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9 19:11:29

가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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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제7대 황제
가경제 | 嘉慶帝
파일:800px-清_佚名_《清仁宗嘉庆皇帝朝服像》.jpg
출생 1760년 11월 13일
청나라 북경 원명원
(現 베이징시 둥청구)
사망 1820년 9월 2일 (향년 59세)
청나라 직예성 청더 피서산장
(現 허베이성 청더시)
능묘 창릉(昌陵)
재위기간 가친왕
1789년 ~ 1795년 9월 4일
청 황태자
1795년 9월 4일 ~ 1796년 2월 9일
제7대 황제
1796년 2월 9일 ~ 1820년 9월 2일 (24년 2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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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83e><colcolor=#00386a> 성씨 중국식 : 애신각라(愛新覺羅)
만주어 : 아이신기오로(ᠠᡳ᠌ᠰᡳᠨ ᡤᡳᡠ᠋ᡵᠣ)
중국식 : 용옌(顒琰)[1]
만주어 : 용얀(ᠶᠣᠩ ᠶᠠᠨ)
한국식 독음 : 옹염
부모 부황 고종 순황제
모후 효의순황후
형제자매 17남 10녀 중 15남
배우자 정후 - 효숙예황후 희탑랍씨
계후 - 효화예황후 뉴호록씨
후궁
16명 [ 펼치기 · 접기 ]
화유황귀비 유가씨, 공순황귀비 뉴호록씨
서비 완안씨, 화비 후가씨, 장비 왕가씨, 신비 유가씨
손빈 심가씨, 간빈 관가씨, 순빈 동가씨, 영빈 양가씨
은빈 오아씨, 안빈 소완과이가씨, 운귀인, 옥귀인
귀인 이씨, 해상재
자녀 5남 9녀
신장 165cm[2]
한호 사이충아 펑션 한(ᠰᠠᡳᠴᡠᠩᡤᠠ ᡶᡝᠩᡧᡝᠨ ᡥᠠᠨ᠌)
칸호 사이시얄투 이루겔투 칸(ᠰᠠᠶᠢᠰᠢᠶᠠᠯᠲᠤ ᠢᠷᠦᠭᠡᠯᠲᠦ ᠬᠠᠭᠠᠨ)
묘호 인종(仁宗)
시호 중국어:
수천흥운수화수유숭문경무광유효공근검단민영철예황제(受天興運敷化綏猷崇文經武光裕孝恭勤儉端敏英哲睿皇帝)
만주어: 숭옌 후왕디(ᠰᡠᠩᡤᡳᠶᡝᠨ ᡥᡡᠸᠠᠩᡩᡳ)
연호 1796년 ~ 1820년
중국어: 가경(嘉慶)
만주어: 사이충아 펑션(ᠰᠠᡳᠴᡠᠩᡤᠠ ᡶᡝᠩᡧᡝ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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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즉위 전3. 즉위 후
3.1. 권신 화신 숙청3.2. 관료 기강의 재확립 시도3.3. 민생 악화 및 잇따른 반란3.4. 대외관계3.5. 종교정책3.6. 죽음
4. 평가5. 각종 매체에서6. 가정 관계
6.1. 정비6.2. 후궁
7. 여담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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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96년 선제인 고종 건륭제의 퇴위로 즉위하여 1820년까지 약 25년 동안 재위한 청나라의 제7대 황제다.

건륭제의 15남이었고, 건륭제가 늦은 나이에 얻게 된 아들이라 큰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2. 즉위 전

건륭제의 15남으로서, 생모는 영의황귀비 위가씨[3]였다.

영염이 부황 건륭제의 후계자로 낙점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건륭제가 처음으로 후계자로 낙점한 아들은 효현순황후 소생의 차남(적장자) 단혜태자 영련(永璉)이었다. 영련은 효현순황후와의 적장자였기 때문에 태자밀건법에 의해 후계자로 정해졌으나 이른 나이에 요절했다. 이에 건륭제는 슬퍼하면서 대신들을 모아놓고 후계자 밀지를 공개한 후에 태자로 추봉했다. 건륭제가 두 번째로 후계자로 낙점한 아들은 7남 영종(永琮)이었다. 영종 역시 효현순황후의 아들이었으나 일찍 죽었고, 건륭제는 영종을 후계자로 낙점했었음을 공표한 후에 철친왕(哲親王)으로 추봉했다.

다만 영종이 사망한 시점이 1747년이고, 훗날 가경제가 되는 영염이 태어난 시점이 1760년이다. 영염이 태어나자마자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할지라도 13년의 후계자 공백이 남는다. 당시의 평균 수명을 고려했을 때, 장년으로 접어든 건륭제가 이 기간 동안에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을 리는 없어 보인다.[4]

어느 정도 추측은 가능하다. 1748년 효현순황후가 사망했을 때, 건륭제는 서장자였던 영황(永璜)과 3남 영장(永璋)에게 국상 중에 예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폭언을 퍼부으며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겠다고 했다.[5] 4남인 영성(永珹)과 6남 영용(永瑢)은 다른 집안에 양자로 보내어져서 후계자 대열에서 탈락했음을 알 수 있다. 1748년 당시 7남 이하는 어리거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5남 영기(永琪)가 이 기간 동안 잠정적인 후계자가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다. 그 근거는 건륭제의 아들 중 최초로 화석친왕의 작위를 얻은 점과 영기의 생존기간 동안 그가 건륭제의 아들 중에서는 유일한 화석친왕이었기 때문이다. 건륭제 역시 세종 옹정제의 재위기간에는 형제 중에 유일한 화석친왕이었고, 선종 도광제 역시 가경제 재위시에 형제 중에서는 유일한 화석친왕이었다. 대체적으로 후계자에 근접해 있는 아들들이 친왕의 작위를 얻은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료에서 보이는 건륭제의 영기에 대한 총애와 영기의 능력(특히 만주어 구사 능력과 무예 등) 등은 가경제가 후계자로 등장하기 전까지의 공백기간 동안 영기가 건륭제의 후계자였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5남 영친왕 영기(榮親王 永琪) 또한 1766년에 사망했고, 이 해에 계황후 휘발나랍씨도 모종의 이유로 건륭제에게 미움을 받아 유폐되었다. 계황후의 아들이었던 12남 영기(永璂)는 황후 출신의 적자로서 후계자에 선정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모친의 유폐로 입지가 불안하게 되었으며 건륭제보다 먼저 1776년에 사망했다. 이후 계황후 대신 새 황후를 두지 않고, 총애하는 영염의 생모인 영귀비 위씨를 황귀비에 책봉해 후궁을 다스리도록 했다. 이를 볼 때 건륭제는 영귀비 위씨를 황후에 올리고 싶었으나 한족 출신(한군팔기)인 것이 문제가 되어 황귀비에 봉하고, 이때부터 영귀비 위씨(위가씨)의 소생을 후계자로 생각했던 것으로 추정된다.이후 계황후 대신 새 황후를 두지 않고, 총애하는 영염의 생모인 영귀비 위씨를 황귀비에 책봉해 육궁을 통솔하게 하였다. 그러나 위씨를 황후로 봉하지 않았는데 포의 출신이 황후가 된 선례가 없었기 때문이다.[6] 그리고 건륭제는 자신의 나이가 많아서 새 황후를 책립하고 싶어하지 않았다.[7]

1795년 당시 건륭제의 살아있는 아들들은 8남 영선(永璇), 11남 영성(永瑆), 15남 영염(永琰/가경제), 17남 영린(永璘) 등 4명 뿐이었다. 이 중 친왕에 책봉된 아들은 11남 영성(성친왕)과 15남 영염(가친왕)이었으며,[8] 건륭제는 영성과 영염을 정무에 참여시켰다. 한편 8남 영선은 일처리를 못하고, 17남 영린은 여자를 밝히며, 11남 영성은 무예를 싫어하고 문약하며 결단성이 없다는 이유로 건륭제와 대신들의 신망은 15남 영염에게 모아지게 되었다.[9] 마침내 1795년 9월, 건륭제는 영염을 황태자로 책봉하고 이듬해 영염이 36세가 되었을 때 제위를 물려주었다.[10] 즉, 가경제는 유일하게 어머니가 한족인 청나라 황제였다.[11]

사실 건륭제는 89세까지 살며 현재 기준으로도 꽤나 장수했고, 더 오랫동안 재위할 수도 있었다. 허나 그는 자신이 존경하는 할아버지 강희제의 61년 재위 기록을 깨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일부러 60년째 되는 해에 양위한 것이었다. 다만 건륭제는 양위한 이후에도 죽기 전 약 3년 동안은 상황으로 군림하며 가경제를 제치고, 막후의 실권자로 남아있었다.

3. 즉위 후

3.1. 권신 화신 숙청

가경제는 건륭제가 붕어한 뒤, 즉 즉위하고 3년이 지난 39세가 되어서야 친정을 펼칠 수 있었다. 건륭제 치세의 후기부터 드리운 재정 파탄과 권신의 부정 축재로 인한 부패 및 관료 사회의 타락이라는 재앙을 그대로 물려받아 골머리를 썩기 시작했는데, 그 중심에는 니오후루 허션[12]이 있었다. 허션은 아들이 공주와 결혼하여, 건륭제와 사돈이기도 했으며, 건륭제의 비호를 받아 사실상의 황제 노릇을 하며, 매관매직 같은 온갖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있었다.

1799년 상황 건륭제가 붕어하자 가경제는 바로 허션을 체포하고, 그의 죄상을 조사하게 했다. 당시 허션이 축재한 재산은 황실의 15년치 예산과 맞먹었다.[13] 허션의 이러한 부정 축재는 만주 - 몽골 귀족, 중앙과 지방 관료, 향신층의 축재와 사치를 방치하는 결과를 가져와 청나라 멸망의 전주곡이 되었다.[14] 그런데 가경제 본인은 그 몰수한 허션의 재산을 국고에 환수하지 않고 내탕금[15]에 넣어 제 것으로 만들었다. 때문에
'화신이 넘어지니 가경이 배부르게 먹었다.'(和珅跌倒,嘉慶吃飽)
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한편 허션은 그저 건륭제의 비자금 관리자일 뿐이었는데, 가경제가 이 비자금을 손에 넣기 위해 허션을 부정축재로 몰아 처단하고, 그것을 꿀꺽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가경제는 이렇게 손에 넣은 비자금을 사치에 사용하지는 않았으니 허션을 개인 청지기로 썼던 건륭제보다는 나은 셈이었다.[16] 또한 가경제는 당해 1799년 1차 아편금지령을 내렸다.#

3.2. 관료 기강의 재확립 시도

그래서 허션 한 명 잡았다고 건륭제 말기의 흐트러진 관료 기강은 잡히지 않았다. 이미 엄청난 수준의 부패가 허션뿐만 아니라 청나라 관리들 사이에서 만연한 상황이었고, 특히 건륭제 때 북경의 황제와 귀족들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서 지방 관리들에 대한 통제가 소홀해지자 지방 관리의 부패가 심각해졌다. 이 때문에 서쪽의 관중에서는 100만명이 넘는 농민들이 수탈을 피해 도망쳤고, 하북성(河北省)에서도 대량의 농민들이 고향을 이탈해 내몽골이나, 한족에게는 금지(禁地)였던 만주로 도망쳐 정착했다.

사실 관리의 부정부패는 건륭제만의 문제는 아니어서 전 왕조인 명나라도 마찬가지 양상으로 쇠퇴했으며, 명나라 제도를 이어받은 청나라의 통치제도에서 똑같이 발생될 수 밖에 없는 문제였다. 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은 관료들에 대해 부정적인 편으로 봉급을 굉장히 짜게 주었다. 이러한 적은 봉급은 겉으로 보기에는 국가적인 지출에서 적게 나가게 하는 긍정적인 것으로 보였지만, 실상은 황제가 제대로 감시하지 않는다면 관리들이 정해진 세금을 넘어서 사적인 이득을 챙길 수 밖에는 없는 구조였다. 특히 급여가 매우 적다보니 관리들로선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사적인 이득을 챙길 수밖에 없기도 했다. 결국 명나라도 비슷한 구조적인 부패가 생겨났고, 청나라도 이를 그대로 반복했던 것이다.

이에 강희제는 청렴한 관료들을 포상하고 우대함으로써 명청교체기때의 흐트러진 공직 기강을 바꾸고자 노력했고, 옹정제는 관료들을 철저하게 감시하며 부패한 관료들을 무자비하게 처벌하고, 모선귀공제와 양렴은과 같은 생계수단을 주어 부패와 같은 다른 생각을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건륭제는 이러한 업무를 태만시하면서 문제가 커졌고,[17] 이러한 부패가 모이고 모여서 허션이라는 대표적인 부정부패 관료를 만들었다. 강희제나 옹정제와 같이 감시의 눈을 계속 번득이면 일시적으로나마 사렸지만, 건륭제 말기처럼 조금만 감시의 눈이 벗어나면 바로 이런 심각한 현상이 벌어졌다. 따라서 허션이라는 꽃이 사라졌어도, 그 밑에 연결되어 있었던 부정부패의 사슬을 끊지 못했기에 아무런 해결이 되지 못했다. 참고로 조선도 이와 비슷한 체제를 유지했다가 부정부패가 만연해져 나중에 가면 멸망에 큰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어쨌든 가경제는 관료의 기강을 잡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고, 그에 따라 건륭제 말기에 허션이 사실상의 황제 노릇을 하며 실추되었던 황권도 어느정도 다시 회복되었다.

황족의 부정부패를 엄단한 것과는 별개로 아버지 건륭제가 냉대했던 자신의 이복형제들에게는 꽤 나은 대우를 해주었다. 친왕이나 군왕에 봉해진 건륭제 소생 황자들의 상당수는 건륭 연간에 책봉받은 것이 아닌 가경 연간에 책봉받았거나 요절하여 아버지에게 추봉받은 사례이며, 이복 형제•자매들의 외갓집이라 할 수 있는 건륭제의 후궁 가문에게도 파격적인 대우를 보장하여 한족이나 조선계 혈통에도 불구하고 적잖은 가문이 '~가'(佳)를 붙인 새 성씨를 하사받고 정식으로 팔기만주 기적을 받았다. 이들 중 상당수는 화신의 위세에 오래 시달리고 아버지 건륭제에게도 구박받던 처지였는데, 가경제가 화신을 처분하고 가산을 내탕금으로 압류하여 형제들에게 나눠준 것은 황제가 한풀이를 해준 셈이었다.[18] 덕분에 이들은 옹정제나 건륭제에게 까불다가 혼쭐이 난 반세기 전의 여러 황자들과는 달리 찍소리도 않고, 조용히 YOLO를 영위하며 유유자적한 여생을 보냈다. 공신들과 술 한 잔 마시면서 병권을 회수하고 거금과 벼슬을 쥐여주어 고향에 돌려보낸 북송의 태조 조광윤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3.3. 민생 악화 및 잇따른 반란

건륭제 말기의 민생 악화에 대한 원인으로 건륭제의 무분별한 대규모 원정과 화려한 사치로 인해 청나라의 재정을 탕진해서 농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도 물론 한 원인이 될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청나라의 인구 증가가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강희-옹정-건륭 대에 평화가 정착되고, 남아메리카에서 들여온 고구마 및 옥수수와 같은 구황작물로 인해 인구가 폭발[19]하여 민생이 매우 어려워졌다.

오히려 청나라는 건륭제의 치세때 내정이 안정되고, 소금세와 서양과의 교역 확대로 인한 관세에서 수입이 늘어났기 때문에 재정은 튼튼한 편이었다. 하지만, 건륭제때 인구가 폭증해 농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졌고, 그때문에 건륭 연간 말기까지도 재정은 그럭저럭 버텨나갔으나, 건륭제의 치세가 저물어갈쯤 반란이 다발적으로 일어나 가경제 시절까지 이어지면서 그 진압 비용으로 재정이 탕진되었다.

이렇게 폭발적으로 늘어난 인구에도 불구하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더욱 심해지면서 소수의 지주들이 막대한 토지를 겸병하게 되었으며, 무거운 소작료를 내지 못한 빈농들은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 이전에 인구가 거의 없었던 산악지역에 흘러들어 거주하게 되었다. 이들은 현실의 곤궁함을 잊기 위해 미륵신앙을 신봉하는 백련교에 빠져들었고, 백련교는 세력이 확대되자 청나라 조정에 반기를 들게 되었다. 호북성 - 사천성 경계의 산악지역에서 1796년에 폭발한 백련교(白蓮敎)의 난[20]은 워낙 규모가 큰데다가 1805년까지 약 10년이나 계속되어 청나라는 반란 진압에 백은 2억 냥이라는 막대한 돈을 썼고, 관중과 호광(湖廣) 일대의 농지와 향촌 질서가 일거에 붕괴하여 내륙 지방이 극도로 피폐해졌다. 이렇게 백련교를 믿는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반란 진압에 10년이나 애를 먹으면서 민심의 이반이 명확해졌으며, 막대한 전비(戰費) 지출은 19세기 내내 청나라를 괴롭힌 재정 파탄의 불길한 전조가 되었다. 이 전비 지출은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지불한 보상금인 2,100만냥보다 10배나 더 많았다. 그러니까 아편전쟁에 낸 배상금조의 전비를 10년 동안 매년 백련교도 반란 진압에 지출하고 있었다.[21]

간신히 진압된 백련교의 반란은 1813년 이문성[22]임청[23] 등이 이른바 '천리교'(天理敎)라는 이름을 내걸면서 재발했는데,[24] 수도권인 직예, 하남성, 산동성 등 북방 지역의 64개 현에서 동시에 터졌다. 일시에 위세를 떨친 천리교는 이문성을 천왕으로, 임청을 문무성인으로 추대하고 세력 확장을 꾀했다.(천리교의 난) 한편 북경의 황궁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첩보를 들은 가경제는 너무 놀라 직예총독 온승혜와 하남순무 고기 등에게 진압을 명령했다. 그런데 이 반란 때 천리교도들은 관군이 북경 수비를 소홀히 한 틈을 타서[25] 관군으로 위장해 미리 포섭한 환관의 인도를 받으며 고작 70여 명이 자금성을 습격했다.(계유지변) 하지만 가경제는 당시 승덕의 피서산장에 있었으므로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이 자금성 습격은 황궁의 남서방에 있었던 가경제의 적장자인 민녕과 친왕들이 황급히 금위군을 소집하여 가까스로 진압했다.[26] 가경제는 계유지변에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27], 변란을 당하여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우변죄기조>를 반포했다.

한편 한족 농민의 반란 외에도 가경제의 치세에는 소수민족들의 반란도 빈번했다. 가경 2년 정월, 포의족의 왕낭선(王囊仙 1777년~1797년)이 서남쪽 귀주성의 남롱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왕낭선의 난) 당시 왕낭선은 19세에 불과한 처녀였으나 무술에 능하고 신통력으로 병을 치료하는 선녀라는 소문을 퍼뜨려 귀주성에 거주하는 포의족, 묘족, 이족 등 남방 소수민족들의 여신이 되었다. 그녀가 이끄는 반란군은 불과 몇 개월만에 보평, 흥인, 자운, 장순, 직금 등을 점령하고 귀주성의 수도인 귀양까지 진격할 정도로 청나라 조정을 뒤흔들었다. 그래서 가경제는 운귀총독 늑보(1739년~1819년)에게 대군을 거느리고 반란군을 토벌하도록 했다. 결국 늑보 지휘하의 청나라 관군에게 중과부적으로 패배한 왕낭선은 포로가 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으며, 온몸이 발가벗겨진 채 능지처참형을 당했다. 청나라는 왕낭선의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했지만 사실은 이때부터 청나라가 가진 서남지방 소수민족에 대한 지배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게다가 이미 1726년~1729년, 1746년~1749년, 1758년~1759년, 1781년~1784년에 잇따라 폭발한 바 있는 이슬람교도와 사천(四川) 일대의 소수 민족 봉기는 점점 격화되어 1795년~1797년의 제1차 묘족 반란과 1833년의 제2차 묘족 반란으로 가시화되었고, 1807년에는 티베트족(장족)의 봉기가 터지기도 했다. 이는 변경 지대에서도 청나라의 통치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반증이었다.

3.4. 대외관계

고종 건륭제 때 일어난 베트남 원정은 실패로 끝났고, 베트남과 청나라는 어정쩡한 휴전을 맺었다. 1802년 응우옌푹아인에게 패퇴하고 있었던 떠이선 왕조의 잔당이 청 조정에 지원을 요구했으나 해적을 보호했다는 이유로 거부했다.[28] 이로써 베트남에는 떠이선 왕조가 멸망하고 응우옌 왕조가 들어섰으며, 응우옌 왕조에서 사절을 보내자 초대 황제로 즉위한 응우옌푹아인을 '월남국왕'으로 책봉했다. 이때 베트남은 한자로 "대월(大越)"을 공식 국호로 하고 있었는데, 응우옌 왕조는 이를 폐기하고 청나라에 "남월(南越)", "월남(越南)" 둘 중에 하나를 국호로 선택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청나라는 "월남"을 골라주었다. 이것은 고대 국가인 남월이 베트남 및 중국 남부를 지배한 나라였기 때문에, 중원 왕조의 입장에서는 매우 꺼림칙한 명칭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월남"은 이후 베트남의 공식 한자 명칭이 되었다. "베트남" 자체도 "월남"의 베트남어 한자 발음이다.

북방의 강대국인 러시아 제국과는 교류도 있었지만 약간 긴장관계에 있었는데, 러시아 사신들은 청나라에 계속 오고 있었다. 1805년 러시아 특사단은 외몽골 국경문제로 청나라에 왔는데, 삼배구고두 문제로 마찰을 빚었다. 이때 가경제는 사신단을 위해 성대한 연회를 준비했으나, 러시아가 끝내 삼배구고두를 거절하여 험악하게 끝났고, 기분이 상한 가경제는 러시아가 가져온 선물을 모두 돌려보냈다. 물론 이때는 러시아도 나폴레옹 전쟁 등으로 극동에 본격적으로 진출할만한 역량이 없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중국의 이권을 침탈하지는 못했다.

영국은 건륭제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광동성 부근에 군함을 파견하여 자유무역을 요구하며 청나라를 긴장시켰다. 1808년에는 포르투갈(전통적인 영국의 동맹국)의 마카오 방어를 위한다는 구실로 광동성의 향산에 상륙하여 주둔했다. 이에 미온적으로 대응한 광동순무 손옥정을 파면하고 병력을 파견하여 영국이 더이상 침탈하는 것을 막았다.

영국은 어떻게든 중국에 아편을 더 팔아먹으려고 건륭제 시절부터 중국에 전면개방을 요구했다. 중국은 강희제 당시인 17세기를 통틀어 서방과의 교역으로 은 2,800만kg의 무역흑자를 보고 있었고, 이것은 냥으로 따지면 90억냥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영국은 중국에서 자국산 모직물이 인기가 없고, 면직물은 이집트산과 미국산에 치여 경쟁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를 만회하기 위해 1780년대부터 인도산 아편을 가져와서 중국에 팔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중국에 아편중독자들이 점점 늘어났다. 아편의 폐해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옹정제 시절부터 몇차례 금지령이 내려졌으나, 건륭제 말기가 되면 위에서 말한 관리들의 부정부패 때문에 잘 지켜지지 않았고, 오히려 서방세력과 결탁하여 아편이 밀수되는 경우도 많았다. 1810년 가경제는 다시 아편금지령을 내렸으나, 당연히 유명무실해졌다. 결국 청나라의 막대한 무역흑자는 무역적자로 변했고, 아편중독자들이 늘어나면서 나라가 점점 더 산으로 가다가 아들인 도광제 대에 이르러 한번에 터진 참변이 바로 아편전쟁이었다.

조선 사신들은 가경제에 대해 매우 엄격하지만 도덕적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3.5. 종교정책

청나라의 천주교 박해는 강건성세 시기, 전례 문제를 계기로 시작되었으나, 정작 전례 문제를 공론화한 황제들이 서양인 수사들은 총애하여 그들의 사생활을 빙자한 선교활동을 눈감아주면서 알음알음 선교가 성행했다. 또한 지방관들은 천주교 신부를 참수하는 지방관이 있는가 하면, 어떤 지방관들은 자신의 식솔들이 천주교에 입교하자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신부들의 활동을 눈감아주는 등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천주교 단속은 중구난방으로 체계가 없이 이뤄지곤 했다. 건륭제가 세상을 떠나고 실권을 잡은 가경제는 천주교 박해를 이전에 비해 매우 일관적으로 시행했다. 당시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서양에서 들어온 종교였는데, 교단이 지나치게 유럽에 있는 로마 교황청을 중심으로 조직화되어 있어서,[29]청나라 조정은 위협을 느꼈으며, 특히 교황청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온 중국의 전통인 제사를 우상숭배로 취급하며 금지할 것을 요구하자 반감이 더더욱 강해졌다. 청 조정은 《대청률례》[30]의 '금지사무사술'(禁止師巫邪術)[31] 조항을 기독교에 적용시켰으며, 이후 도광제 시기와 동치제 시기에는 탄압이 가중되었다. 서양인 선교사들은 한족과 만주족을 타락시켰다는 이유로 처형되기도 했으며, 개종을 거부하는 경우에는 서부의 이슬람 도시들로 보내져 노예로 팔려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서양인 선교사들의 선교를 막기 위해 서양인들의 내륙 여행을 엄금하고, 이를 어긴 자는 사형에 처했다.

가경제는 백련교도의 난을 계기로 종교반란이 청나라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려 잠재적인 반란세력으로 간주되었던 외래종교인 천주교에 대해서도 탄압을 계속했다. 당연히 서방에서는 이런 박해에 반발했다.

천주교는 예로부터 서방 세력의 침투 도구로 이용되는 면이 강했던지라[32] 중앙집권형 정부 체제가 오래 전부터 정립되어 있었던 대부분의 동양 국가에서는 이들을 거세게 탄압했다. 청나라도 박해는 꾸준히 진행했지만 기본적으로 선교사들이 주요 단속대상이었고, 신자들에 대한 대량 처형은 드물었으며, 사실 서양인 및 중국인 신부들도 이런저런 수단으로 단속을 빠져나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이나 도쿠가와 막부는 아예 내국인 신자들을 무차별하게 처형했다. 묘하게도 당시 조선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벌이고 있었으며,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한국 124위 순교복자들 중 한 명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일화가 있다. 주문모 신부는 청나라 출신으로 신부가 되었고, 조선의 천주'학자'들이 역관들을 통해 몰래 전해온 신부 파송 요청을 접한 북경 교구의 지시로 조선에 파견되었다. 밀입국 후 주문모 신부는 상투를 틀고 한복을 입으며, 한국어도 익혀 현지화된 채 평신도들과 섞여 지냈지만, 체포된 후에는 철저히 중국어한문 필담으로만 진술하면서 외교적 문제의 가능성을 암시했다. 조선에서는 박해를 주도한 정순왕후 김씨와 여러 중신들이 난처해하다가 결국 주문모 신부의 처형을 결정했는데, 그와 별개로 외교적 문제에 대한 걱정에 몹시 노심초사했다. 그러나 당시엔 가경제도 천주교 박해에 나섰기 때문에 조선 조정의 중국인 처형 소식을 듣고도 '멋대로 월경해서 전교하다가 죽었으니 자업자득이다'라는 답변으로 사안을 종결하며 문제삼지 않았다.

3.6. 죽음

가경제는 1820년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고, 청더의 피서산장으로 사냥을 떠나 요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건강은 악화되었으며 결국 1820년 9월 2일에 피서산장에서 붕어했다.

《청사》에는 가경제의 정확한 사인을 적어놓고 있지 않아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어떤 사람들은 황제가 벼락에 맞아 죽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 등 급사한 것을 봤을 때, 대체적으로 학계에서는 비만으로 인한 심장마비 또는 뇌졸중을 주된 요인으로 보고 있다. 어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년의 가경제는 상당한 비만이었다. 특히 가경제는 붕어하기 전에 에 걸려 온몸의 통증이 심했으며, 더위까지 먹어 땀을 많이 흘렸고 피로까지 심했다. 아버지 건륭제가 하루에 2끼만 먹으며 과식을 피하고, 과로를 피하며 놀기 좋아한 것과는 정반대였다.

가경제는 이후 베이징에서 약 120km 정도 떨어진 청서릉의 창릉에 묻혔다.

4. 평가

청나라는 고종 건륭제 시기에 국력이 정점에 달했지만, 건륭제 말기부터 싹튼 쇠퇴의 조짐이 인종 가경제의 치세하에서 점차 수면 위로 드러났다. 백련교도의 난이 터지면서 청나라의 오랜 평화에 종지부를 찍었고, 전국에서 반란들이 연이어 터지며 청 조정의 통치력은 갈수록 약화되어갔다. 한편 지나치게 지속된 평화로 인해 군대는 날로 기강이 해이해져갔고, 관료들의 부정부패로 국고는 말라갔으며 국력은 갈수록 약해져만 갔다.

게다가 서양 열강들이 일부러 중국 내부에 강력한 마약인 아편을 유통시키면서 사회는 썩어들어갔고, 은의 유출이 심화되면서 경제는 무너져갔다. 다만 가경제의 시기까지만 해도 청나라는 외형적으로 여전히 세계 최강국들 중 하나였으며[33], 이후 황제들의 시기처럼 국가가 완전한 개막장으로까지는 치닫지 않았다.

이렇게 가경 연간에 청나라가 쇠퇴하기는 했지만, 가경제 본인은 게으르거나 암군은 절대 아니었고, 오히려 매우 부지런하고 노력하는 군주였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선대 황제들의 전기를 읽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여 밤늦게까지 정사를 돌봤고, 그들을 본받아 성군이 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그리하여 건륭제 재위 후반부터 약화되었던 황권을 다시 강화하고, 건륭제처럼 놀러다닌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 옹정제처럼 지방 관료들과 서한을 주고 받는 주필(붉은먹 서한) 제도를 부활시키는 등, 열정적으로 국정에 임했다. 중앙정부가 엄청난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었음에도 농민들의 생활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자 세금을 깎아주었으며, 부정부패 근절에도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

가경제는 대단히 도덕적이고 원리를 중시했다. 본인 스스로가 유교적인 인의를 신조로 삼았기 때문에 옹정제식의 공포정치도 자제했고, 부황인 건륭제가 수많은 선비들을 잡아 처형했던 문자의 옥이라고 불리던 검열도 폐지했다. 또한 유교 통치자의 덕목 중의 하나인 신하들이 말하는 쓴소리(간언) 역시 주의깊게 들었다.

당시 가경제는 대신으로서 이름난 학자이자[34] 시인이기도 했던 홍량길이 《건륭제 실록》(고종실록)을 편찬하던 중, 건륭제 말기의 쇠락을 비난하는 기사를 넣은 것을 알게 되었다. 효심이 지극한 가경제는 엄청나게 화를 냈다. 건륭제 시절 같았으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황실이나 전임 황제를 비난하는 것은 9족이 멸족될 대죄였으나, 가경제는 중국의 서쪽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일리로 유배를 보내는 선으로 마무리했고, 이것도 지나치다고 생각했는지, 100일 후에 사면해 주었다.[35] 가경제는 '인'(仁)의 군주를 자처했으며 이후 전개되는 백련교의 난과 아편의 확산 역시 최선을 다해 막으려고 힘썼다. 유교 이념의 보급과 공자 숭배를 강화하여 건륭제 말기의 향락풍조도 일소해 사상적인 해이도 바로잡으려고 했다. 다만 증조부인 성조 강희제처럼 희대의 명군은 아니었고, 조부인 세종 옹정제 같이 서릿발같은 결단력도 없었으며, 부친인 고종 건륭제와 같이 시대 상황이 좋은 것도 아니었기에 가경제의 노력은 효과가 별로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본인 스스로는 많은 노력을 했지만, 청나라의 구조적인 개혁 없이 과거의 통치기구를 사용하는 가경제의 노력만 가지고는 무너져가는 청나라를 구할 수 없었다.

가경제의 전 시대인 강옹건성세가 지나치게 찬란했기 때문에 그에 묻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지만 가경제 본인은 선종 도광제 이후의 비중없는 암군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군주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자기 치세에 일어난 큰 사건들은 어느 정도 수습하기도 했다. 어쨌든 상황이 좋을 때인 강희제나 옹정제 다음에 바로 제위를 이었다면 성군 소리를 들을만한 재목이었으나, 청나라의 내외적인 상황은 너무 안좋았다.

그의 치세때 사천성-호북성 경계의 산악지역에서 끈질지게 게릴라전을 펼치던 백련교도의 난을 진압하는데 10년이나 걸리면서 국고는 텅텅비었고, 게다가 영국이 들여온 아편은 청나라 정부 뿐만 아니라 청나라 백성들의 신체적, 육체적 건강에 치명타를 가했다. 가경제는 위기에 빠진 청나라를 구하기 위해 노력을 매우 많이 했지만 강건성세를 가져온 청나라의 제도가 너무 낡은 것이 문제였다. 위기를 구하려면 통치와 국가 구조 전반에 대대적인 개혁을 했어야 했지만, 가경제는 옛 제도로 계속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 보니 별무성과였다.

그러다보니 중국의 역사학자인 옌충녠(閻崇年)은 가경제를 일컫어 근면했으나 그 능력이 평범했고, 쇠퇴해가는 나라를 안정시키기엔 부족한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

일각에서는 가경제의 시기가 청나라에 있어서 중흥을 이룰 수 있었던 마지막 골든 타임이었다고 평가를 하고 있으나, 사실 이쯤 되면 청나라의 사회 문제와 동•서양의 국력 격차가 이미 답도 없게 커진 시점이라서 가경제가 실질적으로 할수 있는 건 사실상 없었다. 당시 청나라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지나친 인구 과잉과 그를 뒷받침 할 수 있는 농업 생산력의 부족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가경제가 화학 비료라도 발명하지 않는 이상, 답을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문제였다.

더 큰 문제는 서양에서 서서히 유입되어 오는 아편의 문제와 이를 막을수 있는 군사력의 부재였는데 가경제의 시대쯤 되면 이미 유럽과 중국의 국력 격차가 너무 심각하게 벌어져 있어서 가경제 개인이 해결할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었다. 당시 청나라는 외형상 세계 최강대국이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외형상 그랬을 뿐이었고 이미 거의 모든 분야에서 유럽한테 심각하게 뒤떨어져 있었다. 기초 과학이나 각종 기술에서 엄청나게 뒤떨어진 건 물론 청나라가 자랑하던 압도적인 부마저 유럽에 비할 바가 아니었는데 청나라의 최전성기라 여겨지던 옹정제건륭제 시절에 이미 영국과 프랑스가 청나라보다 많은 재정 수입을 기록했고,[36] 이 격차는 기하급수적으로 벌어져서 아편전쟁 직전 영국은 청나라의 5배에 달하는 재정 수입을 굴리고 있었다. 이는 유럽이 전통적으로 중국이 강하다고 여겨진 행정 분야에서도 청나라를 압도했기 때문이었다. 군사적인 면에서 봤을 때 동•서양의 격차는 더욱 명확했는데 이미 17세기부터 유럽이 중국을 포함한 비유럽을 군사적인 기술에서 압도하기 시작한 반면 가경제 시기 청나라는 잘 쳐봐야 명나라 시절의 무장에 머물러 있었고, 화약 무기 같은 분야에선 오히려 퇴화했다. 설상가상으로 오랜 기간 동안 평화에 찌든 결과, 청나라의 군사력은 한족 농민군 따위에 쩔쩔맬 정도로 답도 없이 쇠락한 반면, 유럽은 전세계에서 끊임없는 전쟁을 치른 끝에 그 어떤 대륙도 도달하지 못한 조직력과 전술의 경지를 달성한 상태였다. 실제로 잘 무장하고 유럽식 편제를 갖췄으며 수없이 많은 실전 경험으로 단련된 인도[37]조차 한줌에 불과한 영국군에 자주 발린 것이 건륭제 시절인 18세기였고, 나폴레옹 전쟁을 치르면서 안 그래도 밸붕급으로 강했던 군대가 더더욱 강해진 상태였다. 그 결과 가경제 사후 20년도 안 되어 벌어진 아편전쟁에서 수십만 명에 달하는 청나라 대군이 20,000명 남짓의 2선급 영국군 병력의 털끝조차 건드리지 못한채 녹아내려 버렸다.[38] 한마디로 가경제는 자신의 위치에서 당시 중국인의 상식선에서 할 수 있는건 모두 했다. 단지 그가 마주해야 했던 문제들이 몇백년은 노력해도 될까말까하는 희대의 난제들이었을 뿐이다.

이처럼 가경제 시기에는 청나라에 대항한 민족 - 민중 봉기가 잇따라 일어나 사회 혼란이 커지고 민심이 동요했으며, 거듭되는 아편의 밀수로 인해 재정 불안이 시작되고, 부패한 관료 및 귀족의 무능과 타락으로 제국의 붕괴가 실질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가경제가 죽은 후 도광제의 대에 이르면 아편전쟁으로 대표되는 열강의 침탈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5. 각종 매체에서

테메레르 시리즈》에선 전 세계에 용이 존재하고, 특히 중국이 용들의 지위가 가장 좋은 덕에 워낙 청나라가 킹왕짱한 동네가 되어 국가도 안정된 상태고 여전히 잘 살고 있는 중이다. 물론 백련교도의 반란이나 영국의 아편 무역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긴 하지만, 세계관 상 영국이 아편전쟁을 일으켰다간 오히려 멸망할 가능성이 높으므로(...)[39] 역사보다 훨씬 행복한 팔자를 타고났다고 할 법하다.

테메레르윌리엄 로렌스를 절대 떠나려 하지 않는 바람에 로렌스를 형식상 양자로 입양했다. 등장은 2권밖에 없지만 이후로도 편지로 연락하며 용싱 황자 사후 호주에 상인을 보내고 원주민들과 교류를 맺으면서 초반이고 작지만 마을을 만들기 시작하는 등 개방적인 모습을 보이고, 시간이 지나 영국이 감기 전염병을 이용하여 영국 외 전세계 용을 전염병으로 학살하려고 한 일들이 청나라에도 알려지면서 미엔닝 황자를 도아주는 동시에 원한을 품은 리엔이 나폴레옹 편에 붙어서 프랑스를 도아주고, 이후 러시아가 프랑스에게 공격당하면 또는 함락당하면 청나라 또한 순망치한을 당하는 것이 시간 문제라는것을 알고 있었던 상황에서 마침내 나폴레옹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자 로렌스와 테메레르의 도움도 될 겸 러시아를 지원하고자 용 300마리를 러시아로 보내는 등 상당한 도움을 주는 조력자이자 포지션 겸 원래 역사와 다른 행보를 보인다.

요리왕 비룡》 애니판의 황제가 가경제라는 말이 있으나, 연대로 따진다면 광서제가 맞다.

한편 여러 중국 드라마에서는 묘하게 소외받는 황제이다. 건륭 연간 후궁들의 캣파이트에서 아역 및 젊은 조연으로 등장하는 것을 제외하면 딱히 흥미롭게 다룰만한 소재가 많지 않다. 여러 반란 진압이 십전무공처럼 떠벌릴만큼 스케일이 큰 대전쟁인 것도 아니고, 강건성세의 후궁들처럼 궁중 암투를 가경 연간의 후궁들을 주인공으로 흥미진진하게 그리기엔 장자 지친왕이 유교적 정통성으로나 능력으로나 독보적이었고, 후대마냥 외침이 본격화했던 것도 아니니 드라마의 소재로서는 썩 매력적이지가 않다. 그나마 주인공으로서는 허수아비 황제 시절 화신이랑 오만군데 싸돌아다니는 주책바가지 태상황(...) 때문에 속썩이며 화신을 때려잡으려 칼을 가는 효자로 그려지는게 고작인데, 이 역시 마냥 살벌하게 묘사하기엔 깨방정 노인네의 존재감이 강해서 흔한 일일연속극 분위기가 된다는게 문제다. 그나마 홍콩 TVB에서 2018년에 방송한 <천명>에서는 황권을 위해 아버지를 직접 독살하며 화신을 참하려 하는 독기어린 황제로 묘사되는데, 실제 후덕했던 가경제와 달리 배우(Shaun Tam, 담준언)가 쓸데없이 잘생겼다. 이 배우는 홍콩의 전설적인 배우 적룡의 아들이다.

대체역사 소설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에서는 어마무시한 부호이면서도 절대 자기 돈을 절대로 안 쓰려고 하는 구두쇠로 나오며, 얼마나 심각한지 역사의 변화로 영국이 처들어오자 돈을 쓸 정도이고, 전쟁 이후 영국이 대놓고 백성을 약탈하는데도 자식인 지친왕에게 해결하라고 하는 암군으로 등장한다. 주인공이 만든 조선의 마리화나를 피우면서 아편의 대체품으로 마리화나를 퍼트리고 마리화나를 값싸게 공급받기 위해 조선을 침공할 생각을 꿈꾸다가 자신이 견제한 지친왕에게 암살당한다.

6. 가정 관계

6.1. 정비

효숙예황후 희탑랍씨(孝淑睿皇后 喜塔臘氏)
1760년 출생 ~ 1797년 사망

효화예황후 뉴호록씨(孝和睿皇后 鈕祜祿氏)
1776년 출생 ~ 1850년 사망

6.2. 후궁

화유황귀비 유가씨(和裕皇貴妃 劉佳氏)
1761년 출생 ~ 1834년 사망
  • 황장자 다라목군왕 1779년~1780년
  • 황3녀 장경화석공주 1781년~1811년[41] 참고로 이 사람은 남편과의 사이에서 자녀가 없어 남편의 7촌 조카를 양자로 들였는데, 그 양자가 태평천국의 난과 제2차 아편전쟁 당시 팔기몽고의 지휘관이었던 승격림심이었다. 이후 남편의 자사그 보두얼러구이 군왕 작위는 승격림심 덕분에 친왕(+세습망체)이 되었다.

공순황귀비 뉴호록씨(恭順皇貴妃 鈕祜祿氏)
1787년 출생 ~ 1860년 사망

서비 완안씨(恕妃 完顔氏)
? ~ 1789년 사망

화비 후가씨(華妃 侯佳氏)
? ~ 1804년 사망

장비 왕가씨(莊妃 王佳氏)
? ~ 1811년 사망

신비 유가씨(信妃 劉佳氏)
? ~ 1822년 사망

손빈 심가씨(遜嬪 沈佳氏)
? ~ 1786년 사망

간빈 관가씨(簡嬪 關佳氏)
? ~ 1780년 사망

순빈 동가씨(淳嬪 董佳氏)
? ~ 1819년 사망

영빈 양가씨(榮嬪 梁佳氏)
? ~ 1826년 사망

은빈 오아씨(恩嬪 烏雅氏)
? ~ 1846년 사망

안빈 소완과이가씨(安嬪 蘇完瓜爾佳氏)
1785년 출생 ~ 1837년 사망

대대손손 이어진 만주족 명문가보다는 한미한 포의 또는 한군 출신의 한족 집안에서 후궁을 많이 들인 것이 특징이다. ‘가’가 붙은 성씨 대부분이 한족에서 만주족으로 대기된 집안이다. 만주족 생모에게서 난 형제들이 죄다 사고를 치거나 요절해버리며 어부지리로 기회를 얻어 대권을 쟁취했다는 점을 가경제 스스로도 알았는지 이미 사망한 어머니의 친정은 물론 이복형제들에게도 친왕작 및 군왕작을 쏘고, 이복형제들의 외가에 대해서도 여러모로 살뜰하게 챙겨주어 부황 건륭제의 후궁들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가경 연간에 '가'를 붙인 만주식 성씨를 하사받고 만주족으로 대기되었다.

7. 여담

  • 가경제의 통치기(1795년 ~ 1820년)는 조선의 정조(正祖, 1776년 ~ 1800년), 순조(純祖, 1800년 ~ 1834년)의 재위기와 겹친다. 가경제 초반 3년은 건륭제의 얼굴마담이었던 만큼 거의 순조의 재위기간과 겹친다.
  • 가경제 시기까지는 어질 '인'(仁)자의 관화 발음이 '진'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묘호인 인종은 당시 만주어로 '진중'으로 발음되었다. 현대 보통화의 경우, 어질 인 자는 '런'으로 발음[예시]된다.
  • 청나라의 황제들 중에서 유일하게 어린 시절의 초상화가 남아있는 황제다. 옆에 있는 여인은 생모인 효의순황후 위가씨 또는 양모인 경황귀비 육씨라는 설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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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고(淸史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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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신각라 재순 애신각라 재첨 애신각라 부의
214권 「후비전(后妃傳)」
효정경황후 · 정강귀비 · 각순귀비 · 효각민황후 · 액이덕특씨
※ 26권 ~ 160권은 志에 해당. 161권 ~ 213권은 表에 해당. 청사고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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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6><tablebgcolor=#fecd21><tablewidth=100%> 215·216·217·218·219·220·221권 「제왕전(諸王傳)」 ||
애신각라 예돈 · 애신각라 액이곤 · 애신각라 재감 · 애신각라 탑찰편고 · 애신각라 막이합제 · 애신각라 서이합제 · 애신각라 아이합제 · 애신각라 파아랍 · 애신각라 저영 · 애신각라 대선 · 애신각라 아배 · 애신각라 탕고대 · 애신각라 망이고태 · 애신각라 탑배 · 애신각라 아파태 · 애신각라 파포태 · 애신각라 덕격류 · 애신각라 파포해 · 애신각라 아제격 · 애신각라 뇌모포 · 애신각라 다이곤 · 애신각라 다탁 · 애신각라 비양과 · 애신각라 호격 · 애신각라 엽포서 · 애신각라 석새 · 애신각라 고새 · 애신각라 상서 · 애신각라 도새 · 애신각라 박목박과이 · 애신각라 복전 · 영친왕 · 애신각라 상녕 · 애신각라 융희 · 애신각라 윤제 · 애신각라 윤잉 · 애신각라 윤지 · 애신각라 윤기 · 애신각라 윤우 · 애신각라 윤사 · 애신각라 윤당 · 애신각라 윤아 · 애신각라 윤도 · 애신각라 윤상 · 애신각라 윤제 · 애신각라 윤파 · 애신각라 윤례 · 애신각라 윤의 · 애신각라 윤희 · 애신각라 윤호 · 애신각라 윤기 · 애신각라 윤비 · 애신각라 홍주 · 애신각라 홍휘 · 애신각라 영황 · 애신각라 영련 · 애신각라 영장 · 애신각라 영기(永琪) · 애신각라 영종 · 애신각라 영선 · 애신각라 영성 · 애신각라 영기(永璂) · 애신각라 영성 · 애신각라 영린 · 애신각라 면개 · 애신각라 면흔 · 애신각라 면유 · 애신각라 혁위 · 애신각라 혁강 · 애신각라 혁계 · 애신각라 혁흔 · 애신각라 혁환 · 애신각라 혁합 · 애신각라 혁혜 · 민군왕
222권 「아합출등전(阿哈出等傳)」
아합출 ,석가노 맹가불화 이만주 완자독 맹가첩목아 범찰 동산 탈라 탈원보 불화투, · 왕고 ,왕올당,
223권 「만등전(萬等傳)」
,호이간 맹가포록 대산 오이고대, · 청길노 · 양길노 ,납림포록 금태석 포한 포양고 포이항고, 포점태 · 배음달리
224권 「장황언등전(張煌言等傳)」 225권 「액역도등전(額亦都等傳)」
장황언 ,나륜 장명진 왕익, · 정성공 ,정금 정극장 정극상 정극거, · 이정국 액역도 · 비영동 ,삭해 왜흑, · 하화례 ,다적례 화석례 도류, · 안비양고 · 호이한
238권 「장혁덕등전(蔣赫德等傳)」
장혁덕 · 액색혁 · 차극 · 파합나 · 송권 · 부이점 · 여궁 · 성극공 · 김지준 · 왕영길 · 당숭아
247권 「팽이술등전(彭而述等傳)」
팽이술 · 육진분 · 요연저 · 필진희 · 방국동 · 우붕거 · 왕천감 · 조정표
250권 「이위등전(李霨等傳)」
이위 · 손정전 · 두입덕 · 풍부 · 왕희 · 오정치 · 황기 · 송덕선 · 이상아 · 아란태 · 서원문
251권 「도해등전(圖海等傳)」 252권 「감문혼등전(甘文焜等傳)」
마가도해 · 이지방 감문혼 · 범승모 · 마웅진 · 부홍열
253권 「막락등전(莫洛等傳)」
막락 · 진복 · 왕지정 · 비아달 · 이흥원 · 진계태 · 진단적 · 마비 · 엽앙류
255권 「장용등전(張勇等傳)」
장용 · 조양동 · 왕진보 · 손사극
256권 「채육영등전(蔡毓榮等傳)」
채육영 · 합점 · 항애 · 화선 · 동위국 · 동국정 · 주유덕 · 장덕지 · 윤벽 · 왕계문
257권 「조국조등전(趙國祚等傳)」
조국조 · 허정 · 주구 · 서치도 · 호세영 · 당희순 · 이린 · 조응규 · 조뢰 · 이방술 · 진세개 · 허점수
261권 「양첩등전(楊捷等傳)」
양첩 · 석조성 · 만정색 · 오영 · 감리 · 황오 · 방태 · 목혁림 · 단응거
262권 「위예개전(魏裔介等傳)」 263권 「왕홍조전(王弘祚等傳)」
위예개 · 웅사리 · 이광지 왕홍조 · 요문연 · 위상추 · 주지필 · 조신교
264권 「학유눌등전(郝維訥等傳)」 265권 「탕빈등전(湯斌等傳)」
학유눌 · 임극부 · 유홍유 · 유건 · 주배 · 장정추 탕빈 · 손지욱 · 육롱기 · 장백행
266권 「엽방애전(葉方藹等傳)」 267권 「장옥서등전(張玉書等傳)」
엽방애 · 심전 · 여두눌 · 서원공 · 허삼례 · 왕사정 · 한담 · 탕우증 장옥서 · 이천복 · 오전 · 장영 · 진정경 · 온달 · 소영조 · 숭축 · 왕서령
268권 「미사한등전(米思翰等傳)」 269권 「색액도등전(索額圖等傳)」
미사한 · 고팔대 · 마이한 · 전육선 · 두진 · 살목하 색액도 · 명주 ,여국주 불륜,
270권 「학욕등전(郝浴等傳)」 271권 「서건학등전(徐乾學等傳)」 272권 「탕약망등전(湯若望等傳)」
학욕 · 양소온 · 곽수 서건학 ,옹숙원, · 왕홍서 · 고사기 탕약망 · 양광선 · 남회인
273권 「이솔태등전(李率泰等傳)」
이솔태 · 조정신 · 낭정좌 · 동봉채 · 마륵길 · 시유한
304권 「장조등전(張照等傳)」
장조 · 감여래 · 진덕화 · 왕안국 · 유오룡 · 양여곡 · 장태개 · 양석불 · 팽계풍 · 손희렴 · 몽린
305권 「전진군등전(錢陳群等傳)」
전진군 · 심덕잠 · 김덕영 · 전재 · 제소남 · 진조윤 · 동방달 · 전유성 · 추일계 · 사용 · 왕창
306권 「조사일등전(曹一士等傳)」 307권 「위위곽전(魏韋郭傳)」
조사일 · 이신수 · 호정 · 중영단 · 시조생 · 저인지 윤계선 · 유우의 · 진대수 · 장윤수 · 진굉모
308권 「나소도등전(那蘇圖等傳)」
나소도 · 왕초증 · 서사림 · 윤회일 · 왕서 · 방현 · 풍광유 · 양석불 · 반사구 · 호보전 · 왕창
318권 「아계전(阿桂傳)」 319권 「우민중등전(于敏中等傳)」
장가아계 우민중 · 뉴호록 화신 · 소릉아
322권 「두광내등전(竇光鼐等傳)」 323권 「황정계등전(黃廷桂等傳)」
두광내 · 이수방 · 범의빈 · 조석보 · 사진정 · 전풍 · 윤장도 황정계 · 악미달 · 양정장 · 장유공 · 이시요 · 오미태 · 관보
324권 「방관승등전(方觀承等傳)」
방관승 · 부찰부명안 · 주원리 · 이한 · 이세걸 · 원수동 · 정대진 · 유아 · 육요 · 관간정 · 장조규 · 호계당
325권 「이청시등전(李淸時等傳)」 326권 「개태등전(開泰等傳)」
이청시 · 요입덕 · 이굉 · 하위 · 오사작 · 살재 · 난제석 · 한횡 개태 · 아이태 · 계림 · 원푸
340권 「왕걸등전(王傑等傳)」 341권 「경규등전(慶桂等傳)」
왕걸 · 동고 · 주규 경규 · 유관지 · 대구형 · 대균원 · 탁진 · 장후 · 노음부
342권 「보녕등전(保寧等傳)」 343권 「서린등전(書麟等傳)」
보녕 · 송균 · 배탄 · 박계특 서린 · 각라길경 · 각라장린 · 비순 · 장백령 · 백린
344권 「늑보등전(勒保等傳)」 345권 「영보등전(永保等傳)」
늑보 · 액륵등보 ,호시현, · 덕릉태 영보 · 혜령 · 의면 · 영선 · 복녕 · 경안 · 태승은
386권 「문경등전(文慶等傳)」 387권 「숙순등전(肅順等傳)」 388권 「계량등전(桂良等傳)」
문경 · 문상 · 보윤 숙순 · 목음 · 초우영 계량 · 서린 · 관문 · 문욱
389권 「백준등전(柏俊等傳)」 390권 「가정등전(賈楨等傳)」 391권 「왜인등전(倭仁等傳)」
백준 · 인괴 · 서상 · 전경 가정 · 주조배 · 주봉표 · 단무겸 왜인 · 이당계 · 오정동
392권 「새상아등전(賽尙阿等傳)」 393권 「이성원등전(李星沅等傳)」 394권 「서광진등전(徐廣縉等傳)」
새상아 · 눌이경액 이성원 · 주천작 · 노숭광 서광진 · 엽명침 · 황종한
395권 「상대순등전(常大淳等傳)」
상대순 ,쌍복 왕금수 왕수동, · 장문경 · 도은배 ,다산, · 길이항아 · 나준전 · 서유임 · 왕유령
396권 「오문용전(吳文鎔等傳)」 397권 「육건영등전(陸建瀛等傳)」
오문용 · 반탁 · 등이항 육건영 · 양정문 · 청린 · 숭륜 · 하계청
399권 「여현기등전(呂賢基等傳)」
여현기 · 추명학 · 대희 · 장비 · 황종 · 도정걸 · 풍배원 · 손명은 · 심병원 · 장석경
400권 「하계진등전(何桂珍等傳)」 401권 「상영등전(向榮等傳)」
하계진 · 서풍옥 · 온소원 · 김광저 · 이맹군 · 조경현 상영 · 화춘 · 장국량
402권 「오란태등전(烏蘭泰等傳)」
오란태 · 등소량 · 주천수 · 요문선 · 문서 · 팽사거 · 장옥량 · 노점오 · 유계삼 · 서쌍래 · 구등룡 · 왕국재 · 호곤원 · 대문영
403권 「승보등전(勝保等傳)」 404권 「승격림심등전(僧格林沁等傳)」
승보 · 탁명아 · 진금수 · 덕흥아 승격림심 · 서통액 · 항령 · 소극금 · 하건오 · 전순 · 사영춘 · 악선
405권 「증국번전(曾國籓傳)」 406권 「낙병장등전(駱秉章等傳)」 407권 「강충원등전(江忠源等傳)」
증국번 낙병장 · 호림익 강충원 · 나택남
408권 「이속빈등전(李續賓等傳)」 409권 「탑제포등전(塔齊布等傳)」
이속빈 · 정예의 · 증국화 · 이속의 · 왕진 · 유등홍 · 장익풍 탑제포 · 필금과 · 다융아 · 포초,송국영 누운경 담등달, · 당인겸 · 유송산
410권 「팽옥린등전(彭玉麟等傳)」 411권 「이홍장전(李鴻章傳)」
팽옥린 · 양악빈 · 왕명산 · 손창개 · 양명해 · 사준여 이홍장
412권 「좌종당전(左宗棠傳)」 413권 「증국전등전(曾國荃等傳)」
좌종당 증국전 · 심보정 · 유곤일
414권 「이신전등전(李臣典等傳)」
이신전 · 소부사 · 이원길 · 유연첩 · 팽육귤 · 장시일 · 오유수 · 주남계 · 나봉원 · 이상화 · 소경연 · 오종국
415권 「황익승등전(黃翼升等傳)」
황익승 · 정의방 · 왕길 · 오가방 · 이성모 · 이조빈 · 강복산 · 유배원
416권 「정학계등전(程學啟等傳)」
정학계 · 하안태 · 정국괴 · 유명전 · 장수산 · 주성파 · 주성전 · 반정신 · 오장경
418권 「원갑삼등전(袁甲三等傳)」 419권 「낙병장등전(左宗棠傳)」 420권 「한초등전(韓超等傳)」
원갑삼 · 모창희 유장우 · 유악소 · 잠육영 한초 · 전흥서 · 증벽광 · 석보전
421권 「심조림등전(沈兆霖等傳)」
심조림 · 조육영 · 허내보 · 조광 · 주준 · 이함 · 장상하 · 나돈연 · 정돈근 · 방종로
422권 「왕무음등전(王茂廕等傳)」
왕무음 · 송진 · 원희조 · 문서 · 육록 · 서계여 · 왕발규 · 염조윤 · 뇌이함 · 도양 · 오존의 · 은조용
423권 「종직진등전(宗稷辰等傳)」 424권 「오진역등전(吳振棫等傳)」
종직진 · 윤경운 · 왕증 · 목집향아 · 유백천 오진역 · 장량기 · 모홍빈 · 장개숭
425권 「이혜등전(李僡等傳)」 426권 「왕경운등전(王慶雲等傳)」
이혜 · 오당 · 영한 · 유용 · 교송년 · 전정명 · 오원병 왕경운 · 담정양 · 마신이 · 이종희 · 서종간 · 왕개태 · 곽백음
451권 「이조의등전(李朝儀等傳)」
이조의 · 단기 · 정수창 · 증기봉 · 저유립 · 서철산 · 계중행 · 유함방 · 진횡거 · 유지개 · 이용청 · 이금용 · 김복증 ,웅기영 사복가, · 동조용
452권 「홍여규등전(洪汝奎等傳)」
홍여규 · 양종렴 · 사박 · 사극관 · 심보정 · 주기앙 ,주기조, · 종원한 · 서경장 · 서진 · 괴광전 · 진휼성 · 반민표 · 엄작림 · 당석진 · 누춘번
457권 「장동재등전(蔣東才等傳)」
장동재 · 이남화 · 동리고 · 동전승 · 우사한 · 조덕경 · 마복진 · 정문병 · 방요 · 등안방
458권 「서연욱등전(徐延旭等傳)」
서연욱 · 당형 · 하경 · 장조동
459권 「풍자재등전(馮子材等傳)」
풍자재 · 왕효기 · 진가 · 장종한 · 소원춘 · 마성치 · 왕덕방 · 장춘발 · 소득룡 · 마유기 · 오영안 · 손개화 · 소득승 · 장고원 · 구양이견
460권 「좌보귀등전(左寶貴等傳)」 461권 「송경등전(宋慶等傳)」
좌보귀 · 원영산 · 등세창 · 유보첨 · 대종건 송경 · 여본원 · 서방도 · 마옥곤 · 의극당아 · 장순
462권 「정여창등전(丁汝昌等傳)」 463권 「당경숭등전(唐景崧等傳)」
정여창 · 위여귀 · 엽지초 당경숭 · 유영복
464권 「이단분등전(李端棻等傳)」
이단분 · 서치정 · 진보함 · 황준헌 · 증화 · 양심수 · 양예 · 유광제 · 담사동 · 임욱 · 강광인
465권 「서동등전(徐桐等傳)」 466권 「서용의등전(徐用儀等傳)」
서동 · 강의 · 조서교 · 고아랍계수 · 하영년 · 희탑랍유록 · 육현 서용의 · 허경징 · 원창 · 토묵특입산 · 최가연원
471권 「성선회등전(盛宣懷等傳)」 472권 「육윤상등전(陸潤庠等傳)」
성선회 · 서징 육윤상 · 세속 · 이극탄 · 양정분 · 서방 · 노내선 · 심증식
473권 「장훈등전(張勳等傳)」 474권 「오삼계등전(吳三桂等傳)」 475권 「홍수전전(洪秀全傳)」
장훈 · 강유위 오삼계 · 경정충 · 상지신 · 손연령 홍수전
476·477·478·479권 「순리전(循吏傳)」
백등명 ,탕가상 임진단 우종요, · 송필달 · 육재신 · 장목 ,장훈(張塤), · 진여함 · 목수 ,진시림, · 요문섭 ,황정린, · 낙종린 ,최종태 조진조, · 조길사 · 장근 · 강고 ,장극억 가박, · 소사요 ,위입정 고음작 근양, · 최화 · 주중횡 · 유계 · 도원순 · 요기형 · 동국롱 · 육사 · 공감 · 진덕영 · 예복전 · 장림 · 염요희 · 남정원 · 엽신 · 시초정 · 진경문 · 주인룡 · 동화 · 이위 · 사중훈 · 이대본 · 우운진 · 장견도 · 소대업 · 주극개 ,정기 강기연 언여사 주제화, · 왕휘조 ,여돈화 주휴도, · 유대신 · 오환채 · 기대규 · 소희증 · 장길안 ,이육창, · 공경한 · 개방필 · 사소등 · 이갱예 · 이병수 · 적상경 · 장돈인 · 정돈윤 · 이문경 · 유체중 ,유후, · 장기 ,석가소, · 유형 ,서동, · 요간지 · 오균 · 왕조겸 · 조근 · 계초만 · 장작남 · 운무기 · 서대영 · 우수매 · 하왈유 · 오응연 · 유병림 ,진숭지 하자령 소세본, · 이병도 ,유주 주근인 추종준 왕무훈, · 괴덕모 · 임달천 · 방대제 · 진호 · 양영서 · 임계 · 왕인복 · 주광제 · 냉정형 · 손보전 · 가소경 · 도관준 · 진문불 · 이소 · 장해 · 왕인감
480·481·482·483권 「유림전(儒林傳)」
손봉기 · 황종희 · 왕부지 · 이옹 · 심국모 · 사문존 · 고유 · 탕지기 · 육세의 · 심윤 · 응휘겸 · 주학령 · 심호정 · 백환채 · 호승락 · 조본영 · 유원록 · 안원 · 이공 · 조포 · 이내장 · 이광파 · 장형양 · 왕무굉 · 이몽기 · 호방 · 노사 · 고동고 · 맹초연 · 왕불 · 요학상 · 당감 · 오가빈 · 유희재 · 주차기 · 성유 · 소의진 · 고염무 · 장이기 · 만사대 · 호위 · 모기령 · 염약거 · 혜주역 · 진후요 · 장림 · 임계운 · 전조망 · 심융 · 강영 · 저인량 · 노문서 · 전대흔 · 왕명성 · 대진 · 단옥재 · 손지조 · 유대공 · 공광삼 · 소진함 · 왕염손 · 왕중 · 무억 · 장술조 · 척학표 · 정걸 · 손성연 · 왕빙진 · 능정감 · 계복 · 강성 · 전대소 · 허강좌 · 공음식 · 육기 · 광계
484·485·486권 「문원전(文苑傳)」
487·488·499·490·491·492·493·494·495·496권 「충의전(忠義傳)」
497·498·499권 「효의전(孝義傳)」
주용순 · 오번창 오겸목 · 주정 · 적요 · 이경염 · 왕호 · 황농 · 조형 · 황가장 · 정명윤 · 유종수 · 하복한 · 허계각
500·501권 「유일전(遺逸傳)」
502·503·504·505권 「예술전(藝術傳)」
506 · 507권 「주인전(疇人傳)」
설봉조 · 공사연 · 왕석천 · 방중통 · 매문정 · 명안도 · 유상규 · 왕문계 · 주홍 · 박계 · 허여란 · 이황 · 왕래 · 진걸 · 시왈순 · 이예 · 낙등봉 · 항명달 · 정취충 · 사가화 · 오가선 · 나사림 · 고관광 · 좌잠 · 증기홍 · 하란상 · 추백기 · 이선란 · 화형방
508·509·510·511권 「열녀전(列女傳)」
518·519·520·521·522·523·524·525권 「번부전(藩部傳)」
526·527·528·529권 「속국전(屬國傳)」
조선 · 유구 · 월남 · 면전 · 섬라 · 남장 · 소록 · 구르카 · 호한 · 보노특 · 합살극 · 안집연 · 마이갈랑 · 나목간 · 탑십간 · 바다흐샨 · 박라이 · 아부한 · 감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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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건륭제 슬하의 아들들의 돌림자인 '영'(永)자를 이어받아 초명을 '영염'(永琰)이라 했고, 즉위하지 못한 형제들은 피휘를 위해 돌림자를 동음이자로 개명할 예정이었으나, 형제들의 돌림자를 가차없이 싹 바꿨던 옹정제와 달리 永이 상용 한자인 관계로 가경제는 그냥 본인이 永을 顒으로 고쳤다.[2] 학자들의 연구결과에서 나온 키다.[3] 위씨 성의 요동 한족 출신 정황기 포의 가문에서 태어나 입궁했다. 본인은 황귀비 시절에 사망했지만, 훗날 일족이 만주족 가문들과 비슷한 '위가(魏佳)씨'를 사성받고 양황기 만주 기분 니루로 대기되었다. 나중에 건륭제가 효의순황후로 추존했다.[4] 1748년 효현순황후가 사망했을 때, 건륭제는 서장자였던 영황(永璜)과 3남 영장(永璋)에게 국상 중에 예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폭언을 퍼부으며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 당시 건륭제는 1년 가까이 이성을 잃은 상태였고 영황이 곧 병으로 죽자 후회하였다. 영장처럼 민인 출신인 순혜황귀비 소생의 황자들은 원래 계승권이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4남인 영성(永珹)과 6남 영용(永瑢)은 다른 집안에 양자로 보내어져서 후계자 대열에서 탈락했음을 알 수 있다.[5] 물론 영황과 영장 역시 건륭제보다 일찍 죽었다.[6] 효공인황후는 포의출신이지만 아들 옹정제가 황위에 올라 황태후가 되고 황후로 추봉된 경우다.[7] 청나라 황제들은 나이가 많은 상태에서 황후를 잃은 경우 새황후를 다시 봉하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8] 1789년, 화석친왕에 함께 책봉되었다.[9] 이때 만약 11남 영성이 태자로 책봉되어 황제가 되었다면 그의 어머니가 조선인 혈통의 긴기야씨였기 때문에 이후 청나라 황제들에게 조선인의 피가 흐르게 되었을 것이다.[10] 무엇보다 가경제 영염은 효심이 매우 깊어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건륭제와 어머니 위가씨에게 효성을 다한 효자였다. 특히 가경제는 할머니인 효성헌황후에게도 문안을 게을리하지 않고 효성을 다했기에 효성헌황후가 가장 아끼는 손자인 터라 이는 효성헌황후에게 효자였던 건륭제의 환심을 샀다.[11] 제4대 성조 강희제의 어머니인 효강장황후의 경우, 조상이 한화된 여진족이었다가 태조 천명제 누르하치의 치세때 다시 만주족으로 돌아왔기에, 순수 한족이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매우 다르다. 원칙적으로 만주족은 한족과 결혼할 수 없었고, 아이신기오로씨 황족들도 원칙적으로는 한족 여성을 첩으로도 둘 수 없었다. 호적에 올리려면 팔기군 한군기인으로 신분을 올려줘야 했다.[12] 鈕祜祿 和珅, 뉴호록 화신[13] 한국의 역덕들 사이에서는 청나라 국가 예산의 15년치로 알려져 있지만, 아무리 부정축재를 했다해도 그 정도일리는 없고, 허션의 재산은 청나라 황실 의 15년치 예산에 해당했다. 즉, 가경제가 조사해 발표한 허션의 재산은 1,100만냥이었고, 청나라의 1년 예산은 건륭제 중반의 4,800만냥이 최대였다. 당시 1냥은 은 37.5g의 가치였는데, 2020년대 한국 시세로 약 30,000원 정도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1,100만냥은 건륭제 말기 청나라 황실의 15년치 예산이었다는 것인데, 역산하면 황실의 1년 예산은 1,100만/15=약 73만냥 정도였다고 할 수 있다. 2020년대의 시세로 환산하면 약 220억원 정도 밖에 안된다. 물론 당시의 물가 수준과 현재의 물가 수준이 다르고, 당시에는 임금이 훨씬 쌌기 때문에, 현재의 가치와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나라 전체 예산과 비교해 보면 아주 큰 액수는 아니었다. 선통제가 물러날 때인 청나라 말기 황실예산이 1년에 400만냥 정도였는데 이것은 건륭제보다 몇 술 더 뜬 서태후가 무지막지하게 늘린 것이었다. 건륭제가 아무리 늙어가면서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지만 청나라 황실은 여전히 대제국의 국력에 비하면 상당히 절약하며 살았던 것이다. 참고로 청나라의 건륭제 시기와 대응되는 조선 후기 영•정조 재위시 조정의 재정 규모는 쌀로 200만석 정도였는데, 1석이 은 5냥이라고 하면(19세기초의 공식시세), 약 40만냥 정도밖에 안되었다.(출처: 《조선시대 재정과 시장》, 이헌창)[14] 그런데 일부는 건륭제가 하사한 것들도 있었다. 또한 이러한 막대한 자금을 건륭제가 완전히 모르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건륭제가 돈이 필요할 때 허션이 때때로 상납하는 구조라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은 허션이 개인적으로 축재한 재물이었다.[15] 국고와 분리된 황제의 개인 계좌.[16] 스스로는 많이 쓰지 않았지만, 형제•자매 등 가족들에게는 많이 챙겨줬다. 일례로 화신이 권세를 만끽하며 확장을 거듭한 으리으리한 대저택도 일부 부지는 고륜화효공주와 풍신은덕(화신의 아들) 부부에게 돌려줬고, 재산을 압류하면서도 여동생 부부가 여느 공주와 액부들보다 고달프지 않을 만큼은 충분히 남겨줬으며, 심지어 풍신은덕은 아비인 화신의 3년상을 치를 겸 수 년 동안 근신한 후에는 백련교도의 난 진압때 다시 등용되기도 했다. 허구헌날 아버지 건륭제한테 구박을 받았던 많은 형제들이 파격적으로 작위를 승급받은 것도 이 덕분이었다.[17] 물론 건륭제 역시 초중기에는 부황 옹정제와 다를바 없었다. 즉위 초중반에는 인구조사 시스템에 남성만 아니라 여성을 조사하는 것을 추가하여 인구 현황을 훨씬 투명하게 했고, 부패한 관리를 중징계할 때 심지어는 참형에 처하는 방식으로 부정부패를 막았지만 말년에 혼미해지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18] 팔기만주로 대기되면 실상이야 어쨌든 형식적으로는 상비군인 가문이 되는 것이니 녹봉이 나왔다. 가문이 대를 이어, 황제로부터 방계로 멀어질수록 상삼기에서 하오기로 내려갔고 녹봉도 한미해지는 등의 변화는 있었지만, 어쨌든 황제가 가족끼리 뭉치자며 은수저를 금수저로 업그레이드해주는 것이었으니 돈이 꽤 많이 드는 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가경제가 화신을 족치면서 충분한 여력이 생긴 것이었다.[19] 강건성세의 시기인 100년 동안 1.5~2억명에서 3~4억명으로 인구가 2배 이상 늘어났다.[20] 1796년에 일어난 반란의 주동자는 반란 모의 혐의로 처형당한 제림(齊林, Qílín, 치린)의 아내인 왕총아(王聰兒, Wángcōng'er, 왕총얼)였다. 백련교도들은 호북성 - 사천성 경계의 산악지역에서 숨어 관군을 치고, 뒤로 빠지는 게릴라 전법을 썼다. 하지만 반란이 실패하게 되자 왕총아는 절벽에서 투신하여 최후를 맞았다.[21] 간신인 니오후루 허션이 팔기군을 약화시킨 탓도 있었지만, 사실 기병이 중심이 된 청나라군은 산악이나 밀림지역의 게릴라전에는 매우 약했다. 건륭제 시절 평원인 서역에서 막강한 준가르의 철기병을 분쇄했던 청나라군이, 밀림지역인 베트남과 미얀마에서는 맥없이 패퇴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22] 李文成, Lǐwénchéng, 리웬청[23] 林淸, Línqīng, 린칭[24] 참고로 일본에서 생겨서 현대 한국에도 신자가 있는 천리교와는 이름만 같고, 관계는 없다.[25] 왜냐하면 북경과 가까운 지역인터라 북경의 수비병력들까지 반란 진압에 동원되었기 때문이다.[26] 이때 권총을 쏘면서 직접 금위군을 지휘한 민녕이 바로 훗날의 선종 도광제였다. 위의 형이 요절해 이미 혈통상 유일한 적장자 대우를 받고 있었던 민녕은 계유지변 진압을 계기로 입지가 더욱 상승하여, 태자밀건법이 무색하게 차기 황제로 거의 낙점되었다. 또한 역적인 임청은 사로잡혀 능지형에 처해졌으며, 이문성은 도망쳐 자결했다. 이문성의 아내는 남편을 따라온 잔당들을 수습하여 계속 청나라군에 저항하다가 자결했다.[27] 특히 수도인 북경 근처에서 백련교계 반란이 일어나고, 자객들이 황궁인 자금성까지 쳐들어와 황제 암살을 시도한 것 자체가 보통 큰 사태가 아니었다.[28] 사실 이는 핑계였고, 이때의 떠이선 왕조가 더이상 가망이 없어서 도와줘봤자 소용없다고 판단하여 거절한 것이었다. 예상대로 떠이선 왕조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멸망했다. 기본적으로 중국의 역대 왕조는 자신들에 대한 관계에 급격한 변화를 주지 않는 이상, 조공국의 내정에 개입하는 것을 꺼렸다. 예를 들어 고려시대 무신정권에 반기를 든 조위총금나라의 개입을 요청했으나, 금나라는 이를 꺼렸고, 김자점이나 홍경래의 난 때도 이들이 청나라에게 개입을 요청했으나, 청나라는 무시했다. 예외적으로 갑신정변때 청나라가 개입한 이유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 개화파들이 반청친일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타도당한 온건 개화파들이 친청파였기 때문이었다.[29] 일부에서는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 때문에 탄압을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비슷하게 유일신을 섬기는 이슬람교에 대해서는 큰 탄압을 하지 않았다.[30] 청나라의 중앙 법전[31] 나라를 어지럽히는 무당과 술사를 금지한다.[32] 예수회는 창설자였던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부터가 군인 출신이었으며, 스페인포르투갈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을 통해 해외 선교에 나섰다. 이에 뒤질세라 프랑스 왕실이 주도하여 세운 (한국 천주교의 서양인 순교자들을 다수 배출한) 파리외방전교회 등 다른 수도회들도 세속 군주를 후원자로 둔 이상 정치적인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33] 하지만 서구 열강에 비해서는 여러 문제점이 있었다.[34] 인구 폭증이 민생의 악화로 이어질 것을 거의 유일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청나라의 관료였다.[35] 홍량길은 시재로 유명했고, 그 자손들도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출세한 사람이 많았다. 그 증손자인 홍심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유명한 극작가였고, 그 자손중의 한 명이 영화배우 홍금보이다.[36] 1750년 기준으로 프랑스의 연간 재정 수입은 은 1,612톤, 영국은 1,370톤, 청나라는 1,229톤이었다.[37] 당시 인도 아대륙의 거의 모든 왕국들은 유럽과의 지속적인 교류 덕분에 유럽과 맞먹는 수준의 무장을 자랑했고, 그 중 마이소르 왕국은 로켓으로, 마라타 제국은 프랑스식으로 훈련을 받은 막강한 포병대로 영국군을 괴롭혔다. 그리고 당시 인도가 분열된 상태였다고는 하나 세계 최대의 면직물 산업 덕에 재정적으로도 청나라에 비해서 부족할 것이 없었다.[38] 제1차 아편전쟁에 동원된 영국군의 대부분은 영국식으로 훈련된 인도 현지 보조병인 세포이였다. 세포이도 인도를 정복한 강군이었지만 영국 본토의 정예 병력에 비해서는 한 수 아래로 여겨졌다.[39] 당장 영국 함대의 해군력은 《테메레르》의 세계관에서도 청나라를 압도하지만, 셀레스티얼이 다 출동하면 몽땅 다 남중국해에 수장해 버릴 수 있다! 애초에 6,000마리 이상으로 영국군의 20배 이상이나 되는 압도적인 공군력을 본토에 보유하고 있는 만큼 영국이 시비를 걸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40] 가경 7년(1802년)에 장정고륜공주로 책봉되었고, 같은 해 11월에 몽골족 박이제길특씨의 마니파달라(玛尼巴达喇)에게 하가했다.[41] 가경 6년 11월에 몽골 과이심부 군왕 박이제길특씨 색특납목다포제(索特纳木多布济)에게 하가했다.[예시] 쑹자오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