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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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c5b356> 고구려 제8대 국왕 신대왕 | 新大王 | |||
신대왕릉으로 추정되는 산성하 전창 36호를 그린 도면. | |||
출생 | <colbgcolor=#fff,#1f2023>89년 | ||
즉위 | 165년 10월 (76세) | ||
고구려 국내성 (現 중국 지린성 퉁화시 지안) | |||
사망 | 179년 12월 (향년 90세) | ||
능묘 | 고국곡(故國谷)[1] | ||
재위기간 | 고구려 제8대 국왕 | ||
165년 10월 ~ 179년 12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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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 고(高) | ||
휘 | 백고(伯固) / 백구(伯句) | ||
부모 | 부왕 태조대왕?[2] / 차대왕?[3] / 고재사? 모후 미사 | ||
형제자매 | 3남 혹은 5남 중 3남? 형 고궁?[4], 고수성, 고막근, 고막덕 동생 고인고? | ||
배우자 | 고남무의 모후 | ||
자녀 | 5남? | ||
종교 | 무속 | ||
시호 | 신대왕(新大王) | }}}}}}}}} |
"크도다, 신대왕의 은덕이여!"
大哉! 新大王之德澤也!
신대왕이 선정을 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사면령을 내리자 사람들이 기뻐서 손뼉을 치며 외친 말.
大哉! 新大王之德澤也!
신대왕이 선정을 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사면령을 내리자 사람들이 기뻐서 손뼉을 치며 외친 말.
1. 개요
고구려 제8대 왕.휘는 백고 혹은 백구였으며, 왕호 자체가 새로운 군주이다. 제6대 태조대왕과 신대왕의 관계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태조대왕의 이복동생으로, 정사 《삼국지》에는 태조대왕 궁의 서자로, 《후한서》에는 태조대왕 궁의 손자이자 차대왕 수성의 아들로 나온다.
《삼국사기》에 있는 외모 및 성격에 대한 묘사를 보면 "용모가 영특하며, 성품이 어질고 너그러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시호로 보거나 삼국사기의 평가로 보거나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 군주임을 알 수 있다.
2. 생애
《삼국사기》에 따르면, 제7대 차대왕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정적 제거에만 몰두하는 등 폭정을 일삼자 연나부[9] 출신의 명림답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차대왕을 시해하고, 그의 동생인 고백고를 새로운 군주로 옹립하니 그가 바로 신대왕이었다고 한다. 차대왕 시절 태조대왕 때부터 시작된 정복 사업은 더욱 박차를 가했고 후한과 부여와의 쟁패에서 패배한 일도 없던 걸 보면, 차대왕이 무능해서 폐위된 게 아니라 이런 군주들이 흔히 그렇듯 군사적 능력은 만렙인데 정치력이나 친화력이 영 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당시 중국측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대왕이 승하하고 차대왕이 즉위한 시점은 《삼국사기》의 146년보다 25년 이른 121년이다. 이에 따르면 차대왕의 재위기간은 121년부터 165년까지 총 45년이 되며,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신대왕 세력이 어떤 이유로 차대왕의 재위 기간 중 약 24년을 태조대왕의 것으로 조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학계에서는 차대왕과 신대왕의 실제 출생 년도가 기록보다 훨씬 낮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신대왕은 태조대왕의 친동생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삼국유사》 <왕력>에 라는 기록이 있다. 차대왕의 치세때는 폭정을 피해 산골로 숨어 살았다가 명림답부가 차대왕을 시해하고 나서 백고를 안심시킨 후 왕위에 올렸다고 한다. 아무래도 친척 형이었던 차대왕에게 미움을 산 듯하다. 수성(차대왕)이 왕위를 욕심내자 백고(신대왕)가 은근히 간접적인 디스를 했던 적이 있었는데, 반대파에게 가혹한 차대왕이 이걸 그대로 넘어갈리가 없다고 판단했던 걸로 보인다. 왕위에 오른 나이가 《삼국사기》에서는 77세로 나오며, 친척 형인 차대왕처럼 매우 많은 나이에 옹립되었다.
신대왕이 사면령을 반포하다.
"과인은 외람되게도 왕의 친족으로 태어났지만 본디 임금으로서의 덕망이 없었다. 지난날 태조대왕께서 형제 사이에 우애있는 정치를 부탁했으나, 차대왕이 자손을 위해 물려준 계책을 자못 망가뜨렸다. 과인은 피해를 입을까 두렵고 안전하기가 어려워 여러 신료와 백성들을 떠나 멀리 도망쳐 숨었는데, 차대왕이 사망했다는 흉흉한 소식을 듣기에 이르니 다만 마음이 꺾여 매우 슬플 뿐이었다. 어찌 백성들이 즐거이 받들고 여러 대신들이 즉위하라고 권할 줄 생각했겠는가? 그릇되게도 보잘것 없는 몸으로 숭고한 자리에 있게 되니,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는 것이 깊은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도다. 마땅히 은덕을 베풀어 멀리 이르도록하여 마침내 여러 사람과 더불어 스스로 새롭게 함으로써 나라 안에 대사면을 베풀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신대왕조-
"과인은 외람되게도 왕의 친족으로 태어났지만 본디 임금으로서의 덕망이 없었다. 지난날 태조대왕께서 형제 사이에 우애있는 정치를 부탁했으나, 차대왕이 자손을 위해 물려준 계책을 자못 망가뜨렸다. 과인은 피해를 입을까 두렵고 안전하기가 어려워 여러 신료와 백성들을 떠나 멀리 도망쳐 숨었는데, 차대왕이 사망했다는 흉흉한 소식을 듣기에 이르니 다만 마음이 꺾여 매우 슬플 뿐이었다. 어찌 백성들이 즐거이 받들고 여러 대신들이 즉위하라고 권할 줄 생각했겠는가? 그릇되게도 보잘것 없는 몸으로 숭고한 자리에 있게 되니,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는 것이 깊은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도다. 마땅히 은덕을 베풀어 멀리 이르도록하여 마침내 여러 사람과 더불어 스스로 새롭게 함으로써 나라 안에 대사면을 베풀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신대왕조-
신대왕 시기, 정치의 대부분은 국상에 오른 명림답부가 처리했는데, 왕은 명림답부를 신뢰했으며 그가 명재상이라 신대왕의 치세는 대체로 평안했던 것으로 사서는 기록한다. 명림답부가 죽은 이후의 고구려는 신대왕의 친정 체제로 돌입했으나 기록에는 특별한 정치적인 치적이 없는 것으로 나와 있다. 그래도 당시 고구려의 좌보와 우보를 합쳐, 최고 관직인 국상을 만든 걸 보면 후대에 미친 영향이 아예 없는 건 아닌 듯하다.
재위 도중 후한과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뒀는데 그것이 좌원 전투이다. 명림답부가 죽은 이후 신대왕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승하했고, 이후 장남인 고남무가 왕위를 계승했다. 기록에 나오는 아들이 4명이나 되고, 그중 2명이 왕이 되었으나 동생인 연우가 제10대 왕이 되는 바람에 형인 발기가 이에 동의하지 않아서 형제 간 피비린내나는 골육상쟁이 벌어졌다.[10]
신대왕은 자식복이 영 애매한데, 슬하에 네 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차남 발기는 왕위 계승전에서 밀려나 적국(후한)으로 망명했고 아예 군대까지 이끌고 왔으며 3남 산상왕 연우는 왕위 계승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그래도 장남인 고국천왕 남무가 명군이었고, 막내인 고계수도 개념인이라 자식농사를 완전히 말아먹지는 않았다.
심지어 자식이 한 명 더 있었을 수도 있다. 《삼국지》에 따르면 차남인 고발기 말고도 숨겨진 리얼 첫째 고발기가 더 있었다는데[11], 이 녀석도 동생처럼 왕위 계승에서 밀려나자 후한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고국천왕의 동생 발기와 묘한 동질감이 느껴지는데, 실제로 여러 기록을 대조해 보면 숨겨진 첫째 고발기는 기록상의 오류로 추정된다. 왕위 계승 실패 후 적국 망명 스탭을 똑같이 밟은 "동명이인" 형제가 있을리 없다.
3. 신대왕의 계보 문제
태조대왕, 차대왕과 마찬가지로 고구려 초기 왕계 문제의 중심에 놓인 인물 중 한 명이다. 기년을 인상한 백제, 신라와 달리 고구려는 고고학적 건국 연대가 사서 기록과 거의 일치하기에 세 임금의 나이와 세대 문제에 대해 설이 분분하기 때문이다.[12]신대왕의 계보 문제는 고재사와 태조대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53년 대무신왕의 아들 모본왕이 시해되는데, 유리명왕의 아들 고재사는 자신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7살 아들인 태조대왕을 왕위에 올리고 아내인 부여태후가 섭정을 하였다.[13] 121년 동생/서자인 차대왕이 태조대왕에게서 왕위를 빼앗았고, 148년 차대왕은 태조대왕의 적자 또는 원자인 고막근을 죽이고 막근의 동생 막덕이 자살하며 차대왕의 아들 고추안이 태자가 되었다. 165년 차대왕이 죽고 태조대왕의 동생/서자/손자인 신대왕이 즉위하며, 신대왕은 179년 사망한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태조대왕-차대왕-신대왕의 나이는 모두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어 믿을 수 없음이 중론이다. 태조대왕은 47년생, 차대왕은 71년생, 신대왕은 89년생인데, 비정상적으로 늘어진 수명을 배제하더라도 셋의 나이 차이가 지나치게 많다. 셋의 아버지로 기록된 고재사가 태조대왕 즉위 당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고사했음을 생각해보면, 차대왕은 몰라도 신대왕은 결코 재사의 아들이 될 수 없다. 때문에 신채호는 중국 사서의 기록이 더 현실적이라 보고 차대왕과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서자라고 주장했다.
태조대왕의 실제 즉위년 문제도 있다. 태조대왕이 53년에 즉위했다는 삼국사기 기록과 달리, 학계에서는 98년 책성 순수 기사에서 중국이 당시 태조대왕을 "장성"이라 표현한 점을 들어 사실 태조대왕이 70년대~80년대 초 태생이며 실제 즉위 년도가 80년대~90년대 초라는 가설이 있다. 이 경우 모본왕부터 태조대왕까지 30~40년이라는 공위기가 생긴다. 또 77년 10월, "부여가 신기한 사슴과 토끼를 바쳤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태조대왕의 어머니가 부여인이라는 점을 들어[14] 실제로는 부여인인 태후가 이때 태조대왕을 즉위시킨 걸 은유했다는 가설도 있다. 이 경우 태조대왕은 71년생이 되므로 98년 중국이 "장성"이라 표현한 것이 맞아떨어지며(27세), 24년의 공위기가 생긴다. 즉위년 인하 가설을 사실로 가정할 경우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 전부 실제 나이를 수십 년은 인하해야 하며, 태조대왕을 배제해도 신대왕의 생년은 수십 년 인하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삼국사기 기록대로 차대왕이 24세, 신대왕이 42세 연하가 맞을 경우 차대왕은 95년생, 신대왕은 113년생이 된다.
현재 신대왕의 가계에 대한 학계의 정설은 노태돈 교수의 지적대로 태조대왕의 방계 친척 동생이라는 것이다.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아들이라면 설령 적자가 아닌 서자일지라도 훗날 고구려인들이 굳이 아들을 동생으로 고칠 이유가 없고,《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조-의 후반부와 -차대왕조-의 기사들은 지나칠 정도로 차대왕을 깎아내리고 있다. 따라서 신대왕은 아예 태조대왕의 직계 혈통이 아니며, 신대왕의 후손인 후대 고구려 왕들이 신대왕의 정통성을 높이기 위해 신대왕을 태조대왕의 동생인 것으로 얼버무려 신대왕 이전 잦았던 집단 지도 체제 및 복수 왕계, 방계 계승을 인위적으로 정리했을 가능성이 높다.[15]
《삼국사기》보다 수백 년 앞선 중국측 기록인 《후한서》에서는 태조대왕이 121년에 사망하고 뒤이어 수성이 즉위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 또한 고구려의 이 시기 삼국사기 기년 의심론에 근거를 더해준다. 다만 신대왕 이후 고구려 왕들이 동명성왕 주몽을 선조로 분명히 명시하고 있는 이상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친동생이 아닌 방계 친척 동생이더라도 촌수는 그렇게까지 멀지 않았을 개연성이 있다. 사서에 따라 태조왕통의 계보를 잇게 되면 제1대 동명성왕 - 제2대 유리명왕 - 고재사 - 제6대 태조대왕인데, 방계인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친척 동생이고 주몽의 후손이라면 태조대왕의 6촌 동생이 된다. 현대 한국에서도 4촌인데 40살 가까이 차이 나는 경우가 있는 만큼 6촌 형제 사이인 태조대왕과 신대왕의 나이 차가 40살인 경우는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16][17]
다만 여기서 광개토대왕릉비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러 란 부분을 놓고 중간에 빠진 고구려왕이 있었다고 하면서 삼국사기 기록[18]에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한성백제박물관 학술 컨퍼런스 및 여호규 교수의 고구려 초기 정치사 등을 비롯한 학계에서는, 그것이 광개토대왕 이전 임금들을 단순히 센 것으로 보고 큰 의미는 부여하지 않고 있으므로 여기서 꺼내들기는 어렵다.
애초에 고구려 또한 복수 왕계, 복수 왕계끼리의 생전 교대, 방계 계승을 감춘 백제 및 신라와 마찬가지로[19] 유리왕계 자체가 주몽계와 별도였을 가능성이 높은 이상, 여율, 재사의 가계도를 놓고 억지로 삼국사기상 계보와 연도를 짜맞추려 하는 건 자체로 무리한 시도가 될 수 있다.
노태돈, 신형식, 여호규 교수 등을 비롯한 학계에서 현재까지 신빙성 있게 내세우는 사항은 1. 주몽계와 유리(=여달)계는 실은 별도 왕계일 가능성이 높다. 2. 훗날 고구려의 일원화된 직계 계승 조작으로 광개토대왕릉비 및 삼국사기 기록에서 삭제된 고구려왕 내지는 집단지도체제 내부 지도자가 있다. 2-1. 그 중 하나가 고구려 왕실측 공식 기록에서는 삭제되었으나 중국측에 사신으로 간 고구려 귀족에게서 누출된 여율이다. 2-2. 여율은 주몽계였을 것이며, 도절, 해명 또한 유리(=여달)왕 혹은 유리계와의 권력 투쟁에서 져서 밀려난 인물들이었을 가능성이 있다.[20] 3.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 모두 같은 주몽계다. 4. 신대왕은 태조대왕, 차대왕의 방계 형제다. 이 정도가 전부다.
일단 신대왕의 정확한 가계가 무엇이든, 후대 고구려/왕조가 수명의 비현실성을 감수하고 유리명왕-고재사-태조대왕 & 차대왕 & 신대왕으로 족보를 편찬하게 만들 정도로 모본왕 사후(53년)부터 신대왕 즉위(165년)까지 고구려 왕위 계승이 상당한 미궁에 있었음을 보이는 인물이다. 그래도 안정적인 직계 계승 왕조 확립이라는 측면에서는 4세기 중반 즉위 백제 근초고왕, 4세기 후반 즉위 유력 신라 나물 마립간보다 훨씬 빠른데, 이 또한 고구려가 백제나 신라보다 상당히 스타트가 빠르고 국력도 강했음을 보이는 징표기도 하다.
4. 평가
신대왕은 시조묘 제사를 통해 추락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할 수 있는 의식을 치루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신대왕대 고구려는 연나부와 소노부와의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안정적인 정국 운영을 주도해 나갈 수 있었던 왕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21]《동국통감》은[22] 사람들에 추대하여 왕위에 올랐으나 명림답부를 처벌하지 않은 것은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신대(新大)는 난을 피하여 도망나갔으나, 나라 사람들이 마음이 쏠려 그를 추대하여 왕위에 세웠으니, 의당 답부(答夫)가 시역(弑逆)한 죄상을 먼저 밝혀서, 대의(大義)를 폈어야 할 것인데, 자기를 끌어다 세워준 공을 덕으로 생각하여, 도리어 그를 총애하여 임용하였습니다."
5. 신대왕의 왕호 성립 시기
태조대왕(太祖大王)-차대왕(次大王)-신대왕(新大王)의 왕호가 완전히 성립된 시기가 보장왕 대에 들어서라는 주장이 있다.2024.06. 이규호 7세기 고구려의 왕호 정비와 연개소문왕의 장지가 전해지고 있는 것은 16대 고국원왕까지이다. 장지명 왕호는 고국천왕의 분주왕호가 國壤, 고국원왕의 분주왕호가 國罡上王으로 되어 있으면서 각각 故國川原과 故國之原으로 되어 있음에 평양 천도 이후 정리된 왕호임을 알 수 있다. 즉, 壤은 川으로 罡上은 原으로 바뀌게 된 것인데, 평양 천도 이후의 왕인 양원왕과 평원왕의 분주왕호에 여전히 罡上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후대에도 여전히 통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왕비에는 1~3대왕호를 각각 鄒牟王, 孺留王, 大朱留王이라 하고 있다. 이는 당시까지도 휘호형 왕호를 쓰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삼국사기에서 대무신왕의 휘는 무휼이라 전하지만, 분주왕호에 포함된 解朱留가 4, 5대왕의 휘호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대주류왕도 휘호형 왕호라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평양 천도 이전까지는 휘호형 왕호와 장지명 왕호를 주로 사용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반면 4대왕인 민중왕과 5대왕인 모본왕은 분주왕호가 전해지지 않는다. 이들은 민중원과 모본원이라는 장지 관련 전승을 갖고 있는데, 原은 평양천도 이후 정리된 장지명 왕호에 보이는 표현이다. 따라서 민주왕과 모본왕의 장지 전승은 평양 천도 이후에 정리된 내용으로, 그 왕호 역시 그러한 전승에 기반하여 정리된 왕호일 것이다.[23] 그러면 정리 이전의 왕호는 무엇이었을까. 1~3대왕이 휘호형 왕호를 썼다는 점, 분주왕호가 휘호와 동일한 경우 분주왕호를 기록하지 않았다는 선행연구를 참고하면 이들도 본래 휘호형으로 解色朱王, 解(愛)婁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보면 고구려의 첫 다섯 왕은 휘호형 왕호였던 것이 된다.
한편 장지명 왕호로서 가장 이른 것은 고국천왕이다(國壤王). 그 이후 왕호는 광개토왕 이전까지 장지명 왕호로 이어진다. 이러한 흐름 속에 초기의 3대왕호는 휘호와 장지명 왕호 사이에 위치하면서도 어디에도 분류되지 않는 사례이다. 그러한 까닭에 기존에는 이들을 대왕형 왕호로 구분한 다음 國祖王, 次王, 新王이라는 분주왕호를 가졌을 것이라 이해했다. 그런데 장지가 전함에도 장지명으로 전해지지 않는 왕이 있으니, 바로 고국천왕의 아버지인 신대왕이다.
신대왕의 장지는 故國谷으로, 명칭으로 보아 장지 전승은 평양 천도 이후에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대왕 장지의 본래 명칭은 國谷이었을 것이고, 왕호는 그에 기반한 國谷王으로 불리다가 천도 이후 故國谷王으로 바뀌었으리라 생각해볼 수 있다.[24] 하지만 그의 본문왕호는 장지명 왕호와 상관없는 신대왕이며, 분주왕호도 전해지지 않는다. 이는 애초에 장지명 전승이 있었음에도 장지명을 왕호로 삼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즉, 본래 별도의 왕호가 있었는데, 그것이 평양 천도 이후 언젠가 신대왕이라는 왕호로 정리되었다는 것이다.
앞서 본 바와 같이 1~5대 왕호가 본래 휘호형이었다고 하면, 첫 장지명 왕호인 9대 고국천왕의 왕호 이전 장지가 전해지지 않는 왕들이 장지명 왕호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기왕의 연구에서 지적한 것처럼 분주왕호와 휘호가 동일한 경우 분주왕호를 생략했다면, 추모왕 대부터 전해져온 휘형 왕호의 전통과 관련시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부여나 백제, 신라가 휘호형 왕호를 썼던 점으로 비추어 보아 한국 고대의 국가들은 휘호형 왕호가 원초적인 형태였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 역시 건국 초의 왕들이 그와 같다는 점에서 휘호형 왕호가 본래의 왕호 제정방식이었을 것이다. 장지가 전해지지 않는 태조대왕과 차대왕도 궁과 수성이라는 휘는 전하고 있으므로, 장지명 왕호의 등장 이전에는 휘를 사용하여 왕호를 부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장지명이 전함에도 왕호로 쓰지 않았던 신대왕 백고를 더하면 이 셋의 본래 왕호는 휘호형이었다고 생각된다. 즉, 3대왕의 본래 왕호는 宮王, 遂城王, 伯固王이었을 것이다.[25] 특히 이들은 한군현과의 투쟁을 주도한 왕들로서 당대 고구려인들에게 기억된 인물들이었다. 그러므로 次王, 新王과 같은 구체적이지 않은 왕호를 부여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26]
그럼에도 3명의 대왕 가운데 신대왕은 독특한 편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고구려 왕계에서 신대왕이 지닌 역사적 위치를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 가-1. [신대왕] 2년(166) 봄 정월, 令을 내려 말하기를 …國人이 사면령을 듣고 환호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손뼉을 치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크고 넓구나 새로운 대왕의 덕택이여”라고 하였다…[명림]답부를 國相으로 삼고 爵을 더하여 沛者로 삼아, 내외의 병마를 관장하게 하고 梁貊의 부락을 겸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左右輔를 고쳐 국상으로 삼은 것은 이것이 시초이다.
- 가-2. [신대왕] 3년(167) 가을 7월, 왕이 졸본에 행차하여 시조묘에 제사 지냈다.
위의 사료에서 나와 있듯 신대왕 대에는 새로운 정치적인 행보가 확인된다. 기존의 左右輔를 개편하여 國相을 두었다든지, 처음으로 시조묘 제사를 시행한 기록 등은 이 무렵 고구려 정계 내에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최근에는 앞서 살핀 신대왕의 장지 故國谷에 주목하여, 신대왕 대부터 집안으로의 천도를 시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등장하고 있다. 또한 현전하는 신대왕 이후의 왕계는 그의 후손들로서, 멸망 시까지도 왕계의 변동 없이 이어지고 있음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신대왕의 즉위와 그의 치세는 당시 고구려인들에게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던 것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가-1에는 신대왕의 사면령에 대해 당시 國人들은 ‘新大王의 덕택’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국인들이 칭한 대왕을 신대왕의 생시 칭호라 보기도 하지만, 이는 차대왕의 폭정을 뒤집고 즉위한 신대왕에 대한 당대인들의 칭송으로서 ‘새로운 대왕’이라는 의미를 지닌 일반적 표현이라 생각된다. 어찌되었든 당시 고구려인들은 신대왕을 대왕이라고 부를 만큼 각별한 기억을 가진 존재로 여기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태조대왕의 분주왕호인 국조왕은 언제 형성되었는가를 확인해보자. 국조왕이라는 명칭은 그가 오래 살았다는 기록이 있기에 ‘나라의 할아버지 왕’이라는 의미로 붙여졌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태조대왕을 비롯한 3대왕의 수명이 비정상적으로 길기 때문에 그대로 신뢰하기는 어렵다. 관련하여 동천왕의 휘인 位宮이 주목되는데, 그의 휘는 선조인 宮을 닮아서 붙인 것이라 하였다. 당시 고구려인들에게 궁은 범상치 않은 행적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에 동천왕 대에 종묘를 정비하고 국조왕이라는 새로운 왕호를 올림으로서 왕실의 계승성과 권위를 재확인하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이들에게 대왕호를 붙이게 된 배경으로는 고구려와 수가 1차례 전쟁을 치룬 뒤라는 점이 고려되었다. 즉 당시 고구려는 오랜 분열을 끝내고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와의 전쟁을 경험한 상태였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국난 극복의 이미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전 시기 한나라와의 전쟁을 주도했던 3대왕에 주목했다는 것이다.
영양왕 재위기 수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3대왕의 이미지가 필요했다는 설명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다만 현전하는 3대왕의 행적이 영양왕 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하면, 당시에 3대왕을 모두 대왕으로 올릴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태조대왕의 뒤를 이은 차대왕은 선왕인 태조대왕으로부터 정상적인 왕위계승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27] 차대왕 역시 명림답부에게 살해당하는 등, 왕위계승 과정이 순탄치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영양왕 재위기 고구려가 수와의 전쟁을 이어가는 과정을 살펴보면 王弟인 建武(영류왕)는 평양성 전투에서 활약하고 있다. 신집보다 후대의 일이기는 하지만, 이는 당시 고구려군 내에서 王弟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신집 편찬 당시 이전의 역사들이 정리되면서 알게 되었을 3대왕의 행적을 고려할 때, 건무의 모습은 한과의 전쟁을 주도한 수성의 모습으로 비춰질 가능성도 높았다. 영양왕 입장에서는 3대왕 모두를 추앙함으로써 드러나게 될 수성의 행적이 정치적 부담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침 고구려는 6세기 중반 왕위계승 분쟁을 크게 겪은 바 있기에[28] 신집 편찬 과정에서 다시금 그러한 분쟁을 상기하는 일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한편 당시 수와의 전쟁을 주도했던 영양왕과 영류왕(건무)의 왕호에 대해서도 이론이 있다. 하나는 嬰陽王, 삼국유사에 보이는 영류왕의 이칭인 武陽王, 그리고 보장왕의 아버지인 大陽王이 형제관계이면서 ‘陽’을 공통적으로 포함하는 왕호를 가지고 있음에 주목하여 휘호형 왕호로 분류한 것이다. 그러나 대양왕을 제외하면 두 왕과 휘가 별도로 전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휘호형이라 보기 어렵다. 사실 이들을 휘호형이라 분류한 것도 휘를 알 수 없는 대양앙을 같은 유형의 왕호로 이해하기 위한 과정에서 제기된 것에 가깝다.
둘째는 장지명 왕호로 보는 견해이다. 이에 따르면 陽에는 강의 북쪽을 가리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陽旺은 강 북쪽에 묻힌 왕들을 의미하는 것이라 보고, 대동강 북안의 강서 3묘에 주목하였다. 그런데 고구려에서는 같은 입지 조건이라도 강서 3묘보다 지리적으로 떨어져 매장된 왕들의 능을 구분하여 불렀던 집안 시기의 경험이 있다. 그에 비하면 강서 3묘는 같은 묘나 다름없는데, 여기에 각각 표현을 달리하는 장지명 왕호를 붙였다고 보기에는 어려울 듯하다.
그런데 영양왕, 영류왕에게는 현전하는 왕호 이외에 다른 왕호가 전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 나-1. [추고천황] 13년(605) 여름 4월 辛酉 朔에 天皇이 皇太子, 大臣 및 諸王, 諸臣에게 조서를 내려 함께 발원문을 내라 함으로써 처음으로 구리와 비단으로 장육불상 각 1구를 만들라 하였다. 이에 鞍作鳥에게 명하여 불상을 만드는 공인으로 삼았다. 이때, 高麗國 大興王이 聞日本國 天皇이 불상을 만든다는 것을 듣고 황금 3백냥을 보냈다.
- 나-2. [보장왕 원년(642)] 왕의 휘는 臧인데, 나라를 잃은 까닭에 시호가 없다. 建武王의 동생 大陽王의 아들이다. 건무왕 재위 25년째에 盖蘇文이 그를 죽이고 臧을 세워 왕위를 잇게 하였다.
- 나-3. 조부 岑은 東部 (소속으로) 建武太王에게 中裏小兄을 받아 垧事를 맡았다.
나-1은 605년 일본에서 장육불상을 만들자 고려국의 대흥왕이 황금 3백냥을 보냈다는 기사이다. 여기에 보이는 고려국 대흥왕은 영양왕을 가리키며, 605년은 영양왕 16년에 해당한다. 이로 보아 당시 고구려 영양왕은 대외적으로 대흥왕으로 불리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대흥왕이라는 왕호는 어떤 유형으로 볼 수 있을까. 삼국사기에는 영양왕의 휘를 元 또는 大元이라 하였다. 언뜻 보기에는 대흥왕이 영양왕의 휘인 대원을 와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나, 元과 興은 의미상 통하는 점을 찾기 어려워 같은 뜻으로 사용한 것 같지는 않다. 물론 현전하지 않는 영양왕의 다른 휘가 大興일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대흥은 결국 ‘크게 흥하다’라는 뜻이기 때문에, 훈적을 나타내는 왕호로도 분류해볼 만하다.
나-2와 3은 영류왕의 이칭과 관련된 정보를 주는 기록들이다. 이들 기록에서는 영류왕을 건무(태)왕이라 하여 영류왕의 호인 건무를 사용한 휘호형 왕호로 부르고 있다. 특히나 나-3은 영류왕으로부터 멀지 않은 시기를 살았던 고구려인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는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고 생각된다. 이에 의하면 영류왕은 고구려인들에게 건무왕이라는 휘호형 왕호로 불렸던 셈이 된다.
즉, 영양왕에게는 대흥왕이라는 훈적형 왕호가 사용된 흔적이 있고, 영류왕에게는 건무왕이라는 휘호형 왕호가 사용된 흔적이 있는 셈이다. 먼저 7세기 당시 휘호형 왕호로서 왕을 부르던 모습은 이전 시기 왕호들에서 휘호형 왕호가 있었던 것과 연결지어 볼 수 있다. 특히 훈적이나 장지명 왕호는 해당 왕이 사망하고 난 이후 부여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휘호형은 왕의 생시에 부르던 방식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
만약 대흥왕을 훈적형 왕호로 본다면 생시에 훈적형 왕호가 쓰인 증거가 될 수도 있어 보인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전 시기 왕호에서도 생시에 훈적형 왕호를 쓴 것으로 보이는 사례가 있다. 양서 고구려전에는 고구려왕 安이 등장하는데, 이때 고구려왕은 광개토왕을 가리킨다. 마침 광개토왕비에 기록된 그의 정식 왕호는 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으로 ‘장지명+훈적+미칭왕호’로 구성되어 있으며 平安은 廣開土境과 함께 훈적에 해당한다. 또한 충주고구려비에는 고려태왕인 祖王이 나오는데, 이때의 고구려왕은 장수왕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다수이다. 그렇다면 祖王은 장수왕의 훈적으로 여겨지는 長壽의 다른 표현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이 타당하다면 당시 고구려에서는 왕의 생시에 휘호형뿐만 아니라 훈적형으로도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다만 훈적형 왕호의 등장이 4세기 후반 광개토왕부터 시작되었고, 훈적이라는 것도 그 왕을 그렇게 부를만한 특별한 업적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모든 왕에게 생시부터 불렀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영양왕의 경우 대흥왕이라 불린 16년 당시는 이미 1차 대수전쟁을 막아내고, 신집을 편찬하는 등의 대내외적 업적을 쌓은 이후이기 때문에 훈적형 왕호로 불릴 정당성을 확보했으리라 본다.
휘호형 왕호의 역사성이나, 사료로서 가장 당대성을 강하게 띄는 고을덕 묘지명의 표현을 고려하면 생시에는 왕을 휘호형으로 부르는 것이 보편적이었을 것이다. 광개토왕의 경우를 통해 알 수 있듯 고구려 왕호의 정식 구성은 ‘장지명+훈적+미칭왕호’였고, 문헌기록에는 이중 일부만이 남아있다. 현재 훈적형 왕호로 분류되는 왕들의 행적을 감안한다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사후에 추증되는 방식으로 부가되었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면 건무왕의 본문왕호인 영류왕이라는 왕호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榮留라는 의미 자체는 ‘영화가 머무르다’ 정도로 해석되므로, 영류왕은 훈적형 왕호로 이해될 수 있다. 영류왕은 즉위 이전부터 큰 전공을 쌓았고, 죽음의 원인이 된 연개소문의 정변을 제외하면 정치적으로 실정을 한 흔적도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없다. 훈적으로서 칭송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고 짐작된다.
그럼에도 그간 영류왕호가 훈적형으로 분류되지 않았던 것은 그가 연개소문에 의해 시해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구려사 전체를 놓고 보면 영류왕 이전에 시해된 왕이 그를 이유로 왕호의 격하가 이루어진 사례는 찾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고구려의 왕으로서 시해된 것이 분명한 왕은 모본왕, 차대왕, 봉상왕 셋인데, 이들에게 시해당했다고 하여 왕호를 부여하지 않거나 나쁜 의미를 지닌 왕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들도 고구려 왕계를 계승한 왕으로서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따라서 영류왕이라는 왕호는 어찌되었든 훈적형 왕호로 분류될 만하며, 영류왕 재위 당시에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영양왕과 영류왕의 휘호형 왕호는 大元王, 建武王을 썼고, 훈적형 왕호는 大興王, 榮留王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영양왕과 무양왕은 언제 붙여진 것일까? 이는 역시명칭상으로 유사한 왕호인 大陽王과의 관련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왕위에 오르게 된 보장왕은 자신의 아버지를 대양왕으로 올리면서도, 시해된 영류왕 역시도 같은 계통의 왕호에 포함시킨 것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변화의 바탕에는 선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의 정변과 그 이득을 본 보장왕의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다-1. [모본왕] 6년(53) 겨울 11월, 杜魯가 그 군주를 시해하였다. 두로는 慕本人으로 왕을 좌우에서 모셨는데,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울었다. 누군가 말하기를 “대장부가 어찌 우는가?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를 어루만지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라고 하였다. 지금 왕의 학정을 행함으로서 사람을 죽이니 백성의 원수이다. 너는 그를 도모하라.”고 하였다. 두로가 칼을 숨기고 왕의 앞으로 나아가니 왕이 그를 끌어다 앉혔다. 이에 칼을 뽑아 그를 해쳤다. 마침내 慕本原에 장사지내니, 호를 慕本王이라 하였다.
- 다-2. [차대왕 20년(165)] 겨울 10월, 椽那 皀衣 明臨荅夫가 백성이 견디지 못함을 이유로 왕을 시해하니, 시호를 次大王이라 하였다.
- 다-3. [봉상왕 9년(300)] 8월, 왕이 국내의 남녀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궁실을 수리하게 하였다. 백성들이 음식이 부족하여 役이 곤란해져, 이로 인해 流亡하였다. 창조리가 간하여 말하기를…[창]조리는 왕이 고치지 않을 것을 알고, 또 해가 미칠까 두려워 [관직에서] 물러나서 군신과 함께 모의하여 그를 폐하고 乙弗을 맞이하여 왕으로 삼았다.
- 다-4. [영류왕 25년(642)] 겨울 10월에 개소문이 왕을 시해하였다.
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에서 정변을 일으키는 경우, 대부분은 그에 대한 명분이 존재한다. 고구려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왕위를 둘러싼 정변들에서 그 명분을 확인할 수 있다. 라-1~3은 이를 잘 보여준다. 모본왕은 포악한 성격으로 인해 두로에게 시해당했고, 차대왕은 백성이 견디지 못한다는 이유로 명림답부에게 시해당했으며, 봉상왕은 무리한 役事를 일으켜 백성을 곤궁하게 한다는 이유로 창조리에게 폐위당했다. 물론 이런 사례들은 정변을 성공시킨 자들이 제시한 명분이기 때문에 실제와는 얼마간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변에 있어서 그에 대한 합당한 명분을 제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에 반해 영류왕의 경우는 조금 다른데, 그를 시해한 연개소문이 영류왕의 폐위를 도모함에 있어 별다른 명분을 확인할 수 없다. 오히려 연개소문의 성격이 흉악하고 무도하였으므로 여러 대인이 왕과 논의하여 연개소문을 제거하려고 했음을 볼 때, 제거의 명분은 연개소문이 아니라 영류왕이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은 단순히 연개소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당시 고구려 내부의 정치투쟁에 대한 결과로 읽힐 수 있다.
따라서 연개소문의 경우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여 왕을 옹립하고 권력을 잡았지만, 왕을 시해하는 과정에서 그에 합당한 명분을 확보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29] 이럴 때 권력을 잡은 세력은 왕을 교체해야 하는 명분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변 전후 고구려와 당의 외교관계 변화를 살펴보면, 보장왕과 연개소문은 정권을 잡은 후 영류왕의 정치적 행보를 문제삼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그들 입장에서는 영양왕 대부터 이어온 자주적 기조를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명분을 만들어 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전대의 통일왕조였던 한과의 투쟁을 이끈 宮王, 遂城王, 伯固王을 재조명하게 되었을 것이다.
당시 연개소문과 보장왕 정권이 이들 세 왕에 주목한 것은 단순히 통일된 중원왕조와의 투쟁으로 인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들 셋의 관계와 행적, 왕위계승 과정이 영양왕부터 대양왕까지의 그것과 매우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대외적인 활동상에서 전기의 3大왕은 漢과의 관계를 두고, 후기의 3陽왕은 수당과의 관계를 두고 변화를 보인다. 태조대왕-차대왕-신대왕의 치세가 대체적인 흐름 속에서 漢에 대한 강경-유화-강경의 흐름으로 이어졌다면, 영양왕-영류왕-보장왕의 치세도 수당과의 관계가 강경-유화-강경의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유화적인 자세를 취했던 차대왕과 영류왕이 즉위 이전에는 전쟁 수행 과정에서 공적을 쌓은 인물들이었던 점까지 동일하다.
대내적으로도 이들의 관계는 유사한 점이 찾아진다. 3대왕은 同母형제는 아닐지라도 형제관계로서 기록에 남아있고, 3양왕 역시 영류왕이 영양왕의 이복동생이라는 점에서 同母형제는 아니다. 또한 차대왕과 영류왕은 신대왕, 보장왕과 지지하는 세력을 달리했는데, 차대왕 대에는 비류, 관나, 환나가 득세했다가 연나 출신에 의해 제거되었고, 영류왕 대에는 명확하지는 않으나 대신들과 연개소문 일파의 정치적 입장이 달랐던 것이 발단이 되어 연개소문에 의해 제거되었다.
또한 정변을 일으켜 왕을 시해하고 새로운 왕을 세운 세력이 왕과의 혈연적 관계를 맺어간다는 사실도 가벼이 넘길 수 없다. 명림답부가 속했던 연나부가 신대왕 대를 시작으로 왕실과의 혼인관계를 맺었음은 사료에 여러 차례 등장하며, 연개소문 가문 역시 안승의 출자와 관련하여 보장왕의 외손이자 연정토의 아들이라는 내용으로 보아 왕실과의 혼인관계를 상정할 수 있다.
통일 중원왕조에 대해 대외적으로 강경한 태도를 보였던 선대 3왕의 행적에 더해, 내부적인 정변의 명분을 만들 필요가 있었던 연개소문과 보장왕은 3대왕 사이의 관계, 그들의 왕위계승 과정에 주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3대왕의 행적이 그러했는데 찾다보니 우연히 3양왕의 행적과 유사했는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3대왕의 행적을 3양왕에 맞도록 개변했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적극적인 근거가 있지 않는 한은 전자 쪽이 기록을 존중하는 측면에서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정권을 잡은 연개소문 등은 국제정세를 바탕으로 삼아, 자신들은 선대왕과 명림답부의 역사적 위치와 등치시킴으로서 대당관계를 비롯한 정권을 주도할 동력을 마련할 수 있었다. 더불어 영류왕을 차대왕과 등치시킴으로서 정변의 정당성을 찾는 한편, 그의 생전 업적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반대파를 무마하려고 했을 것이다. 이에 그때까지 휘호형 왕호로 전해지던 3대왕의 왕호를 현전하는 형태로 바꾸게 된 것으로 보인다. 대왕호를 올림으로서 세 왕의 훈적을 높이면서도 ‘다음 대왕(次大王)’과는 다른 ‘새로운 대왕(新大王)’의 새로운 정치를 펼치겠다는 의미를 담음으로서 왕호의 정리를 시도했다고 추정된다. 그 다음 보장왕은 연개소문과 함께 재위 2년에 자신의 아버지를 대양왕으로 삼으면서 이전의 두 왕에게도 陽王의 호를 올림으로서 3대왕의 선례에 비춘 3양왕의 칭호를 성립시켰을 것이다. 수성왕을 차대왕으로, 백고왕을 신대왕으로 바꿈으로서 영양왕 다음 왕의 실정을 새로운 왕이 유능한 신하와 함께 바로잡는다는 구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6. 기타
- 태조대왕을 77년 부여 기사와 98년 책성 순수 기사 당시 '장성'이라 표현된 점을 들어[30] 71년생으로 잡을 경우, 사서의 기록(49년)과 24년의 차이가 난다. 따라서 태조대왕과 24세 연하인 차대왕은 95년생, 89년생인 신대왕은 113년생이라 간주할 수 있다. 그리고 태조대왕은 중국 기록대로 121년에 사망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종합하면 71~121년(50세), 95~165년(70세), 113~179년(66세)가 된다. 태조대왕은 생몰년을 인하하면 삼국사기와 달리 장수한 건 아니지만, 차대왕과 신대왕은 확실히 장수했다. 60대 이상의 장수가 흔한 고구려 후기와 달리 고구려 전기에는 30~40대 정도로 수명이 길지 않은 고구려 왕들이 많았는데, 차대왕과 신대왕은 초기 고구려 왕을 기준으로 하면 장수한 드문 사례이다. 나이를 알 수 있는 동천왕과 중천왕이 39세, 46세에 사망한 이후 고구려 중기 고국원왕이 60~70대 산 이후(심지어 고국원왕은 전사했다) 소수림왕~광개토대왕까지 20~40대로 단명하다 장수왕이 97세 산 것이 교차검증되고, 문자명왕 80대 추정, 안장왕 33세 이상, 안원왕 47세 전후, 양원왕 20대 이상, 평원왕 33세 이상, 영양왕 59세 이상, 영류왕 60세 이상, 보장왕 50대 이상으로 수명이 극과 극을 오가는 양상을 보인다. 고구려 왕조는 신대왕의 후손에게 이어지기 때문에, 신대왕 이후 장수한 왕들은 대체로 신대왕의 장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고 볼 수 있다. 대소왕이 의붓동생인 동명성왕의 손자(또는 증손자)인 대무신왕에게 죽을 때까지 살아있었고, 대소왕의 막내 동생인 갈사왕이 이후 갈사국을 세워 손녀가 대무신왕의 차비 해씨가 된 보아 둘은 장수한 것이 확실하며, 고씨와 친족인 백제 부여씨도 살해당하는 일이 줄어든 후기에는 60~70대 왕들이 여럿 출몰하는 것으로 보아 부여-고구려-백제 왕가는 특유의 장수 유전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극단적으로 단명과 장수를 오가는 편이긴 했지만. 근친혼 누적이 적을 때는 장수하는데 근친혼 누적이 심해질수록 점점 수명이 줄어드는 현상이 반복되는 신라/왕조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다.
- 고고학적으로 백제 하북위례성으로 비정되는 압록강 이남 양식의 고구려 적석총 묘제가 임진강 유역에 처음 출몰하는 시기는 기원후 2세기 후반~3세기 초반으로, 신대왕 ~ 산상왕 재위기와 겹친다. 묘제 형성기를 2세기 중후반으로 놓고 보면 신대왕 혹은 산상왕 즉위기 당시 일과 유관하다고 볼 수는 있겠다. 백제 왕통을 양분하던 초고왕계-고이왕계는 온조시조설과 비류시조설이라는 각자 독자적인 시조 전승이 있었는데, 어쨌든 '부여'란 공통점은 있기에 촌수가 아주 먼 부계 친족간으로 볼 개연성은 있다. 신대왕 이전까지만 해도 고구려 또한 신라 6부가 그랬듯이 5부 부족연합 체제였기 때문에 신라 성골-진골이 그랬듯이 왕위계승권을 가진 '친족'의 범위가 매우 넓었던 시절이라 가까운 친척은 아니라도 신라 3성 족단처럼 해성(解姓) 족단으로는 분류할 수 있을 듯하다.[31] 압록강 이남 양식이라는 점 때문에 백제 이탈 세력이 계루부가 아니라 관노부라는 논란도 있기는 하나 그걸 감안해도 소국 하나 세울 정도의 세력이 대규모로 이탈했다는 점은 아직 5부 양식을 탈피하지 못했던 고구려에게 상당한 부담이 되었을 텐데, 신대왕 ~ 산상왕 재위기에 중앙집권화가 가속화되었던 것도 이런 백제 이탈과 유관했을 가능성도 있다. 아이러니한 점은 고구려가 부여에서 이탈한 세력이 세운 나라라서 말기까지도 부여가 고구려를 무시했고 고구려가 부여의 기원을 부정했듯이, 백제 또한 고구려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고구려가 백제를 무시하고 백제가 고구려의 기원을 부정하는 양상을 보이며, 양국관계가 일관적으로 나빴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삼국시대 삼국 중에서 서로가 서로의 나라 왕을 다 죽인 경험이 있는 나라는 고구려-백제뿐이라는 점만 보더라도 역으로 친족이라서 사이가 좋을 수 없었던 고구려-백제 관계의 일면을 보인다.
7. 《삼국사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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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folding [ 표(表) / 잡지(雜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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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신대왕 본기>
一年冬十月 신대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一月 대사면을 행하고 명림답부를 국상으로 삼다.
三年秋九月 시조 사당에 제사를 지내다.
三年冬十月 졸본에서 돌아오다.
四年 현도에 속하기를 청하다.
五年 현도 태수 공손도를 도와 부산적을 정벌하다.
八年冬十一月 명림답부의 계책으로 후한의 군대를 물리치다.
十二年春一月 신하들이 태자 책립을 건의하다.
十二年春三月 남무를 태자로 삼다.
十四年冬十月 일식이 일어나다.
十五年秋九月 국상 명림답부가 죽다.
十五年冬十二月 신대왕이 승하하다.
8. 대중매체에서
9. 둘러보기
고구려의 왕자 [[틀:고구려의 왕자/동명성왕 ~ 봉상왕|{{{#!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ackground: #670000; border-radius: 3px; font-size: .8e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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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왕실의 계보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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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제 | 하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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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모수 | 유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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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왕실 | 1대 동명성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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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유리명왕 | 비류 | 온조 백제 왕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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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절 | 고해명 | 왕녀 | 3대 대무신왕 | 4대 민중왕 | 고여진 | |||||||||||||
고호동 | 5대 모본왕 | 고재사 | ||||||||||||||||
고익 | 6대 태조대왕 | |||||||||||||||||
7대 차대왕 | 고막근 | 고막덕 | 8대 신대왕 | 고인고 | ||||||||||||||
고추안 | 9대 고국천왕 | 고발기 | 10대 산상왕 | 고계수 | ||||||||||||||
고박위거 | 11대 동천왕 | |||||||||||||||||
12대 중천왕 | 고예물 | 고사구 | ||||||||||||||||
13대 서천왕 | 고달가 | 고일우 | 고소발 | 공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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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봉상왕 | 고돌고 | |||||||||||||||||
15대 미천왕 | ||||||||||||||||||
16대 고국원왕 | 고무 | 고림 | ||||||||||||||||
17대 소수림왕 | 18대 고국양왕 | |||||||||||||||||
고강 | 19대 광개토대왕 | |||||||||||||||||
20대 장수왕 | 고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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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다 | 고승우 | 공주 | 고승천 | |||||||||||||||
21대 문자명왕 | ||||||||||||||||||
22대 안장왕 | 23대 안원왕 | 고안학 | ||||||||||||||||
24대 양원왕 | 왕자 | |||||||||||||||||
25대 평원왕 | ||||||||||||||||||
26대 영양왕 | 27대 영류왕 | 평강공주 | 대양왕 | |||||||||||||||
고환권 | 28대 보장왕 | |||||||||||||||||
고복남 | 고임무 | 고덕남 | 고덕무 | 공주 | ||||||||||||||
부흥 보덕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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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성하 전창 36호 추정[2] 정사 《삼국지》[3] 《후한서》[4] 《삼국사기》[5] 산상왕 때 왕위계승분쟁을 일으켰던 발기와 동일인물인데, 김부식이 산상왕에 대응되는 중국 측 기록의 이이모를 고국천왕으로 착각해 별개의 인물로 적혔다.[6] 차남.[7] 삼남.[8] 사남.[9] =절노부=연내부=제나부=북부[10] 장자계승 원칙은 선왕의 장자가 임금이 되는 것이 원칙으로서 사실 고국천왕에게 아들이 없는 상황이라면 어차피 방계라는 점에선 똑같은 그 밑의 동생 누가 계승하더라도 장자계승 원칙을 어기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당연한 얘기로 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긴 형이 기분 좋을 리가 없어 분란이 발생한 것이다.[11] 이렇게 되면 고국천왕 고남무가 첫째가 아니라 둘째가 되며 형도 발기, 첫째 동생도 발기... 발기 패밀리가 된다.[12] 백제는 2세기 후반 임진강 유역에 고구려 적석총 세력이 정착했다 3세기 중후반 한강 위례성으로 남하해 토돈분구묘제 토착 세력과 연합해 한성백제를 건국했고 사로국은 한 특정 세력으로 위계체제가 편성되는 게 2세기 후반이다. 그런데 둘 다 기원전 1세기에 건국했다고 조작했다.[13]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왕위를 고사했으면서 고작 7살 아들을 앉힌 걸 보면 실제 이유는 따로 있던 걸로 보인다. 순치제의 즉위 과정과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는 가설도 있다.[14] 부여태후라는 명칭은 부여씨라는 뜻이 아니라 부여인이라는 뜻이다.[15] 고구려 태조대왕과 신대왕 王系에 대한 재검토 - 초기 王系의 복원을 통한 왕실교대와 국내천도 시기의 탐색 -[16] 신라의 소지 마립간도 내물 마립간의 장남 눌지 마립간의 장손이자 내물 마립간의 장증손이었으나, 내물 마립간의 차남인 복호의 손자 즉 6촌 형인 지증왕의 자식뻘일 정도로 나이 차가 많이 났다.[17] 친척 동생 설을 채택할 경우 신대왕의 3남인 산상왕에 대하여 태조대왕의 증손자라고 서술한 중국측 기록이 충돌하는 건 여기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백제와 고려의 경우에서 그랬듯 중국 측이 기년 파악은 정확해도 계보도는 엉성하고 틀린 경우가 잦아서 그것만 신뢰하기엔 어려운 형편이기 때문이다.[18] 삼국사기에 나온 계보대로라면 광개토대왕은 동명성왕의 13세손(12대손)이 된다. 동명성왕 - 유리명왕 - 고재사 - 신대왕 - 산상왕 - 동천왕 - 중천왕 - 서천왕 - 돌고 - 미천왕 - 고국원왕 - 고국양왕 - 광개토대왕'''(13세손)[19] 시공간이 한국 고대 삼국 및 일본과 완전히 다른 4~10세기 동유럽 슬라브-게르만 연합 정권들 또한 90년대부터 지금까지 활성화된 고고학 및 사서 교차 검증 연구 결과, 거의 똑같은 행동을 한 것으로 드러난다. 고고학 자료 및 로마 제국, 프랑크 왕국, 신성 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 등의 사서와 교차 검증해본 결과, 이들이 따로이 인위적으로 편찬하여 한 조상에게서 시작해 아버지에서 아들로 직계 계승했다고 밝힌 공식 사서와는 달리, 실제로는 복수 왕계, 복수 왕계끼리의 생전 교대, 방계 계승 등을 했던 것으로 드러난다.[20] 사실 권력 투쟁에서는 패배했으나 제거당하기엔 너무 강해 귀족층으로 내려앉은 이전 방계 왕가나 교대 계승 왕실은 나름대로 독자적인 전승 자료를 갖고 있기 마련이며, 당연한 얘기로 아무리 권력이 강하고 잔인한 왕실이라한들 이런걸 죄다 색출해서 말살할 수는 없다. 백제의 경우 이걸 견디고 살아남은 전승이 비류계 건국 사화와 구태 전승이다. 고이왕이 너무 업적이 큰데다 비류계가 대단히 오랫동안 왕위를 이어왔기에, 대놓고 비류와 소서노의 업적과 존재를 깎아내리는 온조계 전승을 추종하는 근초고왕계 임금들마저 그런 전승들을 근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신라의 경우는 박씨 족단과 석씨 족단이 비록 왕위 계승에서는 밀려났을 망정 세력이 강하고 역사도 오래되어, 명백히 백제의 비류계보다도 상대적인 비중이 컸다. 때문에 나물 마립간 이래로 확고히 집권한 김씨 족단이 아무리 힘이 강했다한들 본인들 선조인 성한왕을 박혁거세의 윗자리에 놓을 수는 없었고, 당연한 얘기로 백제나 고구려처럼 왕실 관련 전승과 계보를 조작하지는 못하였다. 신라본기의 계보도와 각 임금별 기사가 고구려, 백제보다 유독 정확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21] 고구려 新大王의 즉위와 시조묘 제사 親行[22]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890416&cid=62135&categoryId=62281[23] 한편 민중왕과 모본왕의 왕계가 동천왕 대 왕릉의 수묘와 종묘제사 정비 시에 함께 편입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24] 신대왕의 장지 故國谷는 본래 국조왕의 장지였으며, 차대왕 수성과 신대왕 백고의 장지 전승은 전해지지 않았다고 보기도 한다.[25] 수성과 백고의 이름이 후한서의 그것과 동일한 것을 토대로 본래 망실되었다가 후한서의 기록에 따라 후대에 보완해 넣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후한과 고구려의 관계나 그들의 행적을 고려하면 거꾸로 고구려로부터 그들의 이름이 후한에 들어가 기록에 남은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된다.[26] 태조대왕의 분주왕호인 國祖王이 왕실의 혈연의식을 드러내는 왕호였을 것이라는 지적이나 그의 어렸을 적 이름이 전하고 있음은 태조대왕 宮에 대한 당대 고구려인들의 인식을 보여준다. 수성 또한 즉위 전부터 대외전쟁을 이끈 인물로서 영웅적인 왕자王者관에 부합하는 인물로서 기억되고 있었으리라 짐작된다.[27] 삼국사기 권15, 태조대왕 80년조에는 수성의 측근들이 수성에게 왕위 찬탈을 건의하는 장면이 있고, 94년조에는 결국 수성이 왕위찬탈을 마음먹은 장면이 전한다.[28] 일본서기 권19, 흠명천황 6년 및 7년조에 추군과 세군의 왕위계승분쟁을 전하고 있다.[29] 삼국사기 권21 보장왕 4년조에는 연개소문의 정변 이후 그에게 굴복하지 않은 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들의 존재는 연개소문과 보장왕으로 하여금 정변의 정당성을 시급히 확보해야 할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30] 고대에서 '장성'이라는 표현은 주로 20대에 쓰던 말이다. 71년생일 경우 98년 당시 27세가 된다.[31] 신라는 말기까지도 진골 기준이 내물 마립간이었다. 물론 서자라던가 반역에 말려들었다던가 서라벌에서 쫓겨났다던가 등의 이유로 족강되는 케이스가 많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진골의 범위가 후대 고려나 조선에 비하면 유독 넓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