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극인 겸 개그맨에 대한 내용은 곽범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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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각 | 곽사 | 장제 | 번조 |
郭汜 곽사 | |
<colbgcolor=#232323><colcolor=#BDBDBD> 최종 관직 | <colbgcolor=#ffffff,#191919> |
성씨 | 곽(郭) |
이름 | 사(汜) |
이명 | 곽다(郭多) |
생몰 | ?~197년 |
고향 | 양주(凉州) 장액군(張掖郡) |
사망지 | 사례교위부(司隸校尉部) 우부풍(右扶風) 미현(郿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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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 동탁의 수하 장수이자 군벌로 옹주 장액군 사람이었으며, 이명은 곽다(郭多)였다.
2. 이름 논란
1990년대 범우사에서 황병국 교수가 번역한 《삼국지》에 곽범이라고 적었는데, 모양이 비슷한 '汜'자를 '氾'자로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황병국 교수는 '氾'이 맞고 '汜'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현재 중국에서도 汜의 표기인 Si로 하여 Guo Si(궈쓰) 로 표기한다. 원나라 때 사학자인 호삼성은 한자 읽기를 알려주는 반절표현으로 이각과 곽사의 음을 알려주었다. 특히 곽사에 대해서는 곽사, 곽범 모두 신빙성이 있다고 보았다.[2]3. 정사
동탁 휘하의 무장으로 이각과 함께 행동했으며, 동탁이 우보를 시켜 섬현에 주둔하게 하면서 당시 교위를 지낸 곽사는 이각, 장제와 함께 진류, 영천의 여러 현들을 공략하러 갔다.그 사이에 동탁이 살해당하고 동탁 사후에는 여포, 마등, 한수 등 군벌들과의 전쟁에서 모조리 승리했다. 《후한서》<서강전>에 따르면 헌제 흥평(興平) 원년(194년), 빙익(馮翊) 지역의 항복한 강족이 반란을 일으켜 여러 현을 노략질하자 곽사, 번조가 그들을 격파하여 수천 명의 머리를 베었다.
195년 2월, 번조를 죽인 후 아주 잠시 동안 이각과 곽사는 서로 술자리를 열어 즐기며 서로를 자기 집에 재우기도 할 정도로 친하게 지냈으나 곽사의 처가 이각이 곽사에게 비첩을 줄 것을 두려워해 이 둘을 멀어지게 할 계획을 세웠다. 한 번은 곽사가 이각이 준 음식을 가져오니 곽사의 처는 그것을 받은 뒤 자신이 미리 준비한 약을 빼내어 곽사에게 보여주었다. 이에 속아 넘어간 곽사는 이각에 대해 의심을 품다가 큰 경계심을 가지게 되어 급기야 이각이 연 연회에 가서 술에 취하자 똥물을 먹고 토하여 술을 깨고자 했다.[3] 이로써 곽사는 이각과 원수지간이 되었다.
《헌제기거주》(獻帝起居注)에 따르면 이각과 싸울 때 수백 명의 군사로 수만 명의 이각군을 무너뜨렸고, 《영웅기》(英雄記)에는 패배하긴 했지만 여포와 1:1 대결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심지어 《영웅기》에 의하면 여포와의 일기토는 곽사가 제안한 것이었다.
결국 삼보의 난으로 이각이 단외에게 사로잡혀 죽었던 것처럼 곽사 또한 원래는 자신의 부하였던 오습의 배반으로 급습당하여 목숨을 잃었다.
4. 연의
연의에서는 전투적 능력이 낮아졌다. 연의의 대표적인 피해자 중 한 명. 이각에 의해 곽아다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며 말도둑 출신이라고 까인다.5. 평가
정치적인 능력은 아예 없다고 봐야하지만 군사적 능력은 무시할 수 없는 인물로,[4] 일신의 용맹이든 용병술이든 무장으로서는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 이 점은 이각도 마찬가지.[5]훗날 동승의 술회(述懷)에 의하면 이각과의 전투에서 병사 수백 명으로 이각군 수만 명을 격파했을 정도로 강용한 무사였다고 한다.
6. 미디어 믹스
자세한 내용은 곽사/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 자칭에 불과하다. 이각의 대사마 임명은 후한 조정의 공식적인 임명이었으나, 곽사의 경우는 자칭이었므로 공신력이 없었다. 그 탓에 대중매체에서는 곽사가 이각의 부하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2] 胡三省曰:傕,克角翻。“汜或氾”,音祀,又孚梵翻 호삼성이 말하길, (이)각은 반절로 "그"+"ㅏㄱ"(즉, "각")으로 읽고, "(곽)사 또는 범"은 "사"로 읽거나 또는 반절로 "부"+"ㅓㅁ"(즉," 범")"으라고 읽는 것이 좋다.[3] 정사 <곽사전>[4] 동탁 사후 사분오열할 뻔했던 구 동탁군을 다시 규합하고 장안을 탈환한 것만으로도 이각과 함께 군사적 능력은 있다고 봐야 한다.[5] 여포군과 굵직한 군벌들을 연전연승으로 이긴 걸 보면 군재면에서는 재평가받을 만하지만, 지휘관이 괜히 대장전 신청했다가 죽을 뻔한 건 만용에 가깝다. 그것도 하필 상대가 여포였던 게 불운이었다. 물론 자신의 무예에 대한 자신감과 여포에 대한 원한도 있었을 테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