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1 09:36:07

이시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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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colbgcolor=#fff,#1F2023> 이시품왕(伊尸品王)[1]
별호 이품왕(伊品王)[2]
시호(?) 명왕(明王)(?)[3]
성씨 김(金)
이품(伊品) / 이시품(伊尸品)
왕후 정신(貞信)
왕자 김좌지(金坐知)
부왕 거질미왕(居叱彌王)
모후 아지(阿志)
생몰연도 ? ~ 407년 4월 10일
재위기간 346년 7월 7일 ~ 407년 4월 10일
(61년)

1. 소개2. 침략의 시대
2.1. 백제의 침공2.2. 의 침공2.3. 고구려의 침공
3. 기록
3.1. 《삼국유사》 가락국기3.2. 《삼국유사》 왕력
4. 기타

1. 소개

금관국의 5대 왕.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전한다. 김해 김씨 족보에는 명왕(明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은 김씨이고 왕비는 극정신이며 태자로는 좌지(훗날 좌지왕)이 있었다. 일본서기의 기본한기(己本旱岐)[4]와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한다. 일본서기에서는 기본한기의 음을 코호칸키(コホカンキ, 옛 발음으로는 "코포칸키")라고 달아놓았다. 여기서의 한기(旱岐)는 가야 소국의 왕을 지칭할 때 쓰는 칭호이기 때문에 본래 이름은 기본에 해당한다. 일본서기에는 기본한기의 왕자로 좌지왕말고 백구저(百久氐), 아수지(阿首至), 국사리(國沙利), 이라마주(伊羅麻酒), 이문지(爾汶至) 등을 더 기록해 놓았으나 이들이 실제로 이시품왕의 아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백구저가 좌지왕과 같다는 설도 있다.

346년 칠석부터 407년까지 무려 61년간 가야를 다스렸으나 임기 내내 주변국들의 침공에 시달리던 불운한 왕이었다.

2. 침략의 시대

2.1. 백제의 침공

369년에 백제리즈 시절을 만든 근초고왕의 지시로 사백, 개로, 사사노궤 등과 함께 가야 연맹의 일부인 탁순국에 모였다가 금관국을 침공한 신라를 격파했다. 이 내용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한국 사서에는 등장하지 않고 일본서기에만 등장한다.
3월에 아라타와 카가를 장군으로 삼아 구저와 함께 탁순국으로 보내어 신라를 치려고 하다. 원군을 청하자 목라근자, 사사노궤, 사백, 개로가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화, 남가라[5],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의 7국을 평정했다. 서쪽으로 돌아서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 심미다례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다. 백제 왕 초고와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의류촌으로 와서 아라타와 목라근자 등을 만나자 비리, 벽중, 포미, 지반, 고사의 읍이 항복하다. 백제 왕과 치쿠마가 벽지산과 고사산에 올라 번국의 맹세를 하고, 치쿠마를 도읍으로 데려가 후대한 뒤 구저와 함께 보내다.

신라에게 공격당하면 항상 백제가 도와주는 식이었다. 이때 목라근자가 가야의 소국들을 평정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외교적인 협상으로 협력국으로 만들었다는게 설득력을 얻고 있다.

2.2. 의 침공

382년 카츠라기노 소츠히코가 파견되었다는 '가라'에 대해서는 금관국인지 반파국인지 이견이 있으나 이 기록의 '기본한기'를 '이시품왕'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만약 이것이 금관국의 기록이라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가 왜에 보내는 사신을 끊자, 일본은 소츠히코를 파견하였으나 미인계에 속아서 뜬금없이 금관국을 침공했다. 이 결과 가라의 왕과 그의 가족들이 모두 백제로 도망갔고, 백제의 장수 목라근자가 나서서 겨우 도성과 땅을 되찾았다."

이를 되찾아준 것은 일본서기에는 천황이라고 되어 있는데 백제 장수 목라근자가 활동한 것 때문에 백제로 보는 의견도 적지 않다.

2.3. 고구려의 침공

하지만 외세의 침략은 끝나지 않았다. 신라 내물왕 시대인 400년 왜가 신라를 침공했는데 '왜가 신라성부터 (임나가라) 종발성까지 들어찼다'고 하여 통설에서는 가야, 그리고 신라와 대립하던 백제의 지원이 함께 했다고 본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_][6]▨▨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戌兵拔新羅城▨城倭寇大潰城▨[_][7]ㅁㅁ盡ㅁㅁㅁ安羅人戌兵新ㅁㅁㅁㅁ其ㅁㅁㅁㅁㅁㅁㅁ言
10년 경자에 (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귀복하였다. '安羅人戌兵' …[8] ㅁ 신라성 ㅁ성 ㅁㅁㅁㅁㅁㅁㅁ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 《광개토대왕릉비》 제2면
신라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광개토대왕은 보병기병 5만명을 편성해 남하해 왔다. 다만 여기에는 판독 불가능한 글씨가 많아 논란이 있다. 이전까지는 임나가라(금관국)가 적극적으로 왜에 협조했다가 패배해 버리면서 이들이 가야 연맹의 맹주 자리를 내놓은 것으로 해석하였으나 고구려 군대가 몰려오자 임나가라 종발성이 즉시 '귀복(歸服)'하였다는 점과 5세기 초반에도 대성동 고분군의 위세가 유지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에 협조하여 크게 타격을 입지 않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금관국은 더 이상 신라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실 369년 기록부터 백제가 일본 교역의 창구로 금관국이 아닌 탁순국 / 다사진을 택하고 4세기부터 부산(독로국으로 추정) 지역에서 가야색과 신라색이 줄다리기를 하는 등 4세기 후반 신라는 점차 김해 쪽으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광개토대왕 때의 원정이 직접 타격을 주지는 않았더라도 교역권이 5세기 초반이 되면 신라 주도로 완전히 넘어가는 상황에 영향을 일정 부분 미쳤으리라고 생각된다. 어찌되었건 금관국 역사상 가장 다사다난했던 시기였고 결과적으로 안 좋은 방향으로의 전환점을 경험했던 왕.

3. 기록

3.1. 《삼국유사》 가락국기

김씨이고 영화(永和) 2년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62년으로 의희(義熙) 3년(407년) 정미 4월 10일에 죽었다. 왕비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 정신(貞信)으로 왕자 좌지(坐知)를 낳았다.
金氏, 永和二年即位. 治六十二年, 義熈三年丁未四月十日崩. 王妃司農卿克忠女貞信, 生王子坐知.

3.2. 《삼국유사》 왕력

제5대 이품왕(伊品王)
아버지는 거질미왕이고 어머니는 아지(阿志)이다. 병오년(346년)에 즉위하여 60년 동안 다스렸다.
第五 伊品王
父居叱旀 母 阿志 丙午立 理六十年

4. 기타


[1]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등장. 주검 시(尸)는 향찰에서 'ㄹ' 받침을 나타내는 표기에 사용되므로, 당시에는 '일품왕'으로 불린 듯하다.[2] 《삼국유사》 왕력에 등장.[3] 김해 김씨 족보에 기록된 시호.[4] 이본한기(已本旱岐)의 오기라는 설도 있다.[5] 일본서기에는 금관국이 남가라로 표현되어 있다. 이건 뒤의 기록에도 마찬가지.[6] 이 부분은 7글자가 있었으나 모멸되었을 수도 있고, 원래부터 글자를 새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7] 앞서와 같이, 16글자가 있었으나 모멸되었을 수도 있고, 16~17자에 해당하는 부분에 원래 글자가 없었을 수도 있다.[8] 이에 대한 해석도 분분하다. '안라국의 방위군', '순라병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신라인의 병사를 안치하여 …' 등으로 나뉘고 있다. 관련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