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06 18:41:01

한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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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
기원전 108 ~ 기원전 82 진번군 임둔군 *
기원전 82 ~ 기원전 75 낙랑군
기원전 75 ~ 1세기 현도군
-2 (흥경으로 이현)
1세기 ~ 204 -2 (무순으로 이현)
204 ~ 313 대방군**
313 ~ 404 -2 (요서로 이현) -2 (요서로 이현)
* -2 현도군은 기원전 107년 설치되었음.
** -2 대방군은 314년 한반도에서 축출되었음.


1. 개요2. 위치3. 지배 성격4. 최씨낙랑국과 낙랑군은 같은 것?5.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6. 기타

1. 개요

漢四郡

한무제위만조선을 공격해 멸망시킨 뒤 그 자리에 세웠다고 하는 4개 군을 포함한 5개의 군급 행정 구역. 인접해 있는 부여, 고구려 등과는 직접적으로 대치 및 교류하기도 했고, 한반도 남부의 삼한과도 적극적으로 철재 등을 교역하고 문물을 전파하는 등 한국사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주고받았다. 중국 본토가 오호십육국시대의 난세로 접어들며 약화되고 고구려가 성장하며 흡수, 소멸했다.

4개 군이 같이 유지된 기간은 25년으로 매우 짧아서 학술적으로는 '한군현'이라 부르기도 하며, '동방변군'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래도 세간에 가장 잘 알려진 명칭은 한사군.

2. 위치

파일:attachment/hansagoon.jpg

왼쪽 지도가 학계의 정설인 한반도 북부설이다.[1] 오른쪽 지도는 난하 요수설을 기반으로 한 지도로, 비정 연구니 뭐니 잔뜩 폼을 잡고 있지만 자기들끼리도 앞뒤 논리가 안맞는다 일명 재야사학에서 주장하는 것이다. 고고학적 성과를 보면 평양 낙랑 토성에서 낙랑 예관이라는 이름이 붙은 와당 발견, 한무제 때 쓰던 오수전 동전 + 3,000여 기에 이르는 목곽묘, 귀틀묘, 진실묘가 발굴, 황해북도 봉산군에서 대방태수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게다가 오른쪽 지도에 있는 요동군과 낙랑군 등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은 원안에 있는 영토, 오늘날 중국허베이성산둥성전국시대 연나라제나라의 땅으로, 진나라한나라 때도 매우 중요한 지방이었다.

주로 위치에 대한 논란이 많이 다뤄지는데, 금방 폐지되거나 이전되어 버린 나머지 세 군현보다 낙랑의 위치가 떡밥이었다. 물론 인터넷 등지에서 음모론의 형태를 띠고 있는 논란일 뿐, 학계에서는 위치에 대해서는 이미 일제강점기에 결론을 내었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문헌 사료만 가지고 일부 학자들이 한사군의 위치를 놓고 다른 곳으로 비정하는 일이 있었으나, 대다수는 한반도 북부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보았다.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지리지 등)이나 고려사 등 국가의 공인 사서 및 지리서, 그외 저명하고 가치 있는 사서들은 모두 평양 일대가 낙랑군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학계에서 낙랑군이 평양에 없었다고 보는 학자는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사실상 논쟁이 끝난 상황이다.

위치에 대한 논란의 실질적인 시발점은 신채호, 정인보 등의 민족 사학자들로서,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의 발굴이 조작된 것이라 주장하며 민족주의적인 방어 논리로서 제기되었다. 신채호는 평양 지방의 지명이 '낙랑'이며, 진번, 임둔, 현도 역시 마찬가지로 각각 가리키는 지명이 있을 것이라 했고, 한사군은 한무제삼조선 전체를 공격해 합병한 뒤 각각의 지명의 위치에 세우려고 하다가 실패한, 즉 '가설'된 군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한사군에 관한 신채호 등의 견해는 대부분이 원전의 한문을 오독했거나 추측이나 희망사항에 따른 결론이 나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현재 한국의 사학계는 이를 수용하지 않는다. 물론 당시 많은 민족 사학자들이 독립운동에 매진하면서 제대로 된 연구를 할 수 없는 환경이었던 점은 이해해야겠고, 일제에 대한 저항 측면에서 일부러 더 민족주의적 사고를 강조했던 점도 있겠으나, 학문적으로 역사는 진실을 찾는거지 목적에 끼워맞추는 분야가 아니다.

낙랑군의 위치에 관한 논란으로, 평양 근처의 낙랑군은 사실 최씨낙랑국이 아니냐는 논란이 존재한다. 자세한 것은 하단 및 해당 문서 참조.

한편, 북한에서는 리지린을 필두로 하여 '난하요수설'을 토대로 한 낙랑군 요서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북한의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고 주장을 위해 증거를 끼워 맞춘 수준이라서 철저하게 논파되어 현재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 어느 학계에서도 주류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 난하요수설을 바탕으로 한 낙랑군 요서설 또는 요동설을 지금도 일부에선 열심히 신봉하고 있는데, 바로 유사역사학자들. 이들은 인터넷과 언론, 출판 시장 같은 곳에서 끊임없이 이런 설들을 재생산하고 있다. 심지어 국회에서 토론회를 강제로 개최하기도 했다. 으악

3. 지배 성격

1916년 조선총독부에서 지원을 받아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절대 아니다. 해방 이후에도 북한 측에 의해 고고학적인 발굴은 꾸준히 계속되어 왔다. 예를 들어 1992년에는 평양 정백동 364호분에서 논어 목간이 발굴된 것이 알려졌으며 2005년에는 낙랑군 25개 현의 인구가 기록된 이른바 초원 4년 호구부 목간이 발견되어 중요한 연구 소재가 되어 있다. 물론 환빠들은 이런 거 모르기 때문에 이런 얘기하면 일제의 발굴 조사 결과를 추종한다고 깐다.[2] 북한은 1990년대 이후에도 일본의 식민지였단 말인가! 심지어 '북한 가서 직접 발굴하기 전까지는 모른다'고 하다가 '북한에서 이미 발굴했고 남한에서도 자료를 입수했다'고 하면 종북주의자라고 까는 신종 환빠도 있다(...). 그럼 뭐 세상 사람이 다 당신처럼 바보 같이 살라는 말도 아니고 어쩌라고

지금까지 대충 나온 자료는 평양 낙랑 토성의 낙랑 예관이라는 와당, 한나라의 오수전 동전, 3,000여기의 이르는 목곽묘, 귀틀묘, 진실묘, 황해북도 봉산군의 대방태수 무덤 등이 대표적이다.

근래에 들어서는 기존의 중국계 유물과 무덤 양식에 더해 낙랑에 속하는 초기 목곽묘에서 세형 동검이나 인장[3] 등이 출토되고, 다른 한편으로 한나라의 율령과 관련된 문자 자료들이 보고되면서 현지 유력자들이 낙랑군을 비롯한 군현 지배와 어떠한 관계를 맺었는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대중적인 인식처럼 소위 한사군 지역이 단순한 중국의 식민지였다고 보는 시각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말.

한사군과 동일한 성격의 사건이 있는데 바로 베트남남월(BC204~BC112)의 멸망과 한 군현의 설치이다. 고조선과 남월은 미시적으로야 관련이 없지만 한나라를 끼고 생각하면 매우 유사한 과정을 겪었다. 한 무제가 북·서 방면의 흉노를 정복한 이후 자연스럽게 관심을 돌린 것이 남쪽의 남월과 동쪽의 고조선이었다. 남월과 고조선 모두 기원전 2세기를 즈음하여 한과의 전쟁 국면으로 들어서는데 남월이 BC112년에 멸망하면서 9개의 한 군현이 설치된다. 이후 한은 고조선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BC108년에 고조선을 정복하면서 4개의 군현을 설치하게 된다.

낙랑을 비롯한 한사군의 성격이 그러하듯 남월의 9개 군현의 성격도 한족관료을 파견했음에도 피정복 민족의 영향력을 배제할 수 있을 정도의 역량은 없었으며[4][5] 결국 중원 밖의 군현들은 한의 통치와는 거리가 점차 멀어졌고 한문화와 재지문화의 교역지점과 같은 절충지대로 변모하였다.[6] 즉 결과적으로 본래의 목적인 한의 통치, 지배가 관철된 것이 아니고 현대의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형성과 같은 동아시아의 문화권을 형성하는 발단이 되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4. 최씨낙랑국과 낙랑군은 같은 것?

미천왕 때 합병당한 낙랑군이 대무신왕 때 합병당한 최씨 낙랑국과 같은 존재인지 별개의 국가인지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별개의 국가로 보는 쪽에서는 낙랑군을 평양과 그 주변으로, 낙랑국은 평양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을 것이라 추정한다. 또한 이에 관해서 경북 대학교 사학과 주보돈 교수 등은 낙랑군과 낙랑국이 평양 부근에 위치하면서 서로 다른 곳이라 보았다.

또한 낙랑공주의 아버지인 최리가 낙랑국의 이라고 기술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태수'가 아닌 것이다. 삼국사기 등이 쓰여진 시대에 '군'과 '국', '태수'와 '왕'[7]을 구별하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8] 또한 중국의 기록을 보더라도 낙랑 태수중에 최리라는 사람은 없었다.

별개의 국가가 아니라는 쪽에서는 낙랑군과 낙랑국의 이름이 같고 지리적으로도 같은 평양 지역에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실제 유물의 발굴로 평양에 낙랑군이 있었다는 점이 확인된 만큼, 고구려와 맞설 만한 강국이 공존할 자리가 없다는 주장이다. 최리 이전에는 전혀 기술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약점이다. (옥저동예 등보다도 존재감이 없는 셈이다.) 또한 대무신왕이 낙랑을 함락시킨 후 후한광무제가 군사를 보내어 낙랑 지역을 점령한 것도 대무신왕의 고구려가 점령한 것이 한의 군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일종의 절충설 내지는 제3설로, 후한 시대 자치화된 영동 7현, 즉 현재의 함흥 지역의 지배자 내지 군장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는 고구려가 대무신왕대 지배한 압록강 중류~두만강 중류에서 쉽게 갈 수 있는 거리라는 점[9], 옥저에서 낙랑국왕 최리를 만났다고 전해지는 점 등이 있다.[10] 왕이라고 불린 이유는 중국 문물을 받아들인 선진화된 해당 지역의 군장이 주변 토착세력에 왕을 과시하는 일종의 외후내왕 형식의 제도를 가졌을 수 있다. 실제로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보면 기원후 25~40년경에는 낙랑군 내에서도 반란과 재정벌이 일상화된 상태로 낙랑군의 일부를 고구려가 먹었을 충분한 개연성이 있는 시대이다.

결국 양쪽 모두 정황 증거에 불과하다. 실제로 평양 주변에 낙랑국의 별개의 유적이 있는지를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는 셈이다.

5.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

문서 참고.

6. 기타

코에이의 삼국지7에서도 낙랑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삼국지 10의 경우 당시 동북공정이 사회적 이슈가 되던 상황이라 게등위에서 이걸 문제 삼았다. 결국 국내판에서는 ‘동답’으로 개명 당하고 위치도 압록강 이북으로 변경되었다.


[1] 사실 삼국사기에는 요동의 공손씨 정권이 강하게 나오며 고구려도 공격하던 관구검마저 격퇴하기도 한다. 혼인 및 군사 지원 등으로 부여, 고구려와 긴밀한 관계를 맺다 결국 위, 고구려의 공세로 흡수된 것으로 나오는데, 오른쪽 지도라면 설명하기 곤란한 면이 있다.[2] '바로 위에서 북한의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고 주장을 위해 증거를 끼워 맞춘 수준이라서 우리나라는 물론 전세계 어느 학계에서도 인정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라는 서술이 있었는데 사료, 사적 자체와 그 것을 해석해서 내놓는 주장은 서로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 똑같은 삼국사기를 가지고 어떤 환빠는 대륙 삼국설을 주장하고, 어떤 사람은 정상적인 한국사 연구를 한다. 이 어떤 환빠의 주장이 터무니 없다고해서 삼국사기 자체가 허구가 되는 게 아니다. 그 해석이 잘못된 거지. 물론 북한의 연구 환경이 환경인 만큼 그쪽 사료나 사적은 보다 더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한다.[3] 예를 들어 '부조(夫租, 이후의 옥저(沃沮))' 지역의 (濊)의 군장(君)에게 주어진 이른바 '부조예군' 인장[4] 다만 교지나 지금의 광동 지역은 베트남의 역사적인 범위를 고려해서 본다면 상실한 것은 맞긴하다.[5] 사실 세계의 다른 제국들도 지나치게 영토가 크면 영토를 확장해도 실효 지배를 거의 하지 못해서 오히려 정복민들에게 그대로 흡수된 곳들도 많다.[6] 지나친 문화전파주의라는 관점도 약간 있기는 하지만 한반도 남부의 국가들의 물질적인 변화에 낙랑, 한 사군의 존재가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견해도 많다.[7] 전근대 시기 동아시아의 천하 체제에서 '왕'이란 호칭을 쓰는 경우는 중국 내에서 태자가 되지 못한 황자들이 명목상 각 지방의 지배자(당나라 시기에 친왕이란 호칭이 붙음.)로 책봉되거나, 중국 바깥 주변국 중에서 중국에 입조하여 책봉을 받은 국가의 군주인 경우에 해당된다. 물론 전자와 후자의 지위는 확연히 다르다.[8] 그런데 최씨 낙랑국 문서에 지적된 대로, 삼국사기에는 '대방왕'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다만 '대방왕'이 나오는 시기는 후한 중기 ~ 말엽 중원에서 외척 및 십상시전횡 - 황건봉기 - 군웅할거 - 삼국지로 이어지는 권력 분열 및 쟁탈 시기라 상대적으로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이 약해지고 이에 따라 공손씨 세력이 요동 및 한반도 북서부로 넘어와 낙랑 - 대방 일대에서 독자적인 정치 체제를 확립하던 시기였음은 감안해야 한다.[9] 평양 지역은 누가 봐도 이미 낙랑군이 있고 그곳에 원정을 나갔다가 현도군에서 뒤를 치면 끔살...[10] 상식적으로 낙랑국이 평양에 도읍을 둔 국가였다면 그 이 옥저에서 거리를 활보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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