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01 18:32:07

현도군 전투




1. 개요2. 배경3. 전개
3.1. 고구려의 1차 침입3.2. 고구려의 2차 침입3.3. 고구려의 3차 침입

1. 개요

부여와 고구려 사이 현도군을 놓고 벌어진 전투.

2. 배경

2세기를 넘어서면서 부여는 토지가 비옥한 요동군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립하게 되며, 이에 여러차례 전투가 벌어진다.

3. 전개

3.1. 고구려의 1차 침입

“부여왕이 아들을 보내어 병사를 거느리고 현도성을 구원하고 고구려·마한·예맥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마침내 사신을 보내 공헌하였다."

≪후한서≫권 5, 제기 5, 효안제 연광 원년 2월.
120년, 고구려가 마한, 예맥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현도성을 공격한다. 이에 부여왕은 병사를 파견하여 방어에 나선다. 전투는 부여군의 승리로 끝난 것으로 보인다.

3.2. 고구려의 2차 침입

“왕이 마한·예맥의 1만여 기를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를 보내어 병사 2만을 거느리고 한나라 병사와 힘을 합하여 맞서 싸웠으므로 아군이 대패했다”

≪삼국사기≫권 15, 고구려본기 3, 태조대왕
121년, 고구려의 태조왕은 1만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다시 현도성을 공격해 포위한다. 위구태가 이끄는 부여군은 중국 한나라군과 연합하여 현도성에서 고구려군을 물리친다.

3.3. 고구려의 3차 침입

“왕(고구려)이 마한·예맥과 함께 요동을 침략함에 따라, 부여왕이 병사를 보내어 현도를 구원하는 동시에 우리 군을 깨뜨렸다”고 한 기록.

≪삼국사기≫권 15, 고구려본기 3, 태조대왕
태조대왕은 122년에 또 한 번 군대를 이끌고 현도군과 요동군을 침입한다. 부여측에서는 현도군과 요동군에 각각 병사를 파견한 것으로 맞대응 하였으며, 고구려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한다. 이렇게, 전투는 부여군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