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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16대 천황 닌토쿠 천황 仁德天皇 | 仁徳天皇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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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출생 | 290년 | ||
사망 | 399년 2월 7일 (향년 108~109세) | ||
능묘 | 모즈노미미하라노나카릉 (百舌鳥耳原南陵) | ||
재위기간 | 제16대 천황 | ||
313년 2월 14일 ~ 399년 2월 7일 (85년 35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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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풍 시호 | 닌토쿠 천황(仁德天皇, 인덕 천황) | ||
화풍 시호 | 오오사자키노미코토(大鷦鷯尊, 大雀命)[1] 오오사자키노스메라미코토(大鷦鷯天皇)[2] 나니와 덴노(難波天皇)[3] | ||
부모 | 부친 오진 천황(応神天皇) 모친 나카쓰히메노미코토(仲姫命) | ||
배우자 | 가쓰라기노 이와노히메(葛城磐之媛) 야타 황녀(矢田皇女) | ||
자녀 | 리추 천황(履中天皇) 스미노에노나카쓰 황자(住吉仲皇子) 한제이 천황(反正天皇) 인교 천황(允恭天皇) 오오쿠사카 황자(大草香皇子) 구사카노하타비노히메 황녀(草香幡梭姫皇女) | ||
황거 | 나니와노타카츠노미야(難波高津宮) | }}}}}}}}} |
1. 개요
일본의 제16대 천황.당시의 황태자였던 이복동생 우지노와키이라쓰코 황자와 서로 천황의 자리를 양보했지만 나중에 황태자가 자살한 까닭에 천황의 지위에 올랐다. 오사카의 다카쓰궁을 도읍으로 삼았으며, 오사카 일대에 하천과 제방 공사, 둔창의 설치 등 많은 토목공사를 실시하는가 하면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펴 세금 면제를 하도록 해 성군으로 추앙받았다. 일본 최대 규모의 전방후원분인 다이센릉 고분(大仙陵古墳)이 바로 그의 능일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2. 생애
2.1. 일본서기 오진 덴노
2년 봄 3월 경술삭 임자(3일)에 나카츠히메(仲姬)를 황후로 삼았다. 황후는 아라타 황녀(荒田皇女), 오호사자키노 스메라미코토(大鷦鷯天皇), 네토리 황자(根鳥皇子)를 낳았다.이 해(오진 11년)에 어떤 사람이 “히무카노 쿠니(日向國)에 한 처녀가 있습니다. 이름이 카미나가히메(髮長媛)라고 하오며, 모로가타노 키미 우시 모로위(諸縣君牛諸井)의 딸입니다. 나라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라고 상주하였다. 천황이 기뻐하여 마음 속으로 찾고자 하였다. 13년 봄 3월에 천황이 모하라노 츠라이(專使)를 보내 카미나가히메(髮長媛)를 불렀다. 가을 9월에 카미나가히메가 히무카(日向)에서 왔다. 그리하여 쿠와츠노 무라(桑津邑)에 살게 하였다.
이때 황자 오호사자키노 미코토(大鷦鷯尊)가 카미나가히메를 보고, 그 용모의 아름다움에 감동하여 연정을 품게 되었다. 천황은 오호사자키노 미코토가 카미나가히메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이들을 결혼시켜 주려고 하였다. 그래서 천황은 후궁에서 열린 연회 날에 처음으로 카미나가히메를 불러 연회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오호사자키노 미코토를 손짓하여 가까이 부르고, 카미나가히메를 가리키며 노래를 하였다.
자. 나의 임(君)이여, 들에 마늘 캐러 가자. 마늘 캐러 내가 가는 길에 좋은 향기의 귤꽃이 피어 있소. 아랫가지는 사람들이 모두 꺾어갔고, 윗가지는 새가 와서 흩어졌지만, 가운데 가지에 남아 있는 꽃처럼 봉오리가 커지며 환해진 아가씨여. 자 꽃을 피워 빛나도록.
오호사자키노 미코토가 어가(御歌)를 듣고 천황이 카미나가히메를 내려주려는 것을 알고 크게 기뻐하여 회답하는 노래를 불렀다.
요사미이케(依網池)에 순채(蓴菜)가 퍼져 있는 것을 모르고, 또 川俣江의 마름 줄기가 퍼진 것도 모르고, 내 마음은 완전히 어리석었네.
오호사자키노 미코토가 카미나가히메와 자고 정이 깊어지자 카미나가히메에게 노래를 하였다.
먼 나라(히무카) 고하다(古波囊)의 아가씨가 아름답다고 평판이 높았는데 지금은 함께 자면서 껴안는구나.
또 다시 노래하였다.
먼 나라 고하다의 아가씨여. 나를 거부하지 않고 자 주어 진심으로 사랑을 느끼게 되었구나.
22년 봄 3월 갑신삭 무자(5일)에 천황이 나니와(難波)로 행차하여 오호스미노 미야(大隅宮)에 머물렀다.
40년(309) 봄 정월 신축삭 무신(8일)에 천황이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大山守命)와 오호사자키노 미코토(大鷦鷯尊)를 불러 “너희들은 자식을 사랑하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매우 사랑합니다.”라고 답하였다. 또 다시 “큰 아들과 작은 아들 중 누구를 더욱 사랑하는가?”라고 묻자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는 “큰아들을 제일 사랑합니다.”라고 답하였다. 이에 천황이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이때 오호사자키노 미코토는 천황의 기색을 미리 살피고 “큰 아들은 많은 세월을 거쳐 이미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불안이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아직 성인이 못 될지도 모릅니다. 이것 때문에 작은 아들은 매우 가엾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천황이 크게 기뻐하여 “너의 말이 진실로 짐의 마음에 맞다.”고 말했다.
이때 천황은 늘 우지노 와키이라츠코를 황태자로 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두 황자의 마음을 알고자 이 질문을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의 답에 기뻐하지 않았다.
갑자(24일)에 우지노 와키이라츠코를 세워 황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그 날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에게 산천임야를 관장하도록 하였으며, 오호사자키노 미코토에게 태자를 보좌하여 국사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41년(310) 봄 2월 갑오삭 무신(15일)에 천황이 아키라노미야(明宮)에서 죽었다(崩). 이때 나이 110세였다[어떤 책(一云)에는 대우궁(大隅宮)에서 죽었다고 한다.].
이 달에 아지사주 등이 오(吳)에서 츠쿠시로 왔다. 이때 무나카타노 오호카미(胸形大神)가 공녀(工女)들을 원했기 때문에 형원으로 하여금 무나카타노 오호카미를 받들도록 하였다. 이는 즉 지금의 츠쿠시노 쿠니에 있는 미츠카히노 키미(御使君)의 선조이다. 그리고 3명의 여자를 데리고 츠노 쿠니(津國)의 무고(武庫)에 도착했으나, 천황이 이미 죽어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오호사자키노 미코토에게 헌상했다. 이 여인들의 후손은 지금의 쿠레노 키누누히(呉衣縫)와 카야노 키누누히(蚊屋衣縫)이다.
2.2. 일본서기 닌토쿠 덴노
오호사자키노 스메라미코토는 호무타노 스메라미코토(譽田天皇)의 넷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나카츠히메노 미코토(仲姬命)라 한다. 이호키이리비코 황자(五百城入彦皇子)의 손자이다.오진 41년 봄 2월에 호무타노 스메라미코토가 죽었다(崩).
이때 태자인 우지노 와키이라츠코(菟道稚郞子)는 오호사자키노 미코토(大鷦鷯尊)에게 양보하며, 제위에 오르지 않았다.
그는 오호사자키노 미코토에게 “무릇 천하의 군주가 되어 만민을 다스리는 자는 위로는 하늘과 같이 덮고 아래로는 땅과 같이 포용해야 합니다. 군주는 백성을 기꺼운 마음을 가지고 부려야 합니다. 백성은 이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천하가 편안합니다. 지금 저는 아우입니다. 또한 배움과 깨우침이 부족합니다. 어찌 감히 황위를 이어 천황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대왕(大王)은 풍모와 자태가 뛰어납니다. 인자함과 효심이 멀리까지 알려졌으며 연령도 위이십니다. 천하의 임금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무릇(其)[134] 선제(先帝)께서 저를 태자로 세운 것이 재능이 있어서였겠습니까. 다만 저를 어여삐 여겼기 때문입니다.
또한 종묘사직을 받드는 것은 중대한 일입니다. 저는 불초하여 적합하지 않습니다. 무릇 형은 위, 아우는 아래, 성인은 군주, 우인은 신하가 되는 것이 고금의 변치 않는 법도입니다. 아무쪼록 왕께서는 주저하시 마시고 제위에 오르소서. 저는 신하로서 도울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오호사자키노 스메라미코토가 “선제께서 ‘제위는 하루도 비워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미리 밝고 덕이 있는 사람을 택하여 황태자로 삼아 제위를 계승할 복과 백성을 주셨던 것입니다. 또한 태자를 총애한다는 증표를 중시하여 천하에 널리 알리셨습니다. 제가 어리석지만 어찌 선제의 명을 버리고 쉽게 아우 왕의 바람을 따를 것입니까.”라고 대답하였다. 이처럼 굳게 사양하며 서로 양보하였다.[136]
그러나 오호야마모리 황자는 항상 선제가 자기를 버려두고 태자로 삼지 않은 일을 원망하고 있던 차에, 이 일로 원한이 더욱 쌓이게 되었다. 그래서 모의하여 “내가 태자를 죽이고, 제위에 오를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오호사자키노 스메라미코토가 미리 그 모의를 듣고 태자에게 몰래 고하여 군사를 갖추어 지키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태자는 군사를 갖추고 대비하였다.
오호야마모리 황자는 군사가 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홀로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한밤중에 출발하였다. 새벽에 우치(菟道)에 이르러 강을 건너려고 하였다. 그때 태자가 삼베옷을 입고 노를 잡고 몰래 사공들 틈에 섞여 오호야마모리 황자를 태우고 건너갔다. 이윽고 강 가운데에 이르러 사공을 꾀어 배를 밟아 전복시켰다. 그러자 오호야마모리 황자가 강에 떨어져 물에 빠졌다. 그는 물에 떠내려 가면서 노래하였다.
토도의 나루에서 능숙하게 노를 젓는 사람이여. 나를 구하러 빨리 와 다오.
그러나 복병이 많아 강기슭에 이르지 못하여, 마침내 물에 빠져 죽었다. 그 시신을 찾게 하였더니 카와라노 와타리(考羅濟)[138]에서 떠올랐다. 태자가 그 시신을 보고 노래하였다.
토도를 건너는 나루터에 서 있는 박달나무여. 마음으로는 베려고 생각했건만, 마음으로는 베려고 생각했건만. 뿌리에서는 그대를 떠올리고 가지에서는 누이를 떠올려. 이쪽 저쪽 모두 가슴이 아파 끝내 베지 못하고 돌아왔구나. 박달나무여.
그리하여 나라노 야마(那羅山)에 (오호야마모리 황자를) 장사 지냈다.
이후 토도에 궁전을 세우고 거기에서 살았으나, 여전히 제위를 오호사자키노 스메라미코토에게 양보하려고 오랫동안 즉위하지 않아 제위를 비워둔 지 이미 3년이 지났다.
그때 해인(海人)들이 생선을 진상품으로 가지고 와 우지노미야(菟道宮)에 바쳤다. 태자가 해인들에게 “나는 천황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곧 돌아가서 나니하(難波)에 진상하도록 하였다. 오호사자키노 스메라미코토 역시 돌려주어 우지에 바치도록 하였다. 그래서 해인들의 바구니가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생선이 썩었다.
또 다시 돌아가 다른 생선을 잡아 바치려 했으나, 이전과 마찬가지로 서로 사양하였다. 그리하여 생선이 또 썩었다. 해인들은 여러 번 왕복하는 일에 지쳐서 생선을 버리고 울었다. 그래서 속담에 “해인인가. 해인도 아닌데 자기 물건 때문에 운다.”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태자가 “나는 형님의 뜻을 바꿀 수 없음을 알았다. 어찌 오래 살아서 천하에 폐를 끼치겠는가.”라고 말하며 자살하였다. 오호사자키노 스메라미코토는 태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나니와에서 달려 우지궁에 이르렀다. 태자가 죽은 지 3일이 지난 날이었다. 오호사자키노 스메라미코토는 가슴을 치고 울부짖으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였다. 머리를 풀고 시체 앞에 웅크리고 “나의 아우 황자야.”라고 세 번 불렀다.
그랬더니 갑자기 살아나 스스로 일어나 앉았다. 오호사자키노 스메라미코토는 태자에게 “슬프고도 아깝도다. 무엇 때문에 스스로 세상을 버리는가. 만약 선제께서 (네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나에게 무어라 말씀하시겠는가.”라고 하였다. 태자가 형왕에게 “천명입니다. 누가 말릴 수 있겠습니까. 만일 천황이 계신 곳에 가게 되면 형님이 성인(聖人)이며 계속 (제위를) 양보하신 것을 상세히 아뢸 것입니다. 그런데 형님께서는 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먼 길을 급히 달려오셨습니다. 어찌 수고롭지 않으셨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곧 동복누이인 야타 황녀(八田皇女)를 바치며 “비록 납채(納采)하시기에 부족합니다만, 삼가 후궁으로 삼아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관에 엎드려 죽었다. 오호사자키노 스메라미코토는 소복(素服)을 입고 슬퍼하며 소리 내어 슬피 울었다. 그리고 우지노야마(菟道山) 위에 장사지냈다.
원년[4] 봄 정월 정축삭(丁丑朔) 기묘(3일)에 오호사자키노 미코토가 천황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황후를 높여 황태후라 하였다. 궁전을 나니하에 지었는데, 이것을 타카츠노 미야(高津宮)라 한다.[5] 궁전의 담장과 건물에는 흰색을 칠하지 않았다. 서까래, 들보, 기둥도 장식하지 않았다. 억새로 지붕을 이을 때에도 끝을 가지런히 하지 않았다. 이는 사사로운 이유로 백성이 밭을 갈고 베 짜는 시간을 빼앗지 않기 위함이었다.
이전에 천황이 태어난 날 부엉이[6]가 산실에 들어왔다. 다음날 아침 호무타 천황이 대신(大臣)[7] 타케시우치노 스쿠네(武內宿禰)를 불러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라고 물었다. 대신이 “길조입니다. 또한 어제 신의 처가 아이를 낳을 때 굴뚝새[8]가 산실로 들어왔습니다. 이 또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천황이 “지금 짐의 아들과 대신의 아들이 같은 날에 함께 태어났다. 모두 길조이다. 이것은 하늘의 표식이다. 그 새의 이름을 따서 서로 바꾸어 자식의 이름에 붙여 후세의 증표로 삼자.”고 말하였다. 그래서 굴뚝새의 이름을 따서 태자의 이름을 오호사자키 황자라 하였으며, 부엉이의 이름을 따서 대신의 아들을 츠쿠노 스쿠네(木菟宿禰)[9]라 하였다. 이는 헤구리노 오미(平群臣)[10]의 시조이다. 이 해의 간지는 계유이다.
2년 봄 3월 신미삭 무인(8일)에 이하노 히메노 미코토(磐之媛命)[11]를 황후로 삼았다. 황후는 오호에노 이자호 와케노 스메라미코토(大兄去來穗別天皇), 스미노에노 나카츠 미코(住吉仲皇子),[12] 미츠하와케노 스메라미코토(瑞齒別天皇), 오아사즈마와쿠고노 스메라미코토(雄朝津間稚子宿禰天皇)를 낳았다. 또 비(妃) 히무카노 카미나가히메(日向髮長媛)는 오호쿠사카노 미코(大草香皇子)[13]와 하타비노 히메미코(幡梭皇女)[14]를 낳았다.
4년 봄 2월 기미삭 갑자(6일)에 군신을 불러 “짐이 누대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나라 안에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다. 생각하건대, 백성이 매우 가난하여 집에서 밥 짓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짐이 듣기에 ‘옛 성왕(聖王)의 시대에는 사람들이 덕을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고 집집마다 천하가 태평하다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지금 짐이 백성을 다스린 지 3년이 지났다. 칭송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으며, 밥 짓는 연기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것으로 오곡이 여물지 아니하고 백성이 궁핍하다는 것을 알았다. 기내(畿內)에서도 공급이 충분하지 않는데, 하물며 기외(畿外)[15]의 제국은 일러 무엇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3월 기축삭 기유(21일)에 “지금부터 3년간 모든 과역(課役)[16]을 면제하고 백성의 괴로움을 덜어 주라.”고 명하였다. 이 날부터 시작하여 수놓은 옷과 비단신은 완전히 해지지 않으면 다시 만들지 않았다. 또한 따뜻한 밥과 국은 시고 썩지 않으면 바꾸지 않았으며, 욕심을 줄이고 행동을 삼가 쓸데없는 일을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궁전의 담장이 무너져도 수축하지 아니하고 지붕을 이은 억새가 허물어져도 개수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비바람이 그 틈새로 들어와서 의복을 적시었고, 별빛이 무너진 곳으로 새어 들어와 침상을 비추었다. 이후 비바람이 때에 맞아 오곡이 풍성하게 여물었다. 세 번 곡식이 익는 사이에 백성은 부유하고 넉넉해져 칭송하는 소리가 이미 가득하고 밥 짓는 연기 또한 가득 피어올랐다.
7년 여름 4월 신미삭(1일)에 천황이 누대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연기가 많이 피어올랐다. 이 날 황후에게 “짐은 이미 넉넉하다. 아무런 근심이 없다.”고 말하였다. 황후가 “어찌하여 부유하다고 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천황이 “연기가 나라에 가득하니 백성이 당연히 부유한 것이 아닌가.”라고 답하였다. 황후가 다시 “궁의 담장이 무너졌어도 고칠 수가 없습니다. 궁전이 무너져 옷이 이슬에 젖습니다. 어찌 넉넉하다 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천황이 “무릇 하늘이 군주를 세우는 것은 백성을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군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래서 옛 성왕은 한 사람이라도 굶주리고 추위에 떨면 돌아보고 스스로를 책망하였다. 백성이 가난한 것은 짐이 가난한 것이고, 백성이 부유한 것은 곧 짐이 부유한 것이다. 백성이 부유한데 군주가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가을 8월 기사삭 정축(9일)에 이자호 와케 황자를 위하여 임생부(壬生部)[17]를 정하였다. 또한 황후(이와노 히메노 미코토)를 위하여 갈성부(葛城部)[18]를 정하였다.
9월에 제국(諸國)이 모두 “과역을 모두 면제한 지 이미 3년이 지났습니다.이로 인해 궁전은 썩어 무너지고 창고는 비었습니다. 지금 백성[19]이 부유하여 길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습니다. 마을에 홀아비, 과부가 없고 집집마다 쓰고 남은 것이 쌓여 있습니다. 만일 이러한 때에 조세를 바쳐 궁전을 수리하지 않으면, 그것은 분명히 하늘에 죄를 짓는 것이 될 것입니다.”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참고 허락하지 않았다.
10년 겨울 10월에 처음으로 과역을 부과하여 궁전을 지었다. 백성들은 명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이를 데리고 와서 재목을 나르고 망태를 짊어졌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힘을 다해 앞다투어 지었다. 그래서 얼마 되지 않아 궁전이 모두 완성되었다. 이로 인하여 지금도 성제(聖帝)[20]라 칭하는 것이다.
11년 여름 4월 무인삭 갑오(17일)에 군신에게 “지금 짐이 이 나라를 둘러보니 들판과 못은 넓은데, 전지는 부족하다. 또 하천은 제멋대로 흐르고 하천 하류는 흐름이 빠르지 않다. 비가 조금만 내려도 바닷물이 역류하여 거리에서 배를 타야할 지경이 되고, 도로 또한 진흙탕이 된다. 이에 군신들은 함께 이러한 상황을 살펴 물길을 바로잡아 바다로 통하게 하고 역류하는 것을 막아 전지와 택지를 안전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겨울 10월에 궁전 북쪽의 들에 수로를 파서 남쪽의 물을 끌어들여 서쪽[21] 바다로 흘러가게 하였다. 그래서 이 물을 호리에(堀江)[22]라 불렀다. 또한 북쪽 하천의 홍수를 막기 위해 마무타노 츠츠미(茨田堤)[23]를 쌓았다. 이때 쌓으면 무너져 막기가 어려운 곳이 두 군데 있었다. 그때 천황의 꿈에 신이 나타나 “무사시노 히토(武藏人) 코하쿠비(强頸)[24]과 카후치노 히토(河內人) 마무타노 무라지 코로모노코(茨田連衫子)[25][삼자는 코로모노코(莒呂母能古)라고 읽는다.] 이 두 사람을 하백(河伯)[26]에게 바치면 막을 수 있을 것이다.”[27]라고 일러 주었다. 그래서 두 사람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하백에게 제사지냈다. 이에 코하쿠비는 울먹이며 물에 빠져 죽었다. 이후 곧 그 제방이 완성되었다. 다만 삼자는 온전한 박 두 개를 가지고 막기 어려운 곳으로 갔다. 그리고 두 개의 박을 강의 신에게 던지며 “강의 신을 두려워하여 저를 제물로 삼았습니다. 이로 인해 지금 제가 왔습니다. 기어이 저를 얻고자 한다면 이 박을 가라앉혀 뜨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저는 진정한 신이라 여기고 스스로 물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만약 박을 가라앉힐 수 없다면 자연히 가짜 신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찌 헛되이 제 목숨을 끊을 것입니까.”라고 말하였다. 이때에 폭풍이 갑자기 일어나서 박을 끌어다 물속에 넣었다. 박은 물 위에서 빙글빙글 돌며 가라앉지 않았다. 빠른 물결에 떠서 멀리 흘러갔다. 이 때문에 코로모노코는 목숨을 잃지 않고 제방을 완성할 수 있었다. 코로모노코는 재능에 의해 몸을 망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이 두 곳을 가리켜 코와쿠비노 타에마(强頸斷間),[28] 코로모노코노 타에마(衫子斷間)[29]라 불렀다.
(12년) 겨울 10월에 큰 수로를 야마시로(山背)의 구루쿠마노 아가타(栗隈縣)[30]에 파서 논에 물을 대었다. 이로 인해 그 지방의 백성은 항상 넉넉하였다.
13년 가을 9월에 처음으로 자전(茨田)[31]둔창을 세웠다. 그래서 용미부(舂米部)[32]를 정하였다.
겨울 10월에 화이지(和珥池)[33]를 만들었다.
이 달에 횡야제(橫野堤)[34]를 쌓았다.
14년 겨울 11월에 웨카히노츠(猪甘津)[35]에 다리를 놓았다. 그곳을 오바시(小橋)[36]라고 불렀다.
이 해에 왕경 안에 큰 길[大道][37]을 만들었다. 남문에서 곧바로 타지히노무라(丹比邑)[38]에 이른다. 또 큰 수로를 코무쿠(感玖)[39]에 팠다. 이시가하(石河)[40]의 물을 끌어들여 카미츠스즈카(上鈴鹿), 하령록(下鈴鹿;시모츠스즈카), 카미츠토유라(上豐浦)[41], 시모츠토유라(下豐浦)네 곳의 들에 물을 대고, 개간하여 4만여 경의 논을 얻었다. 그래서 그곳의 백성은 풍족하고 여유로워 흉년에 대한 걱정이 없었다.
16년 가을 7월 무인삭(1일)에 천황은 궁인[42] 구하타노 쿠가히메(桑田玖賀媛)[43]를 근시하는 사인(舍人)[44]들에게 보이며 “짐이 이 여인을 사랑하려 하여도 황후의 질투 때문에 함께 하지 못한 지 여러 해가 지났다. 어찌 한창 때를 헛되이 보내야 하는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곧 노래하였다.
나를 섬기는 여인을 누가 돌볼 것인가.
이에 하리마 쿠니노 미야츠코(播磨國造)[45]의 선조 하야마치(速待)[46]가 홀로 나아가 노래하였다.
하리마 하야마치가 두려움이 많지만 삼가 돌보겠습니다.
그 날 구하타노 쿠가히메를 하야마치에게 보냈다. 다음날 저녁 하야마치가 구하타노 쿠가히메의 집에 이르렀다. 그러나 구하타노 쿠가히메와 뜻이 맞지 않았다. 이에 억지로 침소에 들어가려 하였다. 이때 구하타노 쿠가히메가 “첩은 과부로 평생을 마치고 싶습니다. 어찌 그대의 처가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이에 천황이 듣고 하야마치의 뜻을 이루게 하려고 생각하고, 구하타노 쿠가히메를 하야마치에게 딸려 구하타(桑田)로 보냈다. 곧바로 구하타노 쿠가히메는 병이 들어 도중에 숨졌다. 지금도 구하타노 쿠가히메의 묘가 있다.
22년 봄 정월에 천황이 황후에게 “야타노 히메미코(八田皇女)를 들여 비로 삼으려 한다.”고 말하였다. 이때 황후는 듣지 않았다. 이에 천황이 노래를 부르며 황후에게 청하여 말하였다.
귀인(貴人)이 분명히 하고픈 말은, 여분의 활시위는 끊어졌을 때 연결하기 위한 것이니 나란히 하였으면.
황후가 답하여 노래하였다.
옷이라면 이중으로 겹쳐 입는 것도 좋지만, 밤의 잠자리를 나란히 하고자 하는 당신은 두렵기만 하네.
천황이 또 노래하였다.
난파 해변에 있는 물가와 같이 함께 두기 위해 그 아이가 있는 것 같은데.
황후가 답하여 노래하였다.
여름누에가 누에고치를 이중으로 입고 싸안고 자는 것이 어찌 좋을까.
천황이 또 노래하였다.
조유의 피개 언덕을 홀로 울면서 걸어가는 사람도 짝이 있다면 좋으련만.
황후는 끝내 허락하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잠자코 답하지 않았다.
30년 가을 9월 을묘삭 을축(11일)에 황후가 쿠마노노 미사키(紀國)에 행차하여 쿠마노노 미사키(熊野岬)[47]에 이르러 이곳의 미츠나카시하(御綱葉)[48][엽은 카시하(箇始婆)라고 읽는다.]을 따서 돌아왔다. 천황은 황후가 없는 틈을 타 야타노 히메미코를 맞이해 궁전에 들였다. 그때 황후는 나니와 해변에 이르러 천황이 야타노 히메미코를 맞아 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원망하였다. 곧바로 따 가지고 온 미츠나카시하를 바다에 던져버리고 배를 대지 않았다. 이로 인해 당시 사람들이 황후가 잎을 뿌린 바다를 카시하노 와타리(葉濟)[49]라 칭하였다. 천황은 황후가 노하여 상륙하지 않은 것을 모르고, 친히 오호츠(大津)[50]로 행차하여 황후의 배를 기다리며 노래하였다.
나니와 인이여 방울이 달린 배를 끌어당겨라. 허리까지 물에 잠겨도 그 배를 끌어라. 대어선을 끌어라.
이때 황후는 대진에 정박하지 않고 다시 배를 이끌고 강을 거슬러 야마시로(山背)를 순회하여 왜(倭)로 향하였다. 다음날 천황이 사신 토리야마(鳥山)를 보내 황후를 모시고 돌아오게 하였다. 이에 노래하였다.
야마시로로 빨리 뒤쫓아 가라. 조산이여. 서둘러 쫓아가면 내가 사랑하는 처를 쫓아가 만날 수 있을 지도.
황후는 돌아오지 않고 오히려 나아갔다. 야마시로 하(山背河)[51]에 이르러 노래하였다.
야마시로 하를 거슬러 올라 내가 가니, 강 굽이에 서서 무성히 자라는 잎이 무성한 나무는 마치 우리 대군(大君)과 같구나.
이에 나라 산[52]을 넘어서 카츠라기(葛城)[53]를 바라보고 노래하였다.
야마시로 하를, 궁을 지나쳐 거슬러 올라가면, 나라산을 지나 야마토를 지나, 내가 보고 싶은 나라는 갈성고궁, 내 집 근처.
(황후는) 다시 야마시로로 돌아와서 궁전을 츠츠키노 오카(筒城岡)[54]의 남쪽에 짓고 그곳에서 지냈다.
겨울 10월 갑신삭(1일)에 적신의 선조 쿠치모치노 오미(口持臣)를 보내 황후를 불렀다[와니노 오미(和珥臣)[55]의 선조 쿠치노 오미(口子臣)라 한다.]. 이에 쿠치모치노 오미는 통성궁에 이르러 황후에게 아뢰고자 하였으나 (황후는)묵묵히 답하지 않았다. 그때 쿠치모치노 오미는 늦은 가을비[56]를 맞으며 주야로 황후의 궁전 앞에 엎드려 피하지 않았다. 쿠치모치노 오미의 누이 쿠니요리히메(國依媛)[57]가 황후를 섬기고 있었는데, 이때 황후의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쿠니요리히메는 오라비가 비에 젖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노래하였다.
야마시로의 통성궁에서 말씀을 올리려는 나의 오라비를 보니 눈물이 나네.
이때 황후가 쿠니요리히메에게 “너는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라고 물었다. “지금 뜰에 엎드려 말씀을 청하려는 자가 첩의 오라비입니다. 비에 젖어도 피하지 않고 여전히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 그로 인해 울며 슬퍼할 따름입니다.”라고 답하였다. 이에 황후가 “너의 오라비에게 말해 속히 돌아가게 하여라. 나는 결코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구지는 곧 돌아가 천황에게 아뢰었다.
11월 갑인삭 경신(7일)에 천황이 배를 타고 산배에 행차했다. 그때 뽕나무 가지가 물에 따라 떠내려 왔다. 천황이 뽕나무 가지를 보고 노래하였다.반지원이 정말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구나. 내 사랑 같은 뽕나무여. 어디든 걸리지 말고 흘러 갔으면 좋을 것을. 강의 물굽이에 걸리며 흘러 가는구나. 내 사랑 같은 뽕나무여.
다음날 천황이 통성궁에 이르러 황후를 불렀다. 황후는 만나보려 하지 않았다. 이때 천황이 노래하였다.
야마시로 녀가 나무 괭이를 가지고 파낸 무의 잎이 흔들리듯 수런대며 당신이 말을 하기에. 저 멀리 보이는 나무의 가지가 무성한 것처럼 이렇게 많이 거느리고 온 것이오.
또 노래하였다.
야마시로 녀가 나무 괭이를 가지고 파낸 무, 무처럼 새하얀 팔을 휘감지만 않았다면 모른다고 말할 수도 있으련만.
이에 황후가 “폐하는 야타노 히메미코를 들여 비로 맞으셨습니다. 그 황녀 옆에서 황후 노릇을 하기는 싫습니다.”라고 말하고 끝내 만나 보지 않았다. 그리하여 천황[58]이 궁으로 돌아왔다. 천황은 황후의 노여움이 큰 것을 한탄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사모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
31년 봄 정월 계축삭 정묘(15일)에 오호에노 이자호 와케노 미코토[59]를 황태자로 삼았다.
35년 여름 6월에 황후 이와노 히메노 미코토가 통성궁에서 죽었다(薨).
37년 겨울 10월 갑술삭 을유(12일)에 황후를 나라노 야마(乃羅山)[60]에 장사지냈다.[61]
38년 봄 정월 계유삭 무인(6일)에 야타노 히메미코를 세워 황후로 삼았다.[62]
가을 7월에 천황이 황후와 같이 누대에서 더위를 피하였다. 밤마다 토가노(菟餓野)[63]에서 수사슴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소리가 청아하면서도 구슬퍼 가엾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런데 그 달 말에 이르러 사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에 천황이 황후에게 “오늘 밤은 사슴이 울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라고 말하였다. 다음날 웨나노 아가타(猪名縣)[64]의 사헤키베(佐伯部)[65]가 진상품을 바쳤다. 천황이 가시하데(膳夫)[66]에게 “진상한 물건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수사슴입니다.”라고 답하였다. “어디의 사슴인가.”라고 물었다. “토가노입니다.”라고 답하였다. 이에 천황은 이 진상물이 필경 그때 울던 사슴일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로 인해 황후에게 “짐이 요즈음 마음속으로 근심하는 바가 있었는데, 사슴의 소리를 듣고 위안이 되었다. 지금 사헤키베가 사슴을 잡은 날과 장소를 미루어보니 바로 울던 그 사슴일 것이다. 그 사람은 짐이 사랑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우연히 잡았을 터이지만,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사헤키베는 황거(皇居) 가까이에 두고 싶지 않다.”고 말하였다. 이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아기(安藝)의 누타(渟田)[67]로 옮겨 살게 하였다. 이것이 지금 정전의 사헤키베의 선조이다. 그 지방 사람들이 “옛적에 어떤 사람이 토가에 이르러 들판에서 잠들었다. 그때 두 마리의 사슴이 곁에 드러누워 있었다. 새벽녘에 수사슴이 암사슴에게 ‘내가 꿈을 꾸었는데 흰 서리가 많이 내려서 내 몸을 뒤덮었다. 이것은 무슨 징조일까.’라고 말하였다. 암사슴이 ‘당신이 나돌아 다니면 필경 사람이 쏘아서 죽일 것입니다. 곧 흰 소금이 몸에 발라지는 것이 서리의 흰 빛처럼 될 것이라는 징조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때 들에서 자고 있던 사람은 마음 속으로 이상한 일이라 여겼다. 그런데 새벽에 사냥꾼이 나타나 수사슴을 쏘아 죽였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의 속담에 ‘우는 수사슴인가. 꿈처럼 되었다.’라고 한다.”고 말하였다.
40년 봄 2월에 메토리노 히메미코(雌鳥皇女)[68]를 맞이하여 비로 삼고자 하야부사 와케 황자(隼別皇子)[69]에게 주선하게 하였다. 이때 하야부사 와케 황자는 몰래 자기 자신이 아내로 맞이하고 오랫동안 복명하지 않았다. 이에 천황은 지아비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네토리 황녀의 침실에 들었다. 이에 비단을 짜는 여인들이 노래하였다.
하늘을 나는 자조(雌鳥)가 짜는 금기(金機)는 하야부사 와케 왕의 의복(襲) 재료!
이에 천황은 하야부사 와케 황자가 몰래 아내로 맞이한 것을 알게 되어 분개하였다. 그러나 황후의 말과 형제의 의리를 중히 여겼기에 참고 벌하지 않았다. 얼마 뒤에 하야부사 와케 황자가 황녀의 무릎을 베개로 삼고 누워 있었다. 이에 황자가 “굴뚝새(鷦鷯)와 매(隼)[70] 가운데 어느 것이 빠를까?”라고 물었다. 황녀가 “매가 빠르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황자가 “그래서 내가 선수를 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천황은 이 말을 듣고 다시금 분한 마음이 일었다. 이때 하야부사 와케 황자의 사인(舍人)들이 노래하였다.
매여! 하늘에 올라 높이 날아 재장(齋場) 위에 있는 굴뚝새를 잡아라.
천황이 이 노래를 듣고 돌연 크게 노하여 “짐이 사사로운 원한으로 형제를 잃지 않으려고 참은 것이다. 어찌 상처를 내어 사사로운 일이 사직에 미치게 하는가.”라고 말하고 곧 하야부사 와케 황자를 죽이려 하였다. 그때 황자는 메토리 황녀를 데리고 이세노 카무미야(伊勢神宮)에 들어가려고 말을 달렸다.[71] 천황은 하야부사 와케 황자가 도주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키비노 호무치베노 오후나(吉備品遲部雄鯽)[72]와 하리마노 사헤키노 아타히 아가노코(播磨佐伯直阿俄能胡)[73]를 파견하여 “쫓아가 붙잡는 즉시 죽여라.”라고 하였다. 이에 황후가 “네토리 황녀는 실로 중한 죄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죽이는 날에 황녀의 몸이 드러나는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로 인해 오후나 등에게 “황녀가 지니고 있는 족옥이나 수옥[74]을 빼앗지 말라.”고 명하였다. 오후나 등은 쫓아서 우다(菟田)[75]에 이르고, 소니노야마(素珥山)[76]에 들이닥쳤다. 그때는 풀 속에 숨어서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이후 급히 도망쳐 산을 넘었다. 이에 황자가 노래하였다.
사다리를 세워 놓은 듯 험한 산이라도 나와 처 두 사람이 함께 넘으면 편안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 같구나.
이에 오후나 등이 피한 것을 알고 급히 이세의 코모시로노노(蔣代野)[77]로 쫓아가서 죽였다. 그때 오후나 등이 황녀의 옥을 찾았는데, 치마 속에서 얻었다. 곧 두 왕의 시신을 이호키가하(廬杵河)[78] 근처에 묻고 복명하였다. 황후는 오후나 등에게 “황녀의 옥을 보았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보지 못하였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이 해에 신상(新嘗)의 달에 연회가 열렸을 때 내외명부(內外命婦)[79] 등에게 술을 내렸다. 오후미노 야마노 키미 와카 모리야마(近江山君稚守山)[80]의 처와 채녀(采女)[81] 이하사카히메(磐坂媛),[82] 이 두 여인이 손에 좋은 옥을 차고 있었다. 황후가 그 옥을 보고 네토리 황녀의 옥과 매우 비슷하다고 여겼다. 곧 의심을 품고 유사에게 명하여 그 옥을 얻은 연유를 묻게 하였다. 그러자 “사헤키노 아타히 아가노코 처의 옥입니다.”라고 답하였다. 이에 아타히 아가노코를 취조하였다. 그는 “황녀를 주살하던 날 찾아내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리하여 곧바로 아타히 아가노코를 죽이려 하였으나, 아타히 아가노코는 자신의 땅을 바치고 죽음을 면해주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그 땅을 받아들이고 죽을 죄를 용서하였다. 이 때문에 그 땅을 타마테(玉代)[83]라고 부른다.
41년 봄 3월에 키노 츠노노 스쿠네(紀角宿禰)[84]를 백제에 파견하여 처음으로 국군(國郡)의 경계를 나누고, 각 지역에서 나는 것을 상세히 기록하게 하였다.[85]
이 날(43년)에 모즈노(百舌鳥野)[86]에 행차하여 사냥하였다. 그때 암꿩이 많이 날아올라 매를 놓아 잡게 하였다. 그러자 순식간에 수십 마리의 꿩을 잡았다.
이 달에 처음으로 응감부(鷹甘部)[87]를 정하였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매 기르는 곳을 타카카히노무라(鷹甘邑)[88]라 칭하였다.
50년 봄 3월 임진삭 병신(5일)에 카후치(河內) 사람이 “자전제에서 기러기가 새끼를 낳았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날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다. 그는 “정말 사실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천황은 노래하며 타케우치노 스쿠네에게 물었다.
조정에 봉사하는 타케우치노 스쿠네여! 그대야말로 이 세상의 장수인. 그대야말로 나라 안의 최고 장수인! 왜국에서 기러기가 새끼를 낳는다는 말을 그대는 들어 보았는가!
타케우치노 스쿠네가 노래하며 답하였다.
대군이 제게 물으심은 지당하지만, 왜국에서 기러기가 새끼를 낳았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네.
55년에 에미시(蝦夷)[89]가 이반하였다. 그리하여 타지를 보내 치게 하였다. 그러나 에미시에게 패하여 이시노미토(伊峙水門)[90]에서 죽었다. 이때 시종이 타지가 차고 있던 팔찌를 가져다 그의 처에게 주었다. 부인은 팔찌를 가슴에 안고 목을 매어 죽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듣고 슬퍼하였다. 그 후에 에미시가 또 습격해 백성을 약탈하였다. 이에 타지의 묘를 팠다. 그랬더니 큰 뱀이 눈을 부라리며 묘에서 나와 물었다. 에미시는 뱀의 독으로 인하여 많이 죽었다. 단지 한두 사람이 죽음을 면하였을 뿐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타지는 죽었지만 끝내 원수를 갚았다. 어찌하여 죽은 사람이 지각이 없다 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58년 여름 5월에 아라하카(荒陵)[91]의 소나무 숲 남쪽 길에 갑자기 두 그루의 상수리나무가 뿌리를 내렸다. 길을 사이에 두고 끝이 연결되어 있었다.[92]
60년 겨울 10월에 시로토리노 미사자키(白鳥陵)[93]의 능지기[94]들을 차출하여 역정(役丁)[95]으로 충당하였다. 이때 천황이 친히 노역하는 곳에 행차하였다. 그러자 능지기 메키(目杵)가 갑자기 흰 사슴으로 변하여 달아났다. 이에 천황이 “이 능은 본래 비어 있었다.[*
『일본서기』 게이코 40년 시세조에는 ‘日本武尊의 영혼이 백조가 되어 날아갔다.’고 기재되어 있다.] 그래서 능지기를 폐하려고 생각하고 처음 역정으로 차출한 것이다. 지금 이 괴이함을 보니 매우 두렵구나. 능지기를 그대로 두어라.”고 하였다. 곧 다시 하지노 무라지(土師連)[96]들에게 관장하게 하였다.
62년 여름 5월에 원강국사(遠江國司)[97]가 표를 올려 “큰 나무가 오호웨가하(大井河)[98]에서부터 흘러내려 와서 강 구비에 멈추었습니다. 그 크기가 열 아름이나 됩니다. 뿌리는 하나인데 줄기는 둘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야마토노 아타히 아고코(倭直吾子籠)를 파견하여 배를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남해로부터 운반하여 나니하노츠(難波津)[99]로 가져와 천황의 배로 삼았다.
이 해에 누카타노 오호나카츠히코 황자[100]가 츠케(鬪鷄)[101]에서 사냥하였다. 그때 황자가 산 위에서 들을 내려다보니 물건이 있었다. 그 형상이 초막과 같았다. 이에 사신을 파견하여 자세히 살펴보게 하였다. 사신은 돌아와서 “굴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츠케노 이나키 오호야마누시(鬪鷄稻置大山主)를 불러 “저 들 가운데 있는 것은 무슨 굴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빙실(氷室)입니다.”라고 하였다.[102] 황자는 “그 저장 상태는 어떠하며, 무엇에 쓰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땅을 1장[103] 남짓 파고 풀을 그 위에 덮습니다. 그리고 두텁게 띠와 갈대를 깔고 얼음을 가져다 그 위에 놓습니다. 그러면 여름이 지나도 녹지 않습니다. 그 용도는 더운 때가 되면 술을 차게 하는 데 사용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황자는 곧 그 얼음을 가지고 와서 천황에게 바쳤다. 천황은 기뻐하였다. 이후 겨울이 될 때마다 반드시 얼음을 저장하였다. 춘분이 되면 비로소 얼음을 나누어 주었다.[104]
65년에 히다노쿠니(飛驒國)에 스쿠나(宿儺)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몸이 하나인데 얼굴이 둘이었다. 얼굴은 각기 서로 등을 지고 있었으며, 정수리가 합쳐져 목덜미가 없었다. 그리고 각각 손발이 있었고, 무릎은 있는데 오금과 발뒤꿈치는 없었다. 또한 힘이 세고 민첩하여 좌우에 칼을 차고 네 손으로 활과 화살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황명에 따르지 않으며 백성을 약탈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이에 와니노 오미의 선조 나니하노 네코 타케 후루쿠마(難波根子武振熊)[105]을 파견하여 죽였다.[106]
67년 겨울 10월 경진삭 갑신(5일)에 카와치의 이시츠노하라(石津原)[107]에 행차하여 능지를 정하였다. 정유(18일)에 처음으로 능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날 사슴이 들판에서 갑자기 달려와 역민(役民)들 속으로 들어오더니 쓰러져 죽었다. 그때 갑자기 죽은 것을 괴이하게 여기고 상처를 찾았다. 그랬더니 귀에서 때까치[108]가 나와 날아갔다. 그리하여 귓속을 보니 모두 먹히고 할퀴어 벗겨져 있었다. 이곳을 모즈노 미하라(百舌鳥耳原)이라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이 해에 키비노 미치노 나카노 쿠니(吉備中國)[109] 카사시마가하(川島河)[110]의 물길이 갈라지는 곳에 용[111]이 있어 사람을 괴롭혔다. 그리하여 길 가던 사람이 그곳을 지나다 독에 당하여 많이 죽었다. 카사노 오미(笠臣)[112]의 선조 아가타모리(縣守)는 용감하고 힘이 세었다. 그는 깊은 못에 가서 세 개의 박을 물에 던지며[113] “너는 자주 독을 뿜어 길 가는 사람을 괴롭혔다. 내가 너를 죽이겠다. 네가 이 박을 가라앉히면 나는 물러날 것이다. 가라앉히지 못하면 바로 네 몸을 베겠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용이 사슴으로 변해 박을 끌어 당겼으나 박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하여 곧 칼을 빼고 물에 들어가 용을 베었다. 그리고 다시 용의 무리를 찾았다. 깊은 못 바닥에 있는 굴에는 용의 무리가 가득하였다. 그리하여 모두 베었다. 그러자 못의 물이 피로 변하였다. 이로 인해 아가타모리노 후치(縣守淵)[114]라고 불렀다. 그때 괴이한 기운이 나타나고, 배반하는 자가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천황은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며, 부역과 조세를 가벼이 하고 백성을 관대히 대하고 덕을 펼치며 은혜를 널리 베풀어 곤궁한 자를 구하였다. 그리고 조문과 병문안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고아와 과부를 부양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정사가 잘 행해졌으며 천하가 태평하였다. 20여 년 동안 아무런 일이 없었다.
87년 봄 정월 무자삭 계묘(16일)에 천황이 죽었다(崩).[115] 겨울 10월 계미삭 기축(7일)에 모즈노노 미사자키(百舌鳥野陵)[116]에 장사지냈다.
2.3. 일본서기 한반도 관련 기록
이 해(11년)에 신라인이 조공하였다. 그래서 이 공사에 종사시켰다.[117]12년 가을 7월 신미삭 계유(3일)에 고구려[118]가 철로 만든 방패와 과녁을 바쳤다.[119]
8월 경자삭 기유(10일)에 고구려의 사신에게 조정에서 향응을 베풀었다. 이날 군신 및 백료를 모아 고구려가 바친 철 방패와 철 과녁을 쏘게 하였다. 많은 사람이 과녁을 맞히지 못하였다. 다만 이쿠하노 오미(的臣)[120]의 선조 타타히토노 스쿠네(盾人宿禰)만이 철 과녁을 관통하였다. 이때 고구려 사신들이 활 쏘는 솜씨의 훌륭함에 경외를 표하며 모두 일어나 절하였다. 다음날 타타히토노 스쿠네를 칭찬하여 이름을 내려 이쿠하노 토다노 스쿠네(的戶田宿禰)라 하였다. 같은 날 오하츠세노 미야츠코(小泊瀨造)[121]의 선조 스쿠네노 오미(宿禰臣)에게 이름을 내려 사카노 코리노 오미(賢遺臣)[賢遺는 사카노코리(左舸能莒里)라고 읽는다.]라 하였다.
17년에 신라가 조공하지 않았다. 가을 9월에 적신의 선조 토다노 스쿠네(砥田宿禰)와 오하츠세노 미야츠코(小泊瀨造)의 선조 사카노 코리노 오미(賢遺臣)를 보내 조공하지 않은 일에 관해 묻게 하였다. 신라인이 두려워하여 공물을 바쳤다. 조(調)로 바치는 비단 1,460필[122] 및 여러 가지 잡물을 합하여 배 80척 분량이었다.[123]
그때(41년) 백제의 왕족 사케노키미(酒君)[124]이 무례하였다. 이 때문에 기각숙녜가 백제의 왕을 책망하였다. 그때 백제의 왕이 두려워하여 쇠사슬로 사케노키미를 묶어서 소츠비고(襲津彦)[125]에게 딸려서 바쳤다. 이에 사케노키미가 와서 이시카하노 니시코리노 오비토 코로시(石川錦織首許呂斯)[126]의 집으로 도망가 숨었다. 그리고 거짓으로 “천황께서 이미 신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 그래서 너에게 의지하여 살고자 한다.”라고 말하였다. 오래 지난 뒤에 천황이 드디어 그 죄를 용서하였다.
43년 가을 9월 경자삭(1일)에 의망둔창(依網屯倉)[127]의 아비코(阿弭古)[128]가 기이한 새를 잡아 천황에게 바치며 “신이 늘 그물을 쳐서 새를 잡아왔지만, 이러한 새는 잡아본 적이 없습니다. 이에 기이하여 바칩니다.”라고 말하였다. 천황은 사케노키미를 불러 새를 보이며 “이것이 무슨 새인가?”라고 물었다. 사케노키미는 “이런 새는 백제에 많이 있습니다. 길들이면 사람을 잘 따릅니다. 또한 빨리 날아서 여러 가지 새를 잡습니다. 백제인들은 이 새를 구지(俱知)[129]라고 부릅니다[지금의 매이다.].”라고 답하였다.[130] 이에 주군에게 주어 사육하게 하였다. 이후 얼마 안 되어 길들일 수 있었다. 곧 주군이 가죽 끈을 새의 다리에 매고, 작은 방울을 꼬리에 달아 팔뚝 위에 앉혀서 천황에게 바쳤다.
53년에 신라가 조공하지 않았다. 여름 5월에 카미츠케노노 키미(上毛野君)[131]의 선조 타카하세(竹葉瀨)[132]를 파견하여 조공하지 않은 까닭을 묻게 하였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흰 사슴을 잡아, 곧바로 돌아와서 천황에게 바쳤다. 이윽고 다시 날을 잡아 길을 떠났다. 얼마 후에 또 타카하세의 아우 타지(田道)[133]를 파견했다. “만일 신라가 막으면 군사를 일으켜 치라.”고 명하고 정병을 주었다. 이에 신라가 군사를 일으켜 막았다. 이때 신라인이 나날이 싸움을 걸었다. 타지는 요새를 굳게 하며 나아가지 않았다. 때마침 신라의 군졸 하나가 병영 밖으로 나왔다. 곧 사로잡아 그 상황을 물었다. “모모츠키(百衝)라는 힘센 자가 있습니다. 가볍고 민첩하며 용맹합니다. 항상 군의 우측 선봉에 섭니다. 그러므로 살펴보고 있다가 좌측을 치면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때 신라는 왼쪽을 비워놓고 오른쪽을 방비하고 있었다. 타지는 날랜 기병으로 하여금 왼쪽을 계속 공격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신라군이 무너지자, 그 틈을 타 군사를 풀어 수백 명의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4읍[134]의 백성을 사로잡아 돌아왔다.[135]
(58년) 겨울 10월에 오국(吳國)[136]과 고구려가 나란히 조공하였다.[137]
3. 특징
닌토쿠 천황은 '인덕'(仁德)이라는 이름 그대로 어질고 덕이 있는 천황으로 전승되고 있다. 예를 들면, 저녁 무렵 밥을 지을 때가 되어서도 마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 것을 지켜본 닌토쿠 천황은 백성의 곤궁함을 알고 3년간 세금을 면제하는 조치를 취해 백성들로부터 성제 · 성군이라고 칭송되었다. 또한 나니와(오사카)의 인공하천 공사, 간규 지역의 대규모 도랑 공사, 만다 지역의 제방 건설과 둔창의 설치, 요코미 제방의 축조 등 오사카 평야의 대대적인 개발과 농업 발전에 관련된 많은 전승을 남기고 있다.한편으로 닌토쿠 덴노에게는 성군의 이미지 이외에도 또 다른 모습이 전해지고 있다. 오토리 황녀에 대한 구혼이 이와노히메노미코토 황후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않고, 황후의 심한 질투로 인해 고민하는 등의 인간적인 모습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아울러 닌토쿠 덴노와 관련된 성군 전설은 허구에 지나지 않고, 실제로는 거대한 고분을 조영한 전제군주였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이 밖에 닌토쿠 천황을 왜5왕 가운데 찬(讚) 왕 또는 진(珍) 왕으로 추정하는 설이 있으며, 닌토쿠 왕조의 개조(開祖)로 보는 설, 오진 덴노와 닌토쿠 덴노를 동일 인물로 보는 설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현대에 와서는 現 일본 왕조와 다른 왕조 출신의 실존인물로 확실시된다. 닌토쿠 조가 비정상적으로 긴 것은 연대 인상의 영향으로 보이며, 실제로는 4~5세기 인물로 추정된다. 계유년에 즉위했다는 점과 오진 덴노(367년 재위 확인)와 5세기 리추 덴노의 사이에 배치된 것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계유년(373)에 즉위한 것으로 보인다. 5세기 중반~중후반에 일어나는 일들까지 고려하면 433년으로 더 내려야 할 수도 있지만, 왜5왕이 리추 덴노~유랴쿠 덴노로 추정되기도 하고 닌토쿠 조의 특성을 고려하면 4세기~5세기에 활동한 여러 사람을 하나로 모았다고 봐야 할 듯하다.
오사카 지역과 관련된 여러 전설이 내려오고 있으며, 그의 능이 오사카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것을 볼 때 오사카 출신으로 추측된다. 자세히 보면 다른 일본 왕조의 주요 인물들은 일부 예외(진무 덴노 초기, 게이코 덴노 초기, 주아이 덴노)를 제외하면 나라현 동남부나 남부 일대를 근거지로 하는 반면 닌토쿠 조의 활동 반경은 대부분 오사카부나 효고현, 나라현 북부나 동북부 일대에 집중되어 있다. 진무 덴노기부터 5세기 무렵까지 일본 왕조의 주요 인물들은 여러 루트를 통해 나라현 남부, 동남부 일대를 중심으로 유입되어 효고현, 오사카부, 나라현 동북부 일대와 싸우는 모습이 굉장히 자주 나타나는데, 닌토쿠 조에 나오는 기록이 여러 사람을 합친 것처럼 활동 반경과 연대, 일화가 다소의 괴리를 보임을 고려하면 닌토쿠 조의 기록은 4~5세기 現 일본 왕조의 조상이 되는 세력들과 경쟁해온 동격의 세력들의 일대기를 하나로 모아서 편찬한 것일 수도 있다.
기록에 나오는 여러 정황을 보아 처음에는 바다와 가까워 중국과 한반도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용이했던 해안가 세력이 주도권을 잡다가 5세기에 접어들어 나라현의 동쪽인 아즈마(東國)에서 유입된 세력들, 비와호~교토부 일대의 세력들이 손을 잡아 주도권을 빼앗긴 것으로 보이며, 5세기 중반에 접어들어 백제 도래인들에 의해 도쿄 분지가 대대적으로 개간되면서 힘이 강해지고 비와호 일대에서 교토 분지 및 나라현 동부로 남하한 세력에게 다시 주도권이 넘어간 듯하다. 나라현 동남부에 먼저 거주한 집단과 비와호에서 남하한 집단은 원래부터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보이며, 6세기 초반 비와호 출신이었다 교토부 일대로 남하한 게이타이 덴노가 다시금 나라현 동남부로 이주하여 일본의 유일한 대왕이 되고 야마토 왕권이 완전히 일원화된 것으로 보인다.[138]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이사항이 우지노 와키이라츠코(菟道稚郞子)이다. 우지노 와키이라츠코는 오진 덴노의 원래 후계자라 기록된 인물로, 주아이~오진 조에 나타나는 우지(菟道, 교토부 우지시)를 근거지로 교토부~비와호 일대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로, 297년(417) 한반도 기사에서 고려 왕[139]이 굉장히 고압적인 서신을 보내자 분노해 불태워버린 기록이 있어 5세기 초반에 활동한 것이 확인되는 인물이다. 우지노 와키이라츠코는 주아이 덴노-진구 황후-오진 덴노의 일족 및 게이타이 덴노의 고향과 활동 반경이 겹쳐서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보이는데,[140]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니와(오사카시) 출신의 닌토쿠에게 밀려 대왕이 되지 못한 일화는 4세기 후반~5세기 초반 오사카부~나라현 동북부 세력이 야마토 왕권의 주도권을 쥐고 나라현 동남부 및 남부 세력보다 우세에 점했던 시절을 반영한 것일지도 모른다.
연대 인상을 고려하면 오사카부 세력이 나라현 세력에게 실제로 주도권이 밀리는 것은 5세기 중반 이후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오진 덴노, 리추 덴노와 아주 남남이라 보기는 애매하고 서로간에 인척관계가 있었던 듯하다. 닌토쿠 조의 기록이 여러 사람이 합산된 듯한 정황이 있어 '정확히' 누구인지 알아내기는 힘들지만. 그 외에도 4~5세기 각지에서 활동하던 여러 인물들과 더 후대의 인물들이 연대 조정 과정에서 죄다 합산해서 기록된 듯한 정황도 있다.
4. 무덤
오사카부 사카이시에 있는 일본에서 가장 큰 고분인 다이센 고분(大仙古墳/大仙陵古墳)은 기록에 근거하여 닌토쿠 천황의 무덤이라고 주장되어온다.[141] 닌토쿠 천황의 부인인 이와노히메 황후의 무덤은 나라시의 사키초(佐紀町)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두 고분의 특징은 열쇠구멍 모양을 했고, 물로 채운 해자로 둘러싸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덤을 전방후원분이라고 한다. 다만 현재의 해자는 메이지 시대에 조성한 것이다.
천황의 무덤은 황실과 관련된 업무를 관할하는 궁내청에서 관리한다. 궁내청에 따르면 천황의 무덤은 단순히 역사적인 유물이 묻힌 장소가 아니라 신성한 종교적 장소이다. 궁내청은 각각의 무덤들을 조상들의 영혼을 위한 성역으로 해석한다. 그렇기에 정창원처럼 연구는 거녕 발굴허가가 나오지 않으며 이때문에 닌토쿠 천황의 무덤이 맞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2020년 12월 기준 다이센료 고분의 모습. 고분 내부로는 입장할 수 없기 때문에, 공원길과 비슷한 분위기이다. 다이센 고분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모즈·후루이치 고분군의 일부이기도 하다.
5. 기타
금관가야와 고대 야마토 왕권의 관계를 추적한 최인호의 소설 《제4의 제국》에서도 인덕(닌토쿠)릉이 등장한다. 최인호에 따르면 해당 무덤은 메이지 시대인 1872년 9월 7일에 불어닥친 폭풍우로 봉분 토사가 붕괴되어 묻혀 있었던 석관이며 부장된 유물들이 바깥으로 노출되었으며, 그때 궁내청 소속의 화가가 사카이 현령의 명령을 받아 당시 노출된 석관과 출토된 유물들을 그린 그림이 남아 있다.나온 유물 중에는 갑주나 무기는 물론 페르시아산 유리잔도 있었다고 한다. 나온 유물들은 조사 뒤에 다시 원래 봉분 안에 넣었는데, 그 와중에 환두대도, 삼환령, 칠자경 등 유물 4점이 유출되어 1906~07년 사이에 오카쿠라라는 일본인 손으로 들어갔고, 지금은 미국 보스턴 박물관에 소장되었다고 한다. 해당 유물들의 사진이 사카이 박물관에 걸렸는데 '전(傳) 인덕릉 출토품'이라는 표제가 붙었다고 한다.
위 설명은 마치 최인호의 소설에 쓰였으니 근거 없는 창작인 양 설명했지만, 실제로 2007년 KBS <제4의 제국 가야>라는 프로그램에서 최인호가 보스턴 박물관에 직접 방문하여 환두대도, 삼환령, 칠자경, 청동거울을 확인하여 영상기록으로도 남겼다.
그리고 위에서 1872년 폭풍우가 불어닥쳐 유물들이 노출되었고 오카쿠라라는 일본인의 손에 들어가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고 설명한 내용은 최인호가 창작한 것이 아니라 보스턴 박물관의 Joe Earle이라는 미국인이 직접 설명한 부분이다.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이것들이 모두 일본에서 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그뿐입니다. 1872년에 인덕천황의 무덤에 산사태가 발생했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이 지역을 건드린 사람이 없었습니다. 즉 1,400년 동안 무덤은 거의 어떤 이의 손도 타지 않았다가 갑자기 1872년 보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산사태가 발생했고 이틈을 타서 몇 개의 유물들이 무덤에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대부분의 것들은 다시 무덤 안으로 돌려놓았습니다. 그러나 이 다섯 개의 유물들은 밖으로 유출되었고, 오카쿠라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오카쿠라는 돈을 주고 일본, 중국 특별 기금을 이용해 1906년 후반 1907년 초반에 이 유물들을 구입하게 되었습니다."(전문)
또
'인덕의 조야릉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석관의 개석(蓋石)이 사카이 만도코로(政所) 정원의 답석으로 쓰이고 있었다.'
는 에도 시대의 아라이 하쿠세키의 전집 기록을 제시하며, 이전에 무덤은 한 번 도굴당했던 적이 있으며 범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라고 추정했다.[142]6. 가족관계
- 황후: 이와노히메노미코토(磐之媛命) - 342년 쿠마노에 놀러간 사이, 닌토쿠 덴노가 야타노 히메미코(矢田皇女)를 입궁시킨 일에 격노해 천황과 별거해 버리고 그곳에서 죽었다고 한다. 가계가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은 데다 고사기에서 최초로 천황가가 아닌 황후라 기록한 것을 보아 기기 신화 편찬 당시 가문이 제대로 남지 않을 정도로 몰락해버린 듯하다. 남편과 별거할 때 야마시로국(교토부 남부)으로 간 것을 고려하면 교토부 남부 출신으로 추정된다.
- 황후: 야타노 히메미코(矢田王女) - 오진 덴노와 미야누시야카히메 사이의 왕녀로 이와노 히메노 미코토 황후가 죽은 뒤 황후가 되었다고 한다. 즉 오호사자키와는 형제다.
- 비: 히무카노 카미나가히메(日向髪長媛)
- 오오쿠사카노 미코(大草香王子, ?~454)
- 쿠사카노 하타비노 히메미코(草香幡梭王女) - 유랴쿠 덴노의 황후
- 비: 우지노 와키이라츠메(宇遅之若郎女) - 오진 천황의 딸로 오호사자키와 형제다.
- 비: 쿠로히메(黒日売)
==# 천황 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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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사기》.[2] 《일본서기》.[3] 《만엽집》.[4] 『日本書紀』에는 오진 덴노가 41년(庚午) 2월에 죽은 것(崩)으로 되어 있고, 닌토쿠 원년은 太歲癸酉라고 기재되어 있어 양자 사이에는 3년의 차이가 난다. 이는 즉위전기에 나오는 「皇位空之, 旣經三載.」라는 내용과 합치된다.[5] 오사카시 주오구 法圓坂에 7세기 후반부터 8세기에 걸쳐 조영된 나니와노미야 유적을 중심으로 한 上町臺地의 북부와 大阪城 남쪽 일대의 나니와 성지 주변이라 간주되고 있다.[6] 원문은 木菟(학명:Strigidae)이다.[7] 『일본서기』 게이코 51년 8월조에서는 「武内宿禰爲棟梁之臣.」이라 하고, 세이무 3년 정월조에서는 「武内宿禰爲大臣也.」라 기록하고 있다.[8] 원문은 鷦鷯(학명:Troglodytes troglodytes)이다.[9] 『고사기』 고겐 단에는 헤구리노 츠쿠노 스쿠네(平群都久宿禰)는 建內宿禰의 아들이며 平群臣, 佐和良臣, 馬御樴 등의 선조라고 기재하고 있다.[10] 平群臣은 大和의 웅족이다. 덴무 13년 11월에 아손(朝臣)으로 개성(改姓)하였다. 『신찬성씨록』 右京 皇別 平群朝臣條에는 「平群朝臣, 石川朝臣同, 武内宿禰男平群都久宿禰之後也.」라고 적혀 있다.[11] 『고사기』 仁徳天皇段에는 葛城之曾都毗古의 딸 이하노 히메노 미코토(石之日賣命)라고 기재되어 있다. 『속일본기』 천평 원년(729) 8월 24일조의 光明皇后 宣明에서는 葛城曾豆比古(葛城曾豆比古)의 伊波乃比賣命(石之比賣命)을 황족이 아닌 여인의 첫 入后 사례로 적고 있다.[12] 『고사기』 닌토쿠 단에서는 스미노에노 나카츠 호호키미(墨江之中津王)라 적고 있고, 『일본서기』 리추 즉위본기와 『고사기』 리추 단에서는 반역을 도모하여 살해되었다고 적고 있다.[13] 『고사기』 닌토쿠 단에서는 하타비노 오호이라쓰코(波多毘能大郞子) 또는 오호쿠사카 왕(大日下王)이라고 적고 있다.[14] 『고사기』 닌토쿠 단에서는 하타비노 와키이라쓰메(波多毘能若郎女) 또는 나가메히메노 미코토(長目比売命) 혹은 와카쿠사카베노 미코토(若日下部命)라고 적고 있다.[15] 이 기사에서 畿內는 都나 皇居에 가까운 지역을, 畿外는 먼 지역을 가리킨다. 『일본서기』 게이코 51년 8월조의 邦畿之外라는 표현이 참고가 된다.[16] 課는 調用, 役은 身役을 가리키는 율령 용어이다.[17] 임생부는 황자녀의 양육을 위해 설치된 部이다. 乳部라고도 한다.[18] 『고사기』 닌토쿠 단에는 미나시로(御名代)라고 기재되어 있다.[19] 원문은 黔首이다. 『史記』 始皇紀의 「更民曰, 名黔首.」라는 문구가 참고가 된다.[20] 『고사기』 닌토쿠 단에도 「天皇登高山, 見四方之國, 詔之. 於國中烟不発. 國皆貧窮. 故, 自今至三年, 悉除人民之課役. (중략) 是以, 百姓之栄, 不苦役使. 故, 称其御世, 謂聖帝世也.」라고 적혀 있다. 『일본서기』와 『고사기』 모두 3년의 과역 면제에 관한 설화를 싣고 있다.[21] 大阪灣을 가리킨다.[22] 大川(현재 淀川)으로 비정한다.[23] 자전제에 대해서는 히라카타시의 伊加賀 부근에서 都道區 東野田町 부근에 이르는 장대한 제방이라 보는 견해와 伊加賀 부근의 정천 좌안에서부터 네야가와시 太間 부근을 거쳐 카도마시 北島 부근에 이른다고 보는 견해, 伊加賀에서 출발하여 정천이 크게 분류하는 지점인 太間과 정천이 고천으로 다시 분류되는 지점인 平池 부근에 이르는 지역에 축조된 제방이라 보는 견해가 있다.[24] 코하쿠비는 문화 후진지역인 東國 무사시(武藏)에서 온 병사로서 원시적 습속에 순응하여 죽음에 이른 존재로, 삼자는 문화 선진지역인 畿內人이어서 신의 진위를 의심하고 신을 시험하는 등 원시적 습속을 부정한 존재로 간주되기도 한다.[25] 『신찬성씨록』 右京 皇別 茨田連條에서 「多朝臣同祖. 神八井耳命男彦八井耳命之後也.」, 山城國 皇別 茨田連條에서 「茨田宿禰同祖. 彦八井耳命之後也.」라고 적고 있다. 또 同書河內國 皇別 茨田宿禰條에서는 「多朝臣同祖…男野現宿禰. 仁德天皇御代. 造茨田堤.」라고 적고 있다. 덴무 13년 12월에 茨田連씨가 宿禰로 改姓하였다.[26] 하백은 원래 중국 황하의 신을 일컫는데, 고구려의 주몽신화에도 보인다. 『일본서기』에는 하천을 관장하는 신이 대부분 ‘水神’, ‘河神’이라 기재되어 있는데, 하백이 등장한 사례는 위 사료와 皇極天皇 원년조에서 「羣臣相謂之曰. 随村村祝部所教. 或殺牛馬祭諸社神. 或頻移市. 或祷河伯. 既無所効. 蘇我大臣報曰. 可於寺寺轉讀大乘經典. 悔過如佛所訟. 敬而祈雨.」라고 적고 있는 예가 전부이다. 양 기사에 등장하는 하백은 수신으로서의 능력을 시험받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천황에 비해 물을 제어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27] 인간을 희생으로 바치는 이른바 ‘人身供犧’설화의 대표적인 사례로 간주되고 있다.[28] 단간은 하천의 분류 지점이나 합류 지점과 같이 수량이 급격히 늘어나거나 물의 흐름이 빨라지는 지역이어서, 제방을 쌓는 것 자체가 어려운 구간을 가리킨다.[29] 衫子斷間은 茨田郡 太間村(현재 네야가와시 太間町 부근 지역)으로 일반적으로 비정되고 있다. 强頸斷間은 東生郡 千林村(현재 오사카시 旭區 千林 부근 지역)으로 비정하거나, 정천이 고천으로 다시 분류되는 지점인 平地 부근으로 비정하기도 한다.[30] 『和名類聚抄』에서는 「山城國久世郡栗隈鄕.」이라고 적고 있다. 현재 교토부 조요시 久世鄕 久御山町에 걸친 지역이다.[31] 『和名類聚抄』에서 「河內國茨田郡萬牟多鄕.」이라고 적고 있다. 현재 오사카부 히라카타시 남서부와 네야가와시의 西半部, 모리구치시, 카도마시 전역, 다이토시의 서부, 오사카시 츠루미구 동부 지역에 해당된다.[32] 「大寶戶籍」에는 舂米部, 搗米部가 보이는데, 그 반조인 舂米連은 덴무 13년 12월에 宿禰 姓을 받았다.[33] 『大和志』에서는 「添上郡和珥池. 在池田村. 一名廣臺寺池.」라고 적고 있어 和珥池(현재 奈良市 池田町)일 가능성도 있다. 『日本書紀』 스이코 21년 11월조에 和珥池 축조에 관한 기사가 보인다.[34] 『延喜式』 神名帳의 灄川郡 六座 중에 橫野神社가 기재되어 있다. 현재 오사카시 이쿠노구 巽西3丁目에 横野神社蹟이 남아 있다. 横野堤의 수호신이었을 것이다.[35] 현재 오사카시 이쿠노구 中川西 平野川의 東岸 지역이다.[36] 현재 天王寺區 小橋町이다. 『고사기』 닌토쿠 단에는 「堀難波之堀江次通海, 又堀小椅江, 又定墨江之津.」이라고 적고 있다[37] 『일본서기』에는 大道 관계 기사가 3회 나온다. 이 기사와 『일본서기』 스이코 21년 11월조의 「自難波至京置大道.」, 고토쿠 白雉 4년 6월조의 「脩治処処大道.」가 그 예이다.[38] 『和名類聚抄』에서는 「河內國丹比郡丹北, 丹南.」이라 적고 있다. 이 두 鄕이 丹比邑과 관련된 지역이라면 현재 오사카부 미나미카와치군(南河內郡) 美原町 북동부의 丹上, 마츠바라시 南部의 丹南을 중심으로 한 하비키노시 郡戶를 포함한 지역에 해당된다.[39] 『和名類聚抄』에는 「河內國石川郡紺口.」라고 적고 있다. 현재 오사카부 미나미카와치군(南河內郡) 河南町 부근이다.[40] 和泉山脈의 灯明岳 부근이 原流인데, 북쪽으로 흘러 錦部, 石川, 古市 등을 경유하여 志紀郡에서 大和川에 합류한다.[41] 『和名類聚抄』에 보이는 河內郡豐浦(현재 오사카부 히가시오사카시 豐浦町)로 비정할 수 있지만, 거리상으로 너무 멀어 받아들이기 어렵다.[42] 궁중에서 근무하던 여성들을 총칭한 표현이다. 율령제에서는 6위 이하의 女官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43] 『和名類聚抄』에 보이는 丹波國桑田郡(현재 교토부 北桑田郡, 가메오카시)을 출신지로 하는 인명이다. 玖賀媛에 관한 이야기는 『고사기』에는 보이지 않는다.[44] 舍人은 천황이나 황족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사람이다.[45] 『일본서기』 게이코 4년 2월조에서 「稻背入彦皇子. 是播磨別之始祖也.」라고 적고 있듯이 稻背入彦皇子는 하리마노 와케(播磨別)의 시조이다. 『先代舊事本紀』 國造本紀에는 志賀高穴穗朝(成務朝)에 이코지 와케노 미코토(伊許自別命)를 하리마(針間)국조로 정했다고 적혀 있다.[46] 여기에만 보인다.[47] 와카야마현 新宮市 新宮 주변이다.[48] 미츠나카시하(御綱葉)는 미츠노 카시하(三角葉)가 변한 것이다. 잎의 끝이 3개로 벌어진 상록엽으로, 神에게 바치는 술을 담는 나뭇잎이다.[49] 『고사기』에서는 「미츠노사키(御津前)」이라 적고 있다. 현재 나니와의 淀川 하구 부근의 선착장이다.[50] 難波大津(닌토쿠 62년 5월조에는 難波津)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하지만, 明治 19년의 大阪實測圖에 따라 寢屋川 左岸의 오사카시 주오구 城見 지역이라 보기도 한다.[51] 야마시로 하는 木津川의 옛 이름이다. 현재 미에현과 교토부를 흐르는 淀川水系의 지류이다.[52] 현재 나라시 北郊 奈良坂 부근의 언덕을 가리킨다.[53] 葛城은 현재 나라현 中西部, 葛城山 동쪽 기슭 일대를 가리킨다.[54] 『和名類聚抄』에서는 「山城國綴喜郡綴喜, 豆豆木.」이라 적고 있다. 綴喜鄕은 元嘉 원년의 「興福寺官務牒」에 기초하여 현재 교토부 츠즈키군 田邊町 普賢寺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55] 和珥臣은 나라현 텐리시 和爾를 본거로 한 호족이다.[56] 『고사기』 닌토쿠 단에서는 「是口子臣, 白此御歌之時, 大雨. 爾, 不避其雨.」라고 적고 있다.[57] 『고사기』 닌토쿠 단에서는 ‘쿠치코노 오미(口子臣)의 妹인 쿠치히메(口比賣)가 大后에게 봉사하였다.’고 적고 있다.[58] 원문은 車駕이다. 『후한서』 明帝紀의 「車駕遷宮.」이라는 내용이 참조가 된다.[59] 오호에노 이자호 와케노 미코토(大兄去來穗別尊)는 리추 덴노를 가리킨다. 『고사기』에는 오호에노 이자호 와케노 미코토(大江之伊耶本和氣命)라 적혀 있다.[60] 那羅山을 가리킨다.[61] 『延喜式』 諸陵寮式에서는 「平城坂上墓[磐之媛命. 在大和國添上郡. 兆域 東西一町. 南北一町. 無守戶.]」라고 적고 있다. 『陵墓要覽』에서는 「平城坂上陵, 奈良縣奈良市佐紀町字ヒシアゲ」라고 적고 있다. 佐紀盾列古墳群의 東群을 구성하는 세 개의 전방후원분 가운데 서쪽에 위치한 것이 이와노 히메노 미코토의 무덤이라 정하였다.[62] 『고사기』 닌토쿠 단에는 磐之媛의 사망에 관한 내용은 물론이고 야타노 히메미코를 황후로 세운 내용도 보이지 않지만, 야타노 히메미코의 御名代로 八田部를 정했다는 내용은 보인다.[63] 『攝津風土記』 逸文에 의거하여 雄伴郡의 夢野(현재 효고현 고베시 효고구 夢野町)의 옛 명칭이라는 설과, 이곳으로 비정하면 천황과 황후가 菟餓野에서 사슴의 우는 소리를 들었다는 본조의 이야기와 맞지 않다는 점을 들어 현재 오사카시 北區 菟我野町 부근이라는 설이 제시되어 있다.[64] 『和名類聚抄』에서는 攝津國 河邊郡 爲奈鄕(현재 효고현 아마가사키시 동북부)이라고 적고 있다. 猪名縣은 猪名川 양안에 걸친 지역으로 豐島郡(현재 오사카부 토요나카시, 이케다시, 미노오시)에서 河邊郡(현재 효고현 川邊郡 아마가사키시, 카와니시시) 주변에 해당된다.[65] 蝦夷로 조직된 部(베)로, 궁정 경호를 담당하였다.[66] 천황에게 음식으로 봉사하는 집단이다.[67] 『和名類聚抄』에서는 「安藝國沼田郡沼田鄕.」이라고 적고 있다. 현재 히로시마현 豐田郡 本鄕町, 미하라시 서부, 타케하라시 동부 지역에 해당된다.[68] 야타 황녀와 同母妹이다. 『고사기』에서는 ‘메도리노 오호키미(女島王)’이라고 적고 있다.[69] 닌토쿠 덴노나 야타 황녀와는 배다른 형제이다. 『고사기』에서는 ‘하야부사 와케노 미코(速總別王)’라 적고 있다.[70] 굴뚝새(鷦鷯)와 매(隼)는 모두 새 이름이지만, 여기서 ‘鷦鷯’는 닌토쿠 덴노를, ‘隼’은 하야부사 와케 황자를 가리킨다.[71] 『日本書紀通釋』에서는 古俗에 神地로 도망하여 형벌을 면하려 하는 일이 자주 보인다고 적고 있다.[72] 吉備品遲部는 『和名類聚抄』에서는 「吉備國品治郡」, 『선대구사본기』 國造本紀에서는 「吉備品治國造.」라고 적고 있다.[73] 播磨佐伯直은 播磨國의 佐伯部를 관장하는 伴造이다.[74] 『고사기』에는 玉釧(옥으로 장식한 팔찌)이라 적고 있다.[75] 大和國 宇陀郡은 현재 나라현 우다시에 해당된다.[76] 素珥山은 현재 나라현 우다시 實生村 동쪽의 曾爾(소니)村山에 해당된다. 『고사기』에서는 速總別王과 女島王 두 사람이 여기에서 잡혀서 죽었다고 적고 있다.[77] 『일본서기』 리추 원년 4월조에 나오는 倭蒋代屯倉은 倭(야마토)이므로 이 기사와는 다른 곳이다.[78] 廬杵는 미에현 츠시 雲出川의 언덕에 있는 家城(이에키)町으로 비정되고 있다. 廬杵河(현재 雲出川)는 三重縣 一志郡을 남서에서 북동방향으로 흘러 伊勢灣으로 들어간다.[79] 『令義解』 職員令 中務省條에서는 五位以上의 女官을 內命婦라 하고, 5위 이상 官人의 처를 外命婦라고 적고 있다.[80] 近江山君은 오우미의 山部를 관장하는 씨족이다. 『고사기』에서는 山部大楯連의 배하에 소속되어 하야부사 와케 황자의 토벌에 가담하였다고 적혀 있다.[81] 『養老令』 後宮職員令 氏女采女條에는 郡의 少領 이상의 자매 내지 딸 중에서 용모가 단정한 자를 선발하여 後宮에 봉사하게 하였다고 적고 있다.[82] 磐坂은 大和國 城上郡 磐坂村, 현재 나라현 사쿠라이시 巖坂에 비정되는 지역이다. 지명에서 유래한 인명이다.[83] 관련 지명은 大和國 葛上郡 玉手丘(현재 나라현 고세시)와 河內國 安宿郡(현재 오사카부 하비키노시) 玉手山, 玉手村에 모두 존재한다.[84] 키노 츠노노 스쿠네는 실존 가능성이 거의 없는 전승상의 존재로 간주된다. 『고사기』 고겐 단에는 「此建內宿禰之子. 幷九男七女二…次木角宿禰者, 木臣, 都奴臣, 坂本臣之祖.」로, 『신찬성씨록』 左京皇別 紀朝臣條에는 「石川朝臣同祖. 建內宿禰男紀角宿禰之後也.」라고 적혀 있다.[85] ‘처음으로~모두 기록하였다’라는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하나는 『일본서기』 코토쿠 大化 원년 7월조에 보이는 詔에 기초하여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닌토쿠 41년조가 근초고왕 8년(353)에 해당되므로 본문 기사를 백제의 檐魯制 시행을 살펴볼 수 있는 단서로 활용하거나, 『일본서기』의 진구 황후부터 유랴쿠 덴노 이전까지는 2주갑을 내려 보아야 한다는 통설에 따라 473년(개로왕 19년)으로 수정해 개로왕 대에 지방 통치 조직의 편제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86] 和泉國 大鳥郡이다. 현재 오사카부 사카이시의 中百舌鳥町에서 濱寺石津町에 걸친 지역이다.[87] 매를 사육하고 매사냥에 종사하는 특수기술자 집단이다. 매를 사육하는 호를 ‘鷹戶’라 하는데, 『令集解』에 인용된 『古記』에서는 ‘大和, 河內, 攝津에 鷹養戶 17호가 있었다.’고 적고 있다.[88] 『攝津志』에서는 「鷹飼部第宅古蹟在鷹合村, 又有鷹甘部墓, 今稱平塚.」이라 적고 있다. 鷹甘邑(鷹合村)은 현재 오사카시 東住吉區 鷹合町에 해당된다.[89] 蝦夷는 ‘에미시’ 혹은 ‘에비스’라 칭한다. 古代 일본열도 北東部 지역에 거주하며 통일국가의 지배에 저항하면서 그 지배권 밖에 존재한 사람들을 가리킨다.[90] 上總國 夷灊郡 伊志美(이시미;현재 치바현 이스미군, 카츠우라시 지역)라고 보는 설과 陸奧國 牧鹿郡 石卷(이시노마키;현재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으로 보는 설이 있다.[91] 攝津國 西成郡 安良鄕이라는 설과 오사카시 사천왕사의 서남에 있는 茶磨山이라는 설이 있다.[92] ‘木連理’를 祥瑞로 간주하는 중국사상에 의거한 내용이다.[93] 백조릉은 현재 大阪府 羽曳野市 輕里에 있다.[94] 陵守는 천황과 황족의 능묘를 지키는 사람을 가리킨다. 『令集解』 諸陵司條에서는 「諸陵及陵戶名籍事[古記云. 別記云. 常陵守及墓守. 幷八十四戶.]」라고 적고 있어, 『古記』에 인용된 別記에 따르면 陵戶를 陵守로도 칭했음을 알 수 있다.[95] 役丁은 歲役(庸), 雜徭 등의 역에 징발되는 남자를 의미한다.[96] 土師連은 葬事에 관한 일을 담당한다.[97] 『일본서기』에서 처음 國司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다. 遠江國司는 율령에 의거한 표현이다.[98] 遠江과 駿河의 경계를 흐르는 현재의 大井川을 가리킨다.[99] 難波港은 닌토쿠 30년 9월조 등에도 보이지만, 難波津은 처음 보인다. 소재지는 현재 오사카시 中央區 心齋橋筋 부근이라는 설과 同 高麗橋 부근이라는 설이 있다.[100] 오진 덴노와 高城入姬 사이에서 태어난 황자이다.[101] 『和名類聚抄』의 大和國 山邊郡 都介(츠게)鄕이다. 현재 나라현 야마베군 都祁(쓰게)村을 중심으로 하며 동쪽으로는 伊賀國境, 서쪽으로는 텐리시 福住町 부근에 해당된다.[102] 빙실은 諸國에 있었지만, 『延喜式』 主水司式에서는 「大和國山邊郡都介一所.」라고 적고 있다. 이에 따르면 都介에 빙실이 한 곳 있으므로 이 설화와 합치된다. 長野王邸에서 발굴된 출토목간에는 장야왕이 都祁에 氷屋을 두 군데 두었다고 기재되어 있다.[103] 丈은 길이의 단위로, 1장은 한 자(尺)의 열 배로 약 3m에 해당된다.[104] 鬪鷄의 빙실 기원설화는 『고사기』에는 보이지 않는다.[105] 『일본서기』 진구 원년 3월조에 和珥臣의 선조 武振熊이 忍熊王을 토벌한 이야기가 보인다.[106] 飛驒國의 宿儺라는 괴물을 和珥臣이 퇴치하는 이야기인데, 『고사기』에는 보이지 않는다.[107] 白舌鳥野와 같은 곳이다. 본조에는 닌토쿠 덴노의 능호에 관한 기원설화에 해당되는데, 『고사기』에는 보이지 않는다.[108] 원문은 百舌鳥(학명:Lanius bucephalus)이다.[109] 吉備國이 전, 중, 후의 3개로 나누어진 시기에 대해서는 덴무 조 초년이라는 설과 덴무 조 말년 이후 淨御原令制 시기라는 설이 있다.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본조에 나온 국명은 이후의 지식에 기초한 표현이다. 藤原宮跡 출토목간에서 ‘吉備中國下道評’이라는 문자가 발견되었다.[110] 『和名類聚抄』에는 備中國 淺口郡이라 적혀 있다. 현재 오카야마현 아사쿠치군과 쿠라시키시 玉島地區의 河部川(高梁川)이라 추정하고 있다.[111] 원문은 大虯(미츠치)이다. 『和名類聚抄』에서는 「蛟, 美都知(미츠치), 日本紀私記用大虬二子.」라고 적고 있다.[112] 카사노 오미의 시조는 鴨別로 키비 신의 선조 御友別의 동생이다.[113] 박이 가라앉음을 신의 의지와 연결시킨 설화는 닌토쿠 11년 10월조에도 보인다.[114] 현재 오카야마현 쿠라시키시 부근으로 추정한다.[115] 『고사기』에는 정묘년 8월 15일 죽은(崩)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나이가 83세가 된다. 『水鏡』과 『帝王編年記』 등에는 110세라고 적고 있다.[116] 『고사기』에는 毛受之耳原(모즈노미미하라)이라 기재되어 있고, 『延喜式』 諸陵式에는 「白舌鳥原中陵[難波高津宮御宇仁德天皇. 在和泉國大鳥郡. 兆域東西八町. 南北八町. 陵戶五烟.].」이라 적혀 있다. 『陵墓要覽』에는 大阪府 堺市 大仙町으로 소재지를 정하였다. 닌토쿠 릉이라 간주되는 전방후원분의 長軸은 485m, 전방부 전면의 폭은 302m, 높이는 수면에서 전방부가 34m, 후원부가 36m, 三重의 堀을 둘렀으며 총면적 46만 4,000km2이다. 축조에 연 180만(680만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상을 필요로 했을 것으로 계산되고 있다.[117] 조공이 일종의 외교 행위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조공과 노역 종사는 곧바로 연결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것은 『일본서기』에 깔린 삼한 복속의 관념적 이데올로기와 열도로 도해한 이 주민들의 기술이 畿內의 개발에 공헌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이다.[118] 원문은 고려(高麗)다. 『일본서기』의 고려는 모두 『삼국사기』의 고구려다.[119] 고구려와 倭 양국 관계를 조공국과 피조공국 관계로 설정한 것은 『일본서기』 편자의 윤색이다.[120] 『신찬성씨록』 山城, 河內, 和泉國皇別 的臣條에서는 타케우치노 스쿠네의 아들인 葛城襲津彦의 후예라고 적고 있다.[121] 小泊瀨造는 부레쓰 덴노의 名代인 小泊瀨部를 관장하는 伴造이며, 오하츠세(小泊瀨)는 부레쓰 덴노의 이름이다. 덴무 12년 9월에 泊瀨造가 連姓으로 개성되었다.[122] 조공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라가 倭에게 문책을 당하고 그 때문에 많은 공물을 바치게 되었다는 상황 설정 자체는 사실이라고 볼 수 없다. 단지 비단 1,460필이라는 구체적 수치가 기록되어 있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어디에서 이러한 구체적 수치가 나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후대 신라가 보낸 물품의 양이 이 기사에 혼입되어 나타난 수치일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어렵다.[123] 고대 일본에서 八이라는 숫자가 ‘많다, 넓다’라는 일반적 의미를 내포해 사용된 점을 고려하면 80척이라는 말도 구체적인 의미를 가진 숫자는 아니다. 『일본서기』 神功皇后攝政前紀(주아이 9년 겨울 10월조)에 진구 황후에 항복한 신라왕이 미사흔을 인질로 보냄과 동시에 80척의 배에 공물을 실어 보냈으며, 이것이 신라왕이 항상 80척의 배에 공물을 바치는 연유라고 기술된 전승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보인다.[124] 『신찬성씨록』右京 諸蕃下 「刑部」조, 和泉諸蕃 「百濟公」조, 同「六人部連」조에 「出自百濟國酒王也」라는 기록이 있어, 酒君을 선조로 하는 후예 씨족이 확인된다.[125] 닌토쿠 덴노 이후 닌켄 덴노에 이르기까지 안코 덴노를 제외하고 모두 葛城氏를 妃 혹은 母로 삼고 있다.[126] 『住吉大社神代記』에는 「石川錦織許呂志.」라는 인명이 보이며, 『和名類聚抄』에는 「河內國石川郡, 以之加波」라 적고 있다. 현재 오사카부 미나미카와치군(南河內郡) 太子町, 河南町 千早赤阪村, 하비키노시의 일부, 富田千市의 동부 지역에 해당된다. 이시카하 씨는 소가씨 일족이라는 설과, 河內의 石川郡을 본거로 하는 백제계 씨족이라는 설이 있다.[127] 依網은 현재 오사카시 東住吉區 我孫子町과 庭井町에서 大和川의 對岸 松原市 天善町 일대에 걸친 지역이다.[128] 阿弭古는 원시적인 姓(가바네)으로 이해되고 있다. 阿比古, 阿毘古, 我孫이라고도 쓴다.[129] 『和名類聚抄』에는 「鷙, 和名太加(다카). 今案, 古語云俱知(구치).」라고 적고 있다.[130]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원년조(392)와 비유왕 8년(434) 2월조, 8년 9월조에 의거하면 아신왕 대(392~405) 이전에 매사냥이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131] 上毛野氏는 『일본서기』에 의하면 스진 덴노의 황자로, 豐城命(豐城入彦命)의 후예이다.[132] 『신찬성씨록』 左京皇別 上毛野朝臣條에는 「豐城入彦命五世孫多奇波世君之後也.」, 『弘仁私記』 序에는 「田邊史, 上毛野公…大鷦鷯天皇御宇之時, 自百濟國化來而言, 己等祖是貴國將軍上毛野公竹合也者, 天皇矜憐混彼族訖.」이라고 적고 있다. 多奇波世(다카하세)와 竹合(다카하세)은 竹葉瀨를 가리킨다.[133] 『신찬성씨록』 河內皇別 止美連條에는 「尋來津公同祖, 豐城入彦命後也, 四世孫荒田別命男, 田道公被遣百濟國, 娶止美邑吳女, 生男持君, 三世孫熊次, 新羅等, 欽明天皇御世參來.」라고 적고 있다. 타지는 55년에 전개된 에미시 정토 중에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134] 『일본서기』에는 ‘4邑, 4縣, 4村’ 등 4를 단위로 한 문구가 자주 등장한다.[135] 『고사기』에는 보이지 않는 내용이다.[136] 應神紀부터 齊明紀에 걸쳐 ‘吳’가 나온다. 고대 일본에서 사용된 吳의 용례에 관한 연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주로 중국의 장강 하류 지역을 가리키거나 중국 전체를 吳라고 칭한다는 견해이다. 둘째, 吳는 본래 가야 지역의 ‘久禮’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실제로는 한반도 남부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라 보는 것이다. 셋째,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吳를 고구려를 매개로 등장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그리고 긴메이 기와 스이코 기에 보이는 백제를 매개로 한 오로 분류하고, 이를 통해 『일본서기』 찬자의 吳國觀을 읽어내는 연구가 있다.[137] 『송서』 文帝紀의 元嘉 7년(430) 正月條에는 「倭國王遣使獻方物.」이란 기사가 보인다. 원가 7년이 庚午年이고 닌토쿠 58년도 경오년이므로, 『일본서기』 편자가 이 시기 정도에 吳國의 조공 기사를 비정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138] 주아이 덴노-진구 황후-오진 덴노 조를 보면 쓰루가시에서 시모노세키시와 세토내해를 거쳐 사쿠라이시에 정착한 집단과 비와호 일대에서 남하한 집단은 원래부터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139] 시기상 장수왕으로 추정된다. 왜는 400년과 407년 백제의 편을 들어 한반도 전역에 관여했다 고구려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이 광개토대왕릉비에 확인되기 때문에 그 이전은 아닐 듯하다.[140] 고구려의 서신은 어떻게 받나 싶지만, 신라 도래인이 꽤 일찍부터 연안항해를 통해 동해와 맞닿는 주부~도호쿠 지방까지 이주하기도 했음을 고려하면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141] 다만 이 기록도 모순점이 많아서 닌토쿠 천황의 고분이 아니라 비슷한 시기의 토착 세력의 고분이라는 추측도 있다.[142] 소설에서는 1684년 사카이에서 발간된 가장 오래된 지리지라는 《계감》(堺鑑)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따금 이 능에 들러서 대규모의 사냥을 했으며, 또한 많은 사람들과 다회(茶會)를 베풀었다."라는 기록을 그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