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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百濟本記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백제의 역사서다.《삼국사기》를 비롯한 한국의 사서들에서는 언급되지 않으며,《일본서기》가 인용을 함으로써 존재가 확인된 사서다.《삼국사기》의 기록과 부합하는 기록도 나오나,《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 백제 및 가야와 관련된 기록들이 나오기 때문에 비록 일본의 입장에서 걸러졌다곤 하지만 백제의 입장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사료다.
조금 웃긴 점도 있는데, 게이타이 덴노 대의《일본서기 》기록을 보면,《백제본기》를 인용하며 일본의 덴노 및 황태자와 황자들이 모두 죽었다고 되어 있다. 일본 국내의 사서나 문헌에는 없는 내용을 백제의 사서가 전하고 있는 것이다.
주요 기록이 백제 성왕의 치세(531년, 545년, 546년)에 걸쳐 있고, 인용문의 범위가 509~556년이기 때문에 위덕왕 시기에 편찬된 기록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일본서기》의 긴메이 덴노 관련 기록들이 백제 성왕의 행적과 비슷한 이유도《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이 이 책을 그대로 복붙 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존재한다. 실제로 성왕 시기, 한반도의 정세에서 가장 중요했던 사비회의와 관련된 내용은 지나칠 정도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학계에선《백제본기》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놓고 일부만 자신들의 입맛에 각색한 것으로 본다. 이 외에《백제본기》라는 인용글은 없으나, 관산성 전투의 행적과 같은 몇 몇 내용의 경우,《백제본기》의 기록을 따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 《일본서기》의 인용문
《일본서기》에 인용된 내용은 게이타이 덴노와 긴메이 덴노의 기록에서 일부가 전해진다.2.1. 계체기
겨울 12월 병신삭 경자(5일), 남야릉(藍野陵;아위노노미사자키)에 장사지냈다【어떤 책에서는 천황 28년 이 해의 간지 갑인에 죽었다(崩)고 하였다. 여기서 25년 이해의 간지 신해에 죽었다(崩)고 한 것은 『백제본기』를 취하여 기록한 것이다. 그 기록에서는 ‘이 해의 간지 신해 3월, 군사가 안라로 나아가 걸탁성(乞乇城)을 쌓았다. 같은 달, 고구려는 그 왕 안(安)을 시해하였다. 또한 일본 천황 및 태자 황자가 모두 죽었다고 한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신해년은 25년에 해당한다. 후에 교감하는 자가 어느 것이 옳은지 알 것이다.】
《일본서기》 계체기 25년 계체천황을 장사지냄
《일본서기》 계체기 25년 계체천황을 장사지냄
2.2. 흠명기
가을 7월에 백제는 안라일본부(安羅日本府)와 신라가 통모한다는 말을 듣고 전부(前部) 나솔(奈率) 비리막고(鼻利莫古), 나솔 선문(宣文), 중부(中部) 나솔 목리미순(木刕眯淳), 기신 나솔 미마사(紀臣奈率彌麻沙)【기신 나솔은 아마 기신(紀臣)이 한(韓)의 부인을 얻어 낳았을 것이다. 백제에 머물러 나솔이 된 사람이다. 그 아버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른 경우도 모두 이에 준한다.】 등을 안라에 보내 신라에 간 임나집사(任那執事)를 소환하여 임나를 세우는 것을 도모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따로 안라의 일본부의 하내직(河內直)이 신라와 통모하고 있는 것을 심하게 꾸짖었다【『백제본기(百濟本記)』에서는 “가부직비직(加不至費直), 아현이나사(阿賢移那斯), 좌로마도(佐魯麻都)등이다.”라고 말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일본서기》 권제19 흠명기 2년 안라가 신라와 통모하는 것을 꾸짖음
《일본서기》 권제19 흠명기 2년 안라가 신라와 통모하는 것을 꾸짖음
3월에 백제가 나솔 아탁득문(奈率 阿乇得文), 허세 나솔 기마(許勢奈率奇麻), 물부 나솔 가비(物部奈率哥非)등을 보내서 표를 올려 “나솔 미마사, 나솔 기련 등이 신의 나라에 와서 조서를 바치며 ‘그대들은 거기에 있는 일본부와 함께 좋은 계책을 내어 하루빨리 임나를 세워라. 신중히 진행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속지 말라.’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진수련 등이 신의 나라에 와서 칙서를 바치며 임나를 세우는 일을 물었습니다. 삼가 칙서를 받들어 시기를 놓치지 않고 협의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신을 보내 일본부【『백제본기』에는 오호파신(烏胡跛臣;우코하노오미)을 불렀다고 한다. 아마 이는 적신(的臣)일 것이다.】와 임나(의 한기)를 소집했습니다.(중략) 무릇 임나는 안라를 형(兄)으로 여기고 오로지 그 뜻을 따릅니다. 안라인은 일본부를 하늘[天]처럼 여기고 오직 그 뜻을 따릅니다【『백제본기』에는 안라를 부(父)로, 일본부를 본(本)으로 여긴다고 한다.】.
《일본서기》 권제19 흠명기 5년 백제가 임나의 정무와 관련된 그간의 일을 알리며 이나사와 마도의 본국 송환을 요청함
《일본서기》 권제19 흠명기 5년 백제가 임나의 정무와 관련된 그간의 일을 알리며 이나사와 마도의 본국 송환을 요청함
그런데 이나사와 마도가 남의 경계를 넘어 경작을 하고 6월에 도망가 버렸습니다. 인기미 다음의 허세신(許勢臣;코세노오미)의 때【『백제본기』에는 우리가 인기미를 머무르게 한 후에 온 기주신(旣酒臣;코세노오미)의 때에 이르러라고 한다. 모두 잘 알 수 없다.】에는 신라가 다시 남의 경계를 침략한 일이 없었습니다. 안라도 신라가 핍박하여 경작을 못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일본서기》 권제19 흠명기 5년 임나 부흥에 대한 신라의 방해와 적신의 허위보고
《일본서기》 권제19 흠명기 5년 임나 부흥에 대한 신라의 방해와 적신의 허위보고
겨울 10월에 백제의 사인 나솔 득문(奈率得文)과 나솔 기마(奈率奇麻) 등이 돌아갔다【『백제본기』에는 겨울 10월 나솔 득문과 나솔 기마 등이 일본에서 돌아와서 “하내직, 이나사, 마도 등의 일을 주상했지만 이에 관해서는 아무런 칙도 없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일본서기》 권제19 흠명기 5년 백제 사신들이 돌아감
《일본서기》 권제19 흠명기 5년 백제 사신들이 돌아감
이 해에 고구려에 대란(大亂)이 있었다. 많은 사람이 살해당하였다.【『백제본기』에는 “12월 갑오(20일)에 고려국의 세군(細群)과 추군(麁群)이 궁문에서 싸웠다. 북을 치면서 전투를 벌였다. 세군이 패하였으나 사흘 동안 군사를 해산하지 않았다. 세군의 자손을 모두 사로잡아 죽였다. 무술(24일)에 박국(狛國)의 향강상왕(香岡上王)이 죽었다(薨).”고 한다.】
《일본서기》 권제19 흠명기 6년 고구려에서의 대란(大亂)
《일본서기》 권제19 흠명기 6년 고구려에서의 대란(大亂)
이 해에 고구려에 대란이 있었다. 무릇 싸우다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백제본기』에서 “고구려에서 정월 병오에 중부인(中夫人)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나이가 8살이었다. 박왕(狛王)에게는 3명의 부인이 있었다. 정부인(正夫人)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중부인(中夫人)이 세자(世子)를 낳았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추군(麁群)이었다. 소부인(小夫人)도 아들을 낳았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세군(細群)이었다. 박왕이 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세군과 추군이 각각 부인이 낳은 아들을 즉위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세군 측에서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고 한다.】
《일본서기》 권제19 흠명기 7년 고구려에서의 대란(大亂)
《일본서기》 권제19 흠명기 7년 고구려에서의 대란(大亂)
11년 봄 2월 신사삭 경인(10일)에 백제에 사신을 보내어【『백제본기』에는 “3월 12일 신유에 일본의 사신 아비다(阿比多;아히타)가 배 3척을 이끌고 도성 아래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조를 내려 “짐이 장덕 구귀와 고덕 마진문(馬進文) 등이 올린 표의 뜻에 따라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하나하나 교시하겠다.
《일본서기》 권제19 흠명기 11년 백제에 사신을 보내 마무(馬武)를 본국으로 보내라고 함
《일본서기》 권제19 흠명기 11년 백제에 사신을 보내 마무(馬武)를 본국으로 보내라고 함
여름 4월 경진삭(1일)에 백제에 있는 일본의 사자가 바야흐로 돌아가고자 하였다【『백제본기』에는 4월 1일 경진에 일본(日本) 아비다(阿比多)가 돌아갔다고 한다.】. 백제왕 성명이 사자[王人]에게 “임나의 일은 칙을 받들어 굳게 지키겠다. 연나사와 마도의 일은 문책할 것인지 아닌지는 오로지 칙에 따를 것이다.”라고 말하고 고구려 노(奴) 6구를 바치고, 별도로 사자에게 노(奴) 1구를 주었다【모두 이림(爾林)을 공격하여 사로잡은 노예이다.】.
《일본서기》 권제19 흠명기 11년 백제에 있던 일본의 사신이 성왕의 뜻을 가지고 돌아옴
《일본서기》 권제19 흠명기 11년 백제에 있던 일본의 사신이 성왕의 뜻을 가지고 돌아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