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30 09:42:45

아메노히보코

천일창에서 넘어옴
<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문헌상의 인물
아메노히보코
파일:f0006957_4c64436c2fae2.jpg
후쿠이현[1] 츠루가시 츠루가역 앞에 있는 츠누가(아메노히보코)의 동상. 출처
출생 기원전 27년 이전
신라,의부가락국(意富加羅國)
사망 연대 미상
일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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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아메노히보코[2]
후손 진구 황후
왜왕 스이닌 덴노
링크 izusi,성씨 정보,genbu }}}}}}}}}
파일:attachment/천일창/74272482417645276.jpg
아메노히보코와 관련된 자료가 있다고 전해지는 이즈시신사(出石神社).
파일:attachment/천일창/b.jpg
성씨정보의 스샷이다.

1. 개요2. 일본 역사서
2.1. 《고사기(古事記)》2.2. 《일본서기(日本書記)》2.3. 풍토기(風土記) 기록2.4.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 기록
3. 실존 인물인가?4. 아메노히보코의 일본 침공설5. 관련된 신사6.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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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사기》(古史記)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신라(新羅) 출신의 왕자. 일본서기에서만 등장하는 가야(加羅) 왕자 츠누가 아라시토(우사기아리질지간기)와 내용상 동일시 된다. 11대 스이닌 덴노 시기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보통은 천일창(天日槍)으로 훈차된 표기를 따르나 《고사기》에서는 동일한 발음을 다르게 훈차한 천지일모(天之日矛)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화나 설화에 따라 귀화 동기 등도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일본에 정착한 이후 타지마노마타오(多遅摩之俣尾)의 딸 마에츠미(前津見)과 결혼하였고 진구 천황이 그의 6대손이라고 전해진다. 아메는 하늘을 뜻하는 단어로 아마(天)라고도 표기되며 히는 해(太陽),보코는 어린 아이(おさない子)를 즉 당시 젋은 사내를 뜻하는 단어이다.[3] 이외에도 야사에 의하면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그의 후손으로 여겨진다.

2. 일본 역사서

2.1. 《고사기(古事記)》

《고사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옛날 신라의 아구누마(阿具奴摩・阿具沼)라는 늪에서 한 여인이 낮잠을 자고 있을 때, 햇빛이 무지개처럼 내려와 그녀의 음부에 닿았다. 여인은 바로 임신하여 붉은 구슬을 낳았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어떤 남자가 그 여인에게 간절히 부탁해 구슬을 얻은 후 몸에서 떼는 일 없이 언제나 지니고 다녔다. 어느 날 그 남자가 소를 끌고 음식을 산으로 나르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아메노히보코가 그 남자를 보고 소를 죽여 먹으려 한다고 착각해 감옥에 가둬버린다. 그 남자는 아무리 해명을 해도 아메노히보코가 용서를 해주지 않자, 결국 언제나 지니고 다니던 붉은 구슬을 건네주고 나서야 겨우 용서를 받게 된다.

아메노히보코가 그 구슬을 갖고 집에 돌아가 마루에 두자 그 구슬은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했다. 아메노히보코는 여인을 정실로 삼았으며 그녀는 매일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거만한 성격의 그는 어느 날 아내를 욕하며 비난했고, 그녀는 부모의 나라로 돌아간다는 말을 남기고는 작은 배에 올라 난바의 나루터에 있는 히메코소신사(比売碁曾神社)로 떠나버렸다.[4] 히보코는 깊이 반성하고 아내를 찾아 일본으로 향했다. 그러나 난바 해협을 지배하는 신이 방해하여 아내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없었기 때문에 타지마에 상륙하고 말았다. 그는 그곳에서 마에츠미(前津見)라는 현지 여인과 결혼했다고 한다.[5]

붉은 옥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배를 이동하여 지나갔다는건 가야 금관국수로왕과 왕후 허황옥 신화와 비슷한 점이 있다. 또한 일본 건국신화인 스사노오아마테라스와도 연관성이 제기되는데, 전체적인 스토리 구조가 신라에 강림했던 신인 스사노오가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넘어갔다는 것이 신라에서 일본으로 넘어갔다는 아메노히보코와 기본 플롯이 비슷하다. 일본서기에서는 아메노히보코와 비슷한 신화를 가진 인물로 도노아아라사등(都怒我阿羅斯等, 츠누가아라시토)[6]라는 오호카라국(意富加羅国)의 왕자를 소개하고 있는데 오호카라는 큰 가야라는 뜻으로 보통 대가야, 즉 반파국을 가리킨다고 추정된다. 또한 이나바의 흰토끼 설화와도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2.2. 《일본서기(日本書記)》

  • <日本書記> '신대기'
    일본서기에는 아메노히보코와 똑같은 행적을 보이는 스사노오 설화가 나온다.
    스사노오(素盞鳴尊)의 소행이 괘씸하였다. 그래서 여러신이 천좌치호를 과하고 쫓아내었다. 이때 스사노오(素盞鳴尊)는 아들 이소타케루(五十猛)를 데리고 신라국으로 내려가 소시모리(曾尸茂梨)라는 곳에 있었다. 그런데 말을 하기를 "이 땅은 내가 살고 싶지 않다."라고 하고는 진흙으로 배를 만들어 타고 동쪽으로 가서 이즈모국(出雲国)의 히강(ヒの川) 상류에 있는 토리카미봉(鳥上峰)으로 갔다.
신라 왕자 아메노히보코가 귀화했다. 가지고 온 물건은 하후토(羽太)의 옥(=엽세주) 1개, 아시타카(足高)의 옥 1개, 우카카(鵜鹿鹿)의 적석옥(赤石玉) 1개, 이즈시(出石)의 소도(小刀) 1자루, 이즈시의 창(桙) 1자루, 해거울(日鏡) 1면, 곰의 히모로기(熊の神籬) 1구 등 모두 7가지였는데, 타지마국(但馬國)에 보관하여 항상 신물로 삼았다.
《일본서기》 권6 스이닌 덴노 3년 #
《일본서기》 스이닌 덴노조에는 신라에서 아메노히보코가 가져온 물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임나국이 소나갈질지(蘇那曷叱知)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임나는 츠쿠시국(筑紫國)에서 2,000여 리 떨어져 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며 계림(鷄林) 의 서남쪽에 있다.
《일본서기》 권5 스진 덴노 65년#
임나 사람 소나갈질지(蘇那曷叱知)가 자기 나라에 돌아가고자 청하였다. 선황의 시대에 조공하러 왔다가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소나갈질지에게 많은 상을 주고 붉은 비단 1백 필을 가지고 가 임나왕에게 주게 하였다. 그러나 신라인이 길을 막고 그것을 빼앗았다. 그 두 나라의 원한은 이 때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일설(一說)은 다음과 같다. 스진 덴노 때에 이마에 뿔이 난 사람이 한 척의 배에 타고 코시국(越國) 케히노우라(笥飯浦)에 다다랐으므로 그 곳을 츠누가(角鹿)라 이름하였다. 그에게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물으니, “의부가라(意富加羅)[7] 국왕의 아들로, 이름은 도노아아라사등(都怒我阿羅斯等, 츠누가아라시토)인데 우사기아리질지간기(于斯岐阿利叱智干岐)라고도 합니다. 일본국에 훌륭한 임금이 있다고 전해 들었으므로 귀화하려 합니다. 아나토(穴門)에 도착했을 때, 그 나라에 이츠츠히코(伊都都比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신에게 ‘나는 이 나라의 왕이다. 나를 제외하고는 다시 두 왕이 없다. 그러므로 다른 곳으로 가지 말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그 사람됨을 자세히 보니 기필코 왕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곧 다시 그 곳을 물러났으나 길을 몰라 섬과 포구를 오랫동안 맴돌다가 북해로부터 돌아 이즈모국(出雲國)을 거쳐 이 곳에 왔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 때 천황의 죽음을 만나 (이 곳에) 머물러 스이닌 덴노에게 벼슬하여 3년에 이르렀다. 천황이 도노아아라사등에게 “너희 나라에 돌아가고 싶은가”라고 묻자, “매우 바랍니다”라고 답하였다. 천황이 아라사등에게 “네가 길을 잃지 않고 빨리 왔다면 선황을 뵙고 모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본국의 이름을 바꾸되 미마키(御間城)천황의 이름을 따서 바로 너희 나라 이름으로 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붉은 비단을 아라사등에게 주어 본국에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 나라 이름을 미마나국(彌摩那國)이라 부르는 것은 이러한 인연 때문이다. 이에 아라사등은 받은 붉은 비단을 자기나라의 군부(郡府)에 간직하였는데, 신라인들이 듣고 군대를 일으켜 와서 그 붉은 비단을 모두 빼앗았다. 이것이 두 나라가 서로 원한을 맺은 시작이다.

일설은 다음과 같다. 과거에 도노아아라사등(都怒我阿羅斯等)이 자기 나라에 있을 때에 황소에 농기구를 싣고 농막에 가려했는데, 황소가 갑자기 없어져 그 자취를 찾아보니 발자취가 한 군가(郡家)에 머물렀다. 당시 한 노인이 “너희가 찾는 소는 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군공(郡公) 등이 ‘소가 짊어진 물건으로 미루어 보니 반드시 죽여서 먹으려는 것이다. 만약 그 주인이 찾아 오면 물건으로 배상하자’라 하고 곧 죽여서 먹었다. 만약 소 값으로 어떤 물건을 얻기를 바라는지 물으면 재물을 바란다고 하지 말고 군에서 제사지내는 신을 얻고자 할 뿐이라고 말하라”고 하였다. 얼마 후 군공 등이 와서 “소 값으로 어떤 물건을 얻기를 바라는가”라고 하자, 노인이 가르쳐준 대로 대답하였다. 그들이 제사지내는 신은 흰 돌이었다. 흰 돌을 소 값으로 주었으므로 가지고 와서 침실 속에 두었더니, 그 신령한 돌이 아름다운 동녀(童女)로 변하였다. 이에 아라사등이 크게 크게 기뻐하여 동침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아라사등이 다른 곳에 간 동안 동녀가 갑자기 없어졌다. 아라사등이 크게 놀라 자기 부인에게 “동녀가 어디로 갔소”라고 물으니, “동방을 향해 갔습니다”고 대답하였다. 곧 찾기 시작하여 드디어 멀리 바다에 떠서 일본국에 들어갔다. 그가 찾던 동녀는 나니와(難波)에 나아가서 히메코소야시로(比賣語曾社)[8]의 신이 되었고 또 토요국(豐國)의 미치노쿠치군(國前郡)에 이르러 다시 히메코소야시로의 신이 되어, 이 두 곳에서 함께 제사를 받았다.
《일본서기》 권6 스이닌 덴노 2년#

2.3. 풍토기(風土記) 기록

  • <풍토기(風土記)>'에치젠국(越前国) 케히신궁(氣比神宮)'조
    풍토기(風土記) 에치젠국(越前国) 케히신궁(氣比神宮)조에서는 오진 천황과 아메노히보코가 동일인물이라 나온다.
    케히신궁(氣比神宮)은 우사(宇佐)와 동체이다. 야하타(八幡)는 오진 천황이 진좌하였다.
  • 《하리마국 풍토기》 아메노히보코의 군병이 8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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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大己貴命:玄松子の祭神記'

大己貴命(おおなむちのみこと)

別名
大穴牟遅神/大名持神/大汝神:おおなむちのかみ
大国主神:おおくにぬしのかみ
大物主命:おおものぬしのみこと
八千矛神/八千戈神:やちほこのかみ
葦原色許男神/葦原醜男神:あしわらしこをのかみ
顕国玉神/宇都志国玉神:うつしくにたまのかみ
国作大己貴命:くにつくりのおおあなむちのみこと
所造天下大神:あめのしたつくらししおおかみ
所造天下大穴持命:あめのしたつくらししおおなもちのみこと
……
大国主とは、大国を治める帝王の意味。大黒様としても知られる神。

大穴牟遅とは、大名持で、功績多く著名なという意味であり、また大地持(地をナと訓む例には地主(なぬし)・地寄(なよせ)などがある)。

葦原色許男とは、葦原は葦原之中国(日本本土)のこと、色許は醜で、威力を称えた言葉であり、日本本土を治める強い偉い人の意。

八千矛とは、多くの矛を持つ神、即ち武威の神名。宇都志国玉は現国御魂の義で、現在の国の守護神。
『播磨国風土記』神前郡の八千軍野は、天日桙命の軍兵が八千人であったからと記されている。 八千の日桙軍が八千矛と考えると、天日桙命の伝承の一部が混在しているのかもしれない。
파일:20210628_055737.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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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 기록

  • <신찬성씨록>
    <신찬성씨록>에 나오는 황족 '이나이노미코토(稲飯命)'의 조상 계보가 아메노히보코와 연관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있다.
    「시라기[新良貴]씨의 원조는 진무 덴노의 부황인 우가야후키아에즈이고 그 아들 이나히노미코토(稲飯命)의 후손이다. 이나히노미코토는 신라국[新良國/新羅國] 출신이며 국주에 즉위했다. 신라국왕과 조상이 같다.」 是出於新良國。即為國主。稻飯命出於新羅國王者祖合

3. 실존 인물인가?

아메노히보코가 성스러운(...) 천황를 섬기려고 신라의 왕위를 동생에게 물려주고 위험을 감수하며 일본에 왔다는 이야기인데, 당연히 이것은 다분히 신화적인 이야기로 아메노히보코가 붉은 구슬에서 나타난 여신을 따라서 일본에 왔고 아메노히보코의 상륙을 거부한 일본의 신들이 나타나며 결국은 일본에 정착하고 일본 덴노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일본에서는 신라국에서 도래한 정치 집단을 인물화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아메노히보코가 신라의 왕자라는 부분을 신뢰하고 나서 한국 기록 삼국사기와 대조해보면 그나마 아메노히보코와 행적이 유사한 인물이 신라 제7대왕이 되는 일성 이사금이다. 일성은 3대 유리 이사금장남이자 태자였는데 동생(5대 파사 이사금)이 대신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파사가 죽은 후 조카이자 아들이 없던 6대 지마 이사금을 거쳐서 이미 노인이 된 일성이 결국 동생보다 수십 년 늦게서야 왕위에 오른다. 즉, 신라 왕자라는 부분과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했다는 부분이 일치한다.[9] 그리고 한국 기록에서 일성이사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 젊은 시절 행적에 대한 기록은 비어있기 때문에 활동시기가 겹치는 모순도 없다. 물론 일본서기의 아메노히보코는 기원전 1세기 사람이고 삼국사기의 일성이사금은 1세기 사람이란 차이가 있지만, 이주갑인상 문서에서 정리되어 있듯이 한일 상고시대 기록은 기년이 정확하지 않다는 논란이 많아 이를 감안해야 한다.

만약 일성이사금=아메노히보코라면 일본에서 활동하다 말년에 다시 신라로 귀국했고 신라 정계의 사정에 의해 늦게서야 왕위에 올라서 20년을 다스리는 스펙터클한 인생을 살았다는 말인데 물론 일성이사금의 비정상적인 연대를 고려하면 동일인물이라기보다는 아메노히보코의 아들 혹은 자손이 일성이사금일 가능성이 높다.

일설에는 아메노히보코가 일본에 처음 상륙했을 때 바위가 막고 있었으나 이를 칼로 베어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해 제철기술자라는 설##도 있으며, 기원전 무렵 진한인의 일본 이주 설화로 풀이하거나[10], 삼국유사연오랑과 세오녀 전설처럼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왕이 됐다는 점이나 연오랑의 동생인 지고가 등장하는 것을 비교해 아메노히보코가 바로 연오랑이며 신라의 태양신 신화가 일본으로 넘어간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11]

또한 진구 황후가 그의 후손이라는 기록도 있다. 러시아 태생의 미국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은 진구황후 혹은 그의 모티브가 되는 사람이 고대 한국어족이라고 추측했는데, 그의 주장을 따르자면 아메노히보코 신화가 해당 기록과 연관이 있게 된다.

4. 아메노히보코의 일본 침공설

아메노히보코가 군사 8천 명을 이끌었다는 기록과 아내를 찾으러 갔다는 부분을 엮어 사실은 군대를 이끌고 침략하여 정착한 것이 신화로 각색된 것 아닌가 하는 가설이 있다. 사실 정말로 높은 신분의 인물이었다면 혼자서 달랑 이동했을 리도 없고 또한 게르만족의 대이동, 슬라브족의 대이동에서도 그랬듯이 집단의 이동에는 충돌이 수반되기도 하기 때문에 이상할 건 없다.

아메노히보코와 행적이 유사한 도노아아라사등의 행적에서 의부가라국(반파국으로 추정)이라는 나라가 등장하는 부분은 삼국사기에도 빠져있는 기록으로서 가야에 대해 쓰여있는 몇 안 되는 부분이다. 이 둘의 행적이 혼합된 것은 옛 고대 한반도인들이 한두 번 건너간 게 아니기 때문에 신화적으로는 쉽게 혼합될 수 있었다고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부분. 사실 고대의 기록은 지식과 기록체계가 정착하기 전에는 그렇게 정확하지 않고 신화나 설화처럼 구전된 부분은 더더욱 그렇다. 게다가 후대에 각색된 부분도 더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오리지날 그대로 내려오는 경우 또한 거의 없다. 그렇다 할지라도 위 내용들을 종합해서 살펴볼 때 아메노히보코나 도노아아라사등의 신화/설화는 고대 동아시아의 국가형성 과정에서 활발한 인적, 문화적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생생히 증명해주는 물적 증거로서 뛰어난 사료적 가치를 갖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5. 관련된 신사

  • 이즈시신사(出石神社) - 兵庫県豊岡市出石町宮内
  • 御出石神社 - 兵庫県豊岡市出石町桐野986 御出石神社
  • 御形神社 - 兵庫県宍粟市一宮町森添280御形神社
  • 香山神社 境内 牛尾神社 - 福井県大飯郡高浜町下車持44高森7-1

6. 같이보기


[1] 옛 코시국(越国)에 해당.[2] アメノヒボコ. 天日槍(천일창), 天日桙(천일모), 天之日矛(천지일모) 등으로 훈차되었다.[3] https://kotobank.jp/word/%E3%81%BC%E3%81%93-2082300[4] 히메코소신사(比売碁曾神社)의 후예격인 신사로서는 오사카부 오사카시 히가시나리구의 히메코소신사(比売許曽神社, 현재의 제신은 오오쿠니누시의 딸인 시타테루히메노미코토下照比売命), 같은 시의 주오구 코즈궁의 섭사(摂社)인 히메코소신사 등이 있다.[5] 원래 아내의 이름은 아카루히메(阿加流比売)이다.[6] 우사기아리질지간기(于斯岐阿利叱智干岐, 우시키아리시치칸키)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고 소개하고 있다.[7] 의부(意富)는 상고 일본어로 “큰”을 뜻하는 오호(おほ)의 음차이다.[8] 야시로(社)는 작은 신사를 가리킨다.[9] 단 삼국사기 기록상 일성보다 동생 파사가 먼저 왕위에 오른 건 파사쪽이 더 위엄과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라 쓰고 있다. 물론 다른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고 위엄과 지혜는 그냥 은유적으로 둘러댄 것일 수도 있지만.[10] 이병도, 한국사대관 1964년. 64페이지[11] 소재영, 연오랑세오녀설화전 196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