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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도로 보는 부여의 역사 |
동부여는 고구려 초기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북부여만 있었다. 이것을 고구려 후기 고구려 정계에 깊숙히 파고든 부여계 귀족들이 선조를 미화하기 위해 지어냈거나 동부여 사람들이 신화를 조작했는데 그게 고구려 자체 기록과 《구삼국사》를 거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로 전해졌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또 남부여는 백제에서 제26대 성왕 시기에 일시적으로 사용한 국호이며 졸본부여는 고구려를 지칭하는 말이고 갈사부여는 부여 왕족이 부여에서 떨어져 나와 세운 나라 갈사국이다.
일반적으로 부여라 하면 북부여를 지칭하며, 이 영토는 송화강과 눈강이 만나는 만주 길림성의 송눈평야 일대이다. 이들은 이후 국력이 점차 약화되고, 선비족이 발흥하면서 동쪽의 연길 지방과 서쪽의 농안(農安) 지방으로 이동하여 쇠퇴한 이후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전성기 시절에는 서쪽으로는 흉노 - 오환 - 선비와 접했고, 동남쪽으로는 옥저, 숙신 - 읍루 - 물길과 접했으며, 서남쪽으로는 고조선 - 고구려와 접했다. 수도가 위치한 중심지는 346년 전에는 길림 일대, 346년 이후에는 농안 일대로 파악된다.
부여가 융성했을 시기 역사는 개략적인 기록만 남아있고 쇠락기에 가서야 구체적인 기록이 나타난다. 부여 유민들은 3~4세기 선비족에게 침략당했을 때 상당수가 요서 지방으로 이주되어 그 지배층들은 전연과 후연에서 등용했다. 북부여가 고구려에게 정복된 뒤인 5세기 경에는 북만주로 이동하여 두막루를 세웠다. 또한 부여 옛 땅에 남아있던 주민들은 고구려, 말갈, 발해의 구성원이 되었다. 두막루 역시 상당히 오랜 기간 잔존했던 듯하다.
2. 관련 문화권
고고학적으로 부여의 전신은 기원전 10세기에서 4세기까지 존재한 만주 지린 성의 서단산 문화(西團山文化)로 본다.[1]서주~춘추시대 초기에 성립된 서단산 문화는 점차 발전하면서 요동과 북방의 백금보 문화[2] 등의 청동기 문화를 받아들여 발전했으며, 요동 및 한반도 지역과 같은 청동기 문화권에 속한다. 특히 몽골리안계 인골의 발굴과 고조선을 비롯한 한국계의 유적 및 유물로 분류되는 석관묘, 비파형 동모 및 동검, 가는 무늬 거울 등이 발견된다.[3]
이후 석기·청동기 문화인 서단산 문화는 초기 철기 문화인 대해맹 유형[4]]을 거쳐 철기 문화인 포자연 유형[5]]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하나의 국가인 부여로 발돋움하게 된다.[6]
3. 원삼국시대 부여
부여는 기원전 2세기 ~3세기쯤 건국된 나라로, 왕이 다스리는 중앙집권적 국가였다.[7] 왕의 밑에는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의 귀족 세력이 존재하였다.[8] 이들은 지방을 다스리는 역할을 맡았으며, 국가의 중요한 결정은 귀족 회의를 통해 이루어졌다.농업과 목축이 발달하였고, 넓은 평야지대를 이용하여 벼, 보리, 조, 수수, 콩 등의 곡물을 재배하였으며, 말, 소, 돼지 등의 가축을 키웠다.
사회적으로는 엄격한 법률이 적용되었으며, 도둑질을 하면 12배로 배상해야 했고, 간음한 자와 반역자는 사형에 처해졌다. 또한, 왕이나 귀족이 사망하면 노비나 가축을 함께 묻는 순장 풍습이 존재하였다.
그리고, 하늘을 숭배하는 신앙이 있었는 것으로 보이는데, 매년 12월에 "영고" 라는 제천 행사를 연 것에서 알 수 있다. 이 행사를 통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전쟁 포로를 처형하며, 국가의 단합을 다졌다.
4. 북부여(부여)의 역사
일방적으로 "부여" 라고하면 "북부여" 를 가르키는 말이다. 북부여(夫餘)의 초기 역사는 주로 신화와 전설로 전해지며, "삼국유사"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각각의 기원과 발전 과정은 아래와 같다.4.1. 북부여 건국자 해모수와 시조 동명왕
《고기》(古記)에 이르길, 전한(前漢)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BC 59년) 4월 8일에 천제가 흘승골성(訖升骨城)【대요(大遼)의 의주(醫州) 경계에 있다.】에 내려왔는데,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왔다.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칭하고는 국호를 북부여라 하고 자기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고 해(解)를 성으로 삼았다. 왕은 훗날 상제(上帝)의 명으로 도읍을 동부여로 옮겼다. 동명제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나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정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가 되었으니, 곧 고구려의 시조였다.
《삼국유사》 <기이> 제1권 -북부여- #
기원전 59년, 해모수는 하늘에서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내려와 흘승골성에 도읍을 세우고, 북부여(北夫餘)를 건국하게 된다. 《삼국유사》 <기이> 제1권 -북부여- #
그리고, 아들을 낳았는데, 이 자가 바로 2대 왕 해부루였다. 왕위에 오른 해부루는 아버지 뒤를 이어 북부여를 이끌어 나간다. 하지만, 장차 자손 동명제가 이곳에 나라를 세울 것이니, 다른 곳으로 도읍을 옮기라는 천제의 명령을 받고 가섭원으로 이동해 동부여를 세운다. 이렇게, 비어버린 북부여의 왕좌는 동명왕이 차지하였으며, 해모수의 뒤를 이어 국정을 이끌어나간다.
4.2. 전성기
부여의 전성기는 1세기~3세기였으며, 보유한 최대영토는 2,000리에 이르렀다. 부여는 고조선의 유민들을 받아들이면서 인구를 늘렸고, 동시에 한나라 및 조위와의 친선관계를 도모하여 안보 보장을 받고,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며,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의 힘의 공백을 메우고, 전성기를 이룩해냈다.[9] [10][11] 또한, 옆나라 읍루를 복속시키기도 했다."魏略曰: 其國殷富, 自先世以來, 未嘗破壞."
《위략》에서는 '부여가 넉넉하고 풍성하여 선세 이래로부터 파괴를 겪은 적이 없다.'라고 언급했다.
《삼국지》 권30 <오환선비동이전> -부여조-
《진서》에 따르면 고구려 제11대 동천왕 시기에도 부여는 80,000여 호에 달하는 인구를 과시하며, 30,000호에 불과한 고구려를 압도하는 국력을 자랑한 바 있었다.[12] 선세 이래 한 번도 파괴되지 않은 도성을 자랑하던 강대국이기도 하였다.[13][14] 《위략》에서는 '부여가 넉넉하고 풍성하여 선세 이래로부터 파괴를 겪은 적이 없다.'라고 언급했다.
《삼국지》 권30 <오환선비동이전> -부여조-
4.3. 모용선비의 침입
자세한 내용은 부여 - 모용선비 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4.4. 전연의 침입을 받다
자세한 내용은 부여 - 전연 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4.5. 고구려에 투항하다(멸망)
이후 452년 신라와 고구려가 전쟁상태에 돌입할 때쯤 뜬금없이 북위로 사신을 보내고는 다음 기록이 없다가, 고구려가 전쟁하는 틈을 타 독립하려고 했다는 말도 있는데 자세한건 알 수 없다. 이후 물길의 침입을 받고, 도저히 나라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494년, 고구려 제21대 문자명왕[15]에게 투항했다.[16]남은 잔존 세력들은 고구려의 양해 아래 책성 일대에 모여 부여의 명맥을 이어갔지만, 고구려의 공격으로 인해 이것마저 맥이 끊기게 되었다.
5. 동부여의 역사
북부여의 왕 해부루(解夫婁)의 대신인 아란불(阿蘭弗)의 꿈에 천제가 내려와 이렇게 말하였다.
“장차 내 자손에게 이곳에 나라를 세우도록 할 것이니, 너는 다른 곳으로 피해가라.【동명제가 장차 일어날 조짐을 말한 것이다.】 동해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란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서 왕도를 세우기에 적당하다.”
아란불은 왕에게 권하여 도읍을 그곳으로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라고 하였다.
부루는 늦도록 아들이 없었는데, 하루는 산천에 제사를 지내어 대를 이을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빌었다. 이때 타고 가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마주 대하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사람들에게 그 돌을 들추어보게 하였는데, 그곳에는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심이로다!”라고 말하였다. 그 아이를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하였다. 아이가 자라자 태자로 삼았다.
부루가 죽자 금와가 대를 이어 왕이 되었다. 다음의 왕위를 태자 대소(帶素)에게 전하였다. 지황 3년 임오(서기 22년)에 이르러 고구려 왕 무휼(無恤)이 동부여를 정벌하고, 왕 대소를 죽이니 나라가 없어졌다.
《삼국유사》 <기이> 제1권 -동부여- #
북부여의 2대 왕 해부루가 나라를 다스리던 어느날, 그의 신하 아란불이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천제(天帝)가 나타났다고 한다. 천제는 " 장차 내 자손이 이곳에 나라를 세울 것이니, 다른 곳으로 옮겨라" 라고 말했다고 하며, 해부루는 이 계시를 받아 동해 바닷가 가섭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東夫餘)라 하였다. “장차 내 자손에게 이곳에 나라를 세우도록 할 것이니, 너는 다른 곳으로 피해가라.【동명제가 장차 일어날 조짐을 말한 것이다.】 동해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란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서 왕도를 세우기에 적당하다.”
아란불은 왕에게 권하여 도읍을 그곳으로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라고 하였다.
부루는 늦도록 아들이 없었는데, 하루는 산천에 제사를 지내어 대를 이을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빌었다. 이때 타고 가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마주 대하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사람들에게 그 돌을 들추어보게 하였는데, 그곳에는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심이로다!”라고 말하였다. 그 아이를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하였다. 아이가 자라자 태자로 삼았다.
부루가 죽자 금와가 대를 이어 왕이 되었다. 다음의 왕위를 태자 대소(帶素)에게 전하였다. 지황 3년 임오(서기 22년)에 이르러 고구려 왕 무휼(無恤)이 동부여를 정벌하고, 왕 대소를 죽이니 나라가 없어졌다.
《삼국유사》 <기이> 제1권 -동부여- #
그에게는 오랫동안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어서 고민이였는데, 어느 날 그의 말이 곤연의 큰 돌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기이한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이상하게 여겨 그 돌을 들어 올리자 금빛 개구리 모양의 아이가 나타났고, 왕은 이를 하늘이 내린 아들로 여기고 '금와' 라고 이름 붙였는데, 동부여의 2대왕이다. 금와왕(金蛙王)이 즉위하는 동안의 동부여는 최전성기를 맞이하여 융성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그의 아들 3대 왕 대소(帶素)가 나라를 이끌어 나간다. 그러나 서기 22년, 고구려 왕 무휼이 동부여를 정벌하여 대소왕을 죽이고 동부여를 멸망시켰다.
6. 졸본부여 건국의 역사
어느 날 해모수가 동생들과 함께 놀고 있던 유화를 보고는 꾀어내서 함께 하룻밤을 지냈으나 다음 날에 혼자서 승천해 버렸다고 한다.[17] 유화부인은 중매도 없이 다른 남자와 잤다는 이유로, 부친인 하백에게서 쫓겨나 떠돌게 되고, 태백산 우발수까지 밀려났다. 그러다 당시 부여의 왕이었던 금와왕과 만나게 되었는데, 유화의 사연을 알게 된 금와가 유화를 거두어서는 궁 안으로 데려와 방안에 두었다. 이후에 햇빛이 방안으로 들어와 유화의 몸을 내리 쬐었는데, 유화가 아무리 이를 피하려 해도 햇빛은 계속 유화의 몸을 비추었다. 그 이후에 유화는 덜컥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괴상하게도 알을 낳았다. 알의 크기는 5되였다. 금와왕이 알을 돼지나 짐승에게 주거나 들판에 내버려도 짐승들이 알을 해치지 않고 보호하려고 하였고, 껍질이 단단해서 깨뜨릴 수가 없어 결국 도로 유화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이윽고 알에서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동명성왕, 즉 주몽 혹은 추모였다.#하지만 그를 시기한 대소를 비롯한 부여의 왕자들의 간계로 죽을 위기에 처하자, 아내 예씨부인과 모친 유화, 그리고 예씨의 배 속의 아이 유리를 남긴 채 주몽은 떠난다. 이때 배 속의 아이를 위해 자신의 아들임을 증명할 부러진 칼 조각을 남기는데, 관련된 내용이 그리스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에 대한 설화와 거의 같다. 위에 소나무(기둥)가 있는 칠각형 돌(주춧돌) 아래에 부러진 칼의 일부를 묻어뒀으니 찾을 나이가 되거든 그 칼 조각을 가지고 오라는 것. 동명성왕은 떠날 때 오이, 마리, 협보 등의 친구들과 자신을 따르는 여러 무리를 이끌고 도망쳤고, 강에 가로막히자[18] 자신이 하백의 손자이자 하늘의 자식임을 이용해 자라와 물고기로 다리를 만들어 큰 강을 건너 부여를 탈출했다.
부여를 탈출할 때 깜빡하고 곡식을 놓고 왔는데 유화부인이 그걸 알고 비둘기 한 쌍에게 오곡을 전해주게 했다. 동명성왕은 나무 밑에서 쉬다가 비둘기 한 쌍을 보고는 어머니가 보낸걸 알아채고 활로 쏴서 떨어뜨렸고, 오곡을 얻은 후 물을 뿜어 비둘기를 다시 살려서 날려보냈다.
이후에 동명성왕의 일행은 졸본 땅에 도착하였고, 훗날 이곳을 도읍으로 하여 졸본부여를 세우게 된다. 그리고, 졸본부여는 곧 고구려로 발전한다.
7. 갈사국(갈사부여)의 역사
갈사국의 건국은 동부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동부여의 왕 대소가 죽고 난 뒤, 그의 아우는 나라가 망할 것이라 생각하여 100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떠난다.압록곡이라는 곳에 이르자 그는 사냥 나온 해두국왕을 죽이고, 해두국왕의 백성들을 빼앗아 갈사수에 도읍정해 나라를 세웠다. 이 나라가 바로 갈사국이며, 다른 말로는 갈사부여라고 한다.
그렇게, 나라를 이끌어가다가 68년 8월, 고구려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갈사왕 도두를 끝으로 막을 내린 것이다.
8. 두막루의 역사
자세한 내용은 두막루 문서 참고하십시오.북부여가 완전히 멸망하자, 부여의 유민들이 모여 두막루라는 나라를 건국한다.
[1] 대신 기원전 3세기 이전의 서단산 문화의 분포는 성읍국가 이상으로 보기에는 매우 작으며, 현재의 지린시 일대에만 나타난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길림성 북부에는 백금보 문화로 불리는 반농반목적 청동기 문화가 있었다. 또한 남서부에는 철기를 개막한 이질적인 문화가 있었다. 이와 같이 청동기 시대의 대부분의 북중국 지역은 현재의 1개 성 단위가 4~5개의 이질적 문화권으로 쪼개진, 고대적 부족국가 형태를 띠고 있었다. 부여라는 나라가 기원전에 존재했다면 이런 부족 중 하나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밖에 없다.[2] 반농반목적 문화로 현재의 길림성 북부 쑹위엔 시 일대였다. 과거 일부 학자들은 이를 <동명왕 신화>의 '탁리국'과 연관시킨 적도 있다.[3] 이와 동시에 초기에는 요동 및 한반도 지역의 문화와 유사하면서도 고유한 모습을 보이지만, 후대로 갈수록 요동 및 한반도 지역과의 교류·친연 관계가 점점 강해지는 모습을 보인다.[4] 大海猛類型,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5] 泡子沿類型,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6] 바로 이 포자연 문화권에서 나온 장신구와 무구류가 하필이면 《삼국사기》상 고구려 건국 시기인 기원전 1세기경부터 압록강 유역 적석총에서 갑자기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학계에서는 이것이 고구려 건국 지배층과 대단히 유관하다고 보고 있다. 학자들이라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이건 그냥 부여 출신 전사 집단이 주축이 되어 고구려를 건국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뒷받침하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7] 건국 시기는 보통 최소한 기원전 2세기 이전으로 잡고 있다. 그런데 중국 사서인 《상서대전》, 《산해경》, 《사기》 <화식열전> 등에도 부여가 언급된다. 물론 이것이 국경을 맞대고 있다거나, 기원전 3세기 이전에 건국되었다는 근거는 아니다. 하지만 일부 기록과 유물 등의 존재는 부여 이전에도 원시적 공동체가 이 지역에 오랫동안 지속되어 있었음을 말한다.[8] 연맹 왕국의 형태를 띠었다.[9] 부여 남쪽에 위치했고, 오랜 역사와 강성한 국력으로 정통성을 지니고 있었던 고조선(위만조선)이 전한 세종 무황제 유철에 의해 멸망(BC 108)하면서 한사군이 설치되었지만, 한나라도 흉노와의 오랜 전쟁과 토목공사 남발로 인한 과도한 국력소모에 시달린 탓에, 고조선이 기존에 발휘했던 영향력을 온전히 발휘하는 데에는 부담이 컸던 상황이었다. 당장 한사군 가운데서도 함경도와 강원도 지역은 복속에 실패해서 동예와 옥저로 따로 독립해나갔을 정도였다. 그나마 평안도와 황해도는 영토 굳히기에는 성공했기는 했지만 한과 원주민의 정체성이 혼재되어 이름만 한나라를 걸치고 있었을 뿐, 오랫동안 반독립 지역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후한 말기에는 요동군의 태수인 공손도가 동탁의 전횡에 수많은 지방관과 호족들, 기타 군벌 세력이 저항하여 반기를 드는 틈을 타서 칭왕을 하며 독립국 행세를 하기도 했다. 즉, 한나라 입장에서는 중국을 위협할만한 종족들을 효과적으로 견제시켜주는 마름 역할을 부여가 맡아주면서 군사적인 부담을 덜어냈고, 부여 역시 선진문물 및 군사장비를 중국으로부터 수급받고, 비상시에 한나라로부터 군사지원을 받을 수 있었으니, 한나라에게나 부여에게나 원원이 되었던 관계였다.[10] 하지만 중국 세력과 항상 핑크빛 관계를 유지한 건 아니어서 후한 안제 때인 111년에 기병과 보병 7~8,000명을 이끌고 낙랑군에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을 했던 적도 있었다. 이 기록은 하필이면 부여와 낙랑군의 거리가 멀고, 그 사이에 고구려가 있었다는 점 때문에 낙랑군재요서설의 주요 근거로 쓰이기도 한다. 허나 주류 학설은 아니며, 학계에서 이를 설명하는 여러 이론이 있다.[11] 물론 만만치 않은 군사력을 지녔던 고구려를 견제했던 것은 덤으로, 조위의 장수 관구검이 동천왕대의 고구려를 정벌할 때, 부여의 지배자 중 하나였던 위거가 위군에게 군량을 제공하기도 했다.[12] 고대 국가의 국력은 인구와 비례한다. 이는 직접적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농업이 당시 경제의 전부였기 때문이고, 무기 또한 발전하지 못해 사실상 군사력이 인구수와 동일시되던 고대 사회로써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얘기이다.[13] 이에 비해 고구려는 건국 초기, 약하던 시절 툭하면 도성이 파괴되었다. 더욱이 부여는 방어가 취약한 평야 지역에 도읍한 평지성이었고,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방어에 유리한 산성이었다.[14] 여담으로, 학계 일부에서는 동명성왕 ~ 대무신왕 대에 고구려와 충돌했던 부여 세력을 부여 남부의 일개 대가 세력으로 추정하는 주장도 있다.[15] 재위기간: 491~519[16] 일부 세력은 북부여가 멸망하기 이전 북방으로 이주해 두막루를 형성했다는 설이 있다.[17] 신화적 이야기 걷어내고 보면 걍 야반도주(...) 했다고 볼 수 있다.[18] 현재의 송화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