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발해의 장군.2. 정보
발해의 장군들 중 유일하게 군사적인 군공이 알려진 장군.[1] 발해 조정과 계약을 한 해적이거나 고구려 귀족이라고 보는 시각, 고구려 해상 세력의 잔당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지만 남아있는 기록 자체가 희박하여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은 없다.《구당서》[2], 《신당서》[3], 《자치통감》[4], 《책부원귀》[5] 등 중국 사서 및 김장청의 《김유신행록》[6], 최치원의 〈상태사시중장〉[7]과 《삼국유사》[8]에 장문휴의 등주 공격과 그 여파가 적혀 있다. 아래의 《삼국사기》 신라본기 기사는 그 중 《구당서》와 《자치통감》, 《책부원귀》의 기록을 취합한 것이다. #
三十二年, 秋七月, 唐玄宗, 以渤海靺鞨越海入寇登州, 遣太僕員外卿金思蘭歸國, 仍加授王爲開府儀同三司·寧海軍使, 發兵擊靺鞨南鄙. 會大雪丈餘, 山路阻隘, 士卒死者過半, 無功而還. 金思蘭本王族, 先因入朝, 恭而有禮, 因留宿衛. 及是, 委以出疆之任.
32년(서기 733년) 가을 7월, 발해말갈(渤海靺鞨)[9]이 바다를 건너 등주(登州)를 침범하였다. 당 현종이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김사란(金思蘭)을 귀국시켜 임금에게 관작을 더해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영해군사(寧海軍使)로 삼고, 병사를 일으켜 말갈의 남쪽 변방을 치도록 하였다. 때마침 큰 눈이 한 길이 넘게 내려 산길이 막히고, 병사 중 죽은 사람이 절반이 넘어 아무런 전공도 없이 돌아왔다. 김사란은 본래 왕족이었는데, 앞서 당나라에 들어가 조회하였을 때 사람됨이 공손하고 예의가 있었으므로 머물러 숙위(宿衛)하게 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외지로 나가는 사신의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32년(서기 733년) 가을 7월, 발해말갈(渤海靺鞨)[9]이 바다를 건너 등주(登州)를 침범하였다. 당 현종이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김사란(金思蘭)을 귀국시켜 임금에게 관작을 더해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영해군사(寧海軍使)로 삼고, 병사를 일으켜 말갈의 남쪽 변방을 치도록 하였다. 때마침 큰 눈이 한 길이 넘게 내려 산길이 막히고, 병사 중 죽은 사람이 절반이 넘어 아무런 전공도 없이 돌아왔다. 김사란은 본래 왕족이었는데, 앞서 당나라에 들어가 조회하였을 때 사람됨이 공손하고 예의가 있었으므로 머물러 숙위(宿衛)하게 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외지로 나가는 사신의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732년 9월, 무왕의 명을 받아 산둥 반도의 등주를 기습하여 약탈하고 등주자사 위준(韋俊)을 죽였다. 이에 당은 좌령군장군 갈복순을 보내 반격을 명했으나 발해군은 이미 성과를 거둔 후 철수한 상태였다. 이후 등주에는 실업자가 넘치는 등 발해군의 기습으로 인한 피해가 컸다고 한다.[10] 당나라는 이듬해인 733년 1월에 대문예로 하여금 발해군을 치도록 하는 한편, 당에 머무르던 신라의 김사란[11]을 본국에 파견하여 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군은 마도산 전투에서 패전했고, 김윤중이 이끄는 신라군은 발해 남부까지 갔다가 폭설로 인해 퇴각하고 말았다.
등주는 당에서 발해를 해로로 공격하는데 있어서 최적의 군항으로 이용될 수 있는 지역이었다. 이 시기 육로는 거란, 돌궐 등과 얽혀 있었기 때문에 신라로 하여금 발해의 후방을 치게 하고 바다를 통해 수도를 직접 공격하는 과거 백제 공격과 같은 형태를 노릴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발해의 입장에서는 등주가 군사적 목표점으로서 의미 부여가 된다.
이때 요동 반도에서 당군의 저지가 보이지 않고 산둥성과 하북성에 이르러서야 저지선이 형성되는 점, 요동 일대를 관할하는 발해의 직책이 보이는 점과 더불어 발해가 이미 이 시점에서 요동 일대를 차지했다고 판단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1] 발해 장군들에 대해 남아 있는 발해의 기록 자체가 없다. 장문휴 개인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고 발해의 등주 공격 내용이 본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2] 본기 개원 20년(732년) 9월 을사(5일)조, 발해말갈전, 신라전[3] 오승체전, 발해전, 신라전[4] 당기 개원 20년(732년) 9월조, 당기 개원 21년(733년) 정월 정사(18일)·경신(21일)조[5] 외신부 봉책 개원 21년(733년)조, 외신부 포이 개원 21년(733년) 정월 경신(21일)조[6] 삼국사기 김유신전 부록 윤충[7] 삼국사기 최치원전[8] 제1 기이 말갈발해조, 제2 기이 효성왕조[9] 《구당서》에서 발해를 지칭하는 표현 중 하나다.[10] 당나라 허맹용(許孟容, ?~818)이 지은 〈오승체 묘지명〉에 "발해가 위쪽으로 마도산에 이르자 관리와 백성들이 달아나고 흩어지며 생업을 잃었다(渤海上至馬都山吏民逃徙失業)"는 기록이 있다.[11] 성덕왕의 친척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