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왕족 | |
국적 | 발해 > 당나라 |
당 직위 |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
이름 | 대문예(大門藝) |
부왕 | 고왕(高王) |
형제 | 대무예(大武藝), 대호아(大湖雅), 대림(大琳) |
생몰년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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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해의 왕족. 발해의 시조 대조영의 둘째 아들이고 무왕 대무예의 친동생이다.[1] 후술되어 있듯이 형 대무예와의 대립으로 한편의 영화를 찍었다. 발해에서 도망친 이후 당나라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죽었다. 남아있는 기록도 얼마 없는 발해사에서 이렇게 극적인 가족사도 드물듯.2. 생애
생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다. 몰년 정도는 남아있을 법도 하건만 열전에도 남지 않고 따로 기록도 없는걸 보면 당나라 망명 이후 녹을 먹고 산게 아니라 그냥 조용히 죽어지낸 것 같다. 하여튼 발해 고왕인 대조영 때 당에서 온 사신을 따라가 숙위로 머물고 있다가 당현종 초에 발해로 돌아왔다. 그래서 당의 정세에 밝았다고 한다.726년(무왕 8년)에 발해와 대립하고 있던 흑수말갈에 당이 흑수주를 설치하고 장사를 파견하여 지배하고자 했다. 이에 대무예는 흑수말갈과 당이 손을 잡고 발해를 협공할 셈이라 여기고 대문예와 임아에게 명하며 흑수말갈을 공격하게 했다. 위치상 흑수말갈은 발해의 동북쪽에 있었고 당은 발해의 서남쪽에 있었으니[2] 발해로서는 완전히 양면으로 포위를 당한 형세였다.
그러나 당나라의 강성함과 양국의 국력 차를 잘 알고 있던 대문예는 무왕에게 신생국 발해의 국력이 옛 고구려의 1/3도 안되고 고구려조차 30만 대군으로 맞섰지만 결국 당한테 멸망당하고 말았는데 지금 당과 대립하는건 자살 행위라며 이를 만류했다. 하지만 무왕은 이를 씹고 진군을 명했다. 흑수말갈의 경계에 이르러 대문예가 다시 형인 무왕을 말리자 무왕이 대노하여 대문예를 대일하로 교체하며 그를 죽이려 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대문예는 당으로 망명했다.[3] 대문예는 당에서 당 현종을 알현하여 그의 재능을 인정받아 좌효위장군을 제수받고 당나라 사람이 되어 자리를 잡았다. 무왕은 그가 강행한 흑수말갈 정벌을 성공했지만 당으로 망명한 동생에 대한 분이 덜 풀렸는지 마문궤 등을 당에 보내 사정을 말하고 대문예를 죽여달라고 했다.
하지만 당현종은 그를 안서(현 신장 위구르 자치구, 서역 지방)에 머무르도록 하고 대문예가 불쌍해서 의리상 못 죽인다고 발해에 통보하며 영남에 유배를 보냈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이 무왕의 귀에 들어가자 무왕은 다시 이진언을 당에 보내 왜 거짓을 말하냐고 항의하고 대문예를 죽여달라고 다시 요구했다. 하지만 무왕의 항의가 쓰인 편지가 굉장히 무례한터라 이에 대노한 당현종은 비밀을 못 지킨 이들을 처벌하는 한편 발해에는 사신을 보내어 형제간의 우애를 생각해서 하지 말라고 간곡히 타일렀다.[4]
당현종이 무왕의 청을 거부하고 역으로 그를 질책하고 비난하자 무왕은 화가 치밀어 732년 장수 장문휴에게 명하여 당의 등주(현재의 산둥 반도) 지역을 공격해서 등주자사 위준을 전사시키고 유주(현재의 베이징 부근)로 진군하다가 퇴각했다. 분노한 당에서는 대문예로 하여금 유주에서 병사를 모아서 치게 하고 733년 당에 머무르고 있던 김사란을 신라로 보내어 양국 관계 회복을 빌미로[5] 발해를 공격하게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대문예는 출격했으나 마도산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김윤중 혹은 김사란이 이끌던 신라군은 북진하다가 눈을 핑계로 회군한다. 다만 발해도 당의 수비벽에 막혀 그 이상 진격하지는 못한다.
대문예와 발해의 자객들이 싸웠던 낙양교(옛 천진교) |
전투에서 이기고도 당의 본토를 공격할 수 없고 대문예도 어찌하지 못하자 무왕의 분노는 더욱 심해져 자신의 형제인 대문예한테 기어이 자객을 보내는 수준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무왕이 당에 파견한 자객들은 낙양 천진교에서 대문예 암살에 성공할 뻔도 했으나 대문예가 직접 자객들과 맞서 싸워 물리치며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이후 대문예는 죽을 때까지 형인 무왕과 화해하지 못하고 당나라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당나라 사람으로 편안히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무왕 말기에는 당과 발해의 화친이 이루어졌음에도 살아생전엔 형과 화해하지 못하고 발해로도 돌아오지 못한거 보면, 형 대무예와의 개인적 앙금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디서 묘지명이라도 발견됐으면 당시 상황을 좀 더 상세히 알 수 있겠지만, 발견되지 않았다.
3. 여담
형제간의 대립, 강대국과의 관계에 대한 의견차에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스토리가 약간 보이기도 한다. 그 외엔 영양왕과 영류왕의 관계와도 유사하다.[6] 형제 중 하나가 당의 관직을 받아 자국을 공격한다는 점에서는 연남생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도 있다.사실 일반적으론 지금도 대중들 사이에서 소현세자에 대한 긍정적 환상이 있고, 상대 평가라 그런지 효종에 대해서는 약간 세상물정 모르는 외골수로 접근하는 데에 비해, 대문예는 딱히 사대적이라고 까이기보다는 그래도 현실에 기반한 조언을 친형에게 했던 것이라고 인정받으며, 무왕은 그런 조언을 강경하게 뿌리치고 당과의 외교에서 주체적인 태도를 견지했지만 입만 산 건 아니라 결국 발해의 자주권을 확립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당시 당은 지금의 미국과 비슷한 위치였고[7][8] 발해의 국력도 스스로가 고구려의 1/3도 안된다고 못박아버릴 정도로 당에 비하면 새발의 피도 안 되는 갓난아기와 같았으니 당을 상대로 맞선다는 것 자체가 국가 존폐를 우려할 엄청난 리스크를 감수하는 일이었다. 다만 당과의 거리 등을 계산해 거란, 돌궐 등 주변국들과 연대하고 당에 선제 기습 공격을 가하는 등 발해 무왕이 이를 굉장히 잘 극복해내면서 대문예의 입지가 묘해지긴 했다.
이러한 형제간 대립의 내면엔 단순한 의견차보단 왕위 계승 다툼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왕위계승을 주장할 수 있는 대문예가 당으로 망명한 사건은 당이 발해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였으나, 당은 이를 날려먹고 만다.
2000년대에 방영된 KBS 한국사 傳에서 이 과정을 나름 상세히 다루었는데, 바로 '최초의 중원 침공, 당을 정벌하라 무왕 대무예' 편이다. 사건의 흐름을 깔끔하게 잘 정리해놓았다. 또 제작진이 중국을 돌아다니며 직접 발품 팔아 만든 덕에 현장감도 있고 자료조사도 충실히 했는지 이것저것 볼거리가 풍부한 편이다. 다만 아무래도 어느 정도 국수주의 사관이 개입할 수 밖에 없는 터라 연합군이 격돌한 마도산 전투를 발해군이 주역으로 치른 것처럼 묘사해놓긴 했다. 물론 군사적으로면 모를까 정치적으로 세 세력을 규합해 당에 대항한 주체가 발해이긴 했다.
[1] 대무예가 무왕이고 무왕의 뒤를 이은 왕이 문왕이라서 문왕의 이름이 대문예인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지만 문왕은 무왕의 아들인 대흠무이고 대문예의 '문'자 한자도 문왕의 '문'자 한자인 文자가 아니라 門자이다. 참고로 대무예와 무왕의 '무'자는 둘 다 武자이다.[2] 물론 흑수말갈과 당나라는 육지로 바로 맞닿아있지는 않았다. 중간에 거란, 돌궐, 발해가 있었기 때문. 다만 황해를 통해 해상으로 공격해올 가능성은 있었다.[3] 비슷한 시기에 부여부의 대수령이라는 낙사계라는 인물이 당나라로 투항한 것을 낙사계 묘지명으로 알 수 있기 때문에, 전쟁 반대파는 대문예 외에도 있었고 720년대 발해 안에서 꽤나 의견 충돌이 있었다가 결국 축출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4] 이때 국서 내용이 상당히 재미있다. "곤란한 처지가 되어서 나한테 항복해 온 사람을 인지상정으로 어떻게 내칠 수 있겠냐", "내가 네 말대로 대문예를 안 죽이고 있는건 대문예를 감싸서가 아니라 네가 친동생을 죽인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라고 손가락질 받을까봐 걱정돼서 그런 거지"라고 달래는가 싶다가 갑자기 분위기가 돌변해서 "솔직히 니가 믿는게 당이랑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 말고 뭐 있냐? 기어이 주제 파악 못하고 까불겠다는 거냐?"라는 식으로 고압적으로 나가며 무왕이 동생을 죽이려는 것은 패륜에다 악행이라고 질책하며 그를 무모한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 어리석은 왕이라며 제대로 비난하고 정곡을 찌른다. 그런데 정작 자치통감에서 사마광은 이러한 당현종의 태도를 천자가 되어가지고 제후 앞에서 빌빌거리기나 하고 뭐하는 짓이냐고 깠다.[5] 신라와 당나라는 나당전쟁으로 치고받은 이후로 거의 단교 상태에 가까울 정도로 사이가 서먹해져 있을 때였다.[6] 다만 이들에 비교하는건 영양왕-영류왕한테 실례인게 이들은 왕으로서의 정치적 노선이라면 모를까 형제 관계를 의심할 만한 정황은 많지 않다. 오히려 영양왕 때 있었던 고구려-수 전쟁에서 을지문덕 다음으로 큰 공을 세운 장수가 영류왕이다.[7] 중국은 이미 한나라 때에도 위상이 대단했다. 더군다나 당은 그 중국의 역대 왕조 가운데에서도 손꼽히는 군사 강국이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당나라의 군주는 당현종으로 등주성 전투가 벌어진 732~733년은 아직 당현종이 멀쩡하던 시기였다.[8] 사실 위의 내용들은 아주 틀린 것은 아니면서도 맞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역사적으로 당나라의 군사적 역량이 가장 강성했던 시기는 당 태종~고종시기로 사방으로 공세를 펼쳐서 위엄을 드러냈으나, 우리가 알다시피 나당전쟁시기쯤부터 중국 서부의 티벳이 강성해지면서 당의 군사력이 수도 장안 인근의 관중지역으로 집중되어야 하면서 신라가 이길 근거의 하나가 되었다. 또한 고종 사후 무측천시기에는 거란이 일어나서 하북일대를 점거하는 사태까지 생기면서 발해 건국의 시초가 되기도 하는 등 당의 군사력은 그 이전과는 달리 분명히 약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동북으로 유주(北京) 이남지역에 방위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