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01:17:10

왕검성 전투

고조선의 대외 전쟁·분쟁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word-break: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820000><colcolor=#ddd>전쟁·정벌교전세력
고조선-연 전쟁
기원전 3세기
연나라
패수 영토회복
기원전 3세기
진나라
위만의 정변
기원전 194년
위만군
준왕의 마한 정복
기원전 194년
마한
진번⋅임둔 정벌
기원전 2세기
진번국, 임둔국
1차 왕검성 전투
기원전 109년
한나라
2차 왕검성 전투
기원전 109년 ~ 기원전 108년
한나라}}}}}}}}}

<colbgcolor=#c0c0ff><colcolor=#000> 왕검성 전투
王儉城戰鬪
시기 기원전 109년 ~ 기원전 108년
장소 고조선(왕검성)[1]
원인 고조선한(漢)과의 관계 악화
교전국 고조선 한(漢)
지휘관 우거왕 (고조선 국왕)
성기 (대신)
장항 (왕자)
노인(路人) (조선상)
(最)[2]
한음 (상)
왕협 (장군)
(參) (니계상)
역계경 (조선상)[3][4]
한무제 (한나라 황제)
위산 (사자)
양복 (누선장군)[5]
순체 (좌장군)
공손수 (제남태수)
다(多) (졸정)
병력 병력 규모 불명 57,000명
피해 피해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고조선의 멸망, 한사군 설치
영향 한(漢), 한반도 북부에 영향력 행사

1. 개요2. 시대적 상황3. 전개
3.1. 1차 전투3.2. 2차 전투
4. 이후5. 관련 문서6. 외부 링크

[clearfix]

1. 개요

고조선 최후의 전투. 한나라와의 결전으로 총 2차례 펼쳐졌다. 일반적으로 왕검성(王儉城)으로 불리지만 일부 사서에서는 왕험성(王險城)이라 기록된 것도 있다.

당시 한나라는 정점으로 치닫는 황금기한무제 시기였고 인구나 국력이 고조선을 크게 압도했다. 또한 한무제는 주변국 정복에 의욕이 넘치던 사람이라, 한나라 건국 시점부터 골칫덩이였던 흉노막북전투 끝에 제압하는 데 성공했고 베트남남월도 기원전 111년에 멸망시킨 상황이었다. 흉노에 복속되어있던 서쪽 실크로드 도시국가들도 한나라의 영향력에 들어왔으니 중국의 서남북이 평정된 상황에서 한무제에게 남은 건 동쪽의 고조선이었다.

고조선에 사신으로 갔던 섭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6] 한무제는 이를 빌미로 고조선을 침공한다. 1년간의 대치 끝에 우거왕이 태자와 대신들의 배신으로 시해당하고, 고조선은 한나라에 투항하나 이후 우거왕충신 성기가 군사들을 독려하여 왕검성에서 한나라에 다시 대항하였다. 하지만 성기 역시 배신자에 의해 살해되고 왕검성은 함락당했다.

2. 시대적 상황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History_of_Korea-108_BC.png
▲기원전 108년 고조선 세력도. 평양 부근의 별 모양이 수도 왕검성이다.[7]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이 된 위만의 손자 우거왕한반도 일대의 예, 맥, 등과 한나라와의 중계 무역을 통해 고조선을 강성한 나라로 키워가고 있었다. 사실 한나라는 건국 때부터(백등산 포위전) 한무제 시기까지(막북전투) 줄곧 북방의 흉노족에게 신경을 쏟느라 여유가 없어 고조선의 이러한 성장을 막지 못했다. 그래서 이 틈에 고조선은 한나라의 유민과 정치적 망명객들을 받아들이며 선진 문물도 수용해 나아갔다.
한나라의 요동 태수는 위만을 외신(外臣)으로 삼아 요새 밖의 만이를 다스리도록 하고 그 부족의 군장들이 천자를 보고자 하면 저지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군사와 재물을 동시에 얻게 되었고 그 위력으로 이웃에 있는 작은 고을을 쳐서 세력 확장을 꾀하니 진번과 임둔이 모두 복속했는데 그 영역이 수천 리에 달했다. 위만 임금은 왕위를 그의 아들에게 넘겼고 그의 아들은 우거에게 계승케 하니 한나라에서 우거에게로 망명해 가는 자들이 더욱 많아졌다.
사기》 권 115, 조선 열전

하지만 그렇다고 이를 방치한것은 아니라서 고조선을 경계하고 있었다. 특히 요동 태수는 직접적인 공격 대신 고조선의 약화를 위해 기원전 128년에 요동 지역(압록강 상류 혹은 동가강(佟佳江) 유역 일대로 추측)에 있던 예군(濊君) 남려(南閭)를 포섭하여, 우거 왕에게 반기를 들게 했다. 예군은 예족의 족장이라는 뜻도 되지만 그 시기 위치적으로 고조선 혹은 한나라에 간섭을 받던 지역으로 추측되는 만큼 고조선이나 한나라가 내린 칭호일 가능성도 있다. 포섭된 남려는 요동 태수의 후원을 받으며 거대한 폭동을 일으켰고, 그가 지배하던 28만여 명의 인구를 이끌고 한나라에 복속되었다.[8] 그 다음 한나라는 남려가 지배하던 지역에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여, 고조선의 힘을 빼놓기 시작했다.[9]

이에 분노한 우거 왕은 한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차단하고 고조선을 거쳐 한나라에 입조하려는 여러 나라들을 막았다.

기원전 109년, 한무제가 사신 섭하(涉河)를 보내어 고조선에게 이러한 상황을 바꾸도록 했으나, 우거 왕은 그의 말을 거부했다. 이에 섭하는 성과도 없이 돌아가면 무제한테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 한나라로 돌아오는 길에 그를 엄호하던 고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패수에서 살해했다. 섭하는 장을 살해한 것을 왜곡하여 무제한테 보고했고 무제는 이 말만 믿고는 이 공을 높이 사 그를 요동(遼東)의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임명해다. 그러자 빡친 우거 왕은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쳐 섭하를 죽였다.[10]
한 무제 원봉 2년, 한나라 사신 섭하가 조서를 (고조선에) 들고 우거 임금에게 그렇게 하지 말도록 타일렀으나 그는 끝내 황제의 조서를 받지 않았다. 섭하는 돌아오는 길에 (한나라와 고조선의) 국경인 패수에서 마부를 시켜 자신을 배웅하는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죽이고 강을 건너 요새로 돌아와서 천자에게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했다. 천자는 더이상 죄를 묻지 않고 섭하를 요동 동부 도위로 삼았다. 조선의 병사들이 섭하를 습격해 죽였다.
《사기》 권 115, 조선 열전

당연히 한나라는 그것을 노렸다. 그동안 벼르고 벼르던 고조선에 대한 공격을 이 사건을 빌미로 감행한 것이다.[11]

3. 전개

파일:external/66.media.tumblr.com/tumblr_obwg8hrBOy1sqk8veo3_1280.jpg
▲고조선·한(漢) 전역도.

3.1. 1차 전투

파일:external/www.chogabje.com/3333.jpg
전한(前漢)의 병사
그해 가을, 천자는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으로 하여금 제나라 지역으로부터 발해를 건너가 우거를 치도록 명하고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에게는 5만의 병사를 주어 요동으로 나아가 우거를 치도록 했다.
《사기》 권 115, 조선 열전

한나라는 57,000명의 병력을 육군과 수군으로 나뉘어 고조선을 침공했다. 50,000명의 육군은 좌 장군 순체가 이끌었고, 7,000명의 수군은 누선 장군 양복이 이끌었고 발해만을 거쳐 고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을 향했다.

하지만 우거왕의 지휘 아래 고조선은 선전했다. 오히려 좌장군(左將軍) 휘하의 졸정(卒正) 다(多)의 병력을 격파하고 발해만을 거쳐 왕검성을 포위한 양복의 수군도 무찔렀다. 그 기세를 몰아 육로로 오던 순체의 육군 병력도 패수에서 저지했다. 이러한 기세에 당황한 한무제는 위산(衛山)을 우거왕에게 보내 협상을 진행하려고 했다. 우거왕은 그의 태자를 보내 항복할 의사를 내비쳤다. 그래서 태자는 1만의 병사들과 함께 협상을 하러 갔다.
천자(天子)는 두 장군의 전세가 유리하지 않다고 여기고, 위산(衛山)으로 하여금 군사의 위엄을 갖추고 가서 우거(右渠)를 달래게 하였다. 우거는 사자(使者)를 보고 머리를 숙이며 사과하기를, "항복하기를 원하였으나 장군이 신(臣)을 속여서 죽일까 두려워했는데 이제 신절(信節)을 보았으니 항복을 받아주길 청합니다."하면서 태자를 보내 들어가 사죄하게 하고 말 5천 필을 바침과 아울러 군량(軍糧)을 내어 주었다.

사람들 만여 명이 병기를 지니고 막 패수(浿水)를 건너려 할 때 사자와 좌 장군은 그들이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 태자에게 "이미 항복했으니 사람들에게 병기를 지니지 말라고 명하시오."라고 말하였다. 태자도 역시 사자와 좌 장군이 속임수를 쓰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여 끝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사람들을 이끌고 돌아가 버렸다.
《사기》 권 115, 조선 열전

하지만 위산과 순체는 태자가 1만의 병력을 이끌고 오자 수상하게 여기며 고조선군의 무장 해제를 요구했다. 이에 태자도 한나라를 의심하며 돌아오면서 협상은 깨지고 전쟁은 재개되었다. 조선 태자가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무제는 분노하여 이를 전한 위산을 처형했다. 이때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은 왕에게 건의를 했다. 어떤 건의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아마 화친과 비슷한 방향의 제안인듯 보인다. 우거왕이 이를 거부하자 자신의 집단 2,000호를 이끌고 한반도 남쪽 진국으로 망명했다.

3.2. 2차 전투

한나라는 다시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순체는 패수에서 가진 두 번째 교전에서 고조선군을 격파하고 왕검성의 북서쪽을 포위했으며, 양복은 성의 남쪽을 포위했다. 왕검성을 포위한 한나라 군대는 왕검성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으나 고조선의 저항과 더불어 양복과 순체의 갈등으로 왕검성은 몇 달 동안이나 이들의 공격을 저지했다.
좌 장군은 일찍이 연과 대 지역의 군사를 거느린 경험이 있고 천자를 직접 모셔서 총애를 받은 적도 있으나 성질이 사나웠다. 더욱이 작은 싸움에서 이긴 기세를 타서 교만하게 조선을 급히 공격하도록 군사의 출동을 서둘렀다. 누선은 우거와의 싸움에 패하고 나서 제 지역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갔으나 도망가는 병졸들이 많았고, 병졸들이 모두 우거를 포위하고 있기는 했어도 그와 화해하려는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이때 우거의 대신이 누선에게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항복을 시도했다. 좌 장군은 수차례 누선에게 같이 싸우자고 재촉했으나 누선은 우거와 화해할 의사를 가지고 있어 이에 응하지 않았으며 좌 장군이 우거의 항복을 받으려 해도 우거는 이미 마음을 누선에게 주고 있었기 때문에 역시 응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두 장군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사기》 권 115, 조선 열전
파일:external/835b2e753efe588730975d8c649d22862e1f83cd65a792b227add965916d02aa.jpg
고조선 병사 복원도[12]

이렇게 좌장군 순체와 누선장군 양복이 뜻이 맞지 않는 모양새를 보이자, 한 무제는 공손수를 현장에 보내 일을 바로잡고 편의대로 처리하게 하였다. 공손수가 도착하자 순체는 자기 처지를 토로하였고, 공손수는 이에 설득되어 양복을 잡아 가두고 두 군대를 합쳐 버렸다.[13] 이렇게 한나라 군사가 순체를 중심으로 단일화되자 이를 알게 된 고조선 내부는 위기감을 느낀 주화(主和)파와 끝까지 싸우자는 강경파로 나뉘게 된다. 특히 상대적으로 유화적이었던 누선장군 양복의 실각이 크게 작용했다. 108년 4월, 주화파인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 중앙 장관), 한음(韓陰)[14], 장군 왕협(王唊), 니계상(尼谿相)[15], 삼(參, 지방 장관 격) 등이 한나라에 항복하며 배신을 했고 그해 6월, (參)이 보낸 자객이 우거 왕을 살해했다. 허나 삼은 후일 다시 한나라를 배신하려다 죽임을 당한다.

그럼에도 왕검성은 왕의 측근인 대신(大臣) 성기(成己)[16]를 중심으로 저항하자 이를 초조해한 순체가 노인의 아들 최(最)에게 성안의 주민들을 이간질 시키게 했다. 최는 성 안의 사람들을 이간질시켰고 우거 왕의 아들 장항(長降)[17]과 도모해 성을 지키던 성기를 살해했다. 장항은 곧바로 한나라에 투항했고 결국 기원전 108년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함락되면서 위만조선은 3대 86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4. 이후

한무제는 이곳에 한사군을 설치해 관리하도록 했고 우거왕의 아들 장[18]은 왕검성 함락의 공로를 인정받아 한나라의 기(幾) 지역을 다스리는 기후(幾侯)에 책봉되었다.

최는 열양후(涅陽侯)에, 한음은 적저후(荻苴侯)에, 삼은 홰청후(澅淸侯)에 책봉되었다. 이들 중 삼은 기원전 99년에 도망친 고조선인 포로를 숨겨준 죄로 잡혀 투옥되었다가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19]

한나라군에게 협력한 현지인들과는 달리, 정작 한나라군 지휘부의 후일은 좋지 못했다. 한나라군의 지휘관이었던 순체와 공손수[20], 위산은 상은커녕 "공을 다투고 서로 시기하여 계획을 어긋나게 한 죄"를 추궁당해 참수형에 처해졌을 뿐만 아니라 시체를 거리에 버리는 기시에 처해졌다. 순체에게 군권을 뺏겼던 양복도 "병사를 거느리고 열구에 이르러 순체를 기다리지 않고 함부로 군사를 풀어 많은 병사를 잃어 버린 죄"를 추궁당했는데, 처음에는 역시 참수였으나 양복이 속전(보석금)을[21] 바친 덕분에 죽음만 겨우 면하고 여생을 평민으로 살았다. 결국 전투를 통한 모든 공은 한무제의 손에 들어갔다. 이 전쟁의 전말을 기록한 사마천 역시 "(우리 한나라) 장수로서 (승전의 대가로) 제후가 된 자가 없었다"라며 아주 시니컬하게 기록했다.

단 순체, 위산, 공손수, 양복 모두 당시로서는 억울하거나 가혹한 벌을 받은 것은 아니다. 왜냐면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순체와 위산은 우거왕이 제 발로 조공을 바치며 항복하겠다는데 괜히 의심하며 무장해제를 요구해서 그걸 철회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공성전이 오래 지속되어 죽지 않아도 될 병사들이 무수히 죽어나갔는데 이로 인해 발생하는 것은 모두 국가의 지출이다.

게다가 양복은 독단적으로 고조선을 공격했다가 격파당해 8천이나 되는 병사를 잃고 산속에 10여일을 숨어있었으며, 나중에는 순체와 고조선 처리문제를 놓고 반목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공손수는 순체와 양복을 중재하는 임무로 파견됐으나 순체의 말만 듣고 독단적으로 양복을 체포하여 가둠으로써 직권 남용은 물론이고 황제의 명령을 대놓고 무시했기 때문에 처형된 것이다. 양복만 사형을 면했던 것도 순체나 위산처럼 말도 안되는 사고를 치거나 공손수처럼 대놓고 항명한 게 아니라 지휘를 잘못해서 군대를 말아먹은 것이라 3명에 비하면 그나마 죄질이 가벼웠기 때문이었다. 고조선 내부에서 분열이 없었다면 이 상태로는 전쟁이 더 오래 갔거나 한나라 측에서 보급문제가 발생한다든가 하는 이유로 인해서 군사를 물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흉노와의 전쟁에서 한나라는 전쟁이 길어지고 보급문제로 재정이 나빠지기 시작해[22] 전쟁을 포기해야 했다. 곽거병이 있었다면 모를 일이지만 곽거병은 이미 거의 10여년 전에 죽고 없었다.

5. 관련 문서

6. 외부 링크



[1] 왕검성의 위치는 논란이 많다. 학설 중에선 평양설과 요동설이 가장 대표적이다.[2] 노인(路人)의 아들이다.[3] 역계경이 이름인지 칭호인지는 불분명하다.[4] 진국으로 망명한다.[5] 한서 혹리전에 실려있는 그 양복이 맞다. 남월 토벌에 참여하기 전에는 같이 혹리열전에 실린 윤제를 본받아 통치했다고 하는데 그 윤제란 인물은 청렴했지만 잔혹하다는 평판이 있었다.[6] 기록된 한국사 최초의 살인 사건이다. 물론 기록되지 않은 것까지 따지면 구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단, 전쟁도 살인 사건으로 취급하면 기록된 최초의 살인 사건은 고조선-연 전쟁이 된다.[7] 그러나 상술했듯이 왕검성의 위치가 평양이라는 명확한 근거는 아직 없는 상황이다.[8] 28만 명은 당시 요동군의 인구보다 많기 때문에 후에 설치하게 될 창해군의 영역에 들어갈 모든 인구를 합산한 것이란 견해가 유력하다.[9] 다만 이 일은 실패했다. 창해군을 운영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연, 제 지역이 피폐해져 봉기가 일어나는 등 변경개척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서남이 개척도 중지되었다.[10] 섭하를 죽였다고 할 뿐 요동에서의 군사작전에 대한 언급이 없고 "습격해 죽였다"고 기록된 점으로 보아 군사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소수의 병사들을 자객으로 보내서 섭하를 암살했을 가능성도 있다.[11] 사실 대부분 이러한 이유로 전쟁이 일어나면 명분은 그저 침공을 위한 도구일 뿐인 경우가 수두룩하다. 제1차 세계 대전의 명분이 된 사라예보 사건, 중일전쟁의 명분이 된 루거우차오 사건 등이 그 예이다. 심지어 침공할 명분이 없어도 따지지 않고 공격하는 경우도 흔했다.[12] 황금이 아니라 청동인데, 청동은 원래 노란색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녹슬어 녹색으로 변한다.[13] 그런데 이 일을 공손수가 보고하자 한무제는 일 처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공손수를 처형해 버렸다(...).[14] 《사기》에는 "한음", 《한서》에는 한도(韓陶)라고 나와있다.[15] 여기서 니계는 고조선 토착 세력의 지명일 가능성이 크며, 상은 그 지역을 다스리는 부족장으로써 부여받은 관직인 듯 보인다. 이름을 기록한 주체가 한나라 측이다 보니 중국식 관직명을 적어놓은 듯하다.[16] 한자 모양이 불분명한지 성이(成已), 성사(成巳) 등으로 표기된 문헌들이 있다. 관련 문서 및 외부 링크 참고.[17]한서》에는 장강(長降)으로 표기되었다. 《사기》 『후자연표』(侯者年表)에는 장로(張路)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를 근거로 장(長)이 본래 이름이고 장로는 한나라에 투항한 후에 부여 받은 이름이라는 주장도 있다.[18] 또는 장항 / 장강(長降)[19] 사이비 도서인 대쥬신제국사대한민족통사에서는 어째선지 반대로 이들이 우거왕이 너무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답답해서 우거왕을 죽이고 부여군과 함께 한과 싸우는 걸로 나온다. 환단고기규원사화에도 안 나오는 그냥 독자연구다.[20] 상기 각주에서 서술하였듯, 공손수는 순체, 양복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려 갔다가, 순체의 말을 듣고 2차 전투 초기에 양복을 잡아 가둔 사실을 보고한 후에 처형당했다.[21] 다만 이 보석금이 당시에는 엄청나게 큰 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나마 양복의 죄질이 좀 더 가볍고 자기 변호의 기회를 얻지 못했던 점을 고려해서 한무제가 속전의 액수도 원래 내야되는 양보다 크게 줄여준 덕분에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목숨과 맞바꿀 정도의 금액이니 절대 만만치 않은 액수였고 양복은 살아남아도 귀족에서 평민으로 추락하는 불명예를 당했다. 무엇보다도 사마천은 이 돈이 없어서 궁형을 당했다.[22] 여기에 한무제가 사치스러운 생활로 재정을 탕진한 것도 컷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