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41:59

백제-북위 전쟁

백제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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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북위 전쟁
百濟-北魏 戰爭
<colbgcolor=#C00D45,#600823><colcolor=white> 시기 484년(1차), 488년(2차), 490년(3차)
장소 위치 불명
원인 이유 불명
교전 세력 <rowcolor=#C00D45,white> 백제
(수비자)
북위
(공격자)
주요 인물
참가자

파일:백제 군기.svg 사법명
파일:백제 군기.svg 찬수류
파일:백제 군기.svg 해예곤
파일:백제 군기.svg 목간나
등등[1]
참가자

[[북위|
北魏
]] 불명
병력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백제군의 승리

1. 개요2. 배경3. 전개 과정4. 사서5. 북위의 침공 경로 미스터리
5.1. 분석과 학설
6.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북위의 백제 침공이라고도 하며, 웅진시대 백제 제24대 동성왕 재위기간 중 백제북위 사이의 일련의 전쟁이다.

2. 배경

고구려는 옥저를 침공하여 점령하였고, 이후 동예를 속국으로 부리면서[2] 백제를 위협해왔었다.

이전부터 신라구[3]왜구가 출몰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광개토대왕 시절, 신라-왜 전쟁이 발발하였다. 신라는 이를 조속하게 해결하고자 광개토대왕 시절의 고구려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래서 고구려는 5만 군사를 보냈다. 그러나 지원을 온 고구려 군이 이 후로 신라에 눌러 앉았으며, 신라는 그 이후 고구려의 내정간섭으로 속국 신세를 격어야 했다.

자비 마립간 치세의 신라는 고구려 장수왕 시절에 신라 내의 고구려인들을 제거하는 시도를 했으며, 이후 장수왕은 486년에 말갈 세력의 병사들로 하여금 신라를 공격하게 해서 신라의 실직주성이 합락되도록 했다.

당시 나제동맹 관계였던 개로왕 시절의 백제는 말갈 세력이 신라의 실직주성이 합락시킨 후, 469년에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면서, 북한산성 그리고 아신왕 시절에 충성한 쌍현성을 보수하고, 청목령에 목채 진지를 구축하였다.

472년, 백제 개로왕북위헌문제에게 고구려 침공을 여러번 요청했으나 이러한 협상은 번번히 결렬되었고, 개로왕은 북위에게 보내던 조공을 중단하였다.

고구려 장수왕은 이전부터 승려 도림을 첩자로써 백제에 파견하는 등 기회를 살펴왔다. 그리고 475년에 백제로 남침하였으며, 이 때에 당시 수도였던 위례성(한성)까지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개로왕은 참살되었다.

480년, 장수왕은 또 말갈 세력에게 신라를 공격하게끔 하였으며, 이로부터 1년 후인 481년에는 아예 고구려의 정예군도 신라로 출병시켜서 호명성 등 신라의 7개의 성이 함락당하고 미질부(지금의 포항)까지 몰렸으나, 고구려 군대는 신라, 백제, 가야 연합군에 의해서 퇴주하였다.

3. 전개 과정

484년, 북위가 백제를 침공하기 시작함과 거의 동시에 장수왕도 고구려 군대를 남진시켰다. 그러나 고구려 군대는 모산성에서 나제 동맹 군대에게 대패하였다.

488년, 북위가 다시 백제를 침공하였으며, 489년에 장수왕은 또다시 신라를 침공해서 과현 지역까지 진군하였고 신라의 호산성을 함락시켰다.

490년, 북위가 또 다시 백제를 침공했으나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에 의해 수십만 기병을 잃었다. 그리고 491년, 장수왕은 98세[4]의 나이에서 사망하였다.[5]

4. 사서

영명 2년(484) 위로가 백제를 정벌하여 백제왕 모도를 크게 격파했다.
永明二年, 魏虜征之, 大破百濟王牟都.
건강실록

(동성왕 재위) 10년(488) 위(魏)나라가 병사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우리에게 패했다.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위나라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는데 백제에게 패했다. 백제는 진대부터 요서, 진평 2군을 차지하고 있었다.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晉世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也.
자치통감》 권136 <제기>2 -세조 무황제 상지하- 영명 6년(488) 12월조

이해(490) 위로가 또 기병 수십만 명을 내어 백제를 공격하여 국경에 들어왔다. 이에 모대는 장수 사법명, 찬수류, 해예곤, 목간나를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위로 군사를 기습하여 크게 깨뜨렸다.

건무 2년(495)에 모대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중략) 지난 경오년(490)에는 험윤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왔습니다. 신이 사법명 등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거꾸로 쳐서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흉리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말을 몰아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베어 죽이니 그 시체가 평원을 붉게 물들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예기(銳氣)가 꺾이어 고래처럼 사납던 것이 그 흉포함을 감추었습니다. 지금 천하가 조용해진 것은 실상 사법명 등의 꾀이니 그 공훈을 찾아 마땅히 표창해 주어야 합니다. 이제 임시로 사법명을 '행정로장군 매라왕'으로, 찬수류를 '행안국장군 벽중왕'으로, 해예곤을 '행무위장군 불중후'로 삼고, 목간나는 과거에 군공이 있는 데다 또 누선[臺舫]을 깨뜨렸으므로 '행광위장군 면중후'로 삼았습니다. 부디 바라옵건대 천은을 베푸시어 특별히 관작을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또 표문을 올리기를
신이 사신으로 보낸 '행용양장군 낙랑태수장사' 신(臣) 모견, '행건무장군 성양태수 겸 사마' 신 왕무, '겸 삼군 행진위장군 조선태수' 신 장새, '행양무장군' 진명은 관직에 있어 사사로운 것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공무에만 힘써, 나라가 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 내던지고 어려운 일을 당해서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지금 신의 사신의 임무를 맡아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 그의 지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실로 관직을 올려주어야 마땅하므로 각각 가행직에 임명하였습니다. 부디 바라옵건대 성조에서는 특별히 정식으로 관직을 제수하여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허락함과 아울러 장군의 호를 내려주었다.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 大破之.
建武二年 牟大遣使上表曰 (중략) 去庚午年 獫狁弗悛 擧兵深逼 臣遣沙法名等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乘奔追斬 僵尸丹野. 由是摧其銳氣, 鯨暴韜凶. 今邦宇謐靜, 實名等之略, 尋其功勳, 宜在襃顯. 今假沙法名行征虜將軍邁羅王, 贊首流爲行安國將軍辟中王, 解禮昆爲行武威將軍弗中侯, 木干那前有軍功, 又拔臺舫, 爲行廣威將軍面中侯. 伏願天恩特愍聽除. 又表曰: 臣所遣行龍驤將軍樂浪太守兼長史臣慕遺, 行建武將軍城陽太守兼司馬臣王茂, 兼參軍行振武將軍朝鮮太守臣張塞, 行揚武將軍陳明, 在官忘私, 唯公是務, 見危授命, 蹈難弗顧. 今任臣使, 冒涉波險, 盡其至誠. 實宜進爵, 各假行署. 伏願聖朝特賜除正." 詔可, 竝賜軍號.
남제서》 58권 <동남이열전> -백제-

5. 북위의 침공 경로 미스터리

당시 북위의 황제는 명군이었던 효문제였던 반면[6], 백제는 불과 10여 년 전에 장수왕의 침입으로 개로왕이 목잘려 죽고 수도가 불타버린 초유의 경험이 있었던 상황에서 난데 없이 화북지역에 있는 강대국인 북위를 상대로 싸웠고 승리했다는 점이다. 북위의 백제 침공은 한국사에서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중 하나인데, 당시 백제와 북위는 전투가 펼쳐질 만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파일:남북국과 삼국시대.jpg
5세기 동아시아 지도
백제-북위 전쟁이 성립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북위와 백제 사이의 거리 때문이다. 북위와 백제 사이에는 육상으로는 고구려가, 해상으로는 황해가 있었다. 따라서 북위와 고구려 간의 전쟁이라면 모를까, 북위와 백제 간에는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이 일어날 확률이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북위가 만약 백제를 공격하려고 육로를 선택했다면, 고구려가 북위의 군대가 자국 땅을 지나는 것을 허용했다는 것인데, 그것이 가능했는가? 라는 의문점이 있다.

물론 절대라는 것은 없고, 당시 북위와의 훈훈한 관계를 유지하던 고구려가 허용해줄 수도 있으나, 육로로 통해서 고구려를 지난다면 북위군이 평양성 인근을 지나간다는 소리인데, 아무리 동맹국이라도 다수의 병력이 수도 인근을 지나가게 해줬다는 기록은 상식적으로 의문인데다가 한국사는 물론 중국사에서도 나오지 않는다.[7]

그렇다면 황해를 건너왔을 확률이 높은데, 유목민 선비족 출신인 북위는 물에 익숙하지 않아 황해를 건너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에 근거해 북위군이 쳐들어온 곳은 만주화북의 사이에 위치한 요서 지방의 백제 식민지라며 이 사건을 백제의 요서경략설의 근거로 활용하기도 한다.[8]

또한 북위가 왜 수십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보내 백제와 교전을 펼쳤는가?라는 의문점도 있으나, 기록이 부족해 알 수 없다. 병력수의 경우에는 고대의 기록이 으레 그렇듯 부풀렸을 확률이 높다.

다만 북위의 병력이 상당히 강력했고, 백제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동성왕이 남제에 보낸 표문에 기록된 백제군 지휘부들의 면면에서 사법명, 해예곤, 목간나 등 대성팔족의 일원들이 참여한 것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들 대귀족이 직접 참전해서 군대를 지휘했다고 본다면 백제도 상당한 정예병을 투입한 것으로 보이며, 시체가 평원을 붉게 물들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격전끝에 대승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5세기 후반은 백제가 한가롭게 대외 확장이나 노리고 있을 시절이 아니라, 당장 전성기를 맞은 대가야전라도 동부까지 영향력을 넓히며 백제의 본토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구 마한 세력권인 전라북도 남원시, 장수군 등지에는 이 시기 가야 유적이 남아있고, 《일본서기》에도 가야의 전라도 진출을 시사하고 있으며, 마침내 섬진강 유역을 장악해 479년에는 하지왕이 중국 남제에 처음으로 단독 사절단을 보내기도 한다. 백제의 본진이 한반도에 있는 이상 동성왕이 만약 북위랑 싸울 여유가 있다면 당장 앞마당 전라도부터 챙기는 게 먼저였을 것이다.

또한 요서경략설의 관점에서 위 전투가 요서에서 벌어졌다고 가정하더라도 위와 동일한 문제가 남는다. 즉, 위 사법명, 해예곤, 목간나는 대성팔족에 해당하고, 기사에 등장하는 장군들이 승전 이후 받은 지역도 모두 전라도 지역으로 비정된다. 다시 말하면 사법명, 찬수류, 해예곤, 목간나 모두 근거지는 한반도 지역에 위치했다고 보는 건이 타당하지, 요서 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백제 입장에서도 전라도 경영과 한성 수복이 가장 큰 목표일텐데, 안 그래도 부족한 전력 중 상당한 부분을 요서에 상시 배치해 둘 이유도 없다.

그렇다면 위 전투가 요서에서 벌어졌다고 가정하더라도, 백제군은 본토에서 해로를 따라 요서 지방에 파견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이 경우에는 고구려의 연안을 거쳐가야 하니 북위와 같은 진격로의 난제가 있다. 마찬가지로 상당한 전력의 군대가 자국 연안을 통과해가는데 고구려가 그대로 보고만 있었을까?[9] 고구려가 당연히 견제활동에 나섰을 것이고, 설령 해로를 통한 진군을 저지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육군을 동원하여 백제의 북쪽 지역을 도발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위 전투를 전후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충돌을 암시하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5.1. 분석과 학설

남아있는 자료가 저 위의 내용들이 전부다. 그렇다보니 학계의 해석도 제각각인데, 크게 보면 다섯 가지로 분류된다.
  • 북위의 해로 공격설 - 북위와 백제가 전쟁을 했다고 보고, 그렇다면 북위의 공격 루트가 육로인가 수로인가를 따져볼 때 육로는 중간에 고구려가 끼어있는 것을 고려하여 바다를 건너와 침공했다고 본 것이다. 특히 490년 전투 중 동성왕이 남제에 직접 보낸 표찰에서 목간나의 공적 부분이 가장 큰 근거로 꼽힌다. 木干那前有軍功, 又拔臺舫인데, '舫'(방)은 말할 것도 없이 선박이고, '臺'(누)는 성문 혹은 누각으로 볼 수도 있으나 공격자인 북위군에게 성문이나 누각이 존재할 리가 만무하니 '臺舫(대방)'은 각 단어의 의미가 서로 통하는 단어인 '누선(樓船)'[10]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백제 멸망때 당군이 배를 타고 건너온 사례도 있다.
  • 요서경략설 - 백제 본토지역이 아닌 요서지역에서 백제 - 북위 간 충돌했다는 설이다.
  • 북위군이 아니라 고구려군이 쳐들어왔다는 설 - 공격자를 북위군으로 보는 것은 남제 측에 전쟁에 대한 소식을 전하면서 공격자를 '위로'로 지칭했기 때문인데, 문제는 동성왕의 표문 자체에는 위나라가 침공했다는 말이 없고, 위로가 백제를 공격했다는 말은 남제서의 편찬자인 소자현이 작성한 구절이다. 즉, 백제에서 험윤/흉리를 무찔렀다 한 것을, 남조에서는 험윤=북위이므로 백제가 북위를 무찔렀다고 착각하여 소자현이 백제가 위로를 격파했다고 썼다는 것이다. 요서경략설 부정론을 포함해서 이 시기 백제의 대외 관계를 주로 다루는 공주대학교 유원재 교수의 주장이다.
  • 백제의 용병 참가설 - 최근 학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가설로, 이도학 교수의 주장이다. 백제가 왜에 선진 기술을 전수해주고, 왜는 백제에 용병을 파견해 군사적 지원을 해주었듯이[11] 남제가 백제에게 용병을 요청했고, 백제가 이를 받아들여 바다 건너 주둔해 있다가 북위와 전쟁을 했다는 것이다. 다만, 각종 기록의 주체는 북위가 백제(영토)를 침입했다는 기록과 결정적으로 '누선(臺舫)’이라는 북위의 배를 불태웠다는 기록 때문에 전반적인 지지를 얻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가 남조 유송에 마필을 배로 팔았다는 점에서 북위가 고구려 수군의 도움으로 백제로 상륙하여 전투를 벌였다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긴 하지만 북위가 1)수군도 미약한데 바다 건너편을 2)직접적인 위협이나 이해 관계도 없는 상태에서 3)인접 우방국이 있음에도 무슨 이유로 전쟁을 개시했는지부터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 소규모 교전설 - 백제-북위 사이에 교전이 있었지만 동성왕의 표문과 같은 대규모 교전이 아니라 국지전 또는 소규모 전투를 백제가 과장하였다는 주장이다. 구체적으로 북위군이 남조로 가는 백제 사절을 추격하다가 백제에 이르러 작은 충돌이 벌어졌고, 백제가 이 사실을 부풀려 보고했다고 추정하는 주장(韓昇, 2007, 「宋·齊시기 동아시아의 정세와 封號의 변화」, 한국학연구원 학술총서, 2007-10, 285~288쪽), 백제가 남조와의 교류상 중국 동해안 일대에 중간 기항지를 마련하였으며, 이곳에서 백제와 북위 양국 간에 작은 충돌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노중국, 2008, 「(보론)백제의 중국대륙 진출」, 백제 역사와 문화,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494~496쪽) 등이 있다.
  • 부정설 - 백제-북위 간의 전투 자체가 없었으며, 남제에게 인정받기 위해 꾸며낸 기록이라는 주장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도쿄제국대학의 교수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가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의 경우, '그러면 진실 여부를 충분히 확인하고도 남을 남제 측에서 왜 굳이 그런 엄청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줬냐'는 문제가 생긴다. 게다가 기존에 존재하는 기록들에 대하여 별다른 근거도 없이 그냥 부정해버리는 것이라 학계에서는 사실상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국내 학계에서도 백제와 북위의 교전 자체를 부정하는 의견도 제기된 바 있다.[12] 즉 백제와 북위의 교전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13], 동성왕의 표문은 백제가 남제에 신속하는 과정에서 백제가 외교전략의 일환으로 남제의 주적인 북위에 대한 대적 의사를 표명한 것이고, 백제의 신속이 더 중요했던 남제 입장에서는 굳이 그 교전 사실의 실체를 따지기 보다는[14] 백제의 요청대로 외교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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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기 인물들은 모두 490년 전투 참가자들로 그 이전 전투 참가자들은 불명이다.[2] 이러한 행적에 관한 기록은 독성산성 전투에도 있었다.[3] 자세한 내용은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신라-일본 관계 문서의 내용 등을 참조.[4] 중국 사서 기록에도 있는 내용이다.[5] 여담으로 장수왕이 너무 오래 살아서 아들인 고조다가 장수왕 보다 먼저 죽어서 장수왕의 손자인 문자명왕이 왕위를 이어받았다.[6] 다만 아직 효문제가 친정을 시작하기 전이었다.[7] 세계사로 보면 아예 없지는 않다. 대표적으로 제1차 이탈리아 전쟁 당시에 프랑스샤를 8세나폴리 왕국을 친다는 이유로 교황령을 지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왕국은 이탈리아 열국보다 훨씬 더 강대국이었으며 교황국제연합의 수장과 같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고, 함부로 대할 시에는 다른 카톨릭 세력에게 역풍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사례는 아니다.[8] 백제의 요서경략설은 여러모로 논쟁이 되고 있다.[9] 이미지와는 달리,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서신을 보더라도, 백제의 수군은 고구려의 연안 해상통제권을 밀어낼만한 전력은 아니었다.[10] 누선춘추전국시대에 처음 등장한 군사용 선박이다. 배에 큰 누각을 세운 형태이기 때문에 대규모 병력의 수송이 가능했다. 배의 특성상 해전을 벌이기는 적합하지 않았지만, 한나라 무제가 고조선을 공격할 때 동원하거나 후에 수 양제, 당 고종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도 사용하였다. 남북조 시대에는 주력 전투선으로 활용되었다는 기록도 있다.[11] 왜가 대한해협을 건너 백제에 군사적 지원을 한 사례로 관산성 전투, 백강 전투가 있다.[12] 박찬우, 2017, 동성왕대 대남제 외교전략-남제서 백제전의 표문을 중심으로, 한국고대사학회 p 14.[13] 그 근거로서 1. 남제서에 따른 북위의 군사행동이 대체로 북조의 사서와 교차검증 되는 반면, 동성왕의 표문에 따른 교전은 위서를 비롯한 북조의 사서와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 점, 2. 북위는 당시 서북 변경이 소란스러웠고, 9월 이후로는 섭정이었던 풍태후의 사망에 따른 정치적 후폭풍 때문에 백제를 공격할만한 상황이 아니었고, 3. 북위가 백제를 공격할 이유도 없으며, 4. 백제가 올린 표문에 백제를 침공한 실체가 구체적으로 명기되지 않고 험윤, 흉리와 같이 상징적으로 표현된 점, 5. 표문에 북위군의 규모나 침입 장소, 날짜 등과 같은 구체적인 전황이 결여된 점 등을 든다.[14] 특히 당시 남제의 황제였던 명제(남제)는 찬탈로 즉위하여 명분이나 통치의 정당성이 취약했으므로, 명제로서도 굳이 백제의 신속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