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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edc89> 신라의 주 명주 (하서주) 溟州 (河西州) | |
하위 행정구역 | 9군 25현[1] |
주둔 정 | 이화혜정 |
설치 | 505년 |
폐지 | 936년 |
후신 | 동원경[2] |
현재 | 강원도 영동 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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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통일신라의 행정구역체계였던 9주 5소경의 주 중 하나로 중심지는 지금의 강릉시 일대이다. 명주의 영역은 지금의 강원도 영동 지역에 해당하며[3] 지리적으로는 영서 남부나 사실상의 영동 남부 지역에 해당되는 영월군, 평창군, 정선군도 포함했다. 경덕왕에 의해 한화(漢化)되기 이전의 지명은 하서주(河西州)였다.2. 역사
639년 선덕여왕에 의해 북소경[4]이라는 이름으로 소경이 설치되었으며, 이후 통일전쟁을 앞두고 658년 태종 무열왕에 의해 소경이 폐지되고 주가 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서라벌 왕위 계승전에서 밀려난 무열왕계 김주원이 이 곳에 정착하였으나, 큰 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명주군왕에 대한 내용은 아래 문서 참고.)후삼국시대에는 명주성주(溟州城主) 순식[5]의 영지였으며, 순식 외의 호족으로는 김주원의 후손인 김예 등이 있었다. 순식은 일찍이 궁예의 후고구려에 편입되었으나 태백산맥(백두대간)이라는 지형장벽 덕분에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였던 듯한데, 왕건의 쿠데타 이후에도 한동안 살아남아 배후에서 왕건을 견제하였다. 명주는 고려 건국 이후 936년 태조에 의해 동원경으로 승격되었으며, 940년에 다시 명주로 환원되었다.
3. 명주의 관할 군현
9군 25현[6]- 명주(溟州) : 지금의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일대로, 4개 영현(領縣)을 관할하였다. 치소는 지금의 강릉 시내에 있던 강릉읍성(江陵邑城)과 예국고성(濊國古城) 일대의 평지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며, 방어용 산성으로 서쪽 외곽에 명주산성(溟州山城)[7]을 두었다.
- 정선현(旌善縣) : 지금의 강원특별자치도 정선군 정선읍 일대로, 정선현의 성곽으로는 정선 애산리 산성과 정선 고성리 산성 등이 있다.
- 속제현(梀隄縣)[8] : 지금의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용평면 속사리 일대[9] 혹은, 강원특별자치도 정선군 임계면 일대[10]로 비정된다. 속제현의 성곽으로는 평창 대화산성(大和山城)[11] 혹은, 정선 송계리 산성[12]이 있다.
- 지산현(支山縣) : 지금의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연곡면 일대로 비정된다. 지산현의 성으로는 연곡면의 교허성(校虛城, 방내리성)이 있으며, 고분으로는 영진리 고분군이 있다.
- 동산현(洞山縣) : 지금의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현남면 동산리 일대로 비정된다. 동산현의 성으로는 현남면의 후포매리 산성이 있으며, 후포매리와 원포리에 고분군이 남아 있다.
4.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
* 해당 문서는 명주군왕에 대한 한 입장만을 다루고 있으며, 추후의 발견이나 새로운 연구를 통해 달라질 수 있습니다.학계에서는 명주군왕의 존재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으로 본다. 이에 대해 김주원이 원성왕과의 왕위 쟁탈전에서 패배하여 명주로 낙향한 것은 사실로 볼 수는 있으나, 명주군왕이라 불릴 정도의 거대한 세력을 이루거나 명주군왕에 책봉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본다.
4.1. 사료의 문제
명주군왕에 대한 내용은 후대에 조작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김주원이 명주군왕에 책봉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사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거의 유일하다. 하지만, 김주원이 명주군왕으로 책봉되고 명주를 식읍으로 받았다고 기록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인물조가 저술된 시기는 신라 당대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조선전기로, 조선전기는 명족의식에 의해 각 가문의 족보가 활발히 제작되던 시기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인물조 역시 저술 과정에서 각 지방 거족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였으며, 당시 강릉 일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대표적인 거족이 김주원을 시조로 삼는 강릉 김씨였다.즉, 신증동국여지승람 인물조의 내용은 당시 강릉 김씨 가문에서 자신의 조상을 선양하기 위해 조작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에 사료로써의 가치가 매우 떨어진다. 무엇보다도 명주군왕의 존재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사서에서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4.2. 식읍의 문제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따르면, 786년(원성왕 2년)에 김주원을 명주군왕으로 봉하고 명주, 익령(翼嶺), 삼척, 근을어(斤乙於), 울진 등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고 전한다.하지만, 김주원과의 정치적 다툼 과정에서 승리하여 즉위한 원성왕의 입장에서 왕위 쟁탈전에서 밀려나 지방으로 내려간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명망 높은 왕족에게 막대한 식읍과 제후왕의 칭호를 주어 힘을 실어줄 이유가 없다. 더욱이 후대에 고려로 귀부하여 왕건에게 정통성을 부여해 주는 등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큰 힘이 되었던 경순왕 조차도 경주 1개 군 정도의 식읍밖에 받지 못했는데,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왕족에게 5개 군현을 식읍으로 주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4.3. 기타 문제
위의 내용들 외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당시 이미 사망했던 정의태후가 교지를 내렸다고 기록하거나, 신라시대의 관등인 상대등을 상대장등으로 잘못 표기하는 등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는 문제점이 많다.또한, 강름김씨세보(江陵金氏世譜)와 명주군왕신도비문(溟州郡王神道碑文) 등에서 김주원이 최대나(崔大奈), 함신(咸信), 박영(朴榮) 등과 함께 명주에 정착했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최, 함, 박씨는 모두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전하는 강릉의 토성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해당 성씨들의 시조들은 모두 고려 건국 이후에 등장하므로 김주원과 연관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5. 여담
명주의 명(溟)은 강릉의 옛 이름인 아스라(하서량河西良, 하슬라何瑟羅로 음차, "아스라이"의 어간)를 훈차한 것으로 보인다.명주에 주둔했던 부대는 녹색 옷깃의 이화혜정(伊火兮停)으로, 연무현(이화혜현)[15]에 주둔했다. 여기에 청흑·청적(靑黑靑赤) 만보당 2부대가 배치되었다.
대한민국의 명주군이 바로 여기서 따온 지명이다.
[1] 경덕왕 당시[2] 940년에 다시 명주로 환원[3] 지금의 영서는 대부분 삭주 관할이였다.[4] 하슬라소경(何瑟羅小京)이라고도 하였다.[5] 왕씨 사성 이전에는 성이 없었으며, 김주원이나 강릉 김씨와의 혈연적 관계는 확인되지 않는다.[6] 경덕왕 당시[7]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 40 일대[8] 동제현이라고도 한다.[9] 이병도, 1977[10] 홍영호, 2010[11] 평창군 용평면설[12] 정선군 임계면설[13] 해서현(海西縣)이라고도 한다.[14] 만향현(滿鄕縣)이라고도 한다.[15] 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