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7 18:26:38

부여선광

1. 개요2. 생애3. 후손

1. 개요

출생 미상[1]
사망 693년[2]
이름 선광(善光)
용(勇)?
성씨 부여(扶餘) > 쿠다라노코니키시(百濟王)

扶餘善光
(? ~ 693년)

백제의 왕족으로 제31대 의자왕의 아들 혹은 부여풍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2. 생애

백제왕경복(百濟王敬福)이 죽었다. 그 선조는 백제국 의자왕으로부터 나왔다. 긴메이 덴노 때에 의자왕이 그 아들 풍장왕(豊璋王) 및 선광왕(禪廣王)을 보내어 천황을 모시게 하였다. 후에 사이메이 덴노에 이르러 의자왕이 전쟁에서 패하여 당에게 항복하자, 그 신하인 좌평 복신(福信)이 사직을 원래대로 회복하고자 멀리서 풍장을 맞이하여 끊어진 왕통을 이어 일으켰다. 풍장은 왕위를 이은 후 방자하다는 참언을 듣고 복신을 죽이니, 당병이 그것을 알고 주유(州柔)를 다시 공격하였다. 풍장은 우리 병사와 함께 대항하였으나 구원군이 불리하게 되자 풍장은 배를 타고 고구려로 도망하고, 선광은 이로 말미암아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지토 덴노가 백제왕(百濟王)이라는 호를 내려주었으며, 죽은 후 정광참(正廣參)에 추증하였다.
《속일본기》 권27 쇼토쿠 덴노 덴표진고 2년 6월#
속일본기》에 따르면 631년 부여풍이 질자로 보내질 때 함께 일본으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후 부여풍이 귀실복신 등의 추대로 백제로 돌아간 것과는 달리 부여선광은 그대로 일본에 머무르고 있었다.[3]

일본서기》에 따르면 664년 3월 덴지 덴노[4]의 배려로 나니와(현 오사카) 지역에 거처를 마련했다고 한다. 앞서 663년 백강 전투에서의 참패로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한 직후이므로 더 이상 돌아갈 백제가 없어졌으니 이때부터 사실상 일본에 영구 정착하도록 배려한 듯 하다. 676년에는 일본 조정에 진귀한 물품을 바쳤으며, 686년 덴무 덴노의 장례식에 참여했다.

이후 지토 덴노로부터 구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를 하사받았다. '코니키시'는 바로 건길지로, 백제어를 음차한 것이다. 따라서 구다라노코니키시씨는 '백제건길지'씨를 일본어로 읽은 것이 된다. 일본이 지원하고 백제인이 세운 백제왕 부여풍은 백제부흥운동 실패 후 고구려로 망명했으므로[5] 일본에서는 일본에 남은 왕족인 부여선광을 백제 구 왕실의 후계자로 간주한 듯 하다. 생전의 관직은 종3위 정광사에 이르렀다. 693년에 사망한 후 정3위 관위와 조의품이 내려졌다.
공경(公卿)에게 음식과 의상을 주었다. 정광사 백제왕여선광(百濟王餘禪廣), 직대사 원보(遠寶)·양우(良虞)·남전(南典)[6]에게는 넉넉히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일본서기》 권30 지토 덴노 5년 정월#
691년 '여선광'(餘禪廣)으로 기록에 등장하는 것을 볼 때 구다라노코니키시씨 하사는 죽기 얼마 전에 이뤄진 것으로 보이며, 그 전까지 부여씨를 계속 사용했던 듯하다. 구다라노코니키시씨 하사 이전에도 '백제왕 선광' 혹은 '선광왕'(善光王)이라 불린 것으로 볼 때 도일한 백제 유민들의 대표로 내세워졌을 가능성이 높다.

구당서》에 기록된 부여용(扶餘勇)과 동일인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유인원664년 10월 당고종에게 올린 상소에 의하면 부여풍과 함께 각각 고구려와 일본에서 위험인물로 간주된 듯하다. 이 논지에 따르면, 《구당서》에 백제 멸망 후 부여용이 왜로 도주했다는 기사가 있고, 그 시점에 선광도 왜에 있었으므로 부여선광=부여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선광이 백제 멸망 전부터 왜국에 머무르면서 귀국한 기록이 없는 것과 모순되어 그대로 따르기는 어렵다. 선광이 부여풍과 함께 귀국했다가 다시 도주했을 수도 있지만 입증할 수는 없다.

3. 후손

아들 창성(昌成), 손자 낭우(郎虞), 증손자 경복(敬福) 등 여러 후손들이 기록에 남아있다.

창성의 경우,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도일했으나, 675년 아버지보다도 일찍 죽었다. 반면 손자 양우는 737년까지 살았고, 증손자인 경복도 69세로(698~766) 상당히 장수했다.

이후 경복의 자손들은 천황가와 혼인하면서 관계를 맺었는데, 특히 경복의 현손녀였던 경명(慶命)은 사가 덴노와 혼인하여 815년 아들인 미나모토노 사다무(源定)를 낳았고, 그의 증손녀였던 치카코(源周子)가 다이고 덴노와 혼인하여 914년 아들 미나모토노 타카아키라(源高明)를 낳았으며, 그의 딸 아키코(源明子)의 외손자인 미나모토노 아키후사(源顕房)가 현 나루히토 천황의 직계 조상인 호리카와 덴노의 외조부였다.

쿠다라노코니키시씨가 거처했던 일본 오사카부히라카타시에 부여선광의 신주를 모신 구다라오 신사(百濟王神社)가 창건되었다.#


[1] 616년 ~ 630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의자왕의 맏아들인 부여융이 615년에 태어났고, 속일본기에 의하면 631년 형 부여풍과 함께 일본에 도래한 점을 고려하면 그 이전에 출생했을 것이다.[2] 일본서기에 의하면 693년 음력 1월 15일에 정3품 관위와 조위품이 내려진 기록이 남아있다.[3] 부여풍과 함께 백제로 간 부여충승 · 부여충지 형제는 백강 전투 패배 후 나당연합군에 항복했다.[4] 아직 즉위식을 치르기 이전이었지만 실질적인 최고 통치자였다.[5] 부여풍은 668년 고구려의 멸망 이후 결국 당군에 잡혀서 중국 내륙으로 유배되었다.[6] 선광의 아들들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