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18 22:23:43

고구려의 한성 점령


고구려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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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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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한성 점령
高句麗之 漢城 占領
<colbgcolor=#C00D45,#600823><colcolor=white> 시기 475년 (장수왕 63년) 9월
장소

백제, 하남위례성 일대
원인 고구려의 남진 정책
교전국 고구려
(공세)
<rowcolor=black> 백제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고구려 군기.svg 장수왕 (고구려 태왕)
지휘관

파일:백제 군기.svg 개로왕 (백제 국왕)
참전자

파일:고구려 군기.svg 제우 (고구려 대로)
파일:고구려 군기.svg 재증걸루
파일:고구려 군기.svg 고이만년
참전자

파일:백제 군기.svg 참전자 불명
병력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피해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결과 고구려의 승리
영향 백제 개로왕 사망
ㆍ백제 수도 위례성 함락
ㆍ고구려의 한강 유역 점령 및 한반도 주도권 장악
ㆍ백제의 웅진성 천도 및 왕실 입지 약화

1. 개요2. 배경
2.1. 장수왕의 평양 천도 및 나제동맹의 체결2.2. 개로왕, 북위에 국서를 보내다2.3. 장수왕의 분노, 한성 공략의 전야
3. 전투 경과
3.1. 고구려군의 출병과 위례성 포위3.2. 개로왕의 죽음과 한성백제의 멸망3.3. 부여문주의 뒤늦은 구원과 웅진성 천도
4. 전투 이후5. 여담

1. 개요

고구려백제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로 대략 7세기초까지 이어졌다고 보는[1] 고구려-백제 전쟁의 정점을 찍는 사건이었다.

2. 배경

2.1. 장수왕의 평양 천도 및 나제동맹의 체결

427년(장수왕 15년), 고구려가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했다. 광개토대왕장수왕 재위 초기를 거치며 세력을 크게 확장한 고구려의 위세에 눌려 있던 백제와 신라는 이를 고구려가 남진을 본격화하려는 조짐으로 받아들여 경계심을 드러냈다.그로부터 6년 뒤인 433년 신라의 눌지 마립간과 백제의 비유왕이 고구려에 대응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나제동맹을 체결했다.

두 나라는 이후 여러 차례 사신을 교환하며 우호 관계를 다졌으나, 이 시기 장수왕은 내치 안정과 더불어 북위와 북연이 치열하게 대립하던 중원 정세의 급변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2] 또한 나제동맹의 한 축이었던 신라 역시 겉으로는 450년(장수왕 38년)까지 고구려에 복속하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백제와 신라 양국도 사실은 아직 상호 신뢰가 깊지 않아 초기에는 실질적인 군사 협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신라가 고구려와의 종속 관계를 청산하고 이에 반발한 고구려가 454년(장수왕 42년) 신라를 침공하자[3] 나제동맹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게 된 눌지 마립간은 455년 10월, 비유왕이 시해되는 백제의 정변을 틈타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동맹 체결 이후 처음으로 군사를 보내 백제를 지원하며 나제동맹을 외교협정에서 군사동맹으로 격상시켰다.

비유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개로왕은 신라 지원군의 도움으로 간신히 고구려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왕위 계승을 둘러싼 혼란이 완전히 수습되지 않아, 이후 백제는 상당 기간 국내 정치 안정에 힘을 쏟아야 했다. 고구려 또한 454년 ~ 455년 연간의 남진이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뒤로는 468년까지 내정 강화와 방어체제 정비에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약 13년간 고구려와 나제동맹 사이의 전쟁은 일시적인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2.2. 개로왕, 북위에 국서를 보내다

13년간의 소강 기간을 지나 468년(장수왕 56년), 장수왕이 말갈군 1만명과 함께 신라의 실직성(오늘날 삼척)을 공격해 함락시켰다.[4] 이 경로는 동해안가를 따라 남진해 그대로 신라의 수도 서라벌을 공격할 수 있는 길인데, 장수왕이 450년에 있었던 신라의 배신을 앙갚음하기 위해 미리 길을 잡은 것인지, 아니면 이후 예정된 백제를 향한 공세에 앞서 신라를 견제하려는 선제적 조치를 취한 것인지는 기록이 소략하여 불분명하다.

이에 자극받은 백제의 개로왕은 469년(장수왕 57년) 8월에 고구려 남부 지역을 침공하는데, 이는 아신왕 이후 백제가 처음으로 고구려를 선제 공격한 사건이었다. 그러면서 고구려의 반격을 바로 대비해 쌍현성을 수리하고, 국경 지대의 요충지인 청목령(오늘날 개성 인근)에 큰 목책을 설치하고 군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여 방어 태세를 보강했다.

한편 472년(장수왕 60년),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국서를 보내 고구려를 협공하자고 제안하며 북위의 세력을 이용하여 고구려의 남침 세력을 분산해 약화시키려는 개로왕의 외교적인 시도를 펼쳤다. 고구려와 정면으로 대립할 생각이 없던 북위는 뜨뜻미지근한 답서를 육로를 통해 전달하려 했지만, 장수왕이 북위 사신들이 백제로 가지 못하게 길을 막아버리고 백제와 북위 간 주고 받은 국서의 내용을 알게 되었다. 결국 국서의 내용을 본 장수왕은 격노하여 증조부인 고국원왕이 돌아가신 이후부터 큰할아버지인 소수림왕부터 추진해 온 조상들의 원수를 갚을 겸 백제에 대한 전면 침공을 결심하게 된다.

다만 이 과정에서 장수왕 특유의 외교적 노련함이 빛을 발하는데 이 개로왕 국서 사건에 대해 오직 분노의 대상을 백제로 고정한 채로 다른 한축인 북위에는 지속적으로 사신을 파견해 상당 기간 얼어붙었던 고구려-북위 양국간 관계를 오히려 개선하는 기회로 삼았다. 장수왕 입장에서도 북위는 고구려에 사고 친 적이 없기 때문에 침공할 마음도 없었을 것이다.

2.3. 장수왕의 분노, 한성 공략의 전야

장수왕은 백제를 공격하기 몇 해 전 도림이라는 승려를 첩자로 파견하여 백제의 국력을 미리 소모시키는 힘 빼기 작전을 시도한다. 도림은 바둑으로 개로왕과 친해진 다음 전쟁 대비보다는 대규모 토목공사에 집중하라고 건의한다. 그럴듯한 건의라 개로왕은 이를 받아들이는데, 이로 인해 백제의 재정이 파탄날 지경에 이르렀다는.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한 도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고구려로 달아난 뒤 장수왕에게 백제의 상황을 아뢰었고, 장수왕은 크게 기뻐하며 장수들에게 병력을 분배하는 등 본격적으로 정벌에 나섰다.

다만 백제가 무너진 진짜 이유는 토목 공사로 인한 국고 낭비 때문이 아니라 개로왕이 도림의 꼬드김에 넘어가 정작 필요한 개성 일대 방위선을 소홀히 하고, 한성 방어에만 불필요한 인력을 낭비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최근 연구를 통해 새롭게 대두되고 있다. 사실 여러 사료를 통해 교차검증되는 개로왕의 행보를 정리하면 바둑같은 취미생활 때문에 정체불명의 승려에게 홀리고, 왕권 강화를 이유로 궁궐병에 빠져 국정을 파탄낼 정도의 위인은 아니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기도 하다.

그 외에 도림을 이용한 내부 분란뿐 아니라 고구려군은 침공과 관련하여 차근 차근 준비되었음이 고고학적인 증거로도 확인되고 있다. 한반도 남부의 고구려 유적들은 발굴을 통한 연구 결과가 상당히 누적된 상황이고, 고구려가 전쟁 소강기에도 계속된 보루 축성을 통해 임진강, 한탄강에서 백제와 국경을 형성하고, 이를 넘어 양주 분지 일대를 장악한 뒤 나아가 아차산 일대 보루군을 설치하면서 상당히 심혈을 기울여 한성 공격을 준비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도림의 파견은 이미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동안 전쟁 준비를 마친 고구려가 백제 정벌을 위한 최종 단계로 단행한 정치적, 심리적 공작으로 단순한 첩보 활동이 아니라, 472년의 국서 사건으로 전쟁 명분까지 확보한 장수왕이 백제를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 둔 마지막 한 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3. 전투 경과

3.1. 고구려군의 출병과 위례성 포위

63년(475년) 9월에 왕이 군대 30,000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하여, 왕이 도읍한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그 왕 부여경(扶餘慶, 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000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본기〉 제6 장수왕#-
21년(475년) 가을 9월, 고구려왕 거련(巨璉, 장수왕)이 병사 30,000명을 거느리고 와서 한성을 포위하였다. 임금이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이 병사를 네 방면의 길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 바람을 이용해서 불을 질러 성문을 태우니, 사람들이 두려워 성 밖으로 나가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 임금은 상황이 어렵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났는데, 고구려 병사가 추격하여 임금을 살해하였다.
삼국사기》 제25권 〈백제본기〉 제3 개로왕#-
백제기》(百濟記)에서는 "개로왕(蓋鹵王) 을묘년(475년) 겨울, 고구려[狛]의 대군이 와서 대성(大城)을 7일 낮 7일 밤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왕성이 함락되고 마침내 위례(尉禮)를 잃었다. 국왕과 대후(大后),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고 적고 있다.
일본서기웅략기 20년: 고구려가 백제를 쳐서 없앰 #
475년(장수왕 63년) 9월, 장수왕은 82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직접 나서 대대적인 백제 침공을 감행하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장수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불과 7일 만에 백제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북성을 함락시킨 뒤, 수도인 하남위례성을 포위하였다. 이때 개로왕은 성문을 굳게 닫은 채 결전을 시도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개로왕은 아우 부여문주목협만치, 조미걸취와 함께 남쪽으로 탈출시킨 뒤 신라에 구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보냈으나 고구려군은 아예 네 방면으로 나누어 협공하여 맹공을 퍼부었고, 화공까지 가해 개로왕과 남아 있는 백제군을 그야말로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로 인해 성 안의 민심은 크게 흔들렸고, 성밖으로 나가 항복하려는 사람들이 속출하자 개로왕은 더 버티지 못하고 기병 수십 기와 함께 위례성을 탈출해 서쪽으로 나아갔다.

3.2. 개로왕의 죽음과 한성백제의 멸망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임금을 발견하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더니, 임금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 죄를 헤아린 다음 묶어서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걸루와 만년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한 자들이다.
삼국사기》 제25권 〈백제본기〉 제3 개로왕#-

하지만 고구려군은 도망치는 개로왕을 추격했고 결국 죽이는데 성공했다. 삼국사기에서는 그 과정에 대한 기록이 약간 엇갈리는데, 고구려본기 장수왕조에서는 그저 개로왕을 죽였다고만 표현하고 있으나 백제본기 개로왕조에서는 백제 출신의 재증걸루 등이 도망치는 개로왕을 잡아 포박한 뒤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끌고 가 일족 모두와 함께 참수했다고 그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전하고 있다.
20년(476년) 겨울에 고구려 왕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쳐서 없앴다. 그런데 몇몇의 남은 무리들이 창고 아래에 모여 있었다. 무기와 양식이 이미 다 떨어지고 근심하여 우는 소리가 매우 심하였다. 이때 고구려의 여러 장수들이 왕에게 "백제의 마음가짐이 범상치 않습니다. 신들이 볼 때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정신을 잃습니다. 다시 덩굴이 뻗어 자라듯 되살아날까 두렵습니다. 뒤쫓아 가서 제거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왕이 "그럴 수 없다. 과인이 듣기에 백제는 왜의 관가(官家)가 된 것이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또한 그 왕이 들어가서 천황을 섬긴 것은 사방에서 모두 다 안다."라고 말하니, 그만두었다.
일본서기》 〈웅략기〉 20년 #[5]

이때 고구려군은 더 남진하여 백제를 아예 멸망시킬 것을 주장했으나 장수왕이 이를 일단 만류한 뒤 남녀 8000명을 포로로 삼았다. 고구려로서는 371년 평양성 전투에 고국원왕근초고왕과 싸우다가 전사한 원한을 무려 104년만에 더 잔인하게 되갚아준 셈이 되었다. 말 그대로 조상들의 원한을 풀려고 한 국가적 대사업이었던 것이다.

백제는 그야말로 여기서 한번 멸망했다고 봐도 된다. 일본서기에선 아예 직접적으로 '고구려가 백제를 멸했다'라고 표현한다. 아무리 전투에서 패했을 지언정 일국의 왕인 개로왕이 목이 잘려 묘비도 없이 찾을 수도 없는 곳에 매장당한 참사인데다가 무려 8천명이 포로로 끌려갔고 왕실의 기원이자 국가의 중심지였던 한강 유역를 일거에 고구려에 넘겨주게 됐으니 충분히 가능한 표현이다. 현대 역사학에서도 한성백제의 멸망이란 표현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을정도로 백제엔 심각한 타격이었다.

3.3. 부여문주의 뒤늦은 구원과 웅진성 천도

문주왕은 개로왕의 아들[6]이다. 처음에 비유왕이 돌아가시고 개로가 왕위를 잇자 문주가 그를 보좌하여 지위가 상좌평에 이르렀다. 개로가 재위한지 21년에 고구려가 쳐들어 와서 한성을 포위하였다. 개로가 성을 닫고 스스로 굳게 지키면서 문주를 보내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군사 1만 명을 얻어 돌아왔다. 고구려군은 비록 물러갔으나 성이 파괴되고 왕이 죽어서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성품은 부드럽고 결단력이 없었으나 또한 백성을 사랑하였으므로 백성들도 그를 사랑하였다.
삼국사기》 제26권 〈백제본기〉 제4 문주왕#-

개로왕이 고구려군에 사로잡혀 처형된 뒤, 그 동생 부여문주는 신라에서 파견된 구원병 1만 명을 이끌고 급히 귀환하였다. 그러나 이미 수도 위례성은 함락된 뒤였고, 개로왕은 오래전에 목숨을 잃은 뒤였다.

이때 고구려군은 한강 북쪽으로 일시적으로 후퇴하여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으므로, 문주는 비교적 안전한 틈을 위례성에서 정식 즉위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이후 폐허가 된 위례성의 궁궐 터에 머물며, 한강 이북의 고구려군이 여전히 근처에 주둔하고 있다는 긴장된 상황 속에서도 적어도 한 달가량은 수도 이전 문제를 신중히 검토하였다.

하지만 고구려 내부에서도 이번 기회에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켜야 한다는 강경론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더 오래 머물 경우 고구려군이 다시 한강을 넘어 문주왕까지 포로가 되거나 전면 공격을 받을 위험이 컸다. 이에 문주왕은 결국 군사와 조정을 이끌고 남쪽으로 퇴각하여 웅진성(오늘날의 충청남도 공주시)으로 이동하였다.

고구려가 남하하지 않고 회군한 이유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는데, 이후 고구려의 남진 정책이 본격화되어 481년에는 무려 고구려군이 미질부(현재의 경상북도 포항시)까지 공격해 들어간 점 등을 볼때 기껏 점령한 한강유역을 포기한 성격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한강 영역 지배를 유지한채로 혹시 있을지도 모를 북위나 신라의 공격에 대한 대비로 일시적으로 회군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한편 백제군의 퇴각을 인지한 고구려군이 회군하지 않고 다시 남진하여 웅진성 인근 현재의 대전까지 내려왔다는 설이 있는데 월평산성 등에서 고구려의 토기 등이 출토되는 것 등이 그 이유다.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만약 사실이면 웅진성과 대전 사이에서서 고구려군과 나제 연합군간의 치열한 교전이 있었을 것인데, 뒤늦게 백제의 지방 지원군이 합류하기도 했고 이쪽 가설을 택하더라도 최소 이즈음에서 고구려군이 퇴각하면서 백제는 망국의 위기를 가까스로 극복했다고 봐야한다.

4. 전투 이후

전투 이후 고구려의 남진 정책이 계속되어 백제쪽으로는 우술군(현재의 대전광역시 일대)을 넘어 모산성(현재의 전라북도 남원시) 일대에도 고구려군이 당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7] 신라의 경우에는 상황이 더 심각했는데 백제보다 더 많은 공격을 받았고 심지어 481년(장수왕 69년)에는 고구려군이 7성을 함락시키고 수도 서라벌을 목전에 둔 미질부(현재의 경상북도 포항시)까지 이르는, 신라 입장에선 백척간두의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제동맹을 기반으로 반파국(대가야)과 까지 동원되어 고구려의 남진을 백제나 신라나 가까스로 저지하면서 나라를 지킬 수 있었고, 고구려는 장수왕이 죽는 491년(장수왕 79년)까지도 연례행사라고 불러도 무방할만큼 매섭게 백제와 신라를 밀어붙였지만 결국 두 나라를 멸망시키는 상황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5. 여담

국립공주박물관 공식 유튜브 - 단편영화 '한성 475'
  • 국립공주박물관에서 2025년 9월 16일부터 2026년 2월 22일까지 <한성 475, 두 왕의 승부수>​라는 제목으로 특별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관련해서 단편영화를 만들기도 했는데, 과거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인기를 끌었던 화력조선 시리즈에 맞먹는 엄청난 고퀄리티의 작품으로 역덕후들의 찬사를 받았다.


[1] 이 무렵부터는 고구려(영양왕 재위기)는 수나라-당나라와의 전쟁에, 백제(무왕 재위기)는 수-당과의 친교 및 신라와의 전쟁에 집중해 방향이 갈렸다.[2] 대표적으로 북연왕 풍홍 망명 사건이 이 시기에 있었다.[3] 이때는 가야의 도움을 받아 겨우 고구려군을 격퇴했다. 일본서기의 기록상 연도가 다소 다른 부분이 있으나 관련 사료 및 사실관계를 교차검증했을 때, 눌지 마립간이 종속 관계를 청산한건 450년부터 454년 사이로 보고 있다.[4] 이때는 이미 눌지 마립간이 사망하고 자비 마립간이 즉위 중인 상황이었다.[5] 뜬금없이 백제가 왜국의 신하국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당연히 편찬자들에 의해 윤색된 부분이다. 고구려 장수들의 대사는 《수서》에서 북주의 우문헌이 우문옹에게 보육여견을 제거해야 한다고 간언하는 대목을 거의 그대로 베낀 것이며, 백제 왕이 태자나 아우를 왜에 파견한 사례는 있으나 직접 왜에 방문한 적은 없다. 실제로 왜국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해도 그동안 백제의 지원군으로 활동됐던 왜군에 대한 경계 같은 군사전략적인 이야기가 오갔을 가능성이 높다.[6] 삼국사기에선 문주왕이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적시하고 있으나, 개로왕의 동생이라고 보는 쪽이 통설이다.[7] 모산성 위치 비정은 연구에 따라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