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부 사카이시의 거대 전방후원분인 다이센 고분(大仙古墳). 역사적으로 닌토쿠 덴노의 능으로 알려져 왔다. |
[clearfix]
1. 개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은 전면이 방형(方形, 네모꼴)이고 후면이 원형인 형태의 무덤으로, 고대 일본 고분 양식의 하나이다.2. 명칭
전방후원(前方後圓)이란 '앞은 네모나고(方) 뒤는 동그랗다(圓)'는 뜻이다. 명칭이 '전원후방'이 아니라 '전방후원'인 이유는 원형의 중심부에 사람을 묻었으므로 원 부분이 '안쪽(奥側)'이 되기 때문이다.[1]일본사학·세계사학 및 고고학계에서는 대개 일본어 명칭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 젠포코엔훈)[2]'을 그대로 사용하며, '전방후원형 고분(前方後圓形古墳)' 등으로 풀어 쓰기도 한다. 이는 일본의 고분 형태 가운데 후면이 원형이 아니라 각진 형태인 '전방후방분(前方後方墳, 젠포코호훈)' 등과 구별하기 위한 목적이다. 일본에서도 본래 이러한 부덤은 '호리병 무덤' 등으로 불리다가 에도 시대 후기에 체계적인 고고학 연구가 시작되면서 '전방후원분'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었다.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주로 국내 전라도 일대에서 발견되는 전방후원분에 대해 '장고분(杖鼓墳)' 또는 '장고형 무덤', '장구형 무덤'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이는 국악기의 하나인 장고(杖鼓)의 모습과 유사하다는 데에서 온 이름이다. 크기가 좀 더 큰 해남 방산리 고분 등의 경우 과거부터 지역 주민들에게 낮은 산이나 언덕으로 여겨졌으므로 '장고산 고분' 등으로도 불린다.
3. 역사
야요이인 도래 이후 원시적 주구묘(周溝墓)[3]의 형태로 발생하여, 야마토 왕권이 확립되면서 정교화, 규격화되고 발전하였다. 이러한 고분이 대거 조성된 시기를 일본사의 고훈 시대(古墳時代, 고분 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의 대형 무덤은 고인돌 등 거석 문화가 그렇듯, 당대 사회에 이미 계급 분화가 이루어지고 지배층이 막대한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었음을 표상적으로 나타낸다.전방후원분은 동진에서 백제를 거쳐 일본으로 불교가 전래되는 6세기 중엽 이전까지 활발하게 조성되었으며, 정치적 중심지였던 규슈 및 간사이(기나이) 지역에 특히 집중되었다. 이 시기 현재의 오사카부 일대에는 해안 가까이에 거대 전방후원분 수십 기가 축조되기도 했다(모즈·후루이치 고분군 등).
다이센 고분(大仙古墳) 또는 다이센릉고분(大仙陵古墳). |
이런 전방후원분은 불교가 정착한 이후인 아스카 시대(592~710)를 거치며 급격하게 쇠퇴했으며, 나라 시대에 들어서는 신불습합(神仏習合)에 따라 사찰과 탑으로 대체되었다.
4. 특징
전방후원분은 앞이 사다리꼴, 뒤가 원형으로 열쇠 구멍의 모양과 유사하며, 전방후방분은 앞과 뒤가 모두 사다리꼴이나 직사각형을 띈다. 전방후원분의 경우 후대로 갈수록 원 모양이 작아지고 앞의 네모 부분이 커지는 경향이 관찰된다. 어째서 무덤이 전방후원의 열쇠 구멍 모양을 하였는가를 두고는 다음과 같은 학설이 존재한다.- 원분(둥근꼴 무덤)과 방분(네모꼴 무덤)의 형태가 결합된 것이라는 설
- 고대 중국에 있었던 복잡한 무덤 구조를 재현하려고 했다는 설
- 원시 신앙에 따른 추상적인 상징이라는 설
- 원형이 태양을, 방형이 사람이나 산 등을 나타냈다는 설
- 고대인의 우주 원리였던 천원지방을 시각화했다는 설[5]
이 가운데서도 일본 학계에서 가장 유력한 설은 다음과 같다. 전방후원분이 등장하기 전 일본의 무덤은 단순히 흙을 높이 쌓고 해자를 두른 형태의 주구묘인데, 이들 가운데서는 해자의 일부분을 끊고 흙을 이어서 무덤에서 돌출한 팔처럼 만든 것이 발견된다. 이렇게 팔이 붙은 무덤의 팔 부분에는 제사에 쓰이는 부장품 등이 묻혔는데, 이로 말미암아 학계에서는 '팔'이 장례의식을 치르는 장소, 혹은 사자를 무덤으로 인도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고 추정했다. 이 팔 부분이 점점 넓어진 것이 전방후원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설에 대해 한국 학계는 전방후원분이 한반도에서 먼저 만들어져 열도로 넘어갔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한반도에서 전해진 두 가지의 서로 다른 형식의 묘제가 혼합된 것이 전방후원분이라는 해설이다. 이 설에 따르면 전방후원분은 삼각형 또는 사다리꼴 모양의 방형분, 둥근 모양의 원형분이 합쳐진 주구묘(周溝墓) 형식 묘제이고, 한반도 동부에 주로 분포하는 원형분[6]과 한반도 남서부에 있는 삼각형 또는 사다리꼴 모양 방형주구묘[7]가 각각 일본 열도로 전파되어 합쳐진 것이다. 대표적으로 1999년 발굴된 고창 성남리 주구묘(분구묘)와 같이 묘 주위에 해자를 파는 형태는 일본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오래 되었다는 점도 근거로 든다.
그런데 전방후원분이 한국에서 시작했다는 설에도 큰 문제점이 하나 있다. 한반도에는 주구묘는 있지만 주구묘가 전방후원분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 반면, 일본에는 주구묘에서 전방후원분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뚜렷이 드러난다는 것이다.[8] 그럼에도 전남 지역에 다시 나타나는 전방후원분들은 이미 완성된 후대의 형태라 한반도 기원설의 한계로 지적된다.
5. 분포
한국과 일본의 대략적 전방후원분 분포도. 경남 지역의 것은 하술한 경상남도 고성군 송학동 고분으로 전방후원분 부정론도 제기된다. |
5.1. 일본의 전방후원분
고훈 시대에 수많은 고분(古墳)들이 생겨 현재 일본 전역에는[9] 고분만 약 16만(...) 기가 남아있다고 한다. 이를 대표하는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모즈·후루이치 고분군인데, 여기의 고분 45기 중 절반가량인 21기가 전방후원분 양식을 따랐다.전방후원분은 규슈와 간사이 지역 외에도 당시 일본 기준에선 적이던 에조의 영역 홋카이도나 도호쿠 북부를 제외한 일본 전역에 골고루 분포하고, 한국 남부 일부 지역에서도 발굴된다. 특이한 점은 일본과 거리상 더 가까운 경상남도, 즉 가야 지역보다는 일본과 더 거리가 먼 호남의 영산강 유역에서 훨씬 많이 발견된다는 사실이다.[10]
기록이 미비하기는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의 지방세력이 강했던 데다가 지방에서도 야마토에 맞먹는 국가들이 있었다는 증거로 보기도 한다. 그러다 불교가 왜에 들어가 야마토가 도호쿠와 홋카이도를 제외한 나머지 일본 전역을 석권하면서 전방후원분 형식은 점차 사라졌다.
5.2. 한반도의 전방후원분
한국에서는 1980년대 중반 강인구 교수[11]가 한반도에도 전방후원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전방후원분은 거의 모두가 백제의 중앙집권화 완성 이전 마한 토착 세력이 잔존했던 지역인 전라도 남부에 위치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이들 전방후원분의 조성시기는 5세기 후반이라고 추정하는데, 일본 열도에서 발견되는 3세기의 하시하카 고분(箸墓古墳), 4세기의 마키무쿠 고분(纏向古墳) 조성 시기보다 1-2세기 늦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전방후원분 양식이 먼저 생긴 뒤 일본 열도로 전해졌다고 해석할 수는 없고, 일본 열도에서 먼저 발생한 무덤 양식을 한반도에 조성했다고 봐야 한다. 이 때문에 이것이 처음 발견되었을 당시엔 임나일본부설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임나일본부설에서 비정되는 지역은 전라도가 아닌 현대의 경남 서부(변한) 지방이고, 전방후원분 자체는 지역간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했다는 고고학적 가설의 근거로 쓰일 순 있어도 임나일본부설이라는 역사학적 가설을 정립하기에는 너무 빈약한 근거라는 한계가 있다. 일본 규슈 지역에서 발견되는 가야, 마한계 유물, 무덤들을 가지고 가야와 마한이 일본을 지배했다고 주장하기에는 근거가 빈약하듯 이 또한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이에 학계에서는 전방후원분이 한반도에 거주했던 왜인의 무덤이거나, 또는 한반도의 토착세력과 일본 열도 간의 교류를 나타내는 흔적이라고 추정한다. 따라서 알렉산더 보빈의 반도일본어 가설과도 같이 일본인이 일부 한반도 남부에 잔존했고, 한국계가 그것을 밀어내버렸으나 그곳에 아직도 잔존한 일부 일본계와 통혼을 거치거나 문화적으로 융화되는 과정 또는 일본과의 교류를 시작함으로써 이러한 양식이 잔존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가설은 전라도의 Cis-AB형 혈액형이 발견되는 지역과 전방후원분이 발견되는 지역이 상당수 겹침을 생각하면 상당히 신뢰성이 있다. 지역을 비하하기 위함이 아니라, 실제로 그 둘은 전라도에, 그것도 상당히 비슷한 지점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본과 가까운 경남지역은 Cis-AB형 혈액형과 전방후원분이 발견되는 경우가 적으므로 신라가 왜인을 적극적으로 내쫒거나 한국계로 동화시키려고 하였고, 반대로 백제는 꽤 늦게까지 잔존한 남부의 마한 세력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던 역사적인 이유가 있기도 하므로 더욱 타당성이 있다.
5.2.1. 조성주체와 피장자에 대한 학설
한국 학계에서는 전방후원분의 주인에 대해 크게 왜인설(倭人設)과 재지수장설(在地首長設: 토착수장 세력설)로 나누어 설명한다.[12] 이 가운데서도 전남 서부 지역의 전방후원분은 일정 부분 자율성을 갖고 독립하여 왜와 교류할 수 있었던 토착세력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한다.[13]- 왜인설
- 왜계 백제 관료설: 백제의 천도 후 남방세력 포합을 위해 파견된 왜계 관료였다는 설. 5세기 고구려의 침입으로 위례성(한성)의 친위세력을 대거 잃어버린 백제 왕실은 남쪽으로 천도 후 왜계 관료, 용병을 고용하여 친위세력으로 이용했을 가능성도 있는데[14], 이들이 임지에서 사망할 경우 고향인 왜의 묘지 양식으로 장례되었다는 것이다.[15]
- 왜인집단설: 현지 이주한 왜인 집단이었다는 설. 유랑민의 성격으로, 일본부나 독자적 국가 형성을 가정하지는 않는다. 일본 학계 일부 또한 규슈 지역의 세력이 5세기 후반 일본내 정치적 상황의 결과로 영산강 유역에 이주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하지만 이 설은 어째서 한반도의 전방후원분이 왜인이 상륙했을 해상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내륙에도 분산되어 있으며, 또 당시 영산강에 현지 세력이 존재했었다고 추정되는 만큼 어떻게 독자적 세력을 유지했는가, 왜인이 해당 지역을 지속적으로 지배하였다면 어째서 거주지와 관련된 다른 유적이나 유물이 없는가 하는 문제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있다.[16]
- 마한계 왜인설: 백제의 영토 확장으로 밀려난 마한계 도래인 세력의 일부가 귀화, 혼인, 망명 등으로 영산강 유역에 정착했다는 설.[17] 이 설은 해당 지역에 연고가 없던 세력이 어떻게 당대로서는 많은 노동력과 자본이 필요한 토목공사를 벌일 수 있었는지 하는 점을 들어 반론이 있다.[18]
- 재지수장설
- 백제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한 토착세력 설: 백제가 현재의 전라도 지역을 완전히는 장악하지 못하였음은 침미다례 등 사례에서도 알 수 있다. 이 지역의 세력이 백제와 왜 사이에서 교류하며 연대를 모색한 결과라는 것.[19] 상술했듯 전남 서부 지역의 전방후원분은 이럴 가능성이 높다고 여긴다. 백제 중앙과의 관계가 강화됨에 따라 전남지방의 호족들이 옹관묘같은 토착양식을 버리고 백제양식으로 무덤을 조성했다는 것을 상기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 백제의 영향으로 왜의 영향을 받은 토착세력 설: 고대 백제와 왜 간에 교류가 활발했음은 사료를 통해 드러나 있으므로, 주변 세력도 자연스럽게 왜계 영향을 받아 문화를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설.[20]
5.2.2. 한반도의 전방후원분 목록
한반도의 전방후원분 분포도.[21] |
가나다순으로 정리. |
* 고창 칠암리 장고분: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칠암리 산22)
한반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추정하는 전방후원분들 중 하나로, 5세기 후반에 축조되었다고 여긴다. 2023년 고창고인돌박물관에서 도지정문화재 지정을 위해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 광주 명화동 장고분: 광주광역시 광산구 명화동 170-5
광주광역시 시도기념물 22호. 저수지에 접한 민가의 뒷편에 있다. 주변은 해자의 가장자리를 둘러서 인도를 냈으나 펜스는 설치되어 있지 않다. 1990년대에 국립광주박물관이 발굴하여 원통형토기가 출토했다. 광주의 유명 맛집인 명화식육식당 주변이며, 이 고분을 가면 평동저수지가 보인다.
- 광주 요기동 조산 고분: 광주광역시 광산구 요기동 238
논밭 한가운데 민가 옆에 위치하여 이미 겉으로는 봉분의 형태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훼손되었다. 위에는 나무가 무성하게 자랐다.
- 광주 월계동 장고분: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계동 765 (월계로 155)
대표적인 한반도 전방후원분인 광주광역시 광산구 첨단지구의 월계동 장고분. |
- 담양 고성리 월성산 1호분: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성산리 306
전라남도 지방문화유산 지정.
- 함평 예덕리 신덕1호분: 전라남도 함평군 월야면 예덕리
주변에 함평 만가촌 고분군이 위치한다. 은화수[22], 조현종[23], 성낙준[24], 박중환[25] 등이 당시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사이던 시절 발굴했다. 4차 조사까지 했으며, 1991년 신덕고분이 도굴되었다가 도굴꾼들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도굴품을 놔두고 가서 박물관 관계자가 도굴된 유물과 유물을 맞추었다고 한다. 10년 전에도 국립광주박물관에서 관련 학술대회를 열었으며, 2021년 국립광주박물관에서 특별전을 했다.
- 함평 죽암리 장고분: 전라남도 함평군 손불면 죽암리 333-4
서해안고속도로 건설 전 알려지게 되었다. 서해안, 서해안고속도로와 가깝다.
- 해남 방산리 장고산 고분: 전라남도 해남군 북일면 방산리 721
북일면 남동쪽에 위치한 성마산(城馬山)에 조성된 봉분으로 과거 장고산, 장고봉이라 불렀다. 2021년에 해남군에서 북일면 고분 일대를 사적으로 지정하려고 있다.
- 해남 용두리 장고분: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창리 578
5.2.3. 추정된 한반도의 전방후원분
이러한 고분은 당시 발굴조사 때 전방후원분으로 추정되었거나 추정하는 고분이다.- 강진 영파리 고분 : 전라남도 강진군 영파리 장동마을
민족문화유산연구원 지표조사에 밝혀졌다.
- 나주 가흥리 고분 :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가흥리 430
한반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추정하는 전방후원분들 중 하나로, 5세기 중반에 축조되었다고 여긴다. 옹관고분, 원통모양토기 등 토기류도 출토되었다. 2015년 대한문화재연구원에서 출토되었다. - 나주 월태리 고분 :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월태리 산26
지도에는 운봉리 고분으로 되어 있으나, 정확히 말하면 운봉리와 월태리의 경계에 걸친다. 다른 방기된 고분과 마찬가지로 나무가 자라 언덕처럼 보인다.
- 담양 월추리 월추 고분 : 전라남도 담양군 월추리
5.3. 한반도의 고분 발굴과 전방후원분
5.3.1. 경상남도 고성군 송학동 고분군 논쟁
자세한 내용은 송학동 고분군 문서의 송학동 1호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송학동 1호분의 90년대 당시 사진(위-왼쪽), 발굴 당시 사진(위-오른쪽), 복원 조성 사진(아래). |
한반도에 있는 대부분의 전방후원분은 호남에서 발견되지만, 경상남도 고성군 송학동 고분군[26] 1호분처럼 경남 지역에도 전방후원분 또는 기타 왜계 고분 논쟁이 있는 고분들이 일부 존재한다.
이에 대해 한국 학계는 '송학동 1호분은 겉모습이 우연히 닮았을 뿐, 내부 구조는 13개 돌덧널과 돌방으로 구성된 가야권의 독자적인 형태로, 독립된 고분 3기의 봉토가 합쳐진 것일 뿐'이라는[27] 3원분 연속설을 주장한다. 1호분을 조사했던 동아대학교 박물관은 보고서에 3원분이 연접했다고 보고서에 최종적으로 기술하였고, 이에 따라 삼봉낙타처럼 복원되었다.
반면 일본 학계는 송학동 고분군을 전방후원분의 일종이라고 판단하고, 내부 구조가 분리된 전방후원분은 일본에도 이미 그러한 사례가 있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다만 상기했듯 경상도 지역은 왜계 고분과 확실히 구별되는 양식이 있는 신라, 가야계 고분군이 많이 있어[28] 송학동 1호분이 전방후원분이 맞다 치더라도, 이것을 조성한 세력은 현지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진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5.3.2. 2020년 해남 방산리 고분 발굴
한가운데 보이는 열쇠 구멍 비슷한 것이 방산리 고분이다. |
국립광주박물관에서 2000년 처음 도굴 갱도를 확인한 해남 북일면 방산리 장고봉 고분이 20년 만인 2020년 가을부터 2021년 초까지 발굴작업에 들어갔으나, 발굴 도중인 2월 말 다시 묻혔다. "한반도서 가장 큰 고대 무덤, 열자마자 덮은 까닭은…".[29] 연구진 측은 "코로나 방역을 위한 조치이다. 추가 발굴 뒤 공개하겠다."라고 밝혔다.
한편, 이 소식이 한겨레 일본어판 보도로 일본 넷우익 진영에 전해지자 일부 우익들은 "한국이 (임나일본부 따위의) 진실을 덮으려고 다시 묻었다."라는[30] 주장을 하기도 한 모양. 허나 이런 주장은 혐한을 위한 인상조작에 가까운 것으로, 한국에선 이미 1980년대부터 전방후원분들이 발굴되었고, 지자체에서도 은폐는커녕 보호를 위해 기념물로 지정하기도 하고, 출토 유물은 박물관에 보관, 전시 중인데다 역사 및 고고학회를 통해 논문도 발표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을 모르거나 외면하는 것이다. 당장 위에 첨부된 광주광역시 광산구 첨단지구의 월계동 장고분 사진만 봐도 잘 정비해서 멀쩡히 공개하는 데다가, 방산리 고분 역시 가까이 가 보면 관람하라고 안내판까지 세워 놓아 은폐와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본 항목에서도 이미 상술했듯 이게 양측의 인적, 물적, 문화적 교류가 활발했다는 근거로 쓰일 순 있어도 임나일본부설 운운하기엔 나머지 근거가 너무 빈약하다.[31] 해당 고분 역시 현재까지의 장고분 연구로 인해 정립된 학설에 어긋나는 부분이 사실상 없기 때문에 기존의 패러다임을 바꿀 만하지는 않다. 사실 한국 정부가 정말 발굴조사를 은폐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중국의 정혜공주묘같은 유적처럼 해외학자 접근을 막고 조사자료도 공개하지 않으면 그만이다.[32][33]
2021년 10월, 발굴이 완료되었다.#
5.3.3. 2022년 나주 장고분 발굴
2022년 전남 나주의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울산문화연구원이 시굴조사를 했는데, 5~6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장고분이 발견됐다.#6. 대중매체
- 근육맨에선 헬 미셔너리즈의 마그넷 파워를 공급하는 아폴론 윈도우가 이 전방후원분 모양 문양이었다고 나온다. 테리맨이 사경을 헤매다가 사후세계에서 본 문양 덕에 떠올린 사실이며, 사실은 지구곳곳에 있는 문양이었다. 2차전 후반부에서 근육맨의 "지구의 힘이라면 우리도 쓸 권한이 있지 않나?"하는 외침에 해당 문양이 후지산 근처에서 떠오르고, 그 문양을 근육맨이 열쇠가 되어 봉인, 마그넷 파워를 차단하게 된다.
- 팝픈뮤직 수록곡 중 '踊る埴輪'의 장르명 '전방후원 비츠'(前方後円ビーツ). 배너에서는 전방후원 부분이 전방후원분 모양의 그림으로 나온다.
7. 같이보기
[1] 무덤에서 시신이 묻힌 터와 사람들이 성묘하는 자리 사이에 어떤 시설을 두는 것은 전세계적으로 흔하게 나타난다. 사람이 묻힌 동그란 부분을 '안쪽'으로 여기는 인식은 타당하다.[2] 영어 명칭은 'Zenpokoenfun' 혹은 'Japanese keyhole-shaped mound'이다. #[3] 묘 주위에 해자(도랑)를 두르는 형식의 무덤을 가리킨다.[4] 일각에선 덴노릉이 아니라 비슷한 시기 토착세력의 무덤이라고 추측한다.[5] 일본에 전방후원분이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때에는 아직 본격적인 중국과의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중국적 우주관을 공유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후대에 그러한 의미를 부여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6] 경주시나 고령군에 있는 신라, 가야계 고분들이다.[7] 전라남도에 있는 마한계 고분이다.[8] 近藤義郎『前方後円墳と弥生墳丘墓』, 「第4部 前方後円墳の時代へ」 참조.[9] 주로 관서, 관동, 규슈 지역.[10] 경상도 지역은 왜계 고분과 확실히 구별되는 양식을 사용하는 신라, 가야계 고분군이 지역마다 많으므로, 전방후원분이 맞다 치더라도 이것을 조성한 세력은 지역에서 세가 강력하진 못했을 것으로 학계에선 추정한다. 틀:신라의 고총 고분군, 틀:가야의 중심 고분군 문서 참조.[11] 당시 영남대학교 교수로 후에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이직. 강인구 교수는 30년간 전방후원분만을 연구했다.[12] 최성락, 2004, 《전방후원형 고분의 성격에 대한 재고》.[13] 정기진, 2014 《전남 서부지역 전방후원형분 축조세력 검토》.[14] 고대국가의 수도란 결국 왕가의 직할지나 마찬가지인데 이를 송두리째 잃어버렸으니 왕권은 땅에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웅진백제의 백제왕들은 대부분 귀족들에게 휘둘리다가 암살당하는 최후를 맞는다.[15] 박천수, 2007, 《새로 쓰는 고대 한일교섭사》.[16] 임영진, 2006., 정기진, 2014.[17] 서현주, 2007, 《영산강유역 장고분의 특징과 출현배경》.[18] 정기진, 2014.[19] 박영훈, 2009, 《전방후원형 고분의 등장배경과 소멸》.[20] 최성락, 2004.[21] 이 분포도는 14기 이상 말고 추정되거나 장고분이 포함되어 있다.[22] 전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사, 국립나주박물관 관장, 현 국립부여박물관 관장.[23] 전 국립광주박물관 관장, 국립제주박물관 관장이자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 광주 신창동 유적을 발굴함.[24] 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관장.[25] 전 국립나주박물관 관장이자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일하고, 광주 명화동 장고분을 발굴.[26] 영산강 유역 고분(장고분)중 주칠로 칠해진 게 있고, 유구광구소호가 나온 점은 비슷하다.[27] 봉토 2개가 합쳐진 고분은 황남대총 등 꽤 있다.[28] 경상도는 넓은 평야가 별로 없기 때문에 고대국가의 중심지가 들어설 만한 땅이 한정된다. 즉, 신라/가야계 고분군 밀집 지역을 다 제외하면 큰 세력이 있을만한 자리가 딱히 없다.[29] 다만 해당 기사의 한반도서 가장 크다는 드립은 기사 제목을 자극적으로 뽑은 것이다. 방산리 장고분의 봉분 높이는 약 9 m인데, 이 높이를 두고 높이 23 m쯤 되는 경주 황남대총, 봉황대보다 크다고 말하면 억지이다. 경주 대형고분보다 옆으로는 더 길지만 전방후원분은 원래 길쭉한 모양이다.[30] 넷우익들의 음모론은 주변국을 무시하는 쓸데없는 '특정 아시아' 담론에서 기인하는 측면도 있다.[31] 참고로 역사적 지식이 부족한 일반 드립러들은 지역만 대충 듣고 마한 드립을 치는 경우도 있는데, 항목에도 있지만 마한을 이끈 주류 세력들은 북에서 온 전북-충청-경기 내륙을 기반으로 한 세력이라 전남 서부에 주로 분포된 전방후원분과는 연관성이 떨어진다. 차라리 지역적으론 상기했듯 침미다례가 그나마 일정 시기 연관성은 있을 수 있다. 기타 내용은 항목 참조.[32] 사실 일본도 후지무라 신이치라는 빼도 박도 못할 고고학계의 흑역사가 있다.[33] 한편, 일본에선 역으로 일본의 대형 전방후원분을 공개발굴하지 않는 이유가 발굴하면 일본 천황계가 한반도계라는 것이 확실해지기 때문이라는 루머도 존재하지만, 이것 역시 학계에선 신뢰하지 않는다. 일본 궁내청에서 관리하는 대형 전방후원분은 단순 고대유적이 아닌 종교적인 성소로서 관리되기 때문에 학자들이 열어보고 싶어도 함부로 열어보지 못할 뿐이다. 당장 한국도 오릉과 조선왕릉을 박씨와 전주이씨의 반대 때문에 발굴조사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물론 학계 차원에선 열어보자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