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야마토 정권의 장군. 다른 사서에는 '사지비궤(沙至比跪)', '증도비고([ruby(曽都毘古, ruby=さちひこ)])'라는 이름으로도 등장한다. '사치히코'라는 표기도 있으나, '소츠히코' 쪽의 표기가 더 자주 쓰이는 듯하다. 백제의 사씨(沙氏)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2] '~히코'라는 인명 자체가 고대부터 근대까지 두루 쓰여온 일본식 이름이다.[3] 게다가 '카츠라기씨' 자체가 그 유래와 통치 지역까지 자세하게 기록된 일본 호족의 성씨이기 때문에 백제인일 가능성은 더더욱 낮다. 어찌되었건 4세기 후반 ~ 5세기 초반 경의 사람으로 보인다.한편 소츠히코를 백제 도래인이 아닌 신라 도래인으로 보는 설도 존재한다. '히코'[4]가 고대로부터 일본의 남성 인명에 쓰이던 단어는 맞으나, 애초에 신라에서 왔다고 전해진 천일창(天日槍, 아메노히보코)의 증손자의 이름이 키요'히코'(淸彦)였다. 이는 당시 일본 토착인들 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 넘어온 도래인들 또한 이 '히코'라는 이름을 썼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츠히코의 성 '카츠라기(葛城)'가 그가 현재 일본 나라현에 있었던 카츠라기라는 지역에 살고 있었기에 삼은 성씨라고 하나,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이러한 사실이 기술된 바 없어, 확실한 설은 아니다.
카츠라기라는 성씨의 유래에 대한 가설 중에 신라의 갈문왕(葛文王)이라는 관위와의 연관성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5]
한편, 《고사기》에서는 소츠히코를 제8대 고겐 덴노(孝元天皇)의 후손이며, 타케우치노 스쿠네(武內 宿禰)의 아들로 적고 있으나 애초에 고겐 덴노는 결사팔대(欠史八代) 중 한 명으로 일본 역사학계에서도 사실상 실존하지 않았다고 보는 설이 대다수이며, 타케우치노 스쿠네 또한 그가 모신 진구 황후와 더불어 가상의 인물이라는 설이 있어[6], 이 사실들 때문에 이러한 고겐 덴노와 소츠히코 간의 혈연 관계는 사실상 창작되었다고 본다. 단, 타케우치노 스쿠네는 삼국사기에서 ‘우도주군’이라는 이름으로 석우로 기록에서 교차검증되기에 실존인물이라는 설이 최근 대두되었기에 둘다 실존인물임은 확실하다
2. 생애
첫 등장은 진구 5년(205년)이지만, 이것이 하필이면 박제상이 미사흔을 신라로 귀환시킨 사건이라서 도저히 연대가 안 맞는다는 문제가 있다. 《일본서기》에는 205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418년이고, 《삼국유사》에 따르면 425년이다. 연대야 어찌 되었든 미사흔과 함께 쓰시마로 파견되었다가 박제상에게 낚여서 미사흔을 보내준다. 자세한 내용은 박제상 항목 참조.이후 진구 62년(262년)에 천황의 명으로 가라(대가야)[7]를 돕기 위해 신라를 공격한 것이 실질적인 첫 등장인데, 백제 측 기록에 따르면 여기서도 중간에 신라 여자에게 코가 꿰여서 치라는 신라는 안 치고 오히려 백제 및 야마토와 긴밀한 우호 관계에 있던 가야를 공격했다. 이 때문에 기본 한기(己本 旱岐)[8]를 비롯한 가야의 왕실과 백성들이 백제로 피난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후 반파국의 사직은 백제의 장수 목라근자에 의해 복권되었다.[9]
六十二年。新羅不朝。卽年遣襲津彦擊新羅。 【百濟記云。壬午年。新羅不奉貴國。貴國遣沙至比跪令討之。新羅人莊餝美女二人。迎誘於津。沙至比跪受其美女。反伐加羅國。加羅國王已本旱岐。及兒百久至。阿首至。國沙利。伊羅麻酒。爾汶至等。將其人民。來奔百濟。百濟厚遇之。加羅國王妹旣殿至。向大倭啓云。天皇遣沙至比跪。以討新羅。而繩新羅美女捨而不討。反滅我國。兄弟人民皆爲流沈。不任憂思。故以來啓。天皇大怒。旣遣木羅斤資。領兵衆來集加羅。復其社稷。 一云。沙至比跪知天皇怒。不敢公還。乃自竄伏。其妹有幸於皇宮者。比跪密遣使人間天皇怒解不。妹乃託夢言。今夜夢。見沙至比跪。天皇大怒云。比跪何敢來。妹以皇言報之。比跪知不兔。入石穴而死也。】
(진구) 62년. 신라가 입조하지 않았다. 이해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보내어 신라를 치게 하였다. 【《백제기》에 말하길
임오년에 신라가 귀국[10]에 오지 않았다. 귀국이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보내어 치게 하였다. 신라에서 미인 2명을 단정하게 꾸며 항구에서 마중하여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유혹하였다.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는 그 미녀를 받고서 도리어 가라국을 쳤다. 가라국왕 기본 한기(己本 旱岐) 및 아들 백구지(百久至), 아수지(阿首至), 국사리(國沙利), 이라마주(伊羅麻酒), 이문지(爾汶至) 등이 인민을 거느리고 백제로 도망갔다. 백제는 (이들을) 후하게 대했다. 가야국왕의 누이 기전지(旣殿至)가 야마토(大倭)를 방문하여 "천황은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보내어 신라를 치게 했습니다. 그런데 신라의 미녀를 받고는 신라를 치지 않고 도리어 우리나라를 쳐서 멸망시켰습니다. 형제, 백성들이 모두 유랑하고 있습니다. 이에 근심을 이기지 못하여 와서 여쭙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천황이 크게 노하여 목라근자를 보냈다. 군사를 거느리고 가라에 이르러 그 사직을 되돌렸다.
하였다. 일설에 이르기를,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는 천황이 노한 것을 알고 감히 공공연하게 돌아오지 못하고 스스로 숨었다. 그의 누이는 황궁에서 은총을 입은 적이 있었다.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는 몰래 누이에게 사람을 보내어 천황의 화가 풀렸는지 묻게 하였다. 누이는 (천황에게) 꿈을 핑계대어 "오늘밤 꿈에서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보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천황은 크게 화를 내어 "카츠라기노 소츠히코가 어찌 감히 오는가?"라고 하였다. 누이는 말을 전해주었다.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는 용서받지 못함을 알고 동굴에 들어가 죽었다.
라고 했다.】
(진구) 62년. 신라가 입조하지 않았다. 이해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보내어 신라를 치게 하였다. 【《백제기》에 말하길
임오년에 신라가 귀국[10]에 오지 않았다. 귀국이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보내어 치게 하였다. 신라에서 미인 2명을 단정하게 꾸며 항구에서 마중하여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유혹하였다.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는 그 미녀를 받고서 도리어 가라국을 쳤다. 가라국왕 기본 한기(己本 旱岐) 및 아들 백구지(百久至), 아수지(阿首至), 국사리(國沙利), 이라마주(伊羅麻酒), 이문지(爾汶至) 등이 인민을 거느리고 백제로 도망갔다. 백제는 (이들을) 후하게 대했다. 가야국왕의 누이 기전지(旣殿至)가 야마토(大倭)를 방문하여 "천황은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보내어 신라를 치게 했습니다. 그런데 신라의 미녀를 받고는 신라를 치지 않고 도리어 우리나라를 쳐서 멸망시켰습니다. 형제, 백성들이 모두 유랑하고 있습니다. 이에 근심을 이기지 못하여 와서 여쭙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천황이 크게 노하여 목라근자를 보냈다. 군사를 거느리고 가라에 이르러 그 사직을 되돌렸다.
하였다. 일설에 이르기를,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는 천황이 노한 것을 알고 감히 공공연하게 돌아오지 못하고 스스로 숨었다. 그의 누이는 황궁에서 은총을 입은 적이 있었다.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는 몰래 누이에게 사람을 보내어 천황의 화가 풀렸는지 묻게 하였다. 누이는 (천황에게) 꿈을 핑계대어 "오늘밤 꿈에서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보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천황은 크게 화를 내어 "카츠라기노 소츠히코가 어찌 감히 오는가?"라고 하였다. 누이는 말을 전해주었다.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는 용서받지 못함을 알고 동굴에 들어가 죽었다.
라고 했다.】
이 연대는 이주갑인상된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관련 기사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건이다. 만약 '기본 한기'를 금관국의 왕으로 보고, 《삼국유사》에서 인용된 《가락국기》의 이시품왕으로 본다면 4세기 후반이라는 연대는 더욱 확고해진다. 따라서 이 기록은 대개 382년의 것으로 파악한다. 《일본서기》에서 언급한 일설에 따르면 소츠히코는 몰래 돌아와 숨어 있다가 후궁인 누이를 통해 천황이 화가 풀렸는지를 물었다가, 당연하게도 천황이 크게 화를 냈다는 걸 듣고 바위굴에 들어가서 죽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소츠히코는 오진 덴노 14년에 또 등장하므로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11]
일설에 적힌 기록인 소츠히코가 바위굴에 들어가서 죽었다는 기록이 실제로는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려고, 왜국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왜국의 장수 소츠히코와 왜국의 병사들이 백제로 파견되었는데, 신라의 미인계에 넘어간 소츠히코가 백제군과 왜군을 동원하여 엉뚱한 가야를 점령하였고, 분노한 가야 국왕의 누이가 백제 국왕에게 소츠히코가 저지른 어이없는 짓을 고하자, 백제왕이 노하여 소츠히코를 죽이려고 했고, 이에 동굴에 몰래 숨어서 목숨을 부지한 후에 적절한 시기를 타서 백제에서 왜국으로 몰래 도망간 사건일 가능성도 짐작해 볼 수 있다. 382년 당시 백제 왕은 근구수왕이므로 이 경우 뻘짓한 소츠히코를 족치려 한 건 근구수왕일 가능성이 높으며, 소츠히코를 미인계로 낚은 신라 왕은 내물 마립간일 가능성이 높다.
소츠히코가 등장하는 문제의 오진 14년(283년) 기사에 따르면, 그는 백제에서 건너오려다가 신라에 막혀 가야에 머무르고 있었던 궁월군(유즈키노키미, 弓月君)과 그를 따르는 120현의 사람들을 데려오도록 파견되었다. 그러나 3년 가까이 지나도록 데려오지 못하다가 오진 16년(405년) 추가 파병된 원군의 도움으로 간신히 돌아왔다. 이때의 기사도 대개 2갑자 내려 403년의 것으로 본다.[12] 403~405년 당시 백제 왕은 아신왕이고, 신라 왕은 실성 마립간이다.
닌토쿠 41년(353년)에는 왜국의 백제 인근 토지 조사에 맞선 무례한 백제 왕족을 천황 앞으로 압송했다는 기록도 실려 있다. 그런데 이 기사의 경우 2갑자 내리면 473년이 되어 연대의 현실성이 떨어진다. 게다가 《일본서기》의 기록은 5세기 중엽 ~ 후반이 되면 본래 연대로 복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355년의 기록 이후 5세기 후반까지 연대 조정의 축이 될 백제 관련 기록도 없다.
게다가 닌토쿠 덴노는 313년부터 399년까지 재위하는, 장수왕을 뛰어넘는 수준의 재위 기간을 가지고 있는데, 257년에 태어났다고 하므로 399년이면 142세라는 말도 안 되는 기록을 갖게 된다. 따라서 중간의 연대 조정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이는데, 마침 유송에 조공한 기록을 보면 460년 ~ 462년 사이 황위의 교체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닌토쿠 천황의 기록은 60년 정도 소급된 것으로 보이므로, 1갑자만 인하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렇게 조정하면 413년으로 어느 정도 말이 된다.[13] 413년은 전지왕의 재위기간이므로 백제의 어느 왕족이 토지 조사 문제로 전지왕의 심기를 거스르자 전지왕이 왜로 추방시킨 사건으로 보인다. 그리고 박제상 사건은 418년(삼국사기)/425년(삼국유사) 기년이 더 신빙성이 높으므로 신라의 눌지 마립간 시절이다. 정리하자면
- 382년, 미인계에 낚여 가야 공격
- 403년, 백제 이주민 이송에 참여했으나 지연
- 405년, 지원병에 힘입어 이주민과 함께 왜국으로 귀국
- 413년, 백제 왕족 압송
- 418년(혹은 425년), 박제상 사건
이렇듯 약 36년(혹은 43년)에 걸친 활동이 기록에 남은 사람으로, 연대 조정을 거친 결과를 살펴보면 말이 안 되는 활동 기록까지는 아니다. 《일본서기》가 아무 기록이나 주워 모아서 이렇게 됐다기보다는, 숭조 사업의 일환으로 연대를 부풀려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라고 봄이 타당하다.
3. 후손
카츠라기노 소츠히코의 가문은 딸들을 대대로 천황과 혼인시키면서[14] 그야말로 5세기를 상징하는 수준의 외척으로 자라났다. 하지만 본인이 죽은 후세에는 아들 타마다(玉田)[15]와 손자 츠부라(圓/円)[16]가 모두 천황가에 의해 살해당하고, 손녀는 길비상도신전협의 부인이었으나 유랴쿠 덴노의 후궁이 되었다.382년 기사에서 소츠히코가 황궁에서 일하던 여동생에게 천황의 노여움이 풀렸는지 확인해 달라 부탁해서 여동생이 "꿈에서 소츠히코를 보았다"고 말하자 천황이 "어떻게 소츠히코가 돌아올 수 있느냐"고 노발대발했고, 이에 소츠히코가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소츠히코의 여동생이 백제 근구수왕 밑에서 일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오오키미(大王) 밑에서 일하던 게 맞는데 소츠히코의 트롤링을 백제를 통해 알고 있던 오오키미가 펄펄 뛰었거나 둘 중 하나인 듯. 이후 소츠히코의 행적을 보면 오오키미가 화낸 게 맞아도 결국 용서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소츠히코 자체가 대호족인 데다 소츠히코의 딸이 닌토쿠 덴노의 오오키사키(王后)일 정도로 외척으로서도 공고한 세력을 가지고 있어서 결국 넘어갈 수밖에 없던 걸로 보인다.
[1] 한자음으로 읽으면 "갈성 습진언".[2] 애시당초 백제의 사씨는 13대 근초고왕 대의 '사백'이나 '사사노궤'에서 보이듯이 가야 방면으로도 활발히 활동한 가문이었다.[3] 다만 현대 일본인들에겐 오래된 티가 나는 이름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현대에 와선 이름에 자주 쓰이지는 않는 편이다.[4]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선비라고 번역하는 '언(彦)'으로 표기하지만 어원은 '태양의 아들(日子, ひこ)'이라는 뜻에서 왔다고 한다. 예전에는 소리나는 대로 '毘古(비고), 比古(비고)'로 표기하기도 했다. '히코'와 비슷하게 여성 인명에 쓰이는 '희(姬)(히메)'가 있는데 이것도 '태양의 딸(日女, ひめ)'이라는 뜻에서 왔다고 한다. 히코와 마찬가지로 예전에는 소리나는 대로 '毘賣(비매), 比賣(비매)'로 표기하기도 했다.[5] '카츠라기(갈성, 葛城)'는 '갈목(葛木)'이라고도 표기하는데, '목(木)'과 '문(文)'은 음은 물론, 글자의 모양 또한 유사하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이 갈문왕이라는 칭호를 처음 쓰기 시작한 사람이 신라 미추 이사금의 아버지인 구도(仇道)인데, 이 구도는 일본어로 '갈(葛)'자를 훈독한 '쿠즈(くず)'와 발음이 매우 유사하다.[6] 정한론의 기반을 닦은 인물이자, 에도 시대 일본 국학(國學)과 실증 사학의 거두였던 그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조차도 허황된 이야기라 깠을 만큼 진구 황후의 삼한정벌은 현대 일본 역사학계에서 그 임나일본부설보다도 신빙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로 간주한다. 하지만 우익들은 여전히 이를 위대한 일본의 역사로 믿어 마지않는다. 일본 학계에서는 진구 황후 근초고왕설, 히미코설, 사이메이 덴노설과 더불어, 오랜 옛날부터 친밀한 관계였던 가야를 멸망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당나라(외세)와 연합해서 고구려, 백제까지 멸망시킨 신라에 대한 깊은 원한과 백강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빚어진 신라에 대한 두려움이 만들어낸 신라에 대한 정신승리(...)의 차원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보는 설도 있다.[7] 《일본서기》에서 아무런 수식어 없이 "가라"라고 지칭하면 일반적으로 반파국을 지칭한다.[8] '한기'는 가야의 군주 칭호이다.[9] 《일본서기》의 내용을 따르면 천황의 명으로 복권되었다고 하나, 백제를 왜의 속국 수준으로 묘사하는 《일본서기》의 기록이라 이를 곧이곧대로 인정하는 학자는 드물다.[10] '귀한 나라', 즉 일본을 말한다. 《일본서기》 기록이기 때문에 일본을 높여 지칭하고 있다.[11] 아마 이 때문에 정식 기록에 넣지 않고 '일설'이라고만 했을 듯하다.[12] 이 연대를 약간 조정하여 광개토대왕의 남방 정벌(399년 ~ 400년) 및 실성 이사금의 미사흔 일본 파견(402년)과 연결 짓는 주장이 있으나 현재로서는 정황 증거만 있으므로 확언하기 어렵다.[13] 닌토쿠의 아들들인 리추, 한제이, 인교 삼형제 천황의 연대를 어떻게 할 것인지는 후속 문제로 남아 있다.[14] 닌토쿠, 리추, 유랴쿠의 3대가 모두 소츠히코의 딸, 손녀, 증손녀를 황후로 삼았다.[15] 인교 5년 7월 14일조.[16] 유랴쿠 즉위전기. 그러니까 유랴쿠는 츠부라를 죽여놓고 정작 그 딸을 아내로 맞은 것이 된다. 가학적 변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