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8-08 20:09:43

김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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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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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4대 상대등
김세종 | 金世宗
출생
(음력)
510년대 이전
금관가야
사망
(음력)
588년 (향년 70대 이상)
신라
재임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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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상대등
579년 8월 ~ 588년 12월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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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494><colcolor=#fbe673> 성씨 김해 김씨
이름 세종(金世宗)[1], 노종(奴宗)[2], 노부(奴夫)[3]
노리부(弩里夫)[4], 내례부(內禮夫)[5]
부왕 구형왕
아들 솔우공(率友公)
관등 이찬(伊飡飡)
직위 상대등(上大等) }}}}}}}}}
1. 개요2. 이름3. 생애4. 필사본 화랑세기에서5. 대중매체에서
5.1. 선덕여왕의 등장인물
5.1.1. 노리부5.1.2. 세종

[clearfix]

1. 개요

금관가야 왕족 출신 신라 상대의 정치인이자 군인.

2. 이름

동일한 이름을 한자로 훈차하여 세종(世宗)[6]이라 쓰기도 하고, 음차하여 노종(奴宗)[7], 내례부지(內礼夫智)[8], 노부(奴夫)[9], 내부지(內夫智)[10], 노리부(弩里夫)[11]라고도 쓴다. 이는 '누리보'에 가까운 이름을 음차한 것이고, 훈차를 할 땐 '누리'라는 뜻을 지닌 世 자를 쓴 것이다. 처음 이름을 지을 때부터 한자 뜻을 고려해서 짓는 이후 시대와 달리, 아직 중국식 문화가 덜 들어온 고대 신라인의 이름은 당시 순우리말의 음차이므로 이름을 쓸 때 사용하는 한자는 기록마다 그때그때 바뀐다.

3. 생애

삼국사기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금관국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의 장남이자 김무력의 맏형. 그러니까 김유신의 큰할아버지다. 금관국이 만약 멸망하지 않고 대를 이었다면 구형왕에 이어 금관국의 임금이 되었을 인물이지만, 이미 6세기 초반 시점에 금관국은 가야 지역의 주도권도 대가야 등에 빼앗기고 가야 안에서도 약한 나라 중 하나로 전락한 상태였다. 529년 대가야 이뇌왕의 결혼동맹 결렬 사건이 결정타가 되어, 결국 532년 아버지 구형왕은 신라에 나라를 통째로 들어 바치고 항복한다. 이 때 싸우지 않고 순순히 항복한 덕에 금관국 귀족은 신라의 진골 귀족에 편입되어 나름 권세를 누리고 활약할 수 있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구형왕이 항복했을 당시에 김세종의 아들 졸지(卒支), 혹은 솔우(率友)가 있었다고 한다.
신라 제30대 법민왕 용삭(龍蒴) 원년 신유(661)년 3월에 왕이 조서를 내렸다.
"가야국 시조의 9대손인 구형왕이 나라에 항복 할 때 데리고 온 아들 세종의 아들인 솔우공(率友公)【졸지공(卒支公)과 같음.】의 아들 서운(庶云) 잡간(匝干)[12]의 딸 문명황후께서 나를 낳으셨으니, 시조 수로왕은 어린 나에게 15대조가 된다. 그 나라는 이미 없어졌지만 그를 장사 지낸 사당은 지금도 남아 있으니 종묘에 합해서 계속하여 장사를 지내게 하리라."
삼국유사가락국기
이에 따르면 532년 당시에 아들이 있는 성년이었으니 김세종의 생년은 512년 이후 정도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588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76세 이상 장수한 셈이다.

동생인 김무력이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의 왕을 전사시키는 엄청나게 큰 공을 세웠고, 무력의 아들 김서현 - 손자 김유신으로 신라 명장 라인이 이어지기 때문에 세종은 형이 되고서도 존재감이 동생한테 좀 가리긴 하지만 그 역시 전장에서 꽤 많이 활약했는데, 신라와 백제나제동맹을 맺고 551년에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포함한 중부 지방을 공격할 때(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거칠부를 비롯한 아홉 장군[13] 중 한 사람으로 참전해 죽령 이북, 고현(지금의 철령 지방) 이내의 10개 군을 공략해 신라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즉 백제가 한강 하류를, 신라는 한강 상류를 일시에 공략한 것이다. 이 때 세종은 파진찬이었으며 이후 이찬으로 승진했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단양 신라 적성비에도 내례부(內禮夫)라는 이름으로 이사부, 김무력 등과 함께 나와서, 원래 고구려 영역이었던 단양 지역을 점령하는 데도 같이 참여한 것을 알 수 있다.[14]

이후에도 관산성 전투의 보복으로 백제군이 577년에 신라 서쪽 변경을 공격해 왔을 때 이를 요격하여 막아내었다. 진평왕이 즉위한 뒤 579년 상대등에 임명되었고 10년 동안 재임하다가 588년 사망해 이찬 수을부가 상대등 직위를 이었다.

엄연히 신라와는 계통이 다른 귀순한 망국의 구왕족 가문이 한두 세대만에 신라에서 계속 출세해 결국 진골 귀족회의 의장인 상대등까지 올랐다는 것은 고대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상당히 이례적인 일로, 동생 김무력과 함께 이후 김유신과 그의 후손들까지 이어지는 가야계 신김씨의 정치적 위상을 신라에서 처음으로 정립한 입지전적의 군인, 정치가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신라 귀족사회에서 가야계 신김씨 진골에 대해 경주 토착 귀족들이 굴러들어온 돌이라 차별을 했는가라는 논란이 있는데, 김서현이나 문희의 예와 같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미 그 전 시대에 세종이 귀족의 최고 지위 상대등까지 올랐던 것이 반대 예시가 되기도 한다. 신라에서 상대등이 얼마나 높은 자리냐면, 적당한 왕위계승권자가 없는 상황이 닥치면 상대등은 왕위를 계승할 후보 우선순위로 여겨지기도 했을 정도였다. 세종의 생애를 보면 고속 승진과 그에 걸맞는 활약의 연속이었고 신라 사회에서 차별은 커녕 상당히 푸쉬를 받았다고 볼 여지가 많다. 아니면 차별이 있어도 다 제치고 출세할 만큼 세종의 능력이 초월적으로 뛰어났거나.[15] 삼국통일전쟁의 대영웅인 조카 손자는 상대등을 넘어서 진짜로 사후에 왕으로 추존되었으니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집안이였던것은 확실한듯.

이상의 노리부=세종은 진흥왕 순수비금석문에도 자주 등장하며 삼국사기삼국유사에도 다수 나오는 것으로 보아 금관가야의 정통 후손(김해 김씨)임에도 당시 신라에서 엄청나게 출세한 비중 있는 인물이었는데, 아래에 나올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는 신라 왕족 경주 김씨 계열의 인물로 나온다. 이는 박창화화랑세기를 쓰면서 이 사실을 모르고 그만 오류를 범했다는 것으로 보고 있고 따라서 화랑세기 위서론의 또 하나의 중요한 근거로 쓰인다.

화랑세기 진서론을 지지하는 이종욱 교수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가 잘못된 거고 오히려 화랑세기로 보완된다...는 입장인데, 삼국유사+삼국사기랑 화랑세기랑 어느 쪽에 더 힘이 실릴지는 말할 필요가 없다. 이에 대해 김태식 교수 입장은 황종이랑 거칠부가 싸운다는 말과 같이 무리한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4. 필사본 화랑세기에서

파일: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png
신라의 풍월주(風月主)
박창화가 필사했다고 주장하는 화랑세기의 기록
5대 사다함 6대 세종 원화 초대 남모 / 준정

필사본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신라시대 인물. 우산국 정벌로 유명한 이사부의 아들. 어머니는 지소태후. 아버지가 다른 형 진흥왕이 친동생처럼 대했다고 한다.

처음에 미실과 혼인했으나 미실이 지소태후에게 쫓겨나자 융명을 정실로 삼았다. 미실이 사다함과 사귀자 괴로워하는 세종을 보다못한 지소태후가 미실을 다시 불러들였으나, 미실은 첩이 된 것이 싫어 세종을 멀리 했다. 이에 미실이 정실이 되고 융명은 둘째 부인이 되었다.

사다함이 죽을 때 세종을 풍월주로 추천해 사다함의 뒤를 이어 6세 풍월주가 되었다.

아내 미실이 궁에 들어가 왕을 모시고, 그외에도 여러 남자와 사통했는데도 오히려 부인에게 정절을 지킨 대인배. 미실이 사도황후와 동침하라고 했는데도 거절했다가 미실이 계속 청하자 어쩔 수 없이 동침했다고 한다. 심지어 풍월주가 잠시 폐지되고 원화가 부활했을 때 불만을 터뜨리는 낭도들에게 "원화(미실)은 내 옛 부인"이라며 따를 것을 종용했다.

화랑세기에서는 '화랑 중의 화랑', '화랑의 전형'이라고 칭송했다.

아들이자 11세 풍월주 하종은 사다함이 미실의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낳았다고 하는데, 사다함을 매우 닮아서 실은 사다함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고 한다.

5. 대중매체에서

5.1. 선덕여왕의 등장인물

화랑세기의 설정을 채택한 드라마에서는 노리부와 세종이 별개의 인물로 나온다.[16]

5.1.1. 노리부

노리부는 이 드라마에서 거칠부, 이사부와 함께 진흥왕 시절부터 그를 섬겨온 신하로 1화에서 잠깐, 그리고 미실의 회상 장면에서 나온다. 물론 노리부가 김유신의 종조부라는 얘기는 안 나온다(...). 진흥왕을 보살펴서 이사부와 함께 지증왕 시절부터 전해지던 신라의 뜻을 알리려는 진흥왕의 뜻을 수행했다. 진흥왕의 후계자인 진지왕이 하라는 정치는 안하고 막장으로 나가자 이사부, 거칠부 그리고 미실과 함께 진지왕을 폐위시켰다. 미실이 진흥왕의 유언을 읽으며 진지왕을 폐위하자 백정 왕자의 손을 잡고 왕이라고 선언한다. 그 후에도 상대등으로 등장하여 미실이 황후로 세우는 화백회의를 주관하지만 문노와 마야가 오면서 무산된다.[17]

사실 위의 고증 오류에 대해서는 풍월주 비재때 회상씬 자체가 중간에 투입돼서 생긴 오류이다. 1화에서는 아예 거칠부라는 인물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 거칠부는 왜 문노가 미실을 적대했는지 설명하기 위해 그리고 추후에 세필과 소엽도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 넣은 인물이다. 덕분의 노리부의 성격 자체도 바뀌게 되었는데 1화의 노리부는 그저 미실의 앞잡이 내지 도구로써 충신인 면모가 드러나지 않는 반면에 추후 에피소드에서는 미실을 황후로 밀어준게 미실을 좋게봐서 미실이 황후가 되면 왕을 제대로 보좌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미실을 밀어준 것처럼 그려지기 때문이다.[18]

노리부가 미실의 진흥왕 암살시도를 몰랐다면 노리부가 봐온 미실은 진흥왕 시절의 발톱을 감추며 진흥왕에게 충성했던 미실이기에 그런 판단을 하는 것도 무리한 일이 아니다.[19]

5.1.2. 세종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세종(선덕여왕)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삼국사기》 진지왕 본기, 《삼국유사[2]삼국사기》 법흥왕 본기.[3]삼국사기》 진흥왕 본기, 《삼국사기거칠부 열전.[4]삼국사기》 진흥왕 본기.[5]단양 신라 적성비』. 금석문에서는 내례부지(內禮夫智)로 나와있는데 지는 마한어에서 "님"과 같은 존칭어로 등장하기때문에 내례부가 본명이라 볼수 있다.[6] 우리가 잘 아는 묘호 세종과 한자까지 똑같지만 이 세종은 묘호가 아니라 이름이다. 저쪽 세종의 이름은 이도(李祹)[7] 삼국사기 법흥왕 19년(532) 조.[8] 단양 신라 적성비(551). 관등은 대아간지(=대아찬)였다.[9] 삼국사기 진흥왕 12년(551) 3월 조. 관등은 파진찬이었다.[10]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560년대). 관등은 일척간(=이찬)이었다.[11] 삼국사기 진평왕 원년(579) 8월 조. 상대등이 되었다.[12] 삼국사기에는 김무력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13] 대각간 구진, 각간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ㆍ비서(非西), 파진찬 거칠부ㆍ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 아찬 미진부, 그리고 파진찬 노부(奴夫, 즉 세종)[14] 적성비에서는 관등이 대아찬으로 나와서, 파진찬으로 나오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시기보다 좀 더 먼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 대아찬이 파진찬보다 아래이므로.[15] 진지왕 기록에 보면 노리부가 백제의 대군을 상대하여 대승을 거둔 기록이 남아 있다. 단순히 정치인인 것 뿐 아니라 군사적 수완도 꽤 뛰어났었던 듯하다.[16] 애시당초 상술했듯이 실제 역사의 김세종(= 노리부)은 금관가야 구형왕의 장남이고 화랑세기의 김세종은 신라 왕가 출신인 김이사부의 아들이다. 그냥 동명이인 취급하면 편할듯.[17] 다만 여기서 드라마 자체 고증 오류가 생기는데 분명 진지왕 폐위 후 상대등이었던 거칠부를 미실이 독살하기 전 미실은 세종에게 상대등의 자리를 약속했다. 그리고 풍월주 비재에도 덕만, 유신 알천의 대화에서도 거칠부 다음에 세종이 상대등이 되었다고 나온다. 그러면 거칠부 -> 세종이 상대등으로 교체되어야 하는데 엉뚱하게 노리부가 앉아있는 것.[18] 실제 거칠부를 제외하고는 미실이 진흥왕을 암살하려고 했다는 시도를 분간하지 못했고 아는 사람들도 얼마 없었다. 세종의 아버지 이사부가 알았을지는 무관하나 당시 세종이 이미 미실과 혼인관계였기 때문에 알고서도 묵인했을 가능성도 있거나 아니면 실제로 병약한 모습을 보여주기에 병상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신경을 못썼을 수도 있다.[19] 실제 미실은 권력을 탐했을지언정 마지막 진흥왕이 자신을 버리기 전까지는 진흥왕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긴 했다. 이런 모습은 5년뒤에 나오는 드라마 정도전의 이인임과 비슷하다. 둘다 왕에게는 충성했으나 왕이 자신을 버린다는 것을 안 순간에 돌아서며 타락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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