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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미상 |
성씨 | 미상[1] |
휘 | 미상 |
선대 군주 | 준왕(準王) |
생몰년도 | ? ~ 기원전 19년 |
재위년도 | ? ~ 기원전 19년 |
1. 개요
원삼국시대 마한의 군주로 준왕 이후 확인되는 마한왕이다. 휘와 시호는 전해지지 않으며 누구에게 왕위를 세습받았는지도 전해지지 않는다.마한왕 2세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실제 2대 군주는 아니나, 실체가 파악된 순서로는 2번째 마한왕이기에 편의상 2세로 표기된 것이다.
2. 생애
진·변한(辰·卞韓)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어찌 이와 같은가?
辰·卞二韓, 爲我屬囯, 比年不輸職貢, 事大之禮, 其若是乎.
辰·卞二韓, 爲我屬囯, 比年不輸職貢, 事大之禮, 其若是乎.
기원전 20년(혁거세 38년), 혁거세가 호공을 마한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마한왕은 호공을 꾸짖으며 공물을 바치지 않은 것을 책망하지만 호공은 두 성인이 일어나신 후 낙랑, 변한, 왜국 모두가 신라를 두려워하는데도, 마한왕에게 자신을 보내 안부를 물었으니 예가 지나치다고 응수했다. 이에 분개한 마한왕은 호공을 죽이려 했지만 신하들이 말려서 호공을 살려 보내게 된다. 이후 1년 뒤 마한왕이 사망하는데 신라에서 어떤 이가 마한을 정벌할 기회라고 혁거세에게 아뢰지만 혁거세는 "남의 재앙을 다행으로 삼는 것은 어질지 않은 짓이다."라고 하며 설득에 따르지 않고 대신 조문 사절을 보냈다고 한다.
일단 연대만 보면 사로국 같은 경우 진한 일대의 소국간 우열을 확고히 하여 간접 지배로 편제한 게 고고학적으로는 4세기로 풀이되지만, 그 전부터도 사로국이 적어도 목지국처럼 명목상으로나마 진한 전체의 맹주였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 굳이 문제가 있다면 고고학적으로 볼 때, 혁거세가 실존했을 개연성이 높은 시간대가 적어도 기원전 1세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현대 고고학계에서는 혁거세 거서간이 속한 서북한 고조선계가 경주 일대로 남하하여 선주 고조선계 세 집단을 아울러 신라를 건국한 시기를 2세기 후반으로 잡고 있다. 거기다 신라 초기 기록을 보면 후대 왕의 기록을 선대 왕이 한 것처럼 인상해 기록한 것으로 여겨지는 정황도 몇 가지 있어 후대 왕의 기록을 혁거세의 기록인 것마냥 왜곡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천안 청당동에 소재했던 마한 그리고 더 나아가 삼한 전체의 명목상 맹주국인 목지국이 처음으로 천안 일대에 자리 잡은 건 기원후 1세기 후반~2세기 초반으로 나오는데[2], 박씨 족단으로 추정되는 낙랑인 집단이 기존 서라벌에 있는 세력들[3]을 아우른 2세기 후반보다 확실히 빠르긴 하다.
3세기 후반 백제가 목지국 본가인 청당동 세력을 제압하면서 광속으로 남하하여 4세기 초반 전라북도 김제까지 남하하지만, 목지국 본가도 가만히 당하지 않아 충청북도 일대의 친목지국 성향의 마한 거수국들과 사로국을 비롯한 진한 거수국들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4세기 초반까지 백제에게 저항한 것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된다. 그 결과 분노한 백제가 목지국 본가와 충북 일대의 마한 소국 집단들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으로 보답하지만, 이 과정에서 진한의 도움을 받아 목지국의 편을 들었던 충주 금릉동의 마한 거수국이 사로국에 망명하여 김씨 족단이 되었다. 3세기 후반~4세기 초반 신라와 백제와의 전쟁 기록은 현대 학계에서 진한의 원조를 받은 목지국의 잔여 세력과 백제의 전쟁으로 해석되고 있는데, 어쩌면 해당 기록은 3세기 중반~후반 목지국이 백제에게 맞서고자 사로국의 원조를 받는 과정에서 일어난 해프닝을 신라가 자뻑하는 어조로 기록한 것이 혁거세 시절로 소급되어 기록된 것일 수도 있다.[4]
[1]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마한왕이 준왕의 후예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2] 주로 낙랑에서 내려온 조선계 집단인 것으로 파악된다.[3] 기존 선주민인 이들은 고조선이 연나라한테 한참 밀릴 때 내려온 집단, 위만조선이 성립할 때 위만에게 반대하여 내려온 집단, 위만조선이 서한에게 망할 때 내려온 집단 등, 전원 조선계긴 하지만 내려온 시기에 각기 차이가 있어서 문화나 정체성이 완전히 같을 순 없었던 걸로 보인다.[4] 당장 백제에게서 역사왜곡 수법을 배워온(...) 일본서기만 보더라도 자뻑으로 특정 사건을 왜곡해서 기술한 것이 수두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