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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왕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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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제8대 국왕 고이왕 | 古爾王 | |||
고이왕대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 전경. | |||
<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출생 (음력) | 166년 전후 (추정)[1] | ||
백제 위례성 (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일대) | |||
사망 (음력) | 286년 11월 (향년 120세 전후 추정) | ||
백제 위례성 (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일대) | |||
능묘 | 미상 | ||
재위기간 (음력) | 백제 제8대 국왕 | ||
234년 ~ 286년 11월 (52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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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고이(古爾) / 고모(古慕) · 구이(久爾) · 구이(仇爾)[3] | ||
부모 | 부왕 개루왕(?)[4] 모후 미상 | ||
형제자매 | 3남 중 차남(?)[5] | ||
왕후 | 책계의 모후 | ||
자녀 | 1남 | ||
종교 | 토속 신앙 | ||
왕호 | 고이왕(古爾王)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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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의 제8대 국왕이자 건길지. 고이왕의 후손들, 즉 고이왕(8대) - 책계왕(9대) - 분서왕(10대) - 계왕(12대)으로 이어지는 왕통을 고이왕계라고 부른다.2. 생애
234년 사반왕이 나이가 어리고 정사를 처리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폐위된 뒤 왕위에 올랐다.238년 정월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북과 피리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군악대의 시초로 보인다.
246년 위나라[6]가 고구려를 침략하는 중이었다.(비류수 전투) 고이왕은 이 틈을 타 위나라의 낙랑군의 변방을 공격하였다. 더불어 낙랑군과 대방군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대방군을 공격하여 태수 궁준을 전사하게 한 배후에도 고이왕이 이끄는 백제의 힘이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7]
고이왕은 남옥저의 일부를 점령하고 중국의 통일 왕조인 서진과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현재 충청남도 천안시의 영역에 자리잡았었다고 추정되는 마한의 목지국(目支國) 세력을 압도하여 이전의 관계를 청산하고 마한 전체의 실질적인 영도 세력으로서의 위치를 확립했다.[8][9] 현재 강원도 북부에 자리잡은 동예가 자주 침범해오자 동예와 우호 관계를 조성하기도 했고 한사군의 후신인 낙랑군 및 대방군과도 혼인을 통한 동맹 관계를 형성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펼쳤다.
260년 봄 정월, 기존의 좌•우보 체제를 개혁하여 6좌평 제도를 두고 관등을 16품계로 나눠 정비했으며 관직의 위계에 따라 자색, 비색, 청색으로 다른 옷을 입게 하고 왕과 귀족에 대한 옷을 정하는 등 공복 제도를 정했는데 왕권의 강화로 이어졌으며 백제가 부족 연맹체에서 고대 국가로 발돋움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10]
236년 10월에 서해의 큰 섬에서 사냥을 하며 직접 40마리의 사슴을 활로 쏘아 잡았다는 기록이 있으며[11] 활쏘기를 잘했을 정도로 무예가 뛰어나고 호방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사냥을 갔다는 기록을 보아 사냥을 통해 군사를 훈련시키고 인재를 선발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던 걸로 보이며 자신의 위엄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는 이유도 있었던 것 같다.
율령(형법과 행정법)을 반포하고 내정을 크게 정비했는데 고이왕 때 정비된 체계가 백제의 멸망 때까지 정확히 400년[12]간 이어지게 된다. 사실 고구려나 신라는 소수림왕, 법흥왕 때 율령을 반포했다고 기록에 써 있지만 백제는 정확한 율령 반포 시기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단 《삼국사기》 고이왕 29년(서기 262년)에 "관리로서 재물을 받거나 도둑질한 자는 장물의 3배를 징수하고 종신토록 금고하게 하라고 명령했다."라는 기록을 율령 반포의 근거로 보아 교과서에서는 고이왕 때 율령 반포를 했다고 가르친다.
고이왕은 재위 기간 내내 괴곡, 봉산을 중심으로 자주 신라와 충돌했으나 이렇다 할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는데, 해당 일이 실제로 있었다면 적어도 분서왕 ~ 비류왕 재위기일 가능성이 높다. 신라가 본격적으로 백제와 국경을 마주하는 시기는 한참 뒤인 기원후 4세기이기 때문이다. 일단 적어도 고이왕 때까지는 목지국이 위신이 추락하긴 했어도 여력은 보존하던 때이고, 백제가 영토 확장을 위해 남하한 전진은 목지국이 위치한 충남 일대에서 더뎌지는 한편 전북 서해안으로 더 깊게 내려갈 정도기에, 적어도 그때는 백제군이 백제에게 완전히 복속하지 않고 저항을 멈추지 않는 목지국을 타넘어 진한 지역까지 나타날 시기는 아니었다.
물론 백제가 고이왕 시기에 본격적으로 돌입한 내치의 정비 및 확장에 힘입어 한강 유역을 벗어나 남하하기 시작했고, 그런 과정에서 목지국을 무력화하고 목지국 휘하에 있던 충청도 마한 거수국들을 흡수하면서 충청도 북부 지역까지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해 사로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진한 소국들과 마찰을 빚게 되지만, 적어도 고이왕 때는 그런 일이 일어날 상황이 아니었다.
3. 고이왕에 대한 의문
3.1. 지나치게 긴 수명
백제 초기 왕, 특히 고이왕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왕들이 그렇듯 생애와 재위에 관한 기록이 미스터리이다.[13] 이 시기를 기록한 《삼국사기》 의 생몰년은 그 정확성을 의심받는데, 나이를 최대한 적게 잡아 아버지 개루왕이 사망한 해와 그 다음해인 166년~167년에 태어났다고 쳐도 고이왕이 즉위하는 234년에는 67세~68세가 된다. 어찌어찌 좀 오래 살아서 67세~68세에 즉위했다쳐도 고이왕의 재위기간은 무려 52년이나 되기 때문에 이렇게 되면 사망한 286년에는 120세가 넘게 된다.때문에 과거에는 고이왕을 초고왕의 아우가 아닌, 초고왕의 아우의 아들, 즉 초고왕의 조카라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럴 경우 나이가 40세쯤 줄어들기 때문에 52년이나 재위해도 그다지 비현실적이지는 않게 된다지만, 초기 백제사의 기년은 기원후 2~3세기에나 겨우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한성 백제의 역사를 무리하게 고구려의 건국 연대에 맞게 백제인 자신들이 수정했다는 게 요즘 중론이므로 이런 추측은 현재 와선 진지하게 논의되진 않는다.
개루-초고-구수-사반 계열, 소위 초고왕계와는 실제로 계보가 다르지만 사반왕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후 정통성을 위해 개루왕의 아들을 자칭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고대인들이라고 바보가 아닌데 단순히 정통성을 위해 혈연 관계도 없는 자의 아들을 일부러 자칭하는 일은 있을법하지 않는 일이므로 설득력은 매우 적은 설이다.
물론 유교적 왕통 관념이 강해진 후대에 와서는 방계에서 들어와 계승한 군주들이 항렬에 맞게 사후양자 입적을 행하긴 했고, 중국에서는 이미 적어도 전한 왕조 때부터 행해진 흔한 관습이긴 하지만 당대 초기 백제가 그렇게 종법 문제를 엄하게 고려한 나라였는지는 상당한 의문이 따른다.
일단 고이왕 재위기 중 후반부 행적과 그 후대인 책계왕의 행적은 적어도 마한 목지국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고고학적 성과와 어느 정도 일치하기 시작하므로, 책계왕 재위기부터는 그럭저럭 《삼국사기》에 기록된 기년에 맞다고 볼 여지가 높다.
그렇다면 고이왕의 사망 연도에 대해선 《삼국사기》를 믿을만하지만, 실제 출생연도와 즉위연도는 《삼국사기》 기년보다 늦을 개연성이 높다.
3.2. 정체에 대한 논란
백제 시조로 알려진 인물 중 하나인 구태가 고이왕이라는 학설이 있다. 이 학설은 이병도가 주장했는데, '구태(仇台)'라는 이름이 '구이'라고도 읽힐 수 있으며[14], 이것이 곧 '고이(古爾)'와 이어진다는 것이 주요 논거이다. 이 견해에 따라 제8대 고이왕을 백제의 실질적 시조로 보고, 이미 3세기 중반에 백제가 상당한 발전을 이룩했다고 판단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음상사에 의존한 주장이며, 심지어 음운적으로 제대로 일치하지도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다. 이(爾)는 중고한어 발음이 /niëx/라서 엄밀히 따지자면 고이왕(古爾王)의 古爾는 '고니'로 읽어야 한다. 반면 이(台)의 발음은 현재와 같이 /yie/라서 仇台는 구이로 읽히기는 한다.4. 기타
"고이(古爾)는 사냥하기를 즐기어 서기에만 빠지는 실수를 면치 못하였으나, 빈핍(貧乏)한 사람을 진휼하고 조조(租調)를 회복하며, 관제(官制)를 정하고 장리(贓吏)를 금고(禁錮)하며, 이웃 나라와 교류하여 수호(修好)하였으니, 이것이 칭찬할 만한 것입니다."
- 고이왕의 이름 '고이'를 중고한어로는 ko nië로 읽었는데, 이것이 건길지(鞬吉支)의 건에 대응된다는 견해가 있다. 조선 시대에 임금을 뜻하는 말로 긔ㅈ가 있었음이 확인되므로 "건"과 "길지"는 독립된 단어임이 확실시된다. 이를 《양서》에 나오는 경주 월성의 명칭 건모라(健牟羅, 큰마을)에 대응시켜 큰 왕으로 읽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 고이왕-책계왕-분서왕-계왕에 이르는 고이왕계의 시조격인 인물이다. 계왕 이후 고이왕계는 초고왕계에게 밀려 왕위를 차지하지 못하는데 사학자 노중국은 고이만년, 고이해와 같은, 고이(古爾)가 들어간 인물들과 고이왕을 연관짓는 의견을 냈지만 확실하지 않다.[16] 이들의 이름이 모두 고유어 "큰"을 음차한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 백제에서 우씨(優氏)로 보이는 인물들은 고이왕 대 내법좌평 우두(優豆),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11대 비류왕의 동생이자 반란자인 내신좌평 우복(優福), 25대 무령왕 대 달솔(達率) 우영(優永)[17] 등으로 주로 고이왕계가 세력이 가졌을 때 집중되어 있는데 특히 왕의 동생이 2명이나 있기 때문에[18] 이에 근거해 고이왕계는 사실 왕성이 우씨(優氏)로 온조왕계의 부여씨(扶餘氏)와는 다른 비류 시조설과 관련있는 우태(優台)를 시조로 한 왕가였을 것이라는 천관우의 가설이 있다.
5. 《삼국사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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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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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고이왕 본기>
一年 고이왕이 즉위하다
三年冬十月 서해에서 사냥하다
五年春一月 악기를 사용하여 천지신명에게 제사지내다
五年春二月 부산에서 사냥하다[19]
五年夏四月 왕궁의 문기둥에 벼락이 치다[20]
六年春一月 정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다가 5월에 이르러 내리다
七年 군사를 보내 신라를 공격하다
七年夏四月 진충을 좌장으로 임명하다
七年秋七月 석천에서 군사를 사열하다
九年春二月 남쪽의 소택지에 논을 개간하다
九年夏四月 숙부 질을 우보에 임명하다
九年秋七月 서문 밖에서 활쏘기를 구경하다
十年春一月 큰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지내다
十三年 여름에 가뭄이 심하여 보리가 죽다
十三年秋八月 낙랑의 변방을 공격하여 주민들을 잡아오다
十四年春一月 남쪽 제단에서 제사지내다
十四年春二月 진물을 좌장으로 임명하다
十五年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다
十五年 창고를 풀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다
十六年春一月 태백성이 달을 덮다
二十二年秋九月 신라와 괴곡의 서쪽에서 싸워 승리하다
二十二年冬十月 신라의 봉산성을 공격하다
二十四年春一月 큰 가뭄이 들다
二十五年 말갈의 추장 나갈이 말을 헌상하다
二十六年秋九月 상서러운 구름이 왕궁 동쪽 하늘에 떠오르다
二十七年春一月 육좌평 등을 설치하고 직무를 나누어 보게 하다
二十七年春二月 품계에 따라 관복을 제정하다
二十七年春三月 왕의 동생 우수를 내신좌평에 임명하다
二十八年春一月一日 남당에 앉아 정무를 처리하다
二十八年春二月 진가를 내두좌평에 임명하고 다른 좌평도 함께 임명하다
二十八年春三月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다
二十九年春一月 뇌물을 받거나 도적질하는 관리를 처벌하라는 명령을 내리다
三十三年秋八月 군사를 보내 신라의 봉산성을 공격하다
三十六年秋九月 혜성이 자미궁 성좌에 나타나다
三十九年冬十一月 신라를 공격하다
四十五年冬十月 신라의 괴곡성을 포위하다
五十年秋九月 신라의 변경을 공격하다
五十三年春一月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다
五十三年冬十一月 고이왕이 죽다
6. 대중매체에서
- 웹툰 <삼국전투기>에서는 비류 전투 설명에 앞서 한반도 정세를 소개할 때 등장한다. 고구려와 더불어 제대로 된 군복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백제군 군복 색은 적색과 흰색 조합. 이후 비류 전투 (2)편의 타이틀 컷까지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 체제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여 나라의 기틀을 잡았으며, 본격적으로 주변국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고 언급된다.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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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성왕 | ─ | ─ | 동명왕(?) | 구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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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 13대 근초고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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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타태자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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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법사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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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좌태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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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교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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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선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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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문사 | 부여문선 | 부여덕장 | 부여사 | 부여창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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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례] 실재 혈통 기준 세로선(│) 부자, 부녀, 사위관계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 }}}}}}}}} |
[1] 개루왕의 아들이라는 기록이 사실일 경우.[2] 《삼국사기》 고이왕 27년(서기 260년)에 三月 以王弟優壽爲內臣佐平라며 왕의 동생을 우수라고 기록하였다. 기타 문단 참조.[3] 《신찬성씨록》.[4] 초고왕처럼, 고이왕도 정말로 확실하게 개루왕의 생물학적 아들인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의 내용에서 후술.[5] 초고(?), 우수(?)[6] 《삼국지》에 나오는 위나라다. 당시 황제는 조방이었다.[7] 246년에 일어난 전투를 기리영 전투라고 하는데 아직 한사군에 맞서 싸운 기리영 전투의 주체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많다. 현재 가장 신빙성이 있는 의견은 3가지로 목지국, 백제의 고이왕, 신분활국이다.[8] 고이왕의 백제가 마한 목지국의 세력을 압도하게 된 계기가 《삼국사기》 등 주요 역사서에 직접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기타 문헌 및 정황상 기리영 전투와 관련이 있다고 추정된다.[9] 고이왕 대에 마한 관련 기사가 있는 것은 아니고 《삼국사기》의 온조왕 24~27년 기록의 원래 연대를 고이왕 대로 추정한 것.출처 고고학적으로는 《삼국사기》상 고이왕~책계왕 재위기에 천안 청당동의 마한 목지국 세력이 갑자기 큰 쇠락을 경험하는 것으로 분석된다.[10] 다만 고이왕의 업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성왕 대의 것이 고이왕 때로 앞당겨져 기록되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6좌평 제도를 비롯한 각종 제도들은 같은 시대 중국의 제도보다 발전된 것이기 때문. 물론 지나친 확대 해석은 피해야 하지만 백제가 중국에서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 발전한 것이 사실인데 그걸 감안하면 중국의 것보다도 앞선 통치 체제를 운영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기록을 살펴봐도 알 수 있지만 6좌평의 명칭은 후대에 가서 나오고 6좌평에 들어가지도 않는 좌평 명칭인 상좌평이 나오기도 하며 기록이 부실해서일 수도 있지만 고이왕 대에 확인되는 좌평이 2명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로 교과서에서도 6좌평 제도를 마련한 왕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으며 그냥 백제에 이런 제도가 있었다는 식으로만 언급한다. 고이왕 때에 공복 및 관등 등 백제의 기본 정치 구조의 뼈대를 만들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신뢰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이병도였다.[11] 사열식에서는 날아가는 기러기 1쌍을 활로 쏘아 맞혔다는 기록도 있다. 참고로 권근은 《동국통감》에서 고이왕이 활쏘고 말 달리는 능력을 과시하며 사치스럽게 스스로 방자하여 그 잘못하는 짓을 모른다고 비판했다.#[12] 260~660년[13] 이 때문에 중, 고등학교 한국사 교육과정에서는 건국을 제외하면 아예 고이왕 이전의 백제사를 가르치지 않는다.[14] 구태의 台 자는 ‘별 태’뿐만 아니라 ‘나 이’라는 훈과 음도 있기에 ‘구태’가 아니라 ‘구이’로 읽힐 수도 있다는 것이다.[15] 그러나 실제 그랬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16] 노중국, <백제의 성씨와 귀족가문의 출자>, 《대구사학》 89, 2007.[17] 이쪽은 연대 차이가 상당히 나는 데다 당대에 성씨가 없던 인물들은 그냥 2글자 이름으로 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정말로 우씨였는지가 확실하진 않다. 만약 이때도 3글자 인명이 정착했거나 혹은 같이 이름에 우를 사용한 다른 인물들도 같이 기록되었다면 우씨였다는 게 확실하겠지만 안타깝게도 다른 인물들은 확인된 바가 없다. 물론 연대 차이와 상관없이 종실로서 집안은 귀족 계급으로 존속했을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나 발해 모두 부여의 왕성으로 알려진 해씨가 존재했으며, 고구려 왕족이었던 고씨는 발해가 멸망한 뒤에도 남아 있었고, 신라의 박씨나 석씨도 김씨의 왕위 독점 이후에도 소멸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 집안은 소수로나마 2000년이 지난 현대에까지 살아남아 있다.[18] 우두 또한 왕족으로 보인다.[19] 지금의 부산광역시가 아니라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일대로 추정.[20] 기록에 의하면 이때 황룡이 그 문으로부터 날아갔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