호응한 가야계 세력이 금강을 따라 금산군, 진안군 권역으로 진출한 것이 아닌가하고 추측하기도 한다. 이 시기 백제는 개로왕이 한성 함락 당시 붙잡혀 전장 한복판에서 처형된 이후, 25대 무령왕 이전까지는 어지러운 상황에 빠져서 이렇게 앞마당까지 위협당하는데도 적극적인 대처가 힘들었다.
이걸 왜국이 임나(가야)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로 엮으려는 일부 일본 학자들의 시도도 있었지만[8], 오이와노 스쿠네가 스스로 삼한의 왕이 되겠다며 '카미(신성, 神聖)'를 자칭한 것부터가 왜국의 지배를 부정하겠다는 것인데 왜국에서 임나를 통치하려고 보냈다는 사람이 왜국를 부정하는 반역을 일으킨 꼴이 되는 것이라서 임나일본부에서 주장한 임나에 대한 왜국의 통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기도 한다. 물론 왜국에서도 반란이 자주 일어났었으니 비슷한 케이스로 볼 수도 있긴 하지만.
사실 왜인이 임나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호응을 얻었다는 것 자체가 왜국과 임나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경계인이거나 임나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찌 보면 위만과 비슷한 경우일 수도 있다. 6세기에 백제에서 나솔(奈率) 키노 오미 미마사(紀臣 彌麻沙)[9]를 왜국에 사신으로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모노노베씨(물부씨, 物部氏)처럼 키씨(기씨, 紀氏)도 일부가 백제에 정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3. 기록
이 해(겐조 덴노 원년) 키노 오이와노 스쿠네(紀 生磐宿禰)가 미마나(임나, 任那)를 점거하고 고(구)려(高麗)와 손을 잡았으며, 서쪽에서 장차 삼한(三韓)의 왕 노릇을 하려고 관부(官府)를 정비하고 스스로 카미(神聖)라고 칭하였다. 미마나(任那)의 좌로(左魯)[10]나기타 갑배(那奇他甲背)[11] 등이 계책을 써서 백제(百濟)의 적막이해(適莫爾解)[12]를 니린(爾林)에서 죽이고【니린(爾林)은 고려(高麗)의 땅이다.】[13] 시토로모로노사시(대산성, 帯山城)[14]을 쌓아 동쪽 길을 막고 지켰으며, 군량을 운반하는 나루를 끊어 군대를 굶주려 고생하도록 하였다. 백제의 왕(동성왕)이 크게 화가 나, 영군(領軍)[15] 고이해(古爾解)[16]·내두(內頭)[17] 막고해(莫古解)[18] 등을 보내 무리를 거느리고 시토로모로노사시(帯山城)에 나아가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키노 오이와노 스쿠네(紀 生磐宿禰)는 군대를 내보내 맞아 쳤는데 담력(膽力)이 더욱 왕성하여 향하는 곳마다 모두 깨트리니 한 사람이 백 사람을 감당할 정도였다. (그러나) 얼마 후 군대의 힘이 다하니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알고 미마나(任那)로부터 돌아왔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국(百濟國)이 좌로(左魯) 나기타 갑배(那奇他甲背) 등 300여 인을 죽였다.
《일본서기》 권 15 <겐조 덴노> 3년(487) 시세조
《일본서기》 권 15 <겐조 덴노> 3년(487) 시세조
……카와치노 아타이(하내직, 河內直)에게[19]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직 너의 악평만 들어 왔다. 너의 선조들도【《백제본기》에는 '그대의 선조 나간타 갑배(那干陀甲背), 가렵직기 갑배(加獵直岐甲背)'라고 하였다. 또한 '나기타 갑배(那奇陀甲背), 응기 기미(鷹奇岐彌)'라고도 하였는데, 말이 변하여 자세히 알 수 없다.】[20] 다 같이 간계를 품고 거짓을 말하였다. 이카카노 키미(爲哥可君)[21]가 그 말을 믿고 국난을 걱정하지 않고 내(성왕) 뜻에 반하여 방자하게 포악한 짓을 저질렀다.[22] 때문에 쫓겨났으니 전적으로 너의 책임이다. 너희들은 미마나(任那)에 머물면서 항상 나쁜 짓을 하였다. 미마나(任那)가 나날이 쇠퇴해 간 것은 오로지 너희들 때문이다. 너희들은 비록 하찮을 지라도 작은 불이 산야를 태우고 마을로 번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너희의 악행 때문에 미마나(任那)가 패망한 것이다.
《일본서기》 권 22 <긴메이 덴노> 5년(544) 2월조 카와치아타이(河内直)에의 비난
《일본서기》 권 22 <긴메이 덴노> 5년(544) 2월조 카와치아타이(河内直)에의 비난
여기서 미마나는 임나,즉 가야를 말한다. ##
4. 백제 내란 및 백제인설
역사학자 김현구는 키노 오이와노 스쿠네(기 생반 숙녜, 紀 生磐 宿禰)=이카카노 키미(위가가군, 爲哥可君)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김현구 외에도 한국 학계에서는 꽤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주장이다. 교토대학에서 박사 학위을 받은 이재석 한성대 교수도 같은 주장을 펼친다.[23] '이카카노 키미(爲哥可君)'는 성씨 혹은 칭호에 해당하는데 《백제본기》에서는 '위가기미(爲哥 岐彌, 이카 키미)'라고 표기되어 있고, 이름은 '유비기(有非岐, 우히키)'라 하였다. 카와치노 아타이(河内直)씨의 선조이며, 나기타 갑배(那奇他甲背)의 말을 듣고 가야에서 포학한 행위를 자행했다고 한다. 오이와노 스쿠네(생반숙녜, 生磐宿禰)와 본명이 닮았으며, 행적이 비슷하기 때문에 반란에 동참했거나 혹은 그와 동일인물인 것으로 매우 유력시되는 인물이다.김현구의 원문에서 정확히는 키노 오이와노 스쿠네(기 소궁 숙녜, 紀 小弓 宿禰)=목군 유비기(木君 有非岐, 키노 키미 우히키)로 보고, 또 '목(木)'은 일본어 훈독에서 '키(き)'로 읽히므로 '키(紀)씨'를 백제의 '목(木)씨'로 보는 설이라고 했는데 정작 사서에서는 이카카노 키미(爲哥可君)가 '목(木)씨'라는 기록, 또 '목(木)씨'의 '카바네(姓)'가 '키미(君)'라는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위에 언급된 사료 중 <흠명기> 5년 2월조 기사를 보면 분주(分注)에서 《백제본기》를 인용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카와치노 아타이(하내직)의 조상들 이름을 나간타 갑배와 가렵직기 갑배라고 하고 있다. 나간타 갑배는 <현종기> 3년 시세조 기사에서 키노 오이와노 스쿠네(기생반숙녜)의 선동으로 함께 반란을 일으킨 임나, 즉 가야의 나기타 갑배와 동일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같은 기사를 자세히 읽어보면 기생반숙녜의 난 기사는 백제 입장에서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출동한 것은 왜군이 아니라 백제군이었으며, 반란 주체 세력들이 "동도(東道)를 막고 ... 군량을 운반하는 나루를 끊어 군대를 굶주려 고생하도록" 하였더니 백제왕이 화를 내며 백제군을 출동시켰다고 했다. 즉, 동도를 끊어 고생한 것은 백제군이며, 임나 주둔 백제군까지의 보급로를 동도라고 표현하였다면 그 중심은 백제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신공기(神功紀)> 49년조의 남만 침미다례 원정에 대한 해석에서 침미다례 원정의 주체가 백제 13대 근초고왕이라는 근거 중 하나로 백제 중심의 방위 관념이어야 침미다례가 남만일 수 있다는 것을 드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따라서 이 반란 기사의 원 출처는 백제측 사료임을 알 수 있고, 이를 근거로 이재석은 '위가가군(또는 위가 기미) 유비기'는 '기생반숙녜'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으며, 기생반숙녜가 백제의 장군이고, 이 반란이 백제 장군 기생반숙녜가 임나(가야)인들을 포섭하여 백제 24대 동성왕을 상대로 일으킨 반란이었음을 주장한다. 다만 기생반숙녜=목만치라는 주장은 정황상 가능한 가설 중 하나라고 소개하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사실 정확한 국적은 사료의 부족으로 알 수 없는데, 키노 오이와노 스쿠네의 행적이 '목협만치(木協滿致)'와 동일인물이라는 의심을 받는 백제의 장수 목만치(木滿致)와 비슷하여 목만치와 동일인물로 보는 설도 있다. 목만치는 소가노 마치(蘇我満智)와 동일인물이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즉 목만치=목협만치=키노 오이와노 스쿠네=이카카노 키미(爲哥可君)=소가노 마치로 의심되는 가설이 존재한다. 자세한 건 목만치 항목 참조.
하지만 당시 백제, 가야, 왜인들은 각자 서로의 조정에서 복무하기도 하는 경우가 보이는 등 특정 국가에 대한 소속의식이 근대 국민국가와는 달랐던 점 역시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기생반숙녜가 무조건 왜인이 아니라 백제인이라고 명확히 선을 긋는 것 자체가 근대적 관념의 소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일본서기》 <현종기> 반란 기사를 살펴보면 이 반란 자체는 왜가 개입되지 않은 백제와 임나, 즉 가야 간의 일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은 사실이다. 해당 사료를 자세히 읽어보자. 국적 미상의 기생반숙녜를 제외하면 왜인과 왜국 관련 인물은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다. 전전(戰前) 근대 일본 사학계가 이 기사를 임나일본부설의 강한 근거 중 하나로 제시했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다.
[1] 고대 일본에서 널리 쓰였던 성으로 천황이나 종실 및 그에 준하는 다른 나라 종실이 내려준 성을 뜻한다.[2] 고대 일본에서 가문을 통해 세습되던 관직을 표시하는 칭호로 가문의 명칭정도로 생각하면 된다.[3] 여기에 '키'가 백제의 '목'씨라는 가정이 맞다면 '목생반'이 된다.[4] '기생성음'을 "기이하게 성음으로 태어났다"고 해석한 경우도 있는데 출처가 불분명하다.[5] '생(生)'을 '오이'로 발음하는 사례로는 효고현(兵庫県) 아이오이시(相生市)가 있다.[6] 성(聖)은 음의 경우, '오음'으로는 '쇼(しょう)', '한음'으로는 '세이(せい)'로 읽히며, 훈의 경우, 상용내는 없고, 상용외로 '히지리(ひじり)', '키요-이(きよ-い)', '키요-라카(きよ-らか)'로 읽을 수 있고, 이름만의 독음으로는 흔하지 않은 사례까지 합쳐서 '키요(きよ)', '사토시(さとし)', '세(せ)', '타카(たか)', '타카시(たかし)', '타다(ただ)', '히로(ひろ)', '마사(まさ)', '미(み)'로 읽을 수 있다. 음(音)은 음의 경우, '오음'으로는 '온(おん)', '한음'으로는 '인(いん)'으로 읽히며, 훈의 경우, 상용내로 '오토(おと)', '네(ね)'로 읽을 수 있고, 상용외는 없으며, 이름만의 독음은 특별히 따로 없다.[7] 애초에 칠지도의 '기생성음'을 키노 오이와노스쿠네와 엮는 것이 무리인 게 칠지도가 제작된 건 4세기 중순의 13대 근초고왕 대이고, 오이와노스쿠네가 활동한 건 5세기 후반의 24대 동성왕 대라 시차가 100년이 넘는다.[8] 대표적인 인물은 스에마츠 야스카즈(末松 保和).[9] '키(紀)'가 '우지(氏)'이고, '오미(臣)'가 '카바네(姓)'였다.[10] 훈은 '사루'.[11] 갑배(甲背)는 칭호로 보인다. '갑배(甲背)'의 칭호는 전부 목리불마 갑배(前部木刕不麻甲背) 성방(城方) 갑배 매노(甲背昧奴)의 인명을 보아 백제의 칭호임을 알 수 있다. 훈은 '나카타 코하이'.[12] 훈은 '차쿠마쿠니게'.[13] 학계에서는 현재 위치를 천안시나 김제시로 추정한다.[14] 일본식 발음으로 적혀있지만, 현지 언어(고대 한국어)로 된 지명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시토로'가 '대(帯)', '모로'가 '산(山)', '사시'가 '성(城)'에 각각 대응한다. 1000여년이 지난 15세기의 중세 국어 문헌에서는 '띠[帶\]'를 'ᄯᅴ', '산(山)'을 '모로/뫼', '성(城)'을 '잣/재'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고대 국어 지명 '시토로모로사시'는 중세 국어의 'ᄯᅴ뫼잣', 현대 국어의 '띠메재'에 대응된다. 《삼국사기》에서는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을 대산현(帶山縣)으로 기록해 놓았기에 학계에서는 대산성의 위치가 태인면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15] 백제의 중앙군으로 추정된다. 훈은 '이쿠사'.[16] 훈은 '코니게'.[17] 즉 내두좌평. 8대 고이왕 때 설치한 재정 담당 관직.[18] 13대 근초고왕 24년(369년)에 고국원왕이 침공하자 태자와 함께 출전해 막아낸 장수와 이름이 동일하다. 훈은 '마쿠코게'.[19] 카와치(河內)가 '우지(氏)', '아타이(直)'가 '카바네(姓)'에 해당한다.[20] 키노 오이와노 스쿠네(紀 生磐宿禰)에게 영합해 백제-가야-왜 동맹에 반기를 든 나기타 갑배(那奇他甲背) 등의 가야인들을 말한다. 카와치(河內)는 지명이라 카와치(河內)씨에는 혈연적으로도 연관성이 없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여기서의 카와치노 아타이(河內直)씨는 반란에 동참했던 가야인의 후손들로 보인다.[21] 《백제본기》에 의하면 위가 기미(爲哥岐彌, 이카 키미)라 적혀있으며 이름은 유비기(有非岐, 우히키)라고 한다. 다른 일본서기 판본에 유비파(有非破 ; 우히하)로 적혀있으므로 우히키는 오기로 보인다.[22] 오이와노 스쿠네(生磐宿禰)의 반란 시기는 487년 경이다. 성왕이 아닌 동성왕 대에 일어난 일이므로 어째서 성왕의 뜻에 반했다고 했는진 알 수 없다. 혹은 오이와노 스쿠네(生磐宿禰)의 반란으로 인해 성왕의 뜻인 임나 재건이 방해가 되었단 소리가 아닐까 싶다.[23] 《고대 한일관계와 일본서기》, 동북아역사재단, 2019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