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4 21:55:03

하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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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7CEEB><colcolor=#3d428b> 왕명 <colbgcolor=#fff,#1f2023> 하지왕(荷知王)
생몰년도 ? ~ ?
재위기간 ? ~ ?

1. 소개2. 정체?3. 관련 항목

1. 소개

중국 역사서남제서》 만동남이전(蠻東南夷傳)에 등장하는 가야 반파국(대가야)의 군주. 479년에 여러 나라의 사신과 더불어 가라왕 하지가 사신을 통해 폐백을 바쳤고, 이에 보국장군 본국왕으로 제수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加羅國 三韓種也 建元元年 國王荷知使來獻 詔曰 量廣始登 遠夷洽化 加羅王荷知款關海外 奉贄東遐 可授輔國將軍本國王
가라국은 삼한의 종족이다. 건원 원년(479)에 국왕 하지의 사신이 와서 (조공을) 올렸다. 조서를 내려 “널리 헤아려 비로소 (남제 조정에) 올랐으니, 먼 오랑캐가 감화되었다. 가라왕 하지가 바다 밖에서 관문을 두드리며 동쪽 먼 곳에서 폐백을 바쳤으니 가히 보국장군 본국왕에 제수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남제서》 권58 열전 제39 만동남이전
이때 하사받은 보국장군은 남제의 제3품으로, 표기대장군이나 진동대장군 등의 제2품을 하사받은 고구려왜국보다는 낮지만 상당한 지위를 남제에게 인정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당시 중국 남조는 원래 유송(劉宋)이었는데, 마침 대가야가 사신을 보낸 479년 그 해 송의 권신 소도성이 황제를 칭하고 남제를 건국했기 때문에 아마도 하지왕은 사절단을 준비하고 물리적으로 보내는 기간을 고려하면 남제가 아니라 유송에 사신을 보내려 했을 듯 하다. 이렇게 하지왕의 사신 파견은 의도적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마치 제나라의 건국을 축하하는 듯한 형태가 되었다. 당시 남조와 북조는 서로 명목상 조공국을 늘리려고 경쟁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야라는 새로운 나라가 폐백을 바치는 것은 남제에게 좋은 경사였다.

2. 정체?

정약용은 "수로왕의 자손에는 좌지왕, 질지왕, 겸지왕이 있는데 하지는 이 삼지의 하나라고 했으니 그 연대로 보아 질지왕이 틀림없다."라고 하기도 했다. 즉 정약용은 하지왕을 금관국 군주로 추정한 것.

그러나 현대에는 금관국이 아니라 반파국 출신이라고 추정한다. 우선 5세기 후반대에 가야 지역에서 가장 잘 나가던 나라는 반파국이라는 게 정설이며 고고학적으로도 증명이 되어있으므로 중국까지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낼 정도면 반파국일 가능성이 높다. 마침 5세기 후반 반파국은 개로왕이 사망하고 수도가 함락된 백제의 약화를 기회로 삼아 호남까지 영향력을 뻗어 전라북도 남원시, 장수군 등지에 관련 유적을 다수 남길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했던 고고학적 증거와도 맞물린다. 중국에 사절단을 보낸 것도 본래 내륙 고령 세력인 대가야가 섬진강 유역을 장악해 가능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현대 한자음으로 비슷하게 읽히는 가실왕과 동일인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하지왕의 지(知)는 당시 '디'에 가깝게 발음됐을 뿐더러 가실왕은 우륵과 동시대 사람, 즉 6세기 중반 사람이라 남제서의 하지왕 기사와 시기 차가 제법 있어 가능성은 낮다.

3. 관련 항목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