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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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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황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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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 제3대 황제
조방 | 曹芳
출생 232년
조위 연주 임성국 임성현
(現 산둥성 지닝시 런청구)
즉위 239년 1월 22일
조위 사례 하남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사망 274년 (향년 42세)
서진 사주 하내군
(現 허난성)
재위기간 조위의 황태자
239년 1월 22일
조위의 황제
239년 1월 22일 ~ 254년 10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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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8b><colcolor=#ece5b6> 성씨 조(曹)
방(芳)
부모 양부 열조
양모 명원황후
배우자 회황후, 황후 장씨, 황후 왕씨
난경(蘭卿)
작호 제왕(齊王) → 소릉공(邵陵公)
시호 여(厲)
제호 전폐황제(前廢皇帝)
연호 정시(正始, 240년 ~ 249년)
가평(嘉平, 249년 ~ 254년)
}}}}}}}}} ||
1. 개요2. 생애
2.1. 즉위 이전2.2. 즉위 이후2.3. 폐위2.4. 폐위 이후
3. 가족 관계4. 평가5. 미디어 믹스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삼국시대 조위(曹魏)의 제3대 황제. 는 난경(蘭卿).

위나라 황제들 중 재위기간이 15년으로 가장 길며,[1] 삼국시대 황제들 중에서 촉한의 마지막 황제인 유선(40년), 오나라의 첫 번째 황제인 손권(23년), 마지막 황제 손호(16년)에 이어 네 번째로 길다.

고구려조위하고 싸운 비류수 전투가 조방의 재위기에 벌어진 일이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위명제 조예어디선가 데려온 양자이며 형제로는 조순이 있었다. 어릴 때 조방은 황태자가 되었으며 조순은 진왕(秦王)에 봉해졌다. 이에 대해 《정사 삼국지》에는 애초에 황실의 비밀이라 근본을 알 수 없다고만 했고, 《위씨춘추》나 《세설신어》에서는 임성왕 조해(曹楷)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훨씬 후대에 저술된 책의 저자들이 조방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진수[2]도 알 수 없었던 사실을 제대로 알아냈으리란 신빙성은 낮다. 한편 배송지는 주석에서 조방이 조등의 둘째 형[3]의 증손자 조경의 후손이라고 적었다.

비록 조방이 명제 조예의 친자가 아니더라도 명확하게 조씨일족 출신 양자임을 증명했더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만약 정말로 임성왕 조해의 아들이라면, 조해는 조창의 아들이고 명제 조예에게는 사촌이기 때문에 오촌 조카인 조방을 입양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 경우 정통성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어차피 아들 없는 사람이 친척의 아들을 입양하는 게 흔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조방의 경우에는 아무리 황제인 조예의 양자가 되었다 해도 결국에는 누구의 아들인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정통성에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 조조가 아들을 워낙 많이 낳았기 때문에 누구 아들인지 명확한 다른 황족 친척들이 매우 많았는데도 굳이 부모를 비밀로 해야 하는 친척을 양자로 들여서 정통성을 저해했다는 점에서 여러 의문을 자아낸다.

2.2. 즉위 이후

조예가 239년, 재위 14년 만에 36살의 나이로 죽자 9살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나이가 어렸으므로 조예의 황후이자 조방의 양모인 곽태후(명원황후 곽씨)가 대신 수렴청정을 하였고, 조예의 탁고대신인 조상사마의가 어린 황제를 곁에서 보필했다. 사마의의 아들인 사마준은 조방과 나이가 같은데 사마준이 조방에게 글을 강론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조상과 사마의 간의 분쟁이 암암리에 격화되면서 조상은 사마의 측 인사들을 전부 배제하고, 자신과 동생, 지인 등으로만 권력구조를 독점했고, 황제 조방조차 무시한 채 전횡을 일삼았다.

물론 사마의도 이걸 그냥 당할 남자는 아니었기에 두 아들인 사마사사마소를 데리고 고평릉 사변을 일으켜 조상 일파를 죄다 죽여버린다. 이로써 사실상 위나라의 전권은 하내 사마씨 가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다만 사마의는 다른 생각이 있었는지 아니면 적어도 자기대에선 역성혁명을 벌이지 않았던 조조를 보고 느낀 바가 있었는지 건국 자체엔 관심이 없어 그냥 조위의 실세로 있는 데 만족하여[4] 조위의 사직은 보존할 수 있을 듯 했으나 문제는 두 아들들은 이런 사마의와 달랐다.

조방이 10살도 안 되는 나이에 황제가 됐다는 것 때문에 사마의가 어린 조방을 꼭두각시로 만들었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사마의가 고평릉 사변을 일으켰던 때는 조방 재위 10년인 249년이다. 즉 조방의 나이 19세이므로 어리다면 어리지만 그 당시 기준으론 일단 성인에 속하는 나이다. 거기다가 10년 동안이나 황제였으니 적어도 황제로서 경력만 보면 적은 것도 아니었다.

2.3. 폐위

사마의의 뒤를 이은 사마사가 권력을 잡자 조방은 외척인 장집, 중서령 이풍, 황문감 소삭, 영녕서령 악돈, 항종복야 유현, 태상 하후현 등과 함께 사마사와 그 일당들을 주살하고 하후현을 대장군으로 대신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발각되어 실패했고 이풍, 하후현 등은 처형되었다. 그 이후 장집의 딸이자 황후인 장씨도 사마사에 의해 폐출되는 등 조방의 측근이 모두 정리되었다.

몇 달 뒤 수세에 몰린 조방은 사마사를 없애려 하였으나 계획만 세우고 실행치 않았다. 정확하게는 강유농우로 침범하자 허창에 주둔하고 있던 안동장군 사마소를 강유를 공격하라고 수도로 부른 다음 그를 죽이고 그 군대를 탈취, 사마사도 몰아낸다는 계획이었는데 막상 사마소가 들어오자 조방은 이를 두려워하며 실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마소는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들어왔고 사마사는 이 계획을 알고 황제의 계획을 황태후에게 말하며 황제를 폐위시킬 작정을 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사마사는 황태후인 곽태후를 통해 조방을 폐위시켰다.
가을 9월 대장군 사마사는 황제의 계획을 황태후에게 말했다. 19일, 황태후가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황제 조방은 이미 성년이 되었지만, 국가의 정무를 직접 처리하지 않고, 부인에게 탐닉하고 여색에 빠져 매일 배우들을 불러들여 추악한 유희를 즐기고 있고, 후궁 여자들을 맞아 내전에 머물게 하여 인륜의 질서를 파괴하고 남녀의 정절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소. 공손함과 효도하는 마음은 날마다 줄어들고, 도리에 역행하는 오만함만이 점점 심해져 하늘이 명한 대업을 잊고 종묘를 받들 수 없게 되었소. 겸태위(兼太尉) 고유에게 간책(簡策)을 받들어 종묘에 제사지내어 보고하고 조방을 제나라로 돌려보내 옛날대로 번왕을 담당하도록 하여 황제의 자리에서 떠나도록 하시오."

이 날 황제는 다른 궁전으로 옮겨 머물렀으며, 이때 그는 스물셋이었다. 사자가 부절을 갖고 호송하였다. 하내군(河內郡) 중문(重門)에 제왕의 궁궐을 만들었고, 제도는 모두 번국의 예식과 같았다.

《위서》 <제왕기>
이로써 조방은 사마사에 의해 폐위되었다. 조방은 제왕(齊王)이라는 작위를 받고 하내군(河內郡) 중문(重門)으로 쫒겨났다.

참고로 《삼국지집해》에선 조방의 비행 부분에 대해 그거 거짓이라는 학자들의 의견이 줄줄이 달린다. 앞에선 선행을 잔뜩 써놓고 마지막엔 그에 상반되는 기록을 남겨 위화감을 느끼게 만드는 진수의 기법이라고 보이는데 실제로도 많은 학자들이 의구심을 가지고 반박했다.

삼국지연의》에선 사마사 토벌 밀모 장면이 과거 헌제의 명을 받은 동승유비, 마등, 유표 등을 끌어들여 조조를 주살하려다 실패한 것과 비슷하게 묘사된다.

2.4. 폐위 이후

폐위 후 일생은 알려진 게 없는데, 《정사 삼국지》에서는 폐위된 후 곧바로 조모를 옹립하는 걸로 끝난다. 《진서》에서는 약간의 기록이 더 있는데, 265년 서진이 세워지면서 더 이상 황족이 아니게 던 그는 제왕에서 소릉(邵陵公)으로 격하되었다.

274년, 42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시호는 여공(厲公)으로 추증되었다. 문제는 시법에서 죄없는 사람들을 살육한 경우를 '여'라고 한다고 한 만큼 이 글자가 얼마나 좋지 않은지를 고려하면 고인드립인 셈이라는 거다. 참고로 우금도 이 시호를 받았다.

3. 가족 관계


황후로는 회황후[5]가 있었으나 251년 세상을 떠났다. 회황후 사망 후 장집의 딸인 황후 장씨를 맞아들였으나 사마사 주살 시도가 발각되는 바람에 장씨가 쫓겨났고 황후 왕씨를 맞이했다. 후궁들은 당대에 특이하게 본명이 알려진 여자들이 많다. 자손은 없었는지 전혀 기록된 것이 없다.

4. 평가

후한의 헌제나 조방이 폐위된후 즉위한 조모에 비하면 참 존재감도 없는 애매한 황제로 딱히 이야기 거리나 평가할만한 껀덕지도 별로 없다.

꼭두각시 황제였던건 헌제나 조방이나 조모나 다 마찬가지 지만 그래도 헌제는 나름대로 잠재력이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황제인데다 인성도 흠잡을것 없이 좋았고 왕윤을 시켜 동탁을 주살하거나 조조를 없애려 하는등 나름대로 갖은 노력을 기울였고, 조모의 경우 능력은 말할것도 없이 뛰어났으며 본인이 스스로 검까지 빼들어 사마소를 주살하려 하는등 할 수 있는 건 다 한데 비하여 이쪽은 존재감도 없거니와 능력에 대해 언급되는 부분도 없고,기록이 누락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고평릉 사변 당시에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투항하자는 조상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가 결국 조위 멸망의 서막을 열었으며 이후에도 사마소를 제거후 사마사를 몰아내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단념하는 등 은근히 유약하고 겁많은 모습도 많이 보인다.

비록 대놓고 살육을 자행하거나 사람을 함부로 죽인 적도 폭정을 일삼은 적도 없기에 여라는 시호는 부적절하지만 그외엔 딱히 고평가 할만한 요소가 전무하다. 인지도도 딸려서 여타 매체에서 헌제나 조모는 나오더라도 조방은 출연하지 않는 경우도 많으며 이후 즉위한 조모가 워낙 임팩트 있는 모습을 보이며 장렬하게 사망했기에 조방은 기억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5. 미디어 믹스

5.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파일:external/vignette4.wikia.nocookie.net/Caofang-rotkxi.jpg
삼국지 9, 10, 11
파일:external/san.nobuwiki.org/0484.jpg
삼국지 12, 13, 14

삼국지 3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그래도 황제인 만큼 나오지만 능력치가 낮다. 황제일 경우는 옥새를 들고 있으니 매력이라도 100이지만 황제가 아닐 때라면 평범하다.

삼국지 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45 / 무력 53 / 지력 47 / 정치력 55 / 매력 55에 특기는 화계, 호통 2개 가지고 있다. 239년 1월에 나오며 나이가 7살이다. 숨은 능력치는 야망 14 / 용맹 3 / 수명 1 이다.

삼국지 6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50/무력 20/지력 31/정치력 60/매력 74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무력 6/지력 29/정치력 55. 모략계 병법인 혼란을 가지고 있지만 지력이 저래서야.... 그 밖에 병법으로는 지식계 병법인 조영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3/무력 8/지력 24/정치력 58/매력 71에 특기라고 있는 게 주호. 단 1개. 그나마 증조부들 아이템을 물려받고 나온다면 전론, 의천검, 옥새 등을 물려받기 때문에 통솔력 3/무력 13/지력 30/정치력 58/매력 100이 된다.

삼국지 12의 본편에서는 짤렸다가 PS3판에서 새로 등장했는데 일러스트는 쓸데없이 성깔이 있게 왕좌에 앉은 채 무섭게 노려보고 있다. 능력치 총합은 102.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20/무력 14/지력 27/정치력 48. 특기는 문화 1, 견수 1. 전수특기는 문화로 전법은 고무.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5, 무력 8, 지력 28, 정치력 48, 매력 71로 전작과 달리 지력이 1 상승한 대신 통솔력이 15, 무력이 6 하락했다. 개성은 소침, 주의는 왕도, 정책은 지역진흥 Lv 3, 진형은 안행, 전법은 고무, 친애무장은 이풍, 장집, 하후현, 혐오무장은 없다.

5.2. 영걸전 시리즈

삼국지 공명전에서는 위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된 인물로 곧 조상이 실각되고 사마의에게 전권을 장악당해 황제답게 살지도 못했다. 마지막 전투인 낙양 전투를 클리어하면 낙양 황궁에서 자결한 시체로 발견되는데, 유서에 죄는 모두 선조들과 나에게 있으니 장수나 관리들에게 죄를 묻지 말라는 말을 남긴다. 이를 본 제갈량은 "명군의 자질이 있었을지도 모르겠군"이라고 평가한다.

파일:The Legend of Cao Cao Cao Fang.png

삼국지조조전 Online에서는 본래 성년의 모습으로 플레이어블 무장이 될 예정이라 초상화도 있었지만, 게임에서는 정작 제대로 사용되지 못하고 탈락 무장이 되었다. 병과는 보병, 능력치는 무력 26. 지력 76, 통솔 54, 민첩 48, 행운 50. 회심 대사는 비겁한 자들이로구나!, 퇴각 대사는 네 이놈, 기억해두겠다.

사마의전 스토리에서 어린 시절로만 등장하는데, 조상을 따라 고평릉에 동행했다가 사마의가 낙양을 제압하고 조상 앞으로 오자 사마의가 날이 춥다면서 먼저 처소로 들라면서 추후 찾아뵙겠다고 하자 낙양으로 돌아간다. 사마의가 왕릉의 반란에 연루된 황족 조표를 처벌해야 할 것과 종친들을 업에 불러 감시하게 하는 것을 주장하자 알았다고 허락한다.

5.3.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파일:전략조방.png

최종권인 60권에 등장한다. 스토리가 딱 촉나라 망하는 부분까지 진행되기에 조방은 어린 아이의 모습로만 등장한다.

5.4. 삼국전투기

조우, 조상 등과 더불어 플레이모빌 인형으로 등장한다. 황제가 된 이후에는 본작에서의 역대 조위 황제들이 그랬듯 가면을 썼다.

전투외편 2편에서 처음 등장. 조예에 의해 태자로 임명되었으며 조예 사망 후 위의 황제가 된다.

전투외편 4편에서는 제사를 올리기 위해 고평릉으로 향했었고, 사마의가 고평릉 사변으로 조상 세력을 전부 제거한 뒤에는 덜덜 떨면서 사마의에게 승상직을 부여하려 했다.[6]

적도 전투 편에서는 어느 정도 성장하여 사마씨의 전횡에 반감을 품게 되었다고 언급되었다. 조방은 진태의 지원 요청을 구실삼아 사마씨 가문을 척결하기로 정했고 사마소를 적도에 지원하러 갈 군대를 끌고 입조하게 한 뒤, 사마소를 죽이고 군대를 빼돌린 다음 그 군대로 사마사를 죽인다는 그럴 듯한 계획을 짰지만 막상 사마소를 보자 쫄아붙어서 그냥 사마소를 보내줘 버렸고, 결국 그 군대는 사마사가 사마소에게 빌려 이용해서 역으로 조방 본인이 폐출당해버렸다.

5.5. 대군사 사마의

조예가 황실 종친 중 남아 한 명을 데려와 양자로 삼았다고 나와 누구의 자식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사마의의 첩 백령균이 유모로 돌본다. 하지만 개초딩스러운 성격에[7] 황궁예법을 적응 못했지만, 백령균이 겨우 예법을 가리켰을 때, 사마의를 쳐내려는 조상일파가 조방의 친모를 모셔왔다며, 임성왕 조해의 첩을 데려와 유모로 삼게 한다. 세설신어의 임성왕 조해의 아들, 곧 조창의 손자라는 설을 채택하고, 적자가 아닌 서자라 그동안 굳이 드러내지 않았다는 식으로 재해석을 해서 이야기를 풀어냈다.

6. 둘러보기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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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권 「왕위이유부전(王衛二劉傳)」 22권 「환이진서위노전(桓二陳徐衛盧傳)」 23권 「화상양두조배전(和常楊杜趙裴傳)」
왕찬 ,진림 완우 유정, · 위기 · 유이 · 유소 · 부하 환계 · 진군 ,진태, · 진교 · 서선 · 위진 · 노육 화흡 · 상림 ,시묘, · 양준 ·두습 · 조엄 · 배잠 ,배수,
24권 「한최고손왕전(韓崔高孫王傳)」 25권 「신비양부고당륭전(辛毗楊阜高堂隆傳)」 26권 「만전견곽전(滿田牽郭傳)」
한기 · 최림 · 고유 · 손례 · 왕관 신비 ,신헌영, · 양부 ,왕이, · 고당륭 ,잔잠, 만총 · 전예 · 견초 · 곽회
27권 「서호이왕전(徐胡二王傳)」 28권 「왕관구제갈등종전(王毌丘諸葛鄧鍾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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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권 「방기전(方技傳)」
화타 · 두기(夔) ,마균, · 주건평 · 주선 · 관로
30권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오환 · 선비 ,가비능, · 부여 ·고구려 · · 읍루 · 예맥 · 동옥저 · 마한 · 진한 · 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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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조방이 재위기간이 긴 게 아니라 다른 황제들의 재위기간이 너무 짧은 것이다. 조비, 조모, 조환의 재위기간은 불과 6년이었고 그나마 긴 조예도 13년밖에 안 된다. 위나라만 이런건 아니고 삼국 모두 실질적, 형식적 창업주인 조조, 유비, 손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오래 살지 못했다. 유선, 조환이 예외 사례.[2] 진수와 조방은 1살 차이이다. 물론 진수는 촉한에서 30대까지 성장한 사람이라 위나라 사람은 아니지만.[3] 자가 숙흥인 인물[4] 사마의는 고평릉 사변 당시 이미 70세였다. 당시 기준으로 언제 갈지 모르는 노인이었고, 실제로도 고평릉 사변 후 고작 2년 만에 죽었다. 차라리 자식에게 후일을 맡기는 게 옳지 다 늙은 자신이 황제로 즉위하는 것은 심각한 무리수였다. 거기다가 그의 후계자였던 장남 사마사의 능력을 감안하면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5] 견엄의 손녀로 고모 할머니가 문소황후 견씨다.[6] 단, 사마의가 승상이 되겠다고 벌인 일이 아니라며 거절하면서 불발되었다.[7] 장춘화가 죽어 조문을 간 자리에서 슬픔에 빠진 사마의의 수염을 잡아당기며 조조가 꿨다는 세마리 말이 한 구유통에서 여물 먹은 꿈(삼마동조 三馬同曹) 이야기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