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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08b><tablebgcolor=#00008b> ||
}}}}}}}}}}}} || 陳泰 진태 | Chén Tài | ||||
시호 | 목후(穆侯) | |||
최종직위 |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1] | |||
성씨 | 진(陳) | |||
명 | 태(泰) | |||
자 | 현백(玄伯) | |||
아버지 | 진군(陳羣) | |||
생몰연도 | ?년 ~ 260년 | |||
고향 | 예주(豫州) 영천군(潁川郡) 허현(許縣)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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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무장이자 정치가이며 자는 현백(玄伯)으로 예주 영천군 허현 사람. 진군의 아들이자 순욱의 외손자다. 진순(陳恂)의 아버지이자 진온(陳溫)의 할아버지.2. 생애
2.1. 초기 생애
집안 배경뿐만 아니라 능력과 인품도 출중했던 엘리트로 출사 후 승승장구하여 병주자사, 진위장군, 흉노중랑장 등을 역임했다. 관대하고 균형감 있는 통치로 수완을 발휘해 흉노인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부전자전이라고 아버지처럼 매우 강직하고 청렴한 인물이었다. 가문이 가문이었던지라 여기저기서 선물이 많이 들어왔었는데, 이를 일절 손 대지 않고 발신자만 기록해 둔 다음, 상서로 승진하여 낙양에 돌아오자 이를 모두 다 돌려보냈다.
2.2. 고평릉 사변
249년, 조상이 여러 파벌 세력들을 계속 제압했고, 진태는 사마의의 아들인 사마사, 사마소와 친구 관계였지만 조정의 혼란에 얽히지 않으려 했다. 같은 해 정월 도광양회하던 사마의는 조상 등이 황제 조방을 끼고 낙양 남쪽 교외로 능을 알현하는 틈을 타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를 이끌고 귀로를 차단했다. 당시 진태는 상서(尙書)로 이번 알현에 참석하기도 했는데, 사마의는 사람을 보내 조상에게 책을 보내어 저항을 포기하도록 하였고, 이에 맞서 조상 등은 여전히 망설였다. 진태는 시중 허윤과 함께 나가 이를 조상에게 권했다. 조상은 곧 허윤과 진태를 대표로 보내 사마의와 협의하게 했고, 사마씨는 줄곧 진태를 유공의 신하로 여겼다. 이후 사마씨 일당들이 조상 일파를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한 뒤, 진태는 조정에서의 투쟁을 피하기 위해 외임을 자청했고, 옹주자사로 자리를 옮겨 곽회와 함께 대촉전선에 부임한다.2.3. 강유의 1차 북벌
249년, 강유를 중심으로 촉군이 옹주로 침공해오자 정서장군 곽회는 당시 옹주자사, 분위장군였던 진태와 더불어 적을 제어할 방법을 상의한다. 진태는 촉군이 의지하는 국성(촉군이 국산에 쌓은 두 개의 성)은 험한 산에 의지하고 견고하게 지어져 직접 공격하기는 어려우나 물자 수송이 어렵고 물 공급도 미비하니 국성의 보급을 끊자는 계책을 낸다.진태는 서질과 등애 등을 인솔하여 국성을 포위하고 성내의 군량과 물 보급을 끊었다. 성을 지키던 구안(句安)과 이흠(李歆) 등은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틴다.
강유가 국성을 구원하러 오기 위해 우두산에서 나와서 진태와 서로 대치했는데 진태는 군사들에게 보루를 견고하게 하고 적과 싸우지 말도록 했다. 그리고선 곽회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주소로 진군하게하여 강유의 퇴로를 끊도록 했다. 이 계책은 성공하여 강유는 도주하였고, 구원을 받지 못한 국성의 구안과 이흠은 결국 위군에 투항한다.
2.4. 강유의 2.5차 북벌
삼국지연의에서는 진태가 강유의 2차 북벌에서도 대응하는데 이는 허구이다.<강유전>에 따르면 253년 여름, 강유가 수만 명을 이끌고 석영으로 출병하여 동정을 거쳐 남안(南安)을 포위한다. 옹주자사 진태가 포위를 풀기 위해 낙문(洛門)에 도착하였고 강유는 군량이 다하여 퇴각한다.
이것이 강유의 2.5차 북벌로 공식적인 북벌로는 카운트하지 않는다. 강유의 3차 북벌은 따로 있다.
2.5. 강유의 3차 북벌
254년 6월에 농서를 공격해 들어온 강유는 10월, 대 촉한용 정예 기병대가 포함된 정촉호군을 격파하고 지휘관인 서질의 목을 베는 데 성공한다. 강유가 승세를 타 항복시킨 곳이 많았고 적도현, 하관현, 임도현의 세 현의 많은 성들을 함락시킨다. 그리고 옹주자사 진태가 도착하기 전 퇴각한다.2.6. 강유의 4차 북벌
곽회 사후에 진태는 정서장군, 가절도독옹양제군사가 되어 옹주와 양주의 군권을 관할하며 촉군의 공격을 막게 된다.255년, 옹주자사 왕경에게서 촉이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기산, 금성, 석영 쪽으로 공격해올 것이라는 보고를 받은 그는 촉군 전력이 삼분해도 좋을 만큼 강하지 않다고 판단, 반드시 한 방향으로만 주력을 투입할 것이라 예상한다. 그래서 왕경에게는 농서로 통하는 길을 지키게 하고 상규에는 등애를 주둔시킨 후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진창으로 향하여 진로가 명백해지는 대로 촉군을 함께 협격하기로 했다.
그런데 왕경은 강유에게 참패하여 패잔병을 이끌고 적도성으로 들어갔고 강유군은 적도성을 포위한다. 등애, 호분 등은 승세를 탄 촉군과의 전투를 피해 적도를 내어주고 농우와 관중의 수비를 강화한 후 반격으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 진태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고 강유가 승기를 타서 더 진군한다면 사태가 훨씬 심각해질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강유의 군대가 무장을 가볍게 하기 위해 물자나 병기를 얼마 데려가지 않은 점을 상기시키며 적도성이 버티는 동안 조속히 공격하면 강유는 퇴각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견해를 내었다.
진태는 평소 전쟁에 관한 일은 과장이 쉽게된다며 간략하게 보고했다. 진태는 표를 올려 군사들을 급히 적도성으로 달려가게 했다. 이 전투의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은 조정의 신하들의 견해는 적도성이 함락될 것은 뻔하고 강유가 농우를 멸망시킬 수 있다며 부정적이었다. 차라리 대군이 사방에서 모이길 기다린 후에 강유를 공격해야 한다고 의견을 내었다.
사마소만은 견해가 달랐고 갑자기 강유를 디스(?)한다.
옛날 제갈량은 항상 이러한 뜻을 품고 있었지만, 끝까지 실현할 수 없었소. 이처럼 큰 사업과 계책은 강유에게 맡길만한 일이 아니오.
또한 적도성은 쉽게 함락시키긴 힘드나 식량이 적으니 진태가 신속히 구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진태는 험난한 산을 넘는데 그의 예상대로 강유가 3일 간 복병을 배치해 놓았었다. 진태의 군대는 몰래 행군하여 고성령을 넘고 적도의 동남쪽에 있는 고산 위에서 많은 봉화를 밝히고 북과 호각을 울렸다. 이렇게 진태가 구원병이 온 것을 과시하자 적도성 안의 위군은 사기가 증진되었고 촉군은 적의 구원병이 벌써오니 위군이 미리 계책을 준비했다고 생각하며 두려워했다.[3]
진태의 군대가 갑자기 적도 남쪽에서 나타나자 강유는 일부 군사를 인솔하여 산을 타고 진태의 군사를 습격했으나 이미 고지에 자리잡은 진태에게 이길 수 없어 돌아갔다.
설상가상으로 양주의 위군까지 금성을 지나 적도로 오고 있었고 진태와 왕경이 비밀리에 날짜를 정하고 함께 강유의 퇴로를 막으려고 하자 이 계획을 들은 강유군은 즉시 퇴각했다. 구원받은 왕경은 "식량은 열흘분도 못 남았습니다. 만일 때에 이르러 구원병이 오지 않았다면 성을 들어 궤멸해 옹주를 잃게 되었을 것입니다."라며 진태에게 감사해한다.
진태는 지친 옹주군을 후방으로 돌리고 건실한 병사들을 전방으로 교체했다. 또한 성과 보루를 수리하도록 하고 자신은 상규로 돌아갔다.
사마소는 다음과 같은 말로 진태를 칭찬한다.
진현백은 침착하고 용감하며 과단성을 갖추어 방백의 중책을 맡았다. 공략당할 성을 구원하면서 병사들의 증원을 요구하지도 않고 사건을 보고하는 것도 드물었으니 반드시 적을 조치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진태는 사마소에게 큰 신임을 받게 된다.
2.7. 사마소의 양신
후에 진태는 승진하여 상서우복야가 되었고, 관리 선발을 관장하며 시중관록대부의 관직이 더해졌다. 이전처럼 전선의 지휘관이 아닌 중앙 조정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오나라의 손준이 침공하자 진태는 진남장군과 가절도독회북제군사로 삼아지고 군사들을 지휘했다. 손준이 퇴각하자 진태 또한 군사를 돌아가게 했고 좌복야로 전임되었다.
제갈탄이 수춘에서 난을 일으켰을 때도 진태는 사마소를 따라 군사를 통솔했다.
사마사, 사마소, 무해 모두 진태와 좋은 관계였는데 사마소가 무해에게 진태와 아버지인 진군을 비교하면 어떻냐고 묻자 무해는 국가의 위엄과 교화를 펼치는 것은 진태가 진군만 못하지만 통솔력을 가지고 간략하게 해 공을 세워 일을 완성하는 것에서는 진태가 진군보다 뛰어나다고 했다. 즉 아버지인 진군이 문(文) 측면에서 위에 도움이 되었다면 그는 무(武) 측면에서 공헌한 셈이다.
2.8. 조모 시해 사건
<진태전>에 주석으로 달린 간보의 진기에 따르면 260년, 황제 조모가 살해당했을 때에는 진태와 사마부 두 명만 조모를 추모했다. [4][5]간보의 진기에 따르면 사마소가 조정의 신하들을 불러 그 대책을 논의했는데 태상 진태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의 외숙[6] 순의에게 그를 불러 참석 여부를 알아보게 했다. 진태가 말하길 "세상의 논자들은 저를 외숙께 견주고 있습니다만 지금은 외숙께서 저만 못합니다."라고 했다. 이는 자신의 외숙부이자 순욱의 아들인 순의가 사마소 편을 들자 "외숙부는 나보다 못난 인간이 되었다."라며 한탄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제와 내외 친족들이 모두 그에게 참석하라고 강요하자 눈물을 흘리면서 조정으로 들어갔다. 민심 이반을 우려한 사마소는 밀실에서 진태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소'라고 물었다. 이에 진태는 '가충을 처형하는게 그나마 천하에 사과하는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가충은 사마소의 밀명을 받고 성제를 시켜 조모를 시해했으니 사마소에게 가충을 죽이라는 것은 "네가 잘못했음"이라고 인정하라는 것과 똑같은 말이었다. 그 서슬 퍼런 상황에서 사마소의 편을 들지 않았던 것이다. 사마소도 크게 찔렸는지 진태에게 "그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겠소?"라고 물었다. 그러나 진태는 "그 이상은 있지만 그 이하의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라고 타협을 거절했다.
<진태전>에 주석으로 달린 《위씨춘추》에 따르면 조모가 죽자 사마부와 상서좌복야[7] 진태는 그의 시신 앞에서 드러누우며 곡을 애달프게 했다. 이 모습을 사마소가 보고 자기도 같이 옆에서 같이 곡을 하며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라고 말한다. 여기서는 좀 더 직설적으로 "가충을 참한다면 오히려 자신의 떳떳함을 지킬 수는 있을 것입니다."라고 한다. 사마소가 다른 방법은 없냐고 하자 진태는 "저에게 다시 그 다음 말을 하게 하시렵니까?"라고 말하고선 피를 토하고 죽었다.
《세설신어》에 인용된 《한진춘추》에 따르면 사마소가 황제의 시해 소식을 듣고 몸을 땅에 내던지면서 "천하 사람들이 나를 어찌보겠는가"라고 말한 후 백관을 불러 이 일을 논의했는데 진태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내가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묻자 진태가 "그동안 공이 몇대에 걸쳐서 공로를 드높였는데 이제 황제를 시해했으니 속히 가충을 죽이면 오히려 자신의 떳떳함을 지킬 수 있을겁니다."라고 대답한다. 이에 사마소가 "공려(가충)을 죽일순 없으니 다른 계책을 생각해달라."라고 하자 진태가 대갈일성으로 "오직 그 이상의 방법만 있을 뿐이니 그것 외엔 권해드릴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고 집에 돌아와서 자결했다고 한다.
공통된 기록에서 진태는 가충을 처벌하지 않을거면 그 이상의 방법밖엔 없다고 철저하게 선을 긋는다. 여기서 가충 처형 이상의 방법이라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 사마소의 목숨 뿐이라는 의미다. 사마씨의 양신이라고 여겨졌던 그가 사마씨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리자 결국엔 사마씨와 완전히 척을 저버리게 된 것이다. 이 일로 원한을 가졌을 가충은 둘째치고 사실 사마소부터가 그동안 자신의 양신이었다고 하여 이런 얘기를 듣고도 그냥 넘어갈 사람[8]은 아니었고, 사마소가 가충을 처벌하지 않아 그 책임을 회피함으로서 진태의 운명도 조위 왕조의 운명과 함께 결정되었다.[9]
아버지 진군이 한을 버리고 위를 세우고 진태 본인은 사실상의 위의 멸망에 목숨을 함께 한 셈인데, 이는 한을 끝까지 보위하다 죽은 외조부 순욱과 위를 버리고 진의 건국에 앞장선 그의 아들 순의의 행적과 흥미로운 대비를 보인다. 위에 충성한 진군/진태 부자와 위를 배척한 순욱/순의 부자, 혹은 망국에 피를 토한 아버지 순욱/아들 진태와 망국에 앞장선 아버지 진군/아들 순의. 이들 두 쌍, 네 부자의 모습은 후한말부터 수나라의 통일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사회붕괴 상황에서 당대 지식인들이 처한 아노미상태와 그 해결과정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국가관 및 가치관[10]의 대립 양태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비슷하게 진태가 가충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고 그 다음은 없다라고 하자 사마소가 다시 묻지 않았다고 했다.
배송지는 진태는 태상이 아닌데 간보는 진태가 태상이라고 적었으니 이상하고 손성이 진태의 말을 고쳤으나 조금 나아진 것 뿐이라고 했다. 또한 손성은 다르게 들은 것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면서 스스로 의미를 판가름하여 고쳐서 내용이 더 나빠졌다고 손성의 태도를 비판했다.
《박물기》에 따르면 진식-진기-진군-진태 네 세대는 모두 조정에서 명성이 높았으나 덕이 점차 줄어들었고 당시 사람이 말하길 그들은 서로 자기 아버지에게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2.9. 죽음
얼마 후 동일한 해인 260년에 사망하였다. 사공으로 추증되고 목후라는 시호가 내려졌다.진태가 가충을 죽여야 한다며 사마씨 정권을 비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기에, 사마씨가 진태를 은밀히 제거했거나 진태가 자살한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이 많다. 진태의 죽은 시점이 워낙 절묘한 데다가 전해지는 기록들도 그걸 뒷받침하고 있다.(당장 위에 나와 있는 위씨춘추에도 사마소가 책임을 회피하려하자 울분을 토하다 죽었다고 나온다.)
3. 미디어 믹스
3.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3 |
삼국지 12, 13 |
삼국지 14 |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문무(文武)를 겸비한 만능 무장. 보통 그가 등장하는 유비 사후인 후기 시나리오에서는 진태만한 인재를 찾아보기 힘들다.[11] 통솔력과 지력은 80대 중반을 넘기고 다른 능력치도 70대를 찍는 만능형. 실제 역사에서의 모습처럼 군사 통솔이나 내정 양쪽에서 골고루 일할 수 있다. 삼국지 2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일러스트 변화가 심한데, 삼국지 6에서의 인물 일러스트는 거의 악몽 수준. 삼국지 5의 일러스트를 그대로 가져다가 16비트화 시키려는 도중에 작업 시간이 부족했는지 완전 발로 그린 게 티가 날 정도로 조악하기 짝이 없다.
삼국지 7에서는 일러스트가 '젊고 능력있는 장군'으로 나왔다. 그러나 이 일러스트는 8탄까지 우려먹고 개성이 없다.
삼국지 9에서는 삭아보이고 어색한 일러스트로 나왔다. 능력치는 통솔력 87/무력 78/지력 87/정치력 77로 A급 장수. 병법도 분투, 돌파, 연사, 정란, 투석, 조영, 교사를 가지고 있다. 후반기에 찾기 힘든 인재. 흠이라면 모략계나 책략계 병법이 없고 숙련도만 있기 때문에 수련을 보내지 않으면 87의 지력을 직접 써먹기는 좋지 않다는 것. PK라면 어차피 진태의 능력도 출중하니까 한두 번쯤 진태에게 발탁 장수를 돌려다가 병법 연마를 해보는 것도 좋다. 전병법 특기이기도 해서 발탁 장수랑 사이좋게 상위 병법도 마스터할 수 있다.
삼국지 10에서는 수염을 달고 나왔고 제법 간지난다. 능력치는 통솔력 85/무력 73/지력 85/정치력 75/매력 75로 뭐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A급 캐릭. 능력치 총합 393은 모든 장수를 통틀어서도 원소와 동급인 공동 25위이며, 특기는 15개에(기술, 징병, 화시, 일제, 진정, 은밀, 반목, 유인, 지리, 회복, 위압, 반박, 군사, 명사, 간첩) 군사, 명사 특기를 모두 가지고 있다.
삼국지 11의 일러스트는 다시 '젊고 능력있는 장군'의 이미지를 아주 철철 뿜어낸다. 능력치는 통솔력 84/무력 73/지력 86/정치력 78/매력 77[12]으로 여전히 좋지만 특기가 잉여인 정묘. 병종적성은 창병 S/극병 A/노병 A/기병 A/병기 A/수군 C로 다방면으로 운용이 가능한 만능형이다. 친애무장으로는 사마소가 조모를 시해하기 전까진 주군이나 다름 없던 사마사, 사마소 형제와 등애, 종육, 부하가 있다. 특이하게도 한실 중시 성향인데, 위나라의 마지막 충신이었던 것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13]
삼국지 12의 일러스트는 육항과 같이 실망스러운 일러스트로 나왔다. 자세히 보면 말을 타고 고삐를 쥔 채 왼손을 가슴에 올리고 있다. 게다가 전법도 육항과 같다. 능력치는 무력이 77로 올라갔고 매력이 삭제된 것을 제외하면 삼국지 11 때와 같다. 하지만 전법이 매우 쓸 만한 궁군강사이기 때문에 후반기 위나라 무장 중 A급 이상의 화력을 자랑한다. 전법이 궁군강사이고 군사 특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대촉전선을 지키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던 곽회와 같다.
삼국지 13에서의 전법은 범위 내 방어 +3, 사기 +1, 사기 유지의 철벽지휘로 가성비가 매우 좋다. 능력치는 삼국지 12 때와 같고 아쉽게도 중신 특성은 없다. 전수특기는 훈련. 병과 적성은 모두 A. 보유 특기는 상업 2/ 문화 1/ 훈련 6/ 순찰 5/ 신속 6/ 분전 2/ 공성 3/ 견수 6의 만능 무장. 단, 등장 시기가 늦어 영웅집결 외에는 보기 힘든 장수 중 1명이다. 물론 사실 시나리오로 그쯤되면 성에 5명 채우기도 벅찬 수준으로 인재 수가 막장이고 A급 무장도 거의 남지 않는 상황이라 활용도는 굉장히 높은 편이다.
삼국지 14에서는 일러스트가 10때 처럼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돌아왔으며 능력치는 통솔 84, 무력 73, 지력 86, 정치 78, 매력 77로 전작에 비해 무력이 4 하락했다. 개성은 침착, 해제, 산전, 명성, 주의는 왕도, 정책은 군제개혁 Lv 4, 진형은 어린, 학익, 장사, 충차, 전법은 분전, 격려, 업화, 진정, 충차, 친애무장은 등애, 부하, 사마사, 사마소, 순의, 혐오무장은 없다.
이번작 영웅집결에서는 같이 강유의 북벌을 막았던 동지였던 등애의 부하로 나왔다. 내정에서는 점령을 빠르게 해 주는 명성 특기가 있고 능력치가 고루 높아 지역담당관으로 아주 쓸만하며, 전장에서는 업화를 가지고 있고 지력이 높은 편이라서 괜찮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 작품에서도 S급은 아니지만 전투, 내정 모두 S급에 가까운 A급으로는 활용이 가능한 장수. 사실 시나리오에서 등장 시기나, 영웅집결에서 등애 본인과 등충 외에는 쓸만한 장수가 없는 등애군임을 감안하면 위상은 더더욱 높아진다.
3.2.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
성우는 김태영.
아버지인 진군이 공명전 낙양 전투 2에서 나왔지만 본인은 공명전에 나오지 않았다.
연의에서는 등애전 첫 전투 출진 가능하고 그 외엔 강유전 등에서 적으로 가끔 등장한다.
도독 중 유이하게 일치단결과 책략 모방 특성을 둘 다 가지고 있다.[14] 그 본인도 책략 딜러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책략 위주의 공격대에서 메인 서포터 역할을 맡았다. 특히나 가장 유행을 탔을 때는 폭풍기 메타 시절이었는데, 일치단결로 아군 책딜러의 정신력을 올려줌과 동시에 본인도 무귀보도나 삼황보도(도성)를 들고 책략 모방으로 폭풍을 복사할 수 있다는 점 덕분에 마딜 메타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서브딜러 중 하나였다.
폭풍 너프 이후로는 한동안 섬멸전에서는 사장되었지만 그 대신 사신 청룡전의 메인 서포터 겸 딜러로 사용된다. 일치단결로 아군 전원의 정신력을 21% 올려주고 본인도 책략 모방으로 구원군, 대각성 등을 자유롭게 구사하면서 플레이에 안정성을 줄 수 있다. 추후 이 역할은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책략 명중률이 더 높은 왕전과 책략 피해량이 더 높은 창평군에게 이어진다.
2020년 기준 경쟁전에서는 6성 전포인 낙구와 피해감소 보패를 맞춘 귀면문 진태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책략모방으로 풍수사의 버프도 돌리고 각종 피해감소와 일치단결을 통한 스탯 버프의 시너지로 무지막지 한 귀면문 탱킹을 하면서 붙어있는 아군들도 일치단결 버프로 순발력 상승을 통한 선공권을 가져와서 유리하게 플래이 하는 것. 상위호환인 왕전에 비해 진태의 코스트는 18로 왕전보다 5 코스트가 낮아서 덱 꾸리기 한결 수월하여 대체 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카운터로는 사마의 풍룡 미사일 등이 사용된다.
3.3.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곽회 부장으로 등장하여 60권에서 촉과 대치한다.
3.4. 삼국전투기
아버지 진군이 업의 칼 프레드릭슨으로 나와서 그런지, 러셀로 나왔다. 그래서인지 삼국지 6 일러스트와도 꽤 닮았다. 처음 등장한 국산 전투 (3)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다.국산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본래 옹주자사였던 곽회가 정서장군으로 승진한 뒤 진태가 옹주자사로 임명돼 서량 방면에 배치된 것으로 묘사된다. 처음 곽회가 진태에게 상황을 설명할 때는 듣는 둥 마는 둥하는 것처럼 보여 곽회를 당황케 했으나, 곽회는 대화를 해 본 뒤 진태가 범상치 않음을 깨닫고 그에게 병사를 주어 국성 공략을 명한 것으로 묘사된다.
진태는 서질과 등애를 이끌고 국성 앞에 진을 치고 주변 도로를 점거한 뒤 성으로 향하는 물길을 끊었다. 이후 강유가 국성으로 구원을 오면서 포위당하는 형국이 되었으나, 진태는 태연하게 뒤쪽에도 녹각을 세우고 병력을 배치하라고 하였다. 등애가 포위당했는데도 놀라지 않냐고 묻자 예상했던 일이기에 그렇다고 답했다. 등애는 그럼 빠져나갈 길이 있는 거냐고 물었고, 진태는 빠져나갈 길은 없으나, 동시에 빠져나갈 필요도 없다고 설명했다. 주변이 좁은 산길이라 막고 있으면 전세가 움직이지를 않고, 그런 대치 상태가 되면 필연적으로 유리해지는 건 자신들이라는 것이 이유. 실제로 강유는 지원군을 끌고 왔지만 진태의 군이 포인트를 막고 꿈쩍을 안 하니 섣불리 공격할 수가 없었다.[15] 그렇게 진태가 끈덕지게 버티는 동안 곽회의 지원군이 강유의 뒤를 치러 왔고, 강유가 퇴각하고 국성의 구안이 항복하면서 승리하게 되었다.
신성 전투 편에서는 곽회가 승진하자 축하의 말을 건넸다. 다만 당사자인 곽회 본인은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적도 전투 편에서는 강유가 적도로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했으나 사령관인 곽회의 상태가 좋지 않고 등애는 여남으로 발령이 나 있었기에 서량방면 위 전력이 두 동강이 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라 난색을 표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주재하고 있는 천수를 비워 놓을 수는 없었기에 결국 진태는 토촉호군인 서질만을 적도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진태는 강유가 적도에서 활개를 치는 동안 중앙에 지원 요청도 보내 봤지만 위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고 묘사되기도 했다.
고관 전투 편에서는 왕경이 강유가 세 방향으로 공격을 오는 걸 확인하고 군을 셋으로 쪼개서 막을 계획을 세워 진태에게 보고하자, 이에 진태는 강유가 미치지 않은 이상 그렇게 병력을 쪼개서 오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느 한 쪽만 막으라 하기도 애매해서 일단 대기하라고 명했다. 왕경이 대기하는 동안 강유가 포한까지 치고들어오자 적도까지 진출하라고 왕경에게 명을 내렸다. 그러나 왕경이 함부로 움직였다가 고관에서 대파를 당하자 왕경에게는 무조건 성만 지키라고 전하게끔 한 뒤 적도 지원을 위해 상규에서 진영을 정비했다.
주변 수하들은 왕경과 적도를 포기하기를 권했지만[16] 진태는 경병인 강유군은 공성을 하기에도, 돌아가기에도 애매한 전력이라 우왕좌왕할 가능성도 큰데다가 적도가 무너지면 일이 더 커질 거라며 지원을 강행했다. 진태는 적도 동남쪽 산을 통해서 적도로 접근했고 산 정상에 도착한 뒤 봉화를 올리고 북을 울려 자신들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강유는 지원이 온 사실을 알아 진태군을 요격하려 했지만, 산 밑에서 산 위를 공격해야 되는 상황이라 유의미한 피해를 줄 수 없었고, 결국 강유를 물러나게 하는데 성공했다.[17]
수춘2 전투 편에서는 고관 전투 이후 중앙으로 불려와 상서복야가 된 것으로 묘사된다. 국무에 관한 전시 비상관리 업무를 수행하는 모습이 묘사되기도 했다.
전투외편 7편에서는 황제 사후 사마소가 연 대책회의에 불참했다고 언급됐다. 이에 순의가 진태를 부르러 갔을 때는 집에서 울고 있던 것으로 묘사됐다. 순의가 사마소가 부르니 가자고 하자 진태는 싫다고 말했으며, 이에 순의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고 하자 한 나라의 군주가 그런 식으로 죽은 것이야말로 말이 안 되는 일이라며 역으로 쏘아붙였다. 순의가 우리같은 힘없는 유생이 뭘 할 수 있겠냐며 자기합리화를 시전하자 삼촌이 어찌 이 조카보다 못하냐며 실망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순의를 포함한 주변인들이 모두 힘을 합쳐 진태를 설득하여 사마소에게 보내면서 결국 사마소 앞에 서게 되었다.
사마소는 진태에게 황제가 피살당한 일을 처리할 대책을 물었고, 이에 진태는 세상을 납득시킬 방법은 딱 한 가지, 가충의 목을 베는 것만에 없다고 진언했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얼마 후 별다른 이유 없이 갑자기 쓰러져 죽었다고 언급되며 사망처리됐다.정사대로 260년에 갑작스럽게 죽었다고 서술되었는데, 그 전에 가충이 자신의 목을 베라고 사마소에게 진언하는 진태의 말을 엿듣고 분노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래서 앞뒤 정황상 가충이 은밀히 암살한 듯한 느낌을 준다. 여담으로, 정사에서 진태가 사마소에게 "일을 해결하려면 가충을 죽이든지, 너가 죽든지 둘 중 하나다." 식의 뉘앙스로 말을 했으나, 본작에선 가충을 죽이라는 말만 할뿐 사마소에게 날리는 "너가 죽든지" 대사는 나오지 않고 그외에는 없다라고만 해서, 실제 역사에서 보여준 간지에는 살짝 미치지 못한다.
기본적으로는 부하에게도 존댓말을 쓰는 존댓말 캐릭터. 거기에 "헤엥~"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런데 고관 전투(3)에서는 그에게 치킨, 등번호 99, '괴물'이란 대사 등 류현진을 나타내는 요소가 추가된 것을 볼 수 있다. 강유의 공세에 맞선 뛰어난 대응은 물론이고 두 캐릭터의 체구[18]의 유사성까지 아울러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3.5. 84부작 삼국지
드라마 후반에 강유가 이끄는 촉군에 맞서는 장면이 있으며, 81화에서 조모가 성제의 손에 시해되자 한달음에 달려와 통곡한다. 사마소가 대책을 묻자 가충을 노려보고는 "가충을 죽여 천하에 사죄해야 합니다!"라고 직설적으로 말한다.[19] 사마소가 정색하며 다른 방법은 없냐고 물어보자, 이외의 다른 방법은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1] 사후 사공으로 추증[2]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3] 배송지는 촉군은 진태의 구원군이 갑툭튀해서 두려워했다는데 정작 촉군이 복병을 3일이나 배치해놓았는데 구원이 이르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기록된건 이상하다고 본전의 기록을 비판했다.[4] 왕상의 기록을 보면 왕상이 조모의 죽음에 통곡했다고 하며, 왕상의 인물됨을 살펴보았을 때 이러한 기록이 거짓으로 꾸며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런데 어째서 당대에 효덕으로 유명했던 왕상은 언급을 하지않고 진태와 사마부만 추모했다고 기록되었는지 의문이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간단한 이치다. 진태는 목숨을 내놓음으로써 그 충심이 진정임을 증명했다. 사마부는 뒷날보면 가식일 뿐 이지만 어쨌든 조위 마지막 충신이 사마씨에게서 나왔다는 이야기 거리가 되었기에 기억에 강하게 남았다. 반면 왕상은 서진 공신이 되어 남은 일생 안락하게 잘먹고 잘 살았다. 그러니 그 울음이 어떻게 보였겠는가?[5] 사실 사마부도 따지고보면 왕상과 마찬가지로 천수를 누리고 잘살았으니까 다르지 않냐고 할 수 있겠지만 왕상과 다르게 사마부는 사마씨다. 즉 사마씨 일족 중에서도 양심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장치로 띄워졌다고 보여지는 게 옳을 것이다. 실제로 저 주석과 다르게 사마부 항목을 가보면 알겠지만 사마부의 추모나 조위를 향한 충신은 철저한 가식으로 점철되어 있다. 따라서 사마부도 엄밀히 말하면 저 목록에서 삭제하는 게 옳고 이렇게 되면 진태 하나만 남게 된다.[6] 진태가 순의의 사위라는 설도 있는데 이는 구(舅)자가 장인, 시아버지, 외숙이란 뜻을 모두 가져서 오역된 것이다.[7] 《자치통감》에서는 《위씨춘추》의 기록을 따라 당시 진태의 관직을 상서좌복야로 적었다.[8] 진태보다 훨씬 온건한 말을 했다가 결국 일족이 풍비박산난 등애의 예를 봐도 그렇듯하다.[9] 단 전해지는 기록을 보면 그의 죽음은 분사나 자살의 느낌도 강하므로 사마소나 가충이 죽였다고 무조건 볼 순 없다. 물론 조모의 시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 사마소인 만큼 사마씨에 대놓고 반한 진태의 운명도 오래가진 못했겠지만 말이다.[10] 개혁을 단행하면 기존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해도 충분하다고 본 것이 순욱과 진태였고 진군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입장, 순의는 난세 따위 아무래도 좋고 자신의 영달이 우선이라는 입장이었다. 순욱은 조조를 권신의 반열에 올려서 그 힘으로 후한의 가치를 회복시키고자 했고, 진태도 마찬가지로 권신인 사마씨들에게 협조하면서 조상일파의 폐단을 정리하는데는 동의하되, 꽤 자질이 보이던 조모의 비극적 죽음에는 분개하였다. 진군은 한의 재건으로는 폐단이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 여겼고, 순의는 조위에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것이 목적이었는지 그냥 인성이 글러먹었던 것인지 확실치 않으나 어느쪽이든 간에 세상의 혼란을 잠식시키는데에 관심이 없었다.[11] 무장이 그나마 제일 많은 위의 경우에도 진태보다 무력으로 나은 인재는 열 명이 채 되지 않는 수준이다. 제갈량 사후 시나리오로 가면 장합, 학소 등이 죽고 난 후라 거기서 또 반토막이 난다.[12] 능력치 총합이 398로 곽회와 공동 20위다.[13] 이와 비슷하게 사마부 역시 한실 중시로 설정되어 있다[14] 천하일통 패에 왕전이 일치단결과 책략모방을 지닌 도독으로 추가되었다.[15] 국성의 구안은 애초에 많은 병력을 데려온 게 아니라서 역시 함부로 나갈 수 없었다. 그나마 수가 되는 건 강족 부대였으나 이들은 위나라에게 이용당한 것에 분노해 촉군에 붙은 것이었으니 쉽게 이용할 수가 없었다.[16] 서량 쪽 루트로 북벌을 하기를 선호하는 강유의 습성을 고려해서 왕경군에 정예를 때려박았는데 그 정예들이 산산조각난 상황이었다. 따라서 내부에서 정예군도 막지 못한 강유를 어찌 오합지졸로 막겠냐는 의견이 생겨난 것이다.[17] 진태가 산에 오른 뒤 퇴로를 막겠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 결정타가 되었다고 묘사되었다.[18] 라기보단 몸매[19] 이에 가충이 진태를 노려보는 장면이 짧게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