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19 15:47:56

학반령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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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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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반령 전투
鶴盤嶺 戰鬪
<colbgcolor=#C00D45,#032807><colcolor=white> 시기 13년 (유리명왕 32년)
장소 고구려 학반령[1]
원인 고구려와 부여의 국지전
교전국 고구려
(수세)
부여
(공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고구려 군기.svg 고무휼
지휘관

[[부여|
扶餘
]] 지휘관 불명
병력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고구려의 승리
영향 고무휼의 정치적 입지 강화 및 태자 책봉
ㆍ고구려의 군사적 자립
1. 개요2. 전투3. 이후

1. 개요

부여가 고구려를 침공하며 학반령에서 벌어진 전투. 왕자 무휼이 복병 전략으로 부여군을 격퇴했으며,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2. 전투

13년, 11월 부여가 고구려를 공격하자, 왕은 자신의 세번째 아들 무휼에게 방어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병력이 적은 탓에 정면승부를 겨루기 어렵다고 판단한 무휼은 계책을 세운 다음, 산골짜기에서 매복한다.

부여군이 학반령 아래에 이르자, 매복하고 있던 고구려군은 기습 공격을 감행했고, 병력에서 열세였음에도 지형과 타이밍을 활용해 부여군을 궤멸시켰다. 남은 부여군 잔당들은 산으로 도망쳤지만, 무휼은 군사를 풀어 이들을 모두 죽인다.

3. 이후

학반령 전투는 수세로 부여의 공격에 대처를 하던 고구려가 방어적 공세를 통해 적을 궤멸시킨 예시로, 고구려는 이 승리를 통해 자주성과 군사적 역량을 입증하고 부여의 침공을 저지함으로써 동북아 패권 경쟁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했다. 무엇보다도 무휼이라는 젊은 영웅의 등장은 단순한 전투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나라의 미래를 바꾸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1] 압록강유역의 만주지방에 있었던 고구려시대의 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