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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
1. 개요
《삼국사기》의 기초가 된 고려 초기의 사서로 현존하지 않는다. 책은 사라졌으나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에 일부가 인용되어 남았는데, 동명왕 본기라는 데서 미루어 짐작하건데 기전체이며, 삼국사기와 대체로 같은 내용이지만 기이하고 설화적인 내용이 더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편찬시기는 고려 건국 이후임은 분명해 보인다. 고구려, 신라, 백제를 상징하는 《삼국사》라는 명칭과 함께, 발해와 관련된 내용이 수록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또한 제2차 여요전쟁 당시 개경이 불타버리며 7대 실록을 포함한 다양한 기록들이 실전되었다는 점을 감안해 1010년 이후에 만들어 졌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2. 명칭
학계에서 통칭되는 구삼국사의 정식명칭은 《삼국사(三國史)》였다.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에는 해동삼국사(海東三國史)로,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는 구삼국사(舊三國史)로,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전삼국사(前三國史)로 전하고 있어 책명이 삼국사(三國史)로 일치하고 있다.(중략) 《삼국사기》 지리지4의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名)에서 보이는 ‘본국 고기(本國古記)’를 《삼국사》로 추정 하였다. 또한 《三國史記》 職官志에 본국 고기(本國古記)를 인용한 것도 구삼국사(舊三國史)의 기록으로 파악하였다. 특히 고구려 지명의 검토를 통하여, 구삼국사(舊三國史)에는 676∼680년간에 이루어진 《후한서(後漢書)》에 붙인 이현(李賢)의 주(註)를 인용하였음을 실증하였다.
정구복. 高麗 初期의 《三國史》 編撰에 대한 一考.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에서 처음 언급되는 사료로, 정황상 원래 명칭은 삼국사(三國史)이지만 당시엔 삼국사기가 나온 후였기 때문에 이규보가 구(舊)자를 덧붙인 것으로 추정 중이다. 마찬가지로 《삼국유사》나 다른 서적에 인용되는 《해동삼국사(海東三國史)》[1], 《국사(國史)》와 같은 책으로 추측되는데, 이쪽은 중국의 삼국사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삼국사임을 밝히기 위해 해동을 붙인 것으로 추정한다. 그 외에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본기(本紀)가 아니라 본기(本記)라고 씌여진 부분도 구삼국사를 지칭하는 말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러다보니 지금도 몇몇 사학자들은 구삼국사가 아닌 삼국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삼국사기와 이름부터가 다르므로 굳이 구를 붙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정구복. 高麗 初期의 《三國史》 編撰에 대한 一考.
추정 명칭 | 기록된 사서 | 비고 |
구삼국사(舊三國史) | 동국이상국집 | 가장 확실한 기록으로 학계에서 주류로 사용하는 명칭. |
해동삼국사(海東三國史) | 대각국사문집[2] | 의견이 다양하다. |
삼국사(三國史) | 삼국유사 | |
국사(國史) | 삼국사기, 삼국유사 | |
삼국본사(三國本史) | 삼국유사 |
3. 내용
東明王篇 序文
동명왕편 서문.
越癸丑四月, 得舊三國史, 見東明王本紀, 其神異之迹, 踰世之所說者。
지난 계축년(1193년, 명종 23년) 4월에 《구삼국사(舊三國史)》를 얻어 동명왕본기(東明王本紀)를 보니 그 신기하고 이상한 사적이 세상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를 넘고 있었다.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3, 「고율시」 동명왕편 서문.
구삼국사 자체는 소실된 사료이긴 하지만 《삼국사기》 편찬 당시 주요 사료로서 이용되었기 때문에, 상당수의 내용들은 삼국사기를 통해 여전히 전해내려오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실제로 《삼국사기》의 주몽조에 실린 신화의 내용은 《구삼국사》의 내용을 전거하였다고 밝힌 이규보의 동명왕편의 내용과 거의 똑같다. 분량 상으로도 《삼국사기》와 비슷하거나 약간 많은 정도였을 것이다.동명왕편 서문.
越癸丑四月, 得舊三國史, 見東明王本紀, 其神異之迹, 踰世之所說者。
지난 계축년(1193년, 명종 23년) 4월에 《구삼국사(舊三國史)》를 얻어 동명왕본기(東明王本紀)를 보니 그 신기하고 이상한 사적이 세상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를 넘고 있었다.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3, 「고율시」 동명왕편 서문.
또한 이규보의 평가로 볼 때[3] 상식적이고 객관적인 내용을 담은 정식 역사서라기 보단 《삼국유사》와 비슷하게 설화나 야사 관련 내용도 제법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적으로 동명성왕의 죽음에 대해서도 〈광개토대왕릉비〉와 《구삼국사》는 "왕이 하늘로 올라갔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는 "왕이 죽었다."라고 기술했다. 이를 통해서 《구삼국사》는 객관성을 좀 포기하더라도 과거 전승을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기록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3.1. 《삼국사기》와의 차이
《삼국사기》의 기록과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을 비교해보면 어떤 차이가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시작 부분부여왕(夫餘王) 해부루(解負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山川)에 제사하여 아들 낳기를 빌러 가는데,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자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기어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리니 금빛 나는 개구리 형상의 작은 아이가 있었다. 왕이,“이것은 하늘이 내게 아들을 준 것이다.”하며, 길러서 금와(金蛙)라 하고 태자(太子)로 삼았다. 정승 아란불(阿蘭弗)이,“일전에 천제(天帝)가 내게 내려와서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려 하니 너는 피하라.’ 하였는데, 동해(東海) 가에 가섭원(迦葉原)이란 땅이 있어 오곡(五穀)이 잘 되니 도읍할 만합니다.”하고, 아란불은 왕을 권하여 옮겨 도읍하고 동부여(東夫餘)라 이름하였다. 예전 도읍터에는 해모수(解慕漱)가 천제의 아들이 되어 와서 도읍하였다.《동국이상국집》 전집 권3, 「고율시」 동명왕편.부여왕 해부루(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제사를 지내 대를 이을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다. 어느 날 그가 몰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렀는데, 말이 그곳의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임금은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려보게 하니, 금빛 개구리【와(蛙)는 와(蝸)라고도 한다.】 모양의 어린 아이가 있었다.임금이 기뻐하며 말하였다.“이 아이가 바로 하늘이 나에게 주신 아들이다!”라고 하며 거두어 길러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하고, 아이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훗날 재상인 아란불(阿蘭弗)이 말하였다.“어느 날 하느님이 내게 내려와 말하기를, ‘장차 내 자손에게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너희는 피하라.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땅이 있는데, 토양이 기름져서 오곡이 잘 자라니 도읍을 정할만 하다.’라고 하였습니다.”아란불이 마침내 임금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게 하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東扶餘)라고 하였다.그 옛 도읍지에는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있었는데,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고 하면서 그곳에 도읍을 정하였다.《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본기 제1 시조 동명성왕
신화와 관련된 부분은 두 책 다 거의 동일하기에 《삼국사기》가 복붙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설화“나는 선인(仙人)의 후손인데 여러 대 왕 노릇을 하였다. 지금 지방이 대단히 작아서 나누어 두 왕이 될 수 없고 그대는 나라를 만든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부속국이 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하였다. 왕이,“과인은 천제의 뒤를 이었지마는 지금 왕은 신(神)의 자손도 아니면서 억지로 왕이라 칭호하니, 만일 내게 복종하지 않으면 하늘이 반드시 죽일 것이다.”하였다. 송양은 왕이 여러 번 천제의 손자라 자칭하는 것을 듣고 마음에 의심을 품어 그 재주를 시험하고자 하여,“왕과 활쏘기를 원하노라.”하고, 그린 사슴을 1백 보 안에 놓고 쏘았는데 그 화살이 사슴 배꼽에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힘에 겨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옥가락지를 가져다가 1백 보 밖에 달아매고 쏘았는데 기왓장 부서지듯 깨지니 송양이 크게 놀랐다.왕이,“국가의 기업이 새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고각(鼓角)의 위의(威儀)가 없어서 비류(沸流)의 사자가 왕래함에 내가 왕의 예로 맞고 보내지 못하니 그 까닭으로 나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하였다. 시종하는 신하 부분노(扶芬奴)가 앞에 나와,“신이 대왕을 위하여 비류의 북을 가져오겠습니다.”하였다. 왕이,“다른 나라의 감추어 둔 물건을 네가 어떻게 가져오려느냐?”하니, 대답하기를,“이것은 하늘이 준 물건이니 왜 가져오지 못하겠습니까? 대왕이 부여(扶餘)에서 곤욕을 당할 때에 누가 대왕이 여기에 이르리라고 생각하였겠습니까? 지금 대왕이 만 번 죽음을 당할 위태한 땅에서 몸을 빼쳐 나와 요좌(遼左)에 이름을 날리니 이것은 천제가 명령하여 하는 것이라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하였다. 이에 부분노 등 세 사람이 비류에 가서 북을 가져오니 비류왕이 사자를 보내어 고하였다. 왕이 비류에서 와서 고각을 볼까 두려워하여 빛깔을 오래된 것처럼 검게 만들어 놓으니 송양(松讓)이 감히 다투지 못하고 돌아갔다.송양이 도읍을 세운 선후(先後)를 따져 부용국(附庸國)을 삼고자 하니, 왕이 궁실을 지을 때 썩은 나무로 기둥을 세워 천 년 묵은 것같이 했다. 송양이 와서 보고 마침내 감히 도읍을 세운 선후를 따지지 못하였다.《동국이상국집》 전집 권3, 「고율시」 동명왕편.이에 송양이 말하였다.“우리는 여러 대에 걸쳐서 왕 노릇을 하였고, 땅이 작아서 두 왕을 용납하기엔 부족하다. 그대는 도읍을 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우리의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떠한가?”임금은 그 말에 분노하여 그와 말다툼을 하다가 서로 활을 쏘아 재주를 겨루었는데, 송양은 대항할 수 없었다.2년(기원전 36) 여름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해 오므로 그 땅을 다물도(多勿都)로 삼고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삼았다. 고구려 말에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다물’이라 하였기 때문에 그곳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본기 제1 시조 동명성왕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 중 하나로, 전체적인 맥락은 같으나 활쏘기의 내용에서 동명성왕의 위대함을 부각시키고 있다. 또한 비류국과의 설화의 경우에는 삼국사기에서 제외되었으나 구삼국사에는 그 일화를 그대로 싣고 있다.
- 치세7월에 검은 구름이 골령에 일어나서 사람들이 그 산은 보지 못하고 오직 수천 명 사람의 소리가 토목(土木) 공사를 하는 것같이 들렸다. 왕이,“하늘이 나를 위하여 성을 쌓는 것이다.”하였다. 7일 만에 운무가 걷히니 성곽과 궁실 누대가 저절로 이루어졌다. 왕이 황천께 절하여 감사하고 나아가 살았다.《동국이상국집》 전집 권3, 「고율시」 동명왕편.4년(기원전 34) 여름 4월,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사람들이 7일 동안이나 빛을 분별하지 못하였다.가을 7월,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본기 제1 시조 동명성왕
여기에도 조금 차이가 보인다. 둘 다 구름과 안개, 그리고 궁궐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는 각각 4월과 7월에 있던 일로 구분을 해놓았으며, 구삼국사쪽은 두 사건을 합쳐놓아 "안개가 걷히며 궁궐이 저절로 지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어 좀더 비현실적이고 신화적인 느낌이 강하다.
- 사망가을 9월에 왕이 하늘에 오르고 내려오지 않으니 이때 나이 40이었다. 태자(太子)가 왕이 남긴 옥편을 대신 용산(龍山)에 장사하였다 한다.《동국이상국집》 전집 권3, 「고율시」 동명왕편.가을 9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이때의 나이가 40세였다. 용산(龍山)에 장사 지내고 호를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 하였다.《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본기 제1 시조 동명성왕
여기서도 삼국사기는 "임금이 죽었다."라고 나와있으나, 구삼국사에서는 "왕이 하늘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았다."며 신화적인 요소가 강하게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유화부인이 죽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는 나와있으나 구삼국사에는 나오지 않으며, 말갈족의 침입을 물리쳤다는 기록도 삼국사기에만 언급되어 있다. 반대로 동명성왕과 송양간의 활쏘기 대결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 졌는지, 부분노가 비류국의 북을 훔친 이야기 같은 설화적인 내용들은 구삼국사의 기록에만 확인이 된다.
3.2. 고구려를 계승한 서적?
『삼국사』에서는 고구려를 내세우는 역사서술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고려 초기에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 자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구려관계 기사가 신라관계 기사보다 많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또한, 고구려만을 계승한 왕조를 강조하였다기보다는 삼국을 통일해 진정한 통일국가라는 의식이 노출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려 초기 고구려 계승 의식이 반영되어, 신라사의 비중이 높은 삼국사기보다[4] 고구려 역사 서술의 우선순위와 비중이 높았을 것으로 추정하는 의견도 있지만 말 그대로 추정의 영역이다. 특별히 고구려의 기술이 삼국사기에 실린 것보다 많았을 것 같진 않다고 보는 의견도 많으며, 동국대학교 홍윤식 교수는 반대로 구삼국사가 삼국사기보다 신라적인 사실을 더 많이 수록하고, 낙랑 등 중국세력에 대해 자주적 입장을 취한 점이 《삼국사기》와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삼국의 역사뿐 아니라 그 이전 역사에도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기술하고 신이사(?)를 역사적 사실의 중요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는 점은 같다고 주장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구삼국사의 구성
구삼국사(舊三國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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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 | }}}}}}}}}}}}}}} |
아쉽게도 현재는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에 전해지는 동명왕 본기 내용을 제외한 나머지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5. 인용문
5.1.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이 구삼국사 기록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원문을 보려면 한국고전종합DB에 등록된 링크를 참조.5.2. 삼국유사
참고로 삼국유사에 삼국사를 인용했다는 기록은 전해지는데, 이 삼국사가 구삼국사라는 주장과 삼국사기라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따라서 실제 구삼국사에 기록된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인지하고 보도록 하자.『삼국사(三國史)』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명주(溟州)는 옛날의 예국(穢國)인데 농부가 밭을 갈다가 '예왕의 도장'(濊王之印: 예왕지인)을 발견해 바쳤다.”
“춘주(春州)는 예전의 우수주(牛首州)인데 옛날의 맥국(貊國)이다.”
“지금의 삭주(朔州)가 맥국이라고도 하고, 혹은 평양성이 맥국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마한 #
“명주(溟州)는 옛날의 예국(穢國)인데 농부가 밭을 갈다가 '예왕의 도장'(濊王之印: 예왕지인)을 발견해 바쳤다.”
“춘주(春州)는 예전의 우수주(牛首州)인데 옛날의 맥국(貊國)이다.”
“지금의 삭주(朔州)가 맥국이라고도 하고, 혹은 평양성이 맥국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마한 #
후당(後唐) 천성(天成, 서기 926년~930년) 초에 거란이 공격하여 깨뜨리자, 그 후 (발해는) 거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삼국사(三國史)』에서는, “의봉(儀鳳) 3년 고종 무인(서기 678년)에 고구려의 잔당이 무리를 모아 북쪽으로 태백산 아래에 의지하여 국호를 발해라 하였다. 개원 20년경에 당나라 황제가 군대를 보내 토벌하도록 하였다.”라고 하였고, 또 “성덕왕 32년 현종 갑술(서기 734)에 발해와 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나라의 등주(登州)를 침략하자, 현종이 이를 토벌하였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말갈과 발해 #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말갈과 발해 #
『삼국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신라는 왕을 거서간(居西干)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진한(辰韓)의 말로 왕이라는 뜻이다. 혹자는 ‘귀인을 부르는 칭호’라고도 한다. 혹은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하고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제2대 남해왕 #
“신라는 왕을 거서간(居西干)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진한(辰韓)의 말로 왕이라는 뜻이다. 혹자는 ‘귀인을 부르는 칭호’라고도 한다. 혹은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하고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제2대 남해왕 #
진평왕은 수많은 장인들을 보내어 절을 짓는 일을 돕게 하였는데, 지금도 그 절이 남아 있다.【『삼국사(三國史)』에서는 이 분을 법왕(法王)의 아들이라고 하였지만, 여기서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전하였으니,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무왕 #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무왕 #
『삼국사(三國史)』 「본전(本傳)」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견훤(甄萱)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이다. 함통(咸通) 8년 정해(서기 867년)에 태어났는데, 본래의 성은 이(李)씨였으나 후에 견(甄)을 성씨로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사를 지어 생활하다가 광계(光啓) 연간(서기 885년~887년)에 사불성(沙弗城)【지금의 상주(尙州)이다.】을 점거하고 스스로 장군이라고 일컬었다. 네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다 세상에 이름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견훤이 가장 걸출하고 지략이 많았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후백제 견훤 #
견훤(甄萱)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이다. 함통(咸通) 8년 정해(서기 867년)에 태어났는데, 본래의 성은 이(李)씨였으나 후에 견(甄)을 성씨로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사를 지어 생활하다가 광계(光啓) 연간(서기 885년~887년)에 사불성(沙弗城)【지금의 상주(尙州)이다.】을 점거하고 스스로 장군이라고 일컬었다. 네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다 세상에 이름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견훤이 가장 걸출하고 지략이 많았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후백제 견훤 #
논평하여 말한다.
“삼국사(三國史)를 살펴보면, ‘구형왕이 양나라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서기 532년)에 신라에 국토를 바치고 항복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수로왕이 처음 즉위한 건무 18년 임인(서기 42년)부터 구형왕 말년의 임자년(서기 532년)까지 490년이 된다. 만일 다른 기록으로 고증한다면, 국토를 바친 것은 위(魏)나라 보정 2년 임오(서기 562년)이니, 30년을 더하여서 모두 520년이나 된다. 이 두 설을 모두 기록해 놓는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가락국기 #
“삼국사(三國史)를 살펴보면, ‘구형왕이 양나라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서기 532년)에 신라에 국토를 바치고 항복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수로왕이 처음 즉위한 건무 18년 임인(서기 42년)부터 구형왕 말년의 임자년(서기 532년)까지 490년이 된다. 만일 다른 기록으로 고증한다면, 국토를 바친 것은 위(魏)나라 보정 2년 임오(서기 562년)이니, 30년을 더하여서 모두 520년이나 된다. 이 두 설을 모두 기록해 놓는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가락국기 #
진평왕 22년 경신(서기 600)에【『삼국사(三國史)』에서는 그 다음 해인 신유년에 왔다고 하였다.】 행장을 정리하여 중국에 왔던 사신을 따라 귀국하였다.
《삼국유사》 제4권 의해 제5 원광이 당나라로 유학을 가다 #
《삼국유사》 제4권 의해 제5 원광이 당나라로 유학을 가다 #
5.3. 대각국사문집
可惜飛房後 / 애석하도다, 방장을 날린 후에
東明故國危 / 동명왕의 옛나라가 위태해졌네
【성사는 원래 고구려 반룡사(盤龍寺) 스님이었는데 보장왕이 도교에 현혹되어 불법을 폐기하자 성사는 방장(方丈)을 날려 백제의 고대산(孤大山)에 이르렀다. 후에 한 신인이 고구려의 마령(馬嶺)에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패망이 며칠 안 남았다”고 하였다. 자세한 것은 『해동삼국사(海東三國史)』와 같다.】
《대각국사문집》 권17 고대산 경복사의 비래방장에서 보덕성사의 영정에 예배함.
東明故國危 / 동명왕의 옛나라가 위태해졌네
【성사는 원래 고구려 반룡사(盤龍寺) 스님이었는데 보장왕이 도교에 현혹되어 불법을 폐기하자 성사는 방장(方丈)을 날려 백제의 고대산(孤大山)에 이르렀다. 후에 한 신인이 고구려의 마령(馬嶺)에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패망이 며칠 안 남았다”고 하였다. 자세한 것은 『해동삼국사(海東三國史)』와 같다.】
《대각국사문집》 권17 고대산 경복사의 비래방장에서 보덕성사의 영정에 예배함.
《삼국사기》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려있다. 다만 《삼국사기》에는 《해동삼국사》의 기록과 달리 신인의 존재와 그가 한 예언이 언급되지 않았다.
9년(서기 650) 여름 6월, 반룡사(盤龍寺)의 보덕화상(普德和尙)이 국가에서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믿지 않는다고 하여, 남쪽에 있는 완산(完山)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겨갔다.
《삼국사기》 제22권 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하 #
《삼국사기》 제22권 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하 #
6. 관련 문서
[1]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에 등장하는 책이다.[2] 고려의 승려 의천의 시와 말씀을 모은 책으로 한동안 실전되었으나 1937년 해인사에서 발견되었다. 총 22권인데, 김부식이 쓴 영통사 대각국사비(靈通寺 大覺國師碑)에는 20권이 남아있다고 기록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 추가된 부분이 존재하는 듯 하다.[3] 본인은 괴력난신을 배격하는 입장이고, 그래서 김부식도 삼국사기에 관련 내용을 생략한 것 아닐까 하고 추정했지만, 계속 읽다보니 그래도 전할 가치는 있다고 봐서 전한다고 적어놨다.[4] 다만 삼국사기 또한 통일 이전만 따지면 고구려본기의 분량이 신라본기보다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