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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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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동명왕 신화 }}}}}}}}}

1. 개요2. 동명왕의 생애3. 각 사서별 해석 차이
3.1. 삼국유사3.2. 삼국사기3.3. 고려시대 이후 문헌
4. 당대 인식(고구려 시기)5. 고구려 "주몽 설화" 와의 유사성6. 두 설화를 구분하지 않은 이유와 현대인의 시선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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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여시조로, 고리국에서 부여로 도망왔다.

그는 1세기 후한 시대의 저서인 《논형》(論衡) 권2 <길험> 편의 부여 <동명왕 설화> 에서 처음으로 언급된다.

2. 동명왕의 생애

북이(北夷) 탁리국(橐離國) 임금(영품리왕)을 모시던 무수리[侍婢]가 임신했다. 임금이 무수리를 죽이려고 하니 무수리가 아뢰되 "크기가 달걀만한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쇤네가 아이를 뱄습니다"라고 하였다. 나중에 아이를 낳았다. 돼지 우리[豬溷] 안에 (아이를) 버리니 돼지들이 입김을 불어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다시 마구간[馬欄]으로 옮겨 말이 (임금) 대신 아이를 죽이게 했다. 말도 입김을 불어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임금이 하늘의 아들이 아닐까 생각하고 그 어미에게 명하여 거두어 노비처럼 키우게 했다. 동명이라 이름짓고 소와 말을 돌보게 했다. 동명은 을 잘 쐈다. 임금은 (동명에게)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웠다. 동명을 죽이려고 하니 동명이 달아났다. 남쪽 엄수(掩水)에 이르러 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졌다. 추격병들은 건너지 못했다. 그리하여 부여(夫餘)에 수도를 정하고 임금이 되었다. 이것이 북이(北夷) 땅에 부여(夫余) 나라가 생긴 연유(緣由)다.
동명의 어미가 처음 임신할 때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동명을 낳아 키웠다. 돼지와 말이 입김을 불어 동명을 살렸다. 몸이 장대(長大)하므로 임금이 동명을 죽이려고 하였다. 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하늘의 운명이 아직 죽을 때가 아니므로 돼지와 말이 (동명을) 구해주었다. 부여에 수도를 정하고 임금이 될 운명이므로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동명을) 도와주었다.
《논형》[1]

고리국 왕의 시녀가 하늘의 기운을 받아 임신한 탓에 태어나게 된다. 태어난 동명의 운명은 비참하였는데, 왕의 의심을 받아 버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돼지와 말의 입김으로 보호받으며 살아남게 되며, 덩치도 크고, 활을 잘 쏘는 인물로 성장한다. 그 뒤, 그를 위협적으로 느껴 죽이려고 한 고리국 왕 때문에 도망가게 된다.

도망치는 과정에서 엄수(掩水) 강에 이르렀을 때, 활로 물을 치는데, 이는 다리를 만들기 위함이였다.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자, 서둘러 강을 건넜고, 추격병까지 따돌리면서 무사히 탈출한다. 그리고, 부여로 가서 수도를 정하고 왕이 된다.

3. 각 사서별 해석 차이

3.1. 삼국유사

삼국유사》에서는 북부여의 시조라고 전해지는 해모수를 계승한 인물로 묘사되었으며, 졸본에 도읍을 정해 부여를 건국하고, 훗날 고구려 건국에 영향을 준 인물이라고 되어 있다.

3.2. 삼국사기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 고주몽이 졸본부여를 계승했다고 한다. 이는 해석상의 차이로서 논란이 있는 부분이며, 졸본에 도읍을 정해 부여를 건국한 인물은 일반적으로 주몽(추모)과 동일시된다. 하지만 주몽을 부여의 건국자로 보는 이유는 단순히 이름이 동명으로 같아서 그렇게 보는 것뿐이며 이에 대한 근거가 미흡하다. 오히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를 보면 주몽이(졸본부여에 도착하여) 졸본부여왕의 왕위를 계승했다고 나온다.# 즉 졸본 도착 이전 졸본부여라는 나라는 이미 있었으며, 주몽은 졸본부여를 계승한 계승자이지 건국자는 아니었다. 또한 백제의 실질적인 건국자는 온조왕으로 이 해석이 타당하다.

3.3. 고려시대 이후 문헌

고려 시대 이후의 문헌에서는 동명왕과 주몽을 같은 인물로 여기고 두 사람을 구분하지 않았다.[2]

4. 당대 인식(고구려 시기)

東明感氣踰㴲川而開國 朱蒙孕日臨浿水而開都 威漸扶索之津力制蟠桃之俗
옛날에 동명(東明)이 기(氣)를 느끼고 사천(㴲川)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朱蒙)은 해를 품고 패수(浿水)에 임해 수도를 열어, 위엄이 해뜨는 곳[扶索\]의 나루에 미치고 세력이 동쪽 지역[蟠桃\]의 풍속을 제압하였으니
<연남산 묘지명> 금석문 中
'광개토대왕릉비' 및 '<모두루 묘지명>' 등 고구려의 금석문에서 자신의 시조를 오직 추모(주몽)로 표기하고 있을 뿐 동명이라 한 예는 없고, 고구려 당대 인물인 <연남산 묘지명>에서는 동명과 추모를 서로 다른 사람으로 구분하고 있다.

5. 고구려 "주몽 설화" 와의 유사성

읽어보면 알겠지만, <동명왕 설화>는 고구려의 <주몽 설화>와 거의 비슷하다. 많은 부분을 차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된 건 외부에서 졸본부여에 정착한 계루부 세력의 왕가가 졸본부여의 왕위를 계승한 상황과 연관이 깊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여계 백성들의 신임을 얻기 위해 <동명왕 설화>를 차용해 계루부의 시조인 주몽의 신성성을 강조할 필요가 절실했기 때문이었던 걸로 보인다.[3]

6. 두 설화를 구분하지 않은 이유와 현대인의 시선

고구려, 부여의 설화가 구분되지 않았던 이유는, 전체적인 줄거리가 비슷한 데다 부여의 동명왕과 고구려의 동명성왕(고주몽)은 왕명도 같아 구분하기 쉽지 않고, 고구려가 부여에서 파생되어 길게 존속했다는 점에서 비중이 상대적으로 덜한 부여의 동명이 고구려의 주몽으로 귀속되어 두 인물이 한 명으로 보이는 착시 현상이 발생한 것으로 바라보아진다. 이에 대해 '동명왕'이라는 호칭 자체가 당시에 '태조'를 뜻하는 부여계 고유어라서 부여와 고구려 양쪽에서 '동명' 왕이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주장이 있다.[4]

현대, 대한민국에 들어서도 기존의 동일인물설에 비판이 가해지는 상황이다. 일단 부여가 고구려보다 먼저 존재했다는 건 참이기에 부여 건국설화가 고구려 건국설화보다 앞선다는 것 역시 사실이며, 고구려 <주몽 설화>는 부여 <동명왕 설화>를 모티브로 했다는 것이 현대인의 시선이다.

7. 기타

옛 기록(古記)에 이르기를 “《전한서》에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壬戌) 4월 8일 천제(天帝)[5]가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五龍車)를 타고 흘승골성(訖升骨城) 요나라(大遼) 의주(醫州) 지역에 있다.에 내려와서 도읍을 정하고 왕을 일컬어 나라 이름을 북부여(北扶餘)라 하고 자칭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고 해(解)로써 씨를 삼았다. 그 후 왕은 상제의 명령에 따라 동부여로 도읍을 옮기게 되고 동명제(東明帝)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나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세우고 졸본부여가 되었으니 곧 고구려(高句麗)의 시조이다. 아래에 나타난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권 제1 <기이>(紀異) -북부여조-
《주림전》(珠琳傳) 제21권에 쓰였으되, “옛날 영품리왕(寧禀離王)의 몸종이 태기가 있어 점쟁이가 점을 쳐 말하기를 ‘아이를 낳으면 귀히 되어 반드시 왕이 되리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내 자식이 아니니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 몸종이 말하기를 ‘하늘로부터 기운이 뻗쳐 내렸으므로 내가 아이를 밴 것이외다.’라고 하였다. 그가 아들을 낳게 되매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돼지우리에 버리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 덥히고 마굿간에 버린즉 말이 젖을 먹여서 죽지를 않고 필경은 부여왕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동명제(東明帝)가 졸본부여의 왕이 된 것을 말함이다. 이 졸본부여는 역시 북부여의 별개 도읍지이므로 부여왕이라고 한 것이다. 영품리는 부루왕의 다른 칭호이다.
삼국유사권 제1 <기이>(紀異) -주림전-[6] 인용
  • 삼국유사 기이의 북부여편과 주림전에도 동명왕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다.
  • '주몽이 동명성(금성)을 뜻하는 말'이며 그러므로 주몽이 동명왕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당대 기록인 《위서》 <고구려전>에서는 오히려 '주몽'을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고 풀고 있을 뿐 금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또한 언어적 유사성을 통해 접근하는 이러한 가설은 역사적 근거가 하나도 없는 경우, 굉장히 조심해야 하며, 실제 고대 언어의 음가나 의미를 확신할 수 없는 경우, 심각한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높다. 당대 사료에서 주몽 = 동명설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가 등장한 이상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만 한다.
  • '고구려'란 국명 자체도 동명왕의 탄생지인 고리국의 '고리'에서 따왔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주몽 설화>에서 북부여는 고구려가 계승해야 할 부모국이라기보단 시조 주몽을 괴롭힌 적대국으로 등장한다. 설화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 고구려는 이후에도 북부여와 많은 전쟁을 벌여야 했다. 또한 해모수-해부루로 이어지는 북부여의 계보는 북부여가 아닌 고구려에서 후대에 전해진 것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데, 예를 들면 해부루 또한 천손임에도 불구하고, 주몽이 나라를 세우게 된다는 계시가 있자 천도를 해야 했고 그 후손인 북부여 왕족들도 찌질하게 묘사되는 등 아무리 봐도 주몽보다 못한 2류 천손 정도로 묘사되었다. 이에 대해 <동명왕 설화>가 고구려에서 왜곡하지 않은 순수한 북부여의 시조 설화였다고 한다면 고구려에서 <동명왕 설화>를 찬탈하여 <주몽 설화>에 써먹은 뒤, 북부여와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해모수-해부루-금와왕 설화>를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후대에 북부여, 동부여는 쇠약해지다 고구려에게 멸망하고, 역내 세력권은 모두 고구려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던 만큼 고구려 우위가 아닌 설화는 거의 남지 않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저희들은 본계(本系)가 백제국 귀수왕(貴須王)에서 나왔습니다. 귀수왕(貴須王)은 백제가 처음 일어난 때로부터 제16대 왕입니다. 대저 백제의 태조(太祖) 도모대왕(都慕大王)은 태양신이 몸에 내려온 분으로, 부여(扶餘)에 머물러 나라를 열었습니다. 천제(天帝)가 녹(籙)을 주어 모든 한(韓)을 통솔하고 왕을 칭하게 하였습니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연력(延曆) 9년 7월
* 일본의 기록인 《일본서기》와 《속일본기》, 《신찬성씨록》에서 백제의 태조로 부여의 도모대왕이라는 인물을 언급한다. 다시 말해서 백제인 스스로는 (부여의 동명왕과 동일시되는) 도모왕을 자국 태조로 본 것이다.[7]
* 유류와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 또한 동명왕 사당을 세우고 제사 지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다. 일단 한성백제를 건국한 두 지배층 중 하나인 고구려인들은 적어도 현재로서는 기원후 2세기 후반에 내려온 이들[8]로 드러나고 있으니, 온조왕의 역사적 아버지가 부여 동명왕일 가능성은 전혀 없지만[9] 백제인의 자국 인식에서는 전술했듯 태조를 부여 동명왕과 동일시하고 있다. <비류시조설>에 따르면 비류와 온조는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의 아들로 나오는데 이에 의하면 비류와 온조는 동명성왕 주몽과는 혈연 관계가 없고 해모수-해부루-우태의 후손이 된다. 계보를 동명왕~연타발-소서노-비류/온조로 보아 비류와 온조를 동명왕의 혈연적 후손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정작 졸본부여 군주였던 연타발의 시조에 대한 기록은 없다. 백제는 훗날 성왕이 부여의 이름을 따서 '남부여'로 국호를 바꾸기까지 했던 만큼 부여를 다소 적대적으로 보았던 고구려에서와는 다르게 백제에서는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소위 우태-비류계 왕실로 비정되는 고이왕계 왕실 또한 동명왕 사당에 참배를 적극적으로 하고 있음이다. 비류계 백제 건국 사화는 온조계 건국 사화와 주몽, 소서노, 우태를 놓고 입장이 크게 달랐으나, 적어도 전승만 보면 우태는 부여 건국자인 동명왕의 후예였고 굳이 따지면 온조-초고계 왕실에서도 중요했을 인물이므로 국가 통합 이데올로기 상으로도 문제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1] 한나라의 왕충이라는 역사덕후가 쓴 엄청난 책이다. 한 명의 개인이 백 명 보고 쓰라 해도 못 쓸 만한 양, 세상 소문까지 다 모은 듯 거의 백과사전 저리가라할 수준의 엄청난 양의 역사 이야기를 써놨기 때문에 현대에도 세계 동양사학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자료로 쓰이고 있다. 물론 모든 내용이 팩트일 수는 없으나, 한반도나 만주 이야기까지 저렇게 열심히 써놓는 성의를 보였기에 역사학자들도 크게 인정하는 책이다.[2] 단, 현재 역사학에서는 추모와는 다른 인물로 여기고 있다. 후자에 대해서는 해당 항목 참조.[3] 다만 <주몽 설화>에서는 북부여의 건국자 해모수와 그의 아들 해부루가 주몽의 혈족으로 묘사되었고, 강의 신인 하백이 추가되었다. 이후에는 아예 동명과 주몽이 같은 인물이라는 인식까지 생겨났다.[4] 조선 후기, 이러한 현상에 의문을 품은 정약용 등의 실학자들은 비판을 가한 바가 있다.[5] -고구려조-에서는 제(帝) 뒤에 자(子) 자가 있다.[6] 당(唐) 고종 총장 원년(668)에 도세(道世)가 지은 《법원주림》(法苑珠林)을 가리킨다.[7] 사실 고고학적으로 보면 백제에서 부여 요소는 고구려를 통한 간접 요소에 그치고, 직접적인 영향은 고구려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당사자 백제인 스스로는 자국을 부여로, 건국자를 태조 도모대왕으로, 비류/온조를 남하를 한 중흥임금으로, 고구려를 부여의 곁가지로 취급했다.[8] 이것도 하북위례성을 서울 강동구 일대가 아니라 임진강 유역에 군집한 고구려계 적석총 유적으로 보면 성립하는 견해다. 가장 오래된 고분이 아무리 올라가도 2세기 후반이고, 하남위례성 정도 시점도 고고학적으로는 3세기 중후반기 한계인 상황이니, 고구려인들이 정말로 삼국사기 초기 연대대로 기원전 1세기 초반에 경기도 및 서울 일대에 정착한 근거는 현재 없음이 갈수록 확실해져 가고 있다.[9] 현재로서는 과연 한성백제의 창업자가 온조인지 자체도 대단히 의문시되는 상황이다. 확실한 건 비류계 사화와는 달리 우태를 계보에서 삭제하고 적대국의 건국 시조인 주몽을 역으로 강조하면서 소서노의 비중까지 축소를 마다하지 않는 온조계 사화를 보면, 적어도 근초고왕 이후에 확립된 백제 왕실의 혈통적 선조가 주몽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