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04 17:36:21

한사군

한국사 韓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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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
기원전 108 ~ 기원전 82 진번군 임둔군 *
기원전 82 ~ 기원전 75 낙랑군
기원전 75 ~ 1세기 현도군
(흥경으로 이현)
1세기 ~ 204 (무순으로 이현)
204 ~ 313 대방군**
313 ~ 404 (요서로 이현) (요서로 이현)
* 현도군은 기원전 107년 설치되었음.
** 대방군은 314년 한반도에서 축출되었음.


1. 개요2. 역사3. 위치4. 지배 성격5. 최씨낙랑국과 낙랑군은 같은 것?6.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7. 기타

1. 개요

漢四郡

한무제위만조선을 공격해 멸망시킨 뒤 그 자리에 세웠다고 하는 4개 군을 포함한 5개의 군급 행정 구역. 인접해 있는 부여, 고구려 등과는 직접적으로 대치 및 교류하기도 했고, 한반도 남부의 삼한과도 적극적으로 철재 등을 교역하고 문물을 전파하는 등 한국사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주고받았다. 중국 본토가 오호십육국시대의 난세로 접어들며 약화되고 고구려가 성장하며 흡수, 소멸했다.

4개 군이 같이 유지된 기간은 25년으로 매우 짧아서 학술적으로는 '한군현'이라 부르기도 하며, '동방변군'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래도 세간에 가장 잘 알려진 명칭은 한사군.

2. 역사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한나라가 멸망시킨 후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이 설치되고 이듬해 (기원전 107년) 현도군이 설치되었다. 고조선 땅에 설치한 한사군의 상황은 일단 한서 지리지의 내용으로 알 수 있는데, 대체적으로 고조선 지역의 관습법 혹은 자체적 법률이 유지되었으며, 관리를 스스로 충당하지 못해 인접한 요동군 출신을 관리로 데려왔다. 다만 최근에는 한의 법률을 시행하려 나름대로 노력한 흔적인 죽간들이 발굴되면서 '시도는 했다'는 정도로 정리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樂浪 朝鮮民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羞之, 嫁取無所讎,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辟. 其田民飮食以籩豆, 都邑頗放效吏及內郡賈人, 往往以杯器食. 郡初取吏於遼東, 吏見民無閉臧, 及賈人往者, 夜則爲盜, 俗稍益薄. 今於犯禁窾多, 至六十餘條.

낙랑 조선 백성들의 범금 팔조는 서로 사람을 죽이면 죽임으로써 갚고, 서로 상해를 입히면 곡식으로 갚으며, 서로 도둑질하는 자는 남자는 몰입(沒入)하여[1] 가노(家奴)로 삼고, 여자는 비(婢)로 삼는다. 스스로 속죄하고 싶으면 한 사람당 50만 전을 내야 한다. 비록 면하여 일반 백성이 되더라도 습속으로 오히려 차별하여, 혼인하고 싶어도 짝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하지 않아 문을 닫는 자가 없었고, 부인은 정숙하여 간음하지 않았다. 밭 가는 백성들은 변두(제사 그릇처럼 생긴 그릇)에 음식을 담아먹고, 도읍의 관리들은 (중국) 내군의 상인처럼 하여 왕왕 술잔 같은 그릇으로 식사한다. 낙랑군은 처음에 관리를 요동군에서 데려 왔다. 관리들이 백성들이 문을 닫지 않는 것을 보자, 급기야 상인들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밤이면 도둑질하여 풍속이 점점 박해졌다. 지금은 범금이 늘어나 60여 조가 되었다.

한사군 중 임둔군(위치 때문에 골치 아픔), 진번군 2군이 얼마 지나지 않은 기원전 82년에 폐지되어 주변 군현에 흡수통합하고 현도군은 고구려현의 반발로 후퇴하는 등 혼란을 겪고 있었지만, 낙랑군은 이 폐지된 군의 관할 구역 중 관리할 여력이 남아 있는 지역을 흡수하면서 한때 인구가 40만이 넘는 성대를 누렸다. 이 때 낙랑은 25개 현을 산하에 두고 함경남도 ~ 강원도 방향의 옛 임둔군 지역인 '영동 7현' 지역에 동부도위를, 황해도 방향의 옛 진번군 지역에는 남부도위를 두었는데 이는 이민족에 대한 방어 목적으로 보인다. 도위가 설치된 지역의 인구 밀도는 매우 낮았다.

기원전 1세기 낙랑군은 되도록이면 토착민에게 유화적인 정책을 펼치면서 현지에 적응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세형 동검 문화가 이 지역에서 계속되고, 평양 정백동 고분군의 '부조예군', '부조장인' 등의 인장이 발견된 점 등으로 유추한 것이다. 또한 삼한의 군장으로 추정되는 염사치의 귀화 시도 기록이 나타나는 것이나 멀리 있는 진한이 협박에 데꿀멍하는 기록, 초기 백제신라가 낙랑에게 상당한 견제를 당하는 기록 등을 통해 보아 주변국과의 관계 또한 낙랑군에 유리한 방향으로 흐른 것으로 보인다. 1세기까지 낙랑군은 고구려, 삼한, 등의 사이에서 동방의 외교 창구가 되었고, 주변국에 단조 철기나 칠기(漆器) 등을 전하는 데도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주변국의 유력층에게는 낙랑군에서 얻을 수 있었던 조복(朝服)과 의책(衣幘)이 지위의 상징으로서 높은 인기를 누린 것으로 보인다. 묘제로는 덧널무덤이 나타난다.

이러한 부를 기반으로 전한 - 신나라 - 후한의 교체기로 중국 대륙이 혼란했던 서기 25년에 토인(土人, 고조선계 토착민 혹은 토착화된 한인) 왕조(王調)를 중심으로 태수를 죽이고 대장군 낙랑태수를 자칭, 사실상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광무제가 후한을 재건하면서 서기 30년에 이 지역에 왕준을 파견, 왕조가 세운 독립 낙랑은 마침 내분이 일어나 군삼로 왕굉(王閎)이 결조사 양읍 등과 함께 왕조를 살해하고 왕준을 맞이해 5년만에 싱겁게 멸망하였고, 낙랑군은 다시 한의 군현으로 편입되었다.

한편 32년 경 등장하여 37년 경 멸망하는 최씨낙랑국도 낙랑군과 같은 지역 혹은 낙랑군의 일부 지역이 독립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2] 이것이 맞다면 이 추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외에 혼란기에 적미의 난의 진원지였던 산둥 반도의 인구가 낙랑 지역으로 유입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광무제가 44년에 살수(청천강) 이남을 편입했다고 되어 있어 다소의 혼란은 있다. 어쨌건 이 때 도위 제도는 폐지되었는데, 이는 광무제의 일관적인 정책이기도 했지만 동부도위 지역, 즉 영동의 7현이 버려졌다. 아마도 고구려와 같은 이민족의 성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2세기 중반까지 낙랑군에 대한 기록은 매우 미미해진다. 부여의 111년 침공 기록이 있지만, 그것을 딱히 쇠퇴의 징후라고 보기는 어렵다. 2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면 다수의 인구가 삼한 지역으로 빠져나갔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고구려의 현도군 등 한 군현 공격이 두드러져 쇠퇴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요동공손씨 세력이 낙랑을 장악하면서 삼한로부터 다시 인구가 회복되었다고 전하는 등 다시 재건 단계에 들어섰다. 하지만 이미 북방에 대한 견제는 어려워졌는지, 낙랑군은 황해도에 대방군을 건설(남부도위가 위치하던 지역)하면서 중심축을 남쪽으로 돌린다.

요동 공손씨는 조조가 낙랑태수로 보낸 양무를 억류하는 등 낙랑을 자기 세력권에 두었다. 204년 요동의 지배자 공손강이 후한 헌제 건안 연간(196년 ~ 220년) 낙랑군 둔유현 (황해도 황주) 이남의 땅을 분할시켜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대방군 설치의 배경을 살펴보면 후한 말 군벌 세력이었던 공손강은 자립하면서 한반도 제종족에 대한 영향력을 넓히려고 했는데 당시 한반도 제종족의 세력이 커지면서 낙랑군의 영역과 군사력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었고, 점점 낙랑군이 반 독립화하던 중이었는데, 공손강의 대방군 신설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려던 목적으로 보인다. 즉, 자신의 세력 기반을 넓히기 위해, 반 독립화하는 낙랑군을 견제하기 위해[3] 대방군을 설치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한반도 제종족에 대한 영향력을 넓힐 수 없었다는 점과 낙랑군의 교역 확대를 이루지 못한 것은 지방 정권이던 공손씨 정권의 한계로 보인다.

이렇게 요동 공손씨 군벌이 낙랑을 지배하다가 3세기 중엽 위나라사마의고구려와 연합해 공손연의 요동을 공격, 멸망시켰다. 공손씨가 지배하던 한사군도 유주자사 관구검의 관할에 들어갔는데, 이 시기 고구려는 위나라와 싸웠다가 비류수 전투에서 대차게 깨졌다. 이후 양맥 전투에서는 고구려가 승리하기는 하지만 많은 피해를 입어 300년경까지는 더 이상 적극적인 세력확장을 하지 못하게 된다.

위나라 치하에서 부종사 오림은 진한의 8국을 낙랑군 소속으로 넣으려고 했는데 통역 실수로 인해 한인(韓人)들이 모두 격분해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이들을 토벌했는데, 궁준은 전사했지만 한을 멸망시켰다고 한다.[4] 이것을 백제 고이왕 13년(246년)의 기록[5]과 결부시키기도 하나, 시기가 다르고, 침략 대상이 다르다는 점에서 아닌 듯 하다. 하여튼 낙랑군은 이 때 주변국에 제대로 힘을 썼고, 주위의 소국들이 줄줄히 항복, 복속하는 상황에서 고이왕도 혼인 관계를 맺고 책계왕 때는 왕을 죽이고 분서왕 때 크게 한방 얻어맞았지만 얼마 안가 분서왕도 죽이는 등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급부상했다.[6]

중국 본토와 교통이 재개된 것도 무색하게, 위(삼국시대)를 뒤엎고 건국된 서진은 274년 낙랑군과 대방군을 평주 동이교위에 소속시키며 적극적으로 동방에 개입하려 했다. 동이교위가 동방 정책의 중심이 되면서 낙랑, 대방, 현도는 점점 세력이 쇠퇴해 가며, 그 사례로 한반도 남부의 마한진한은 더이상 과거처럼 한사군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중국과 교류를 하지 않고 270년대부터는 마한과 진한의 이름으로 중국 본토의 서진에 직접 나아가 통교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진의 삼국통일 이후 팔왕의 난영가의 난, 오호십육국시대의 개막으로 290~300년대경부터 한사군과 중국 본토 본국과의 연결 고리는 사실상 다시 끊긴 것이나 다름이 없어졌다. 과거 위나라에 패했던 피해를 수습한 고구려는 다시 낙랑군과 요동 · 현도군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였던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을 집요하게 공략하여 끝내 미천왕이 이를 수복했다. 서안평은 현재의 단동 지역으로 추정되는데, 압록강 건너편이 신의주라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공략이 힘든 곳이다. 굉장한 백제의 분서왕이 낙랑을 공격했다가 암살당하는 등 과거 삼한 지역 또한 압박을 가해왔다.

결국 미천왕 대인 313년 낙랑이 고구려에 의해 축출되었으며, 1년뒤인 314년에는 대방군 또한 멸망시켜 한반도의 한사군 축출을 완료했다.

고구려의 정복 직전에 탈출한 1,000여가의 낙랑인 세력은 모용외에게 투항했다. 이 모용씨 연나라 치하에서 낙랑군의 일부 유민들은 요서 지역으로 건너가 낙랑군 복원을 시도했지만[7]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4세기부터는 고구려나 백제의 책봉호에 낙랑 관련 관직이 나타나니 포기하는 면도 있었던 것 같고... 그러나 북제 시대에 폐지될 때까지 요서 지역에 군현의 형식은 남아 있었고, 수나라 양제의 원정 때도 이름은 남아 있었다.[8]

한편 고구려가 정복한 옛 한 군현 땅에 남아있는 유민도 많았고, 물론 한 군현이 군사적으로 무너졌다고 해서 문화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2세기 ~ 3세기부터 등장한 낙랑의 벽돌 무덤은 4세기까지 꾸준히 나타났고, 고구려도 이 지역에 중국 계통의 유주자사 진이나 동수 등을 파견하여 반발을 최소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편으로 굴식 돌방무덤으로 대표되는 고구려 문화의 침투를 동반한 것이었고, 광개토대왕 대 남부 7성의 건립이나 평양 지역 9개 사찰의 건립 등 정지 작업을 기반으로 장수왕 때는 이 지역이 '고구려의 수도 평양'으로 자리하게 된다.

3. 위치

파일:attachment/hansagoon.jpg

왼쪽 지도가 학계의 정설인 한반도 북부설이다.[9] 오른쪽 지도는 난하 요수설을 기반으로 한 지도로, 비정 연구니 뭐니 잔뜩 폼을 잡고 있지만 자기들끼리도 앞뒤 논리가 안맞는다 일명 재야사학에서 주장하는 것이다. 고고학적 성과를 보면 평양 낙랑 토성에서 낙랑 예관이라는 이름이 붙은 와당 발견, 한무제 때 쓰던 오수전 동전 + 3,000여 기에 이르는 목곽묘, 귀틀묘, 진실묘가 발굴, 황해북도 봉산군에서 대방태수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게다가 오른쪽 지도에 있는 요동군과 낙랑군 등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은 원안에 있는 영토, 오늘날 중국허베이성산둥성전국시대 연나라제나라의 땅으로, 진나라한나라 때도 매우 중요한 지방이었다.

주로 위치에 대한 논란이 많이 다뤄지는데, 금방 폐지되거나 이전되어 버린 나머지 세 군현보다 낙랑의 위치가 떡밥이었다. 물론 인터넷 등지에서 음모론의 형태를 띠고 있는 논란일 뿐, 학계에서는 위치에 대해서는 이미 일제강점기에 결론을 내었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문헌 사료만 가지고 일부 학자들이 한사군의 위치를 놓고 다른 곳으로 비정하는 일이 있었으나, 대다수는 한반도 북부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보았다.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지리지 등)이나 고려사 등 국가의 공인 사서 및 지리서, 그외 저명하고 가치 있는 사서들은 모두 평양 일대가 낙랑군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학계에서 낙랑군이 평양에 없었다고 보는 학자는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사실상 논쟁이 끝난 상황이다.

위치에 대한 논란의 실질적인 시발점은 신채호, 정인보 등의 민족 사학자들로서,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의 발굴이 조작된 것이라 주장하며 민족주의적인 방어 논리로서 제기되었다. 신채호는 평양 지방의 지명이 '낙랑'이며, 진번, 임둔, 현도 역시 마찬가지로 각각 가리키는 지명이 있을 것이라 했고, 한사군은 한무제삼조선 전체를 공격해 합병한 뒤 각각의 지명의 위치에 세우려고 하다가 실패한, 즉 '가설'된 군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한사군에 관한 신채호 등의 견해는 대부분이 원전의 한문을 오독했거나 추측이나 희망사항에 따른 결론이 나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현재 한국의 사학계는 이를 수용하지 않는다. 물론 당시 많은 민족 사학자들이 독립운동에 매진하면서 제대로 된 연구를 할 수 없는 환경이었던 점은 이해해야겠고, 일제에 대한 저항 측면에서 일부러 더 민족주의적 사고를 강조했던 점도 있겠으나, 학문적으로 역사는 진실을 찾는거지 목적에 끼워맞추는 분야가 아니다.

낙랑군의 위치에 관한 논란으로, 평양 근처의 낙랑군은 사실 최씨낙랑국이 아니냐는 논란이 존재한다. 자세한 것은 하단 및 해당 문서 참조.

한편, 북한에서는 리지린을 필두로 하여 '난하요수설'을 토대로 한 낙랑군 요서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북한의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고 주장을 위해 증거를 끼워 맞춘 수준이라서 철저하게 논파되어 현재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 어느 학계에서도 주류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 난하요수설을 바탕으로 한 낙랑군 요서설 또는 요동설을 지금도 일부에선 열심히 신봉하고 있는데, 바로 유사역사학자들. 이들은 인터넷과 언론, 출판 시장 같은 곳에서 끊임없이 이런 설들을 재생산하고 있다. 심지어 국회에서 토론회를 강제로 개최하기도 했다. 으악

4. 지배 성격

1916년 조선총독부에서 지원을 받아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절대 아니다. 해방 이후에도 북한 측에 의해 고고학적인 발굴은 꾸준히 계속되어 왔다. 예를 들어 1992년에는 평양 정백동 364호분에서 논어 목간이 발굴된 것이 알려졌으며 2005년에는 낙랑군 25개 현의 인구가 기록된 이른바 초원 4년 호구부 목간이 발견되어 중요한 연구 소재가 되어 있다. 물론 환빠들은 이런 거 모르기 때문에 이런 얘기하면 일제의 발굴 조사 결과를 추종한다고 깐다.[10] 북한은 1990년대 이후에도 일본의 식민지였단 말인가! 심지어 '북한 가서 직접 발굴하기 전까지는 모른다'고 하다가 '북한에서 이미 발굴했고 남한에서도 자료를 입수했다'고 하면 종북주의자라고 까는 신종 환빠도 있다(...). 그럼 뭐 세상 사람이 다 당신처럼 바보 같이 살라는 말도 아니고 어쩌라고

지금까지 대충 나온 자료는 평양 낙랑 토성의 낙랑 예관이라는 와당, 한나라의 오수전 동전, 3,000여기의 이르는 목곽묘, 귀틀묘, 진실묘, 황해북도 봉산군의 대방태수 무덤 등이 대표적이다.

근래에 들어서는 기존의 중국계 유물과 무덤 양식에 더해 낙랑에 속하는 초기 목곽묘에서 세형 동검이나 인장[11] 등이 출토되고, 다른 한편으로 한나라의 율령과 관련된 문자 자료들이 보고되면서 현지 유력자들이 낙랑군을 비롯한 군현 지배와 어떠한 관계를 맺었는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대중적인 인식처럼 소위 한사군 지역이 단순한 중국의 식민지였다고 보는 시각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말.

한사군과 동일한 성격의 사건이 있는데 바로 베트남남월(BC204~BC112)의 멸망과 한 군현의 설치이다. 고조선과 남월은 미시적으로야 관련이 없지만 한나라를 끼고 생각하면 매우 유사한 과정을 겪었다. 한 무제가 북·서 방면의 흉노를 정복한 이후 자연스럽게 관심을 돌린 것이 남쪽의 남월과 동쪽의 고조선이었다. 남월과 고조선 모두 기원전 2세기를 즈음하여 한과의 전쟁 국면으로 들어서는데 남월이 BC112년에 멸망하면서 9개의 한 군현이 설치된다. 이후 한은 고조선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BC108년에 고조선을 정복하면서 4개의 군현을 설치하게 된다.

낙랑을 비롯한 한사군의 성격이 그러하듯 남월의 9개 군현의 성격도 한족관료을 파견했음에도 피정복 민족의 영향력을 배제할 수 있을 정도의 역량은 없었으며[12][13] 결국 중원 밖의 군현들은 한의 통치와는 거리가 점차 멀어졌고 한문화와 재지문화의 교역지점과 같은 절충지대로 변모하였다.[14] 즉 결과적으로 본래의 목적인 한의 통치, 지배가 관철된 것이 아니고 현대의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형성과 같은 동아시아의 문화권을 형성하는 발단이 되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5. 최씨낙랑국과 낙랑군은 같은 것?

미천왕 때 합병당한 낙랑군이 대무신왕 때 합병당한 최씨 낙랑국과 같은 존재인지 별개의 국가인지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별개의 국가로 보는 쪽에서는 낙랑군을 평양과 그 주변으로, 낙랑국은 평양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을 것이라 추정한다. 또한 이에 관해서 경북 대학교 사학과 주보돈 교수 등은 낙랑군과 낙랑국이 평양 부근에 위치하면서 서로 다른 곳이라 보았다.

또한 낙랑공주의 아버지인 최리가 낙랑국의 이라고 기술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태수'가 아닌 것이다. 삼국사기 등이 쓰여진 시대에 '군'과 '국', '태수'와 '왕'[15]을 구별하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16] 또한 중국의 기록을 보더라도 낙랑 태수중에 최리라는 사람은 없었다.

별개의 국가가 아니라는 쪽에서는 낙랑군과 낙랑국의 이름이 같고 지리적으로도 같은 평양 지역에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실제 유물의 발굴로 평양에 낙랑군이 있었다는 점이 확인된 만큼, 고구려와 맞설 만한 강국이 공존할 자리가 없다는 주장이다. 최리 이전에는 전혀 기술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약점이다. (옥저동예 등보다도 존재감이 없는 셈이다.) 또한 대무신왕이 낙랑을 함락시킨 후 후한광무제가 군사를 보내어 낙랑 지역을 점령한 것도 대무신왕의 고구려가 점령한 것이 한의 군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일종의 절충설 내지는 제3설로, 후한 시대 자치화된 영동 7현, 즉 현재의 함흥 지역의 지배자 내지 군장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는 고구려가 대무신왕대 지배한 압록강 중류~두만강 중류에서 쉽게 갈 수 있는 거리라는 점[17], 옥저에서 낙랑국왕 최리를 만났다고 전해지는 점 등이 있다.[18] 왕이라고 불린 이유는 중국 문물을 받아들인 선진화된 해당 지역의 군장이 주변 토착세력에 왕을 과시하는 일종의 외후내왕 형식의 제도를 가졌을 수 있다. 실제로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보면 기원후 25~40년경에는 낙랑군 내에서도 반란과 재정벌이 일상화된 상태로 낙랑군의 일부를 고구려가 먹었을 충분한 개연성이 있는 시대이다.

결국 양쪽 모두 정황 증거에 불과하다. 실제로 평양 주변에 낙랑국의 별개의 유적이 있는지를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는 셈이다.

6.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

문서 참고.

7. 기타

코에이의 삼국지7에서도 낙랑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삼국지 10의 경우 당시 동북공정이 사회적 이슈가 되던 상황이라 게등위에서 이걸 문제 삼았다. 결국 국내판에서는 ‘동답’으로 개명 당하고 위치도 압록강 이북으로 변경되었다.


[1] 재산을 몰수하고 가족을 노비로 만듦.[2] 드라마 자명고는 이 설을 따른다.[3] 대방왕(흔히 공손강의 아버지인 공손도에 비정)이 백제에게 자신의 딸을 보내 혼인 동맹을 한 것도, 공손도가 후한의 낙랑태수 파견을 막은 것도 낙랑군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4] 비유적 표현이다. 마한이 완전히 멸망했다는 것이 아니라 소국 하나 혹은 여러 개를 멸망시켰다고 본다. 현재는 선빵을 날린 국가는 마한 북부의 소국인 신분활국이라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 그 외에 백제국으로 추정하는 설, 마한 중심국인 목지국과 여러 소국으로 보는 설 등도 있다. 사실 대방태수가 전사했다는 기록을 보면 만만치 않은 수준의 저항이었을 것이다.[5] 가을 8월, 위(魏)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삭방태수(朔方太守 : 대방태수를 잘못 기록한 듯)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임금이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 낙랑 변경을 습격하여 백성을 잡아왔다. 유무가 소식을 듣고 분노하니, 임금이 침범 당할까 두려워 백성들을 돌려보냈다. 삼국사기 권 24 백제 본기 고이왕 13년[6] 사실 백제와 낙랑은 온조왕 때부터 불편한 관계였는데 온조왕 초반기엔 그럴듯한 관계였지만 백제가 힘이 세지자 낙랑군이 말갈을 꼬셔 백제를 공격하게 하는 등 그리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7] 즉 이 시기부터 한사군은 요서에 있게 된다. 이 요서의 한사군은 그 전 원래 한사군에서 간판만 가져온 것이지만,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을 주장하는 자칭 재야사학자들은 이 기록을 가지고 한사군이 원래부터 요서에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8] 이상의 내용은 이글루스 블로거 '야스페르츠'의 글을 참조하였다.[9] 사실 삼국사기에는 요동의 공손씨 정권이 강하게 나오며 고구려도 공격하던 관구검마저 격퇴하기도 한다. 혼인 및 군사 지원 등으로 부여, 고구려와 긴밀한 관계를 맺다 결국 위, 고구려의 공세로 흡수된 것으로 나오는데, 오른쪽 지도라면 설명하기 곤란한 면이 있다.[10] '바로 위에서 북한의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고 주장을 위해 증거를 끼워 맞춘 수준이라서 우리나라는 물론 전세계 어느 학계에서도 인정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라는 서술이 있었는데 사료, 사적 자체와 그 것을 해석해서 내놓는 주장은 서로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 똑같은 삼국사기를 가지고 어떤 환빠는 대륙 삼국설을 주장하고, 어떤 사람은 정상적인 한국사 연구를 한다. 이 어떤 환빠의 주장이 터무니 없다고해서 삼국사기 자체가 허구가 되는 게 아니다. 그 해석이 잘못된 거지. 물론 북한의 연구 환경이 환경인 만큼 그쪽 사료나 사적은 보다 더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한다.[11] 예를 들어 '부조(夫租, 이후의 옥저(沃沮))' 지역의 (濊)의 군장(君)에게 주어진 이른바 '부조예군' 인장[12] 다만 교지나 지금의 광동 지역은 베트남의 역사적인 범위를 고려해서 본다면 상실한 것은 맞긴하다.[13] 사실 세계의 다른 제국들도 지나치게 영토가 크면 영토를 확장해도 실효 지배를 거의 하지 못해서 오히려 정복민들에게 그대로 흡수된 곳들도 많다.[14] 지나친 문화전파주의라는 관점도 약간 있기는 하지만 한반도 남부의 국가들의 물질적인 변화에 낙랑, 한 사군의 존재가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견해도 많다.[15] 전근대 시기 동아시아의 천하 체제에서 '왕'이란 호칭을 쓰는 경우는 중국 내에서 태자가 되지 못한 황자들이 명목상 각 지방의 지배자(당나라 시기에 친왕이란 호칭이 붙음.)로 책봉되거나, 중국 바깥 주변국 중에서 중국에 입조하여 책봉을 받은 국가의 군주인 경우에 해당된다. 물론 전자와 후자의 지위는 확연히 다르다.[16] 그런데 최씨 낙랑국 문서에 지적된 대로, 삼국사기에는 '대방왕'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다만 '대방왕'이 나오는 시기는 후한 중기 ~ 말엽 중원에서 외척 및 십상시전횡 - 황건봉기 - 군웅할거 - 삼국지로 이어지는 권력 분열 및 쟁탈 시기라 상대적으로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이 약해지고 이에 따라 공손씨 세력이 요동 및 한반도 북서부로 넘어와 낙랑 - 대방 일대에서 독자적인 정치 체제를 확립하던 시기였음은 감안해야 한다.[17] 평양 지역은 누가 봐도 이미 낙랑군이 있고 그곳에 원정을 나갔다가 현도군에서 뒤를 치면 끔살...[18] 상식적으로 낙랑국이 평양에 도읍을 둔 국가였다면 그 이 옥저에서 거리를 활보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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