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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부 사카이시의 다이센 고분. 닌토쿠 천황의 릉이라는 설이 유력하지만 결론은 아직 내려지지 않은 상태. 출처 정보 대표적인 전방후원분 중 하나이다. |
1. 개요
고훈 시대(古墳時代)는 일본의 시대 구분 중 하나이다. 보통 서기 3세기 중후반~7세기 무렵을 가리킨다. 고훈(こふん)은 오래된 무덤을 뜻하는 '고분'(古墳)의 일본어 독음으로, 지배층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각지에 전방후원분 등 대형 고분을 세웠던 시기다. 이런 고분은 시신을 안치하기 위한 석실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덤 주위에 호를 둘러쳐 놓은 것도 있다.2. 상세
중국과 한반도를 통해 한자와 유교, 불교 등이 전해진 시기이다. 기원전 10~기원후3세기에 한반도 등 대륙에서 이주한 도래인들이 일본에 정착했는데(야요이인,고훈인)[1], 이들은 조몬인이라고 일컫는 열도 원주민 부족들과 이합집산 및 융합 과정을 거치며 일본 전역에 소규모 국가들을 세웠다. 이들 소왕국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한 국가로 통합되어 갔는데, 이것이 바로 야마토(大和)였다.야마토는 백제, 가야, 중국 남조와 친분을 맺으며 대륙의 각종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고[2], 일본 전역의 부족 국가들을 잇따라 정복하면서 일본 전역을 제패해나간다. 이를 뒷받침하는 유물로 4세기~6세기 말까지 전방후원분이 동북 지방부터 큐슈 남부까지 계속 만들어진다. 7세기 이후부턴 조성된 전방후원분이 소멸되어 고훈 시대 이후 야마토 조정이 지방세력들을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정권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를 야마토 정권이라 한다. 묘하게도 서기 7~8세기경 국호를 야마토(대화/왜)에서 일본으로 바꾸었다. 이후 8~11세기에 걸쳐 남은 규슈 남부의 하야토와 주부~도호쿠 지역에 혼재되어있던 에미시 부족을 정복하면서 전근대 시기 일본의 강역이 갖춰진다. 오키나와와 홋카이도는 근대 이후에나 일본에 완전히 복속된다.
위서(魏書) 등에 따르면 이 시기 열도에 20여 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연맹체와 이를 대표하는 야마타이국이 있었고, 그 위치에 대해선 학계에서도 규슈론과 간사이론이 나뉘어 계속 논쟁하고 있다. 혹은 둘을 혼합한 규슈에서 간사이로의 이동설도 존재한다. 야마타이국과 이후 야마토 정권의 관계에 대해선 여러 이견들이 있어 학계에서 계속 연구 중이다.
이 시대의 대표적 취락 유적으로는 기원후 500년 무렵의 미츠데라 유적이 있다.
3. 역사 기록의 부족
일본은 한자를 수용하기 이전에는 문자가 없었으며, 한자를 본격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5~6세기라고 파악된다. 수서(隋書) 기록을 보면,沒水捕魚 無文字 唯刻木結繩 敬佛法 於百濟求得佛經 始有文字
물속에 들어가 고기를 잡는다. 글자는 없고 나무에 균열을 만들거나 새끼줄을 묶어 기록할 뿐이다. 불교를 숭상하여 백제에게 불경을 구하니 비로소 글자가 생겼다.
라고 기록되어있는데, 이에 따르면 일본은 5-6세기까지 문자가 없어 구전으로만 과거 내용이 듬성듬성 전해졌을테니 이시기 관련한 문헌 내용이 압도적으로 부족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물속에 들어가 고기를 잡는다. 글자는 없고 나무에 균열을 만들거나 새끼줄을 묶어 기록할 뿐이다. 불교를 숭상하여 백제에게 불경을 구하니 비로소 글자가 생겼다.
다만 문자가 없었을 뿐, 한일 양국의 사료들에서는 이때부터 신라와 왜 양국이 서로 치열하게 공수를 주고 받았던 기록들이 자주 나오는데, 그런 점에서 보자면 한반도와 일본 열도, 양측의 문명권이 이때 무렵부터 제대로 형성되어 본격적으로 국가 대 국가의 교류와 충돌이 함께 시작된 시대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 기타 내용은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도 참조.
이런 사정상 이후에 나온 일본서기에 적힌 이 시기 특히 초중기 일본의 행적들은 철저한 검증이 필요한 내용들이 많다.[3] 일본서기 기록을 보면 200~400년대 10대(사실 1대)~16대 덴노까지 이들의 치세와 수명이 비현실적으로 엄청나게 늘려져[4], 그 시기 공존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야마타이국 여왕 히미코[5] 일족 등에 대한 기록들을 지워버린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걸 보면 현 황실은 히미코 일족 등이랑 처음부터 그랬든 중간에 틀어졌든 어쨌든 결과적으로 적대 관계가 되었고, 일본 열도를 통일해가면서 자기 가문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인지 신화적 역사를 창조하고 나머지 역사는 묻어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왜국은 266년 서진에 사신을 보낸 것을 끝으로 413년[6] 동진에 사신을 보내기까지 중국 측 기록에서 140여 년간 기록이 없고, 한반도 국가들(백제, 가야 소국들, 신라 등)과의 교류 및 전쟁, 박제상 일화 정도를 제외하면 왜국 내정에 대해 알 수 있는 외부 기록이 전무하다. 그래서 금석문이나 고분 등의 유물이 특히 중요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야요이 시대의 기록들도 부족한 건 마찬가지지만.
참고로 이러한 당시의 복식, 문화 등을 복원할 소스는 문헌기록이 아닌 하니와라고하는 고분 부장용의 직립형 장식토기에 의거한 것이다. 사람만 한 크기의 토기로써 당대 복장을 착용한 사람 모양으로 장식을 했다. 오른쪽 중단의 그림이 바로 그것. 머리를 양옆으로 모아 둥글게 묶은 미즈라(美豆良)라는 머리모양도 고훈 시대 복식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이처럼 고훈 시대의 연구는 거의 고고학 자료에 의거하고 있다.
4. 고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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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5. 연구 대상
- 임나일본부설: 이 시기에 일본이 가야 지역으로 진출해 200여 년간 다스렸다는 이론이나 현재는 학계에서든 민간에서든 부정되고 있다.
-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신라가 일본 열도를 침공했다는 일본측 기록들을 신뢰한다면 고훈시대인 291년에 신라의 최초 왜국 침공이 시작되었다.
- 왜5왕: 5세기 중국 사서에서만 등장하는 고대 일본의 왕.
[1] 고훈 시대에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되는 도래 씨족으로 하타씨 등이 있다.[2] 칠지도도 이 시절 보내진다.[3] 당장 신화적 얘기로 점철된 진구 황후 얘기만 봐도 이런 점을 알 수 있다.[4] 대체로 26대 게이타이 천황 이후의 천황들은 실존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가 거의 없는 편이고, 이전의 천황들은 특히 10대 이전엔 실존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많은 편이다. 그 사이는 실존하지 않거나 실존은 하되 치세나 수명 기간은 과장 혹은 역사에서 누락된 다른 군주들의 재임기까지 합친거 아니냐는 식의 가설이 많은 편.[5] 대략적인 히미코 사망 시점은 야요이 시대와 고훈 시대 사이에 해당된다. 야마타이국(邪馬台國)이 주도하던 왜국 부족국가 체제가 구노국과 분쟁을 겪었고 히미코 또한 이 전쟁이 원인이 되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6] 하지만 이 기록마저도 왜국이 파견한 사신이 아니라, 광개토대왕이 남정을 실시해서 포로로 잡은 왜구를 같이 데려가서 조공을 시키고 고구려에 유리한 증언을 시켰다는 게 중론이다. 그 이유는 왜국 사신이 바쳤다는 조공품에 고구려의 특산품인 인삼과 담비 가죽이 있기 때문이다. 즉, 고구려가 자신의 세력과 국력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데려갔다는 해석이다. 倭國獻貂皮人參, 詔賜細笙麝香. 梁書의 義熙 9년(413년)와 義熙起居注을 참고.