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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부왕 양원왕 태자 영양왕 · 왕자 영류왕 · 왕자 대양왕 · 왕녀 평강공주 사위 온달 | ||
관련 문서 | 장안 | 강서대묘 |
배산 전투 拜山 戰鬪 | ||
<colbgcolor=#C00D45,#600823><colcolor=white> 시기 | 577년(?) (평원왕 18년) | |
장소 | 배산[1]의 벌판 | |
원인 | 사료 부족으로 인한 원인 불명[2] | |
교전국 | 고려 (공격) 승 | <rowcolor=black> 북주 (방어)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평원왕 (고구려 태왕) 온달 (고구려 대형) | 지휘관 [[북주| 周 ]] 지휘관 불명 |
병력 | 병력 규모 불명 | 병력 규모 불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고구려의 대승 | |
영향 | 온달의 정치적 입지 강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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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고구려와 북주 간의 야전이다.다만 기록이 무척이나 부실한데 《삼국사기》 본기엔 기록이 없으며, 《삼국사기》 <온달 열전>에만 짤막하게 언급된다. 그 외에 신채호가 쓴 《조선상고사》나 이맥이 썼다는 《태백일사》[3]에도 해당 내용이 나오긴 하지만 《조선상고사》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별반 다르지 않고, 《태백일사》의 경우엔 애초에 위서인 《환단고기》에 수록된 부분이므로 신뢰도가 없다.
2. 전투
정확한 시기는 불명이나 《동사강목》에는 평원왕 19년(577년)에 벌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북주에 의해 북제가 멸망한 577년 정월부터 무제가 사망한 578년 6월 사이에 일어난 전투로 추정하는 의견도 있다. 일단 《동사강목》과 《삼국사기》의 기록을 종합했을 때, 북주의 우문옹이 군대를 내어 요동을 침공했고, 이때 평원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다고 볼 수 있다. 병력의 수는 불명이다.이때 북주의 무제(武帝)가 군사를 내어 요동(遼東)에 쳐들어오자, 왕은 군대를 거느리고 배산(拜山)의 들에서 맞아 싸웠다. 온달이 선봉이 되어 날래게 싸워 수십여 명의 목을 베니,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떨쳐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삼국사기》 <온달 열전>
《삼국사기》 <온달 열전>
그 뒤에 주(周)의 무제(武帝)가 지나 북쪽을 통일하여 위염을 떨치고 , 고구려의 강함을 시기하여 요동에 침입해와서 배산(拜山)의 들에서 맞아 싸우는데, 어떤 사람이 혼자서 용감하게 나가 싸웠다. 칼 쓰는 솜씨가 능란하고 활 쏘는 재주도 신묘하여 수백 명 적의 군사를 순식 간에 목베었다. 알아보니 그는 곧 온달이었다.
《조선상고사》
양측의 군대가 배산(拜山)의 벌판에서 마주하게 되고 이어 회전이 벌어졌는데 이때 평원왕의 사위였던 온달이 선봉에 서서 적진으로 돌격, 수십여명의 목을 베어 승기를 잡고, 이에 고구려군의 사기가 차올라 적들을 쓸어버렸다고 한다.《조선상고사》
3. 밝혀지지 않은 것들
- 북주가 어떤 이유에서 침공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조선상고사》에는 고구려의 강함을 경계해 요동을 침공했다고 하고, 일부에서는 북주가 요서지방으로 진출하면서 요서의 패자를 가리기 위해 고구려를 침공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북한의 역사학자인 손영종은 북제의 영주자사 고보녕이 북주에 반기를 들었고, 평원왕이 이를 지원해주다가 북주와 충돌했다는 가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 전투가 벌어진 장소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논란이 있다.
4. 여담
- 《통천문》이라는 역사소설의 초반부가 해당 내용을 다루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소재만 차용한 것이고 실제 역사와는 다르다.
- 《설민석의 한국사 대모험》 9권, 21권에서 나온다.
- 드라마 <달이 뜨는 강>에서는 주인공 온달의 가장 중요한 전투인 만큼 당연히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