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08 03:04:42

평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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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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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c5b356> 고구려 제25대 국왕
평원왕 | 平原王
파일:강서대묘.jpg
평원왕릉으로 추정되는 강서대묘 전경.
출생
(음력)
<colbgcolor=#fff,#1c1d1f>557년 4월 이전[1]
고구려 평양성
사망
(음력)
590년 10월 (향년 33세 이상)
고구려 장안성
능묘 평원(平原) / 평강상(平崗上)[2]
재위기간
(음력)
고구려 왕태자
557년 4월 ~ 559년 3월 (1년 11개월)
고구려 제25대 국왕
559년 3월 ~ 590년 10월 (31년 7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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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c5b356> 본관 <colbgcolor=#fff,#1c1d1f>횡성 고씨
성씨 고(高)
양성(陽成) / 탕(湯)
부모 부왕 양원왕
모후 미상
왕후 고대원, 평강공주의 모후
고건무, 고대양의 모후
자녀 3남 1녀
태자 고대원, 왕자 고건무, 고대양, 왕녀 평강공주
부마 온달
종교 불교
시호 평원왕(平原王)
평강상호왕(平崗上好王)
평국왕(平國王)[3]
작위 사지절 영동이교위 요동군공 고구려왕[4], 북제
영동장군,
개부의동삼사대장군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5], 북주
대장군 요동군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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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컨데 왕의 신령이 도솔로 올라가
미륵을 알현하시고
천족(天族)[6]과 함께 모이시어
사생(四生)[7]이 모두 축복 받으소서
願王神昇兜率[8]
査覲彌勒
天族俱會
四生蒙慶於
신포시 절골터 금동함 명문에서 발췌. 죽은 평원왕을 축복하는 기도문이다

1. 개요2. 생애3. 외교
3.1. 중국과의 관계3.2. 왜와의 관계
4. 《삼국사기》 기록5. 대중매체에서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고구려의 제25대 태왕. 제24대 양원왕의 맏아들이자 태자였다.

다른 고구려 군주들에 비해 주목도가 좀 덜하고, 대중들에게는 대개 평강공주의 아버지이자 온달의 장인 정도의 이미지만 있지만, 이래봬도 안원왕 말기 이후 귀족 간 내전으로 인해 무너져 가던 고구려를 중흥시킨 숨겨진 명군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담력이 있으며 말을 타고 활쏘기를 잘했다고 한다.#

2. 생애

일본서기》에는 부왕 양원왕은 내전 끝에 8세(만 7세)의 나이로 즉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대로라면 양원왕이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것이 되어서 평원왕 역시 어린 나이에 즉위했을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삼국사기》 <양원왕 본기>에는 평원왕이 557년 태자로 책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최소 그 이전에는 출생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만 양원왕의 나이 역시 《일본서기》 외에는 교차검증이 되지 않아서 자세한 건 알 수 없다. 특히 양원왕의 나이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충돌하고 있어서 최소한 《일본서기》의 기록보다는 나이가 많았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양원왕이 젊은 나이에 승하한 것으로 추정되기에 정황상 평원왕 역시 어린 나이에 즉위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찮은 게 평원왕의 아들인 영양왕은 평원왕 7년(565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정황상 영양왕이 아주 어린 나이에 태자로 책봉된 것으로 보이지만[9] 《일본서기》의 기록대로라면 평원왕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10대 초반에 아들 영양왕을 낳았다는 소리가 된다.

더불어 《삼국사기》의 온달 기록에 사위인 온달이 북주 고조 무황제 우문옹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는데 이때가 평원왕 19년(577년) 경의 이야기이다. 물론 온달의 이야기는 해석이 많지만 평원왕이 이 때쯤 결혼까지 한 딸이 있었다는 사실은 맞기에 평원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지며 온달을 사위로 삼고 등용한 부분은 온달의 출신의 정체와 평원왕의 의도와 관련해서 여러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다. 온달 정체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 참조.

한편 특별히 사서에 '어질다'라고 나와있을 정도로 성군이기도 했는데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스스로가 먹는 음식을 줄이고 농상을 장려했으며 선대 왕부터 축성해온 장안성의 축성을 일시 중단하는 등 민심 수습을 위해 노력했다. 평원왕 28년(586년)에는 평양성에서 장안성으로 천도를 했다.[10]

동국통감》의 평가는 훌륭한 왕으로 평가했다.
"평원(平原)은 한재(旱災)를 만나 걱정하여, 쓸데없는 경비는 정지시키고 급하지 않은 업무는 제쳐놓았으며, 농상(農桑)을 권장하고 궁핍한 자를 진휼(賑恤)하였으니, 훌륭한 점이 있었습니다."

3. 외교

3.1. 중국과의 관계

중국 북주의 침입을 배산의 들판에서 물리쳤다(577년). 이때 활약한 사람이 온달이었다. 하지만 남쪽 신라와의 싸움에서는 보합으로 공세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북주의 뒤를 이어 581년에 세워진 수나라589년 남조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한데다가 고구려에 속해있었던 거란의 일부가 수나라에 투항해버리는 등 서북방에 어두운 정세가 드리워젔다. 이로 인해 장수왕 때부터 이어져 온 양팔 외교는 끝난다.

이 때문에 평원왕은 남쪽의 신라와의 대치는 일단락시키고 서북방의 안정에 주력했다. 이 시기 신라는 554년 백제 성왕을 전사시킨 신라 진흥왕의 위세가 절정에 달한 시기로 568년에 세워진 황초령비마운령비를 보면 고구려는 신라에게 한반도 중부는 물론 함경도 지방까지 먹힌 상태였다. 고구려 역사상 함흥 지역까지 신라에 먹힌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 그럼에도 황초령비의 내용에 따르면 더이상 신라와 추가로 싸우지는 않고 고구려가 신라의 영토 획득을 순순히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상술한 북방 전선 안정화에 주력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사방으로 영토를 개척하여 백서와 토지를 널리 획득하니, 이웃나라가 신의를 맹세하고 화의를 요청하는 사신을 보내왔다.
<황초령비문>
다만 이 함경도 영토는 신라가 지배하기엔 너무 북쪽이라,[11] 고구려가 얼마 안 가 다시 되찾았다. 큰 전쟁이 있었다면 기록이 남았을 텐데 기록이 따로 없는 걸로 봐서, 진흥왕 이후에 신라가 공세종말점이나 양면전선 등의 문제를 겪어, 고구려신라 간 외교적 합의에 따라 이 지역을 신라 측이 스스로 포기했다고 추측된다.

한편 수 건국(581) 이후 평원왕은 전쟁 준비를 하기 시작한듯한 모습이 보인다. 《삼국사기》엔 590년에 수나라에 겁을 먹고 전쟁을 준비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동시기 《수서》의 기록을 보면 오히려 기병으로 수나라의 국경을 수차례 찔러보는가 하면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수나라의 쇠뇌 관련 장인들을 돈을 주며 대거 스카웃해가는 바람에 수나라에서 빡쳐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분노한 수문제가 "우리가 가진 공인(工人)이 충분히 많으니, 데려가려면 나에게 허락을 받으면 그만인데, 감히 돈을 주고 내 허락도 없이 몰래 빼가나? 이 건방진 자식들. 몇 년 전부터 기병들을 보내 변방을 약탈해대고, 간사한 말을 퍼트리던데, 뭔 생각으로 이 따위 짓을 하는 거냐? 나쁜 마음 있는 거 아냐?"라는 말이 그대로 실려있을 정도이다.
태부(太府)의 공인(工人)은 그 수가 적지 않으니 왕이 반드시 그를 필요로 한다면 스스로 주문(奏聞)하면 될 것인데, 몇 해 전에는 몰래 와서 재화로써 이익으로 소인(小人)을 움직여 사사로이 궁수(弩手)를 데리고 고구려로 달아났다. 병기를 수리하는 의도가 착하지 못하므로 바깥소문을 두려워하여 도둑질한 것이 아니겠나? (중략) 또한 자주 기마(騎馬)를 보내 변방 사람을 살해하고, 여러 번 간계한 계획을 펼쳐 올바르지 못한 낭설을 만들었으니, 신하로서의 마음가짐이 아니었다.
- 《수서》권81, <열전>46 <동이열전> 고려
평원왕 재위 말년에 이미 수문제의 위협적인 국서가 왔고, 이로 말미암아 뒤의 영양왕 대에 고구려-수 전쟁이 일어나는데, 그의 중흥을 위한 노력이 없었다면 살수대첩 같은 대대적인 싸움은 시도조차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3.2. 왜와의 관계

그 외에 570년 왜에 사신을 보내 공식적으로 고구려 - 왜 간 외교 노선을 세우기도 했던 기록이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조에 등장한다. 예전에 고구려와 왜는 대립관계였다. 광개토대왕이 400년에 신라를 공격한 백제ㆍ왜ㆍ가야의 연합군을 격퇴하고 4년 뒤에 평양ㆍ대방에서 또 섬멸한 게 그 예이다. 장수왕 때 고구려 사신이 왜에 갔지만 국교 성립에는 실패했고, 이후로도 교류는 있었으나 본격적인 대일 외교는 평원왕 대부터 시작했다. 이 때의 사신 파견은 신라를 피해 동해 바다를 횡단해서 호쿠리쿠카가 지방으로 향하는 루트였고, 훗날 발해 또한 일본에 사신을 보낼 때 이 루트를 사용했다. 이는 당연히 멀고 험난한 항해로, 573년에도 일본에 사신을 보냈지만 다수의 익사자가 발생했다. 5년 동안 세 차례나 사신단을 보냈는데, 이렇게 갑자기 무리해서 일본과 국교를 트려고 한 이유는 562년대가야를 마지막으로 가야가 완전히 신라에 정복당했으며, 진흥왕 순수비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 568년에는 평양 동쪽 함경도 연안까지 진흥왕에게 빼앗기고 진흥왕이 거기에 대신들을 거느리며 직접 행차해 주민을 교화하고 비석까지 여럿 꽂으면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사건까지 일어났기 때문에 평원왕 입장에서는 욱일승천하는 신라를 후방에서 견제할 수 있는 새로운 우군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놀랍게도 《일본서기》에는 이 시기에 고구려 평양성을 쳐들어가 왕궁까지 털어 먹었다는 프로파간다 기록이 나온다. 이는 백제의 대 고구려 선전 혹은 왜가 도운 백제의 고구려 공격 전과를 부풀려 왜국이 주인 것처럼 쓴 듯하다. 유력한 학설은 후대에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의 호족 세력이 대대로 전해오는 구전이나 전승들을 《일본서기》가 편찬될 때 집대성하여, 윤색한 듯하다.
8월에 천황이 대장군 오호토모노 무라지 사데히코(大伴連狹手彦)을 파견하여 군사 수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치도록 하였다. 오호토모노 무라지 사데히코는 백제의 계책을 써서 고구려를 격파하였다. 그 왕은 담을 넘어 도망하였다. 오호토모노 무라지 사데히코는 드디어 승세를 타고 왕궁으로 들어가 갖가지 진귀한 보물, 칠직장(七織帳), 철옥(鐵屋)을 모두 빼앗아 돌아왔다【옛 책(舊本)에는 철옥은 고구려 서쪽의 높은 누각 위에 있었으며, 직장은 고구려왕의 내전 침실에 쳐 있었다고 한다.】. 칠직장은 천황에게 바치고 갑옷 두 벌, 금으로 장식한 칼 두 자루, 구리종 세 개, 오색 번(五色幡) 두 간(竿), 미녀 원(媛)【원은 이름이다.】과 그의 시녀 오전자(吾田子)는 소아도목숙녜대신(蘇我稻目宿禰大臣)에게 보냈다. 이때 대신은 두 여자를 처로 삼고 경(輕;카루)의 곡전(曲殿)에 살도록 하였다【철옥은 장안사(長安寺)에 있다. 이 절이 어느 국(國)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어떤 책(一本)에서는 “11년에 대반협수언련이 백제국과 함께 고구려와 양향(陽香)을 비진류도(比津留都)에서 쫓아냈다.”고 한다.】.
일본서기》 권18 <흠명조> 23년 8월 ##

4.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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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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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평원왕 본기>
一年 평원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二月 북제가 왕을 책봉하다
二年春二月 시조 사당에 제사지내다
二年春三月 왕이 죄수를 사면하다
三年夏四月 기이한 새가 궁정에 모이다
三年夏六月 큰물이 나다
三年冬十一月 진에 조공하다
四年春二月 진이 왕을 책봉하다
五年 큰 가뭄이 들다
六年 북제에 조공하다
七年春一月 왕자 원을 태자로 삼다
七年 북제에 조공하다
八年冬十二月 진에 조공하다
十二年冬十一月 진에 조공하다
十三年春二月 진에 조공하다
十三年秋七月 왕이 패하에서 사냥하다
十三年秋八月 궁실 수리를 중단하다
十五年 북제에 조공하다
十六年春一月 진에 조공하다
十九年 주에 조공하니 주가 왕을 책봉하다
二十三年春二月 많은 별이 떨어지다
二十三年秋七月 서리와 우박이 내리다
二十三年冬十月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다
二十三年冬十二月 수에 조공하니 수가 왕을 책봉하다
二十四年春一月 수에 조공하다
二十四年冬十一月 수에 조공하다
二十五年春一月 수에 조공하다
二十五年春二月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다
二十五年夏四月 수에 조공하다
二十五年 수에 조공하다
二十六年 수에 조공하다
二十六年夏四月 수 문제가 사신을 위해 잔치를 베풀다
二十七年冬十二月 진에 조공하다
二十八年 장안성으로 천도하다
三十二年 진이 멸망한 소식을 듣고 수의 침입에 대비하다
三十二年 수 고조가 왕을 책망하다
三十二年冬十月 평원왕이 죽다

5. 대중매체에서

  • 2004년 개봉한 영화 <여고생 시집가기>에서는 배우 원상연이 연기했다.
  • 2009년 KBS 드라마 <천하무적 이평강>에서는 배우 길용우가 연기했다.
  • 2021년 KBS 드라마 <달이 뜨는 강>에서는 배우 김법래가 연기했다. 역사상 행적과는 달리 의심병이 폭발하여 부인을 살해하고, 매번 불안감을 느끼는 등 실제와는 괴리되는 모습이다. 평원왕은 실제로는 강인한 왕이었으며, 북주군을 물리친 후에 신라군에게 패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태왕 중에 업적이 없거나 무능한 군주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아들 영양왕과 함께 고구려 후기의 대표적인 명군으로 꼽히는 임금이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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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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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부왕 양원왕
태자 영양왕 · 왕자 영류왕 · 왕자 대양왕 · 왕녀 평강공주
사위 온달
관련 문서 장안 | 강서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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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왕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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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왕실의 계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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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무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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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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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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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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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
보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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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57년 4월에 태자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평원왕은 557년 4월 이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영양왕이 태자가 된 것이 565년이니 늦어도 550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2] 강서대묘 추정[3]삼국유사》 기록.[4] 使持節 領東夷校尉 遼東郡公 髙句麗王.[5] 開府儀同三司大將軍 遼東郡開國公 高句麗王[6] 또는 천손이라고도 판독되는데, 어찌 되었건 고구려 왕실이 천손의 후손이라는 천손 관념과 연관이 되어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 명문 앞부분의 불교식 왕명과 엮여 천손관념과 불교신앙의 합습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7] 산스크리트어(梵語)의 catasro-yonayah의 번역으로 생물이 태어나는 네 가지 형태인 태생(胎生)・난생(卵生)・습생(濕生)・화생(化生)을 의미한다. 곧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총칭한디.[8] 미륵보살의 정토가 있는 불교의 도솔천을 의미한다.[9] 영양왕의 태자+재위 기간을 합치면 53년이 넘는다. 아주 장수한 것이 아닌 이상 어린 나이에 태자에 책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0] 평양 장안성에 대한 부분은 많은 연구가 있으니 별도로 참조할 것.[11] 마운령은 고구려 수도 평양성보다 훨씬 북쪽이고, 국내성과 위도가 비슷할 정도다. 나중에 통일신라도 이렇게 북쪽까지 올라오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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